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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敎會) 지도자(指導者)의 사명(使命)
<말선49-50> 목사(牧師)님이 되려면 자기(自己)라는 것을 버려야 된다. 자기(自己)를 주장(主張)하는 입장(立場)에서는 목사(牧師)님이 못 되는 것이다.
<말선24-95> 신앙생활(信仰生活)을 지도(指導)하는 데는 어떤 수단(手段)이나 방법(方法)으로는 안 된다. 교회(敎會)지도자(指導者)는 수단(手段)이나 방법(方法)으로는 안 됩니다.
<말선40-85> 도(道)의 세계(世界)에서는 수단(手段)과 방법(方法)을 이용(利用)해 가지고는 연결(連結)이 안 된다. 여기에서는 정성(精誠)과 의리(義理)와 참(眞)을 통(通)해서 접붙여야 되는 것이다. 사탄 세계(世界)에서 쓰는 수단(手段)과 방법(方法) 가지고는 접붙일 수 없고 진실(眞實) 된 입장(立場)에서 참(眞)을 가지고 남을 위하는 자리에서 이것을 연결(連結)시키지 않고서는 연결(連結)이 안 됩니다.
<말선391-252> 책임자(責任者)가 됐으면 책임자(責任者)는 심기 위한 것이지 비료(肥料)를 주기 위한 것이지 책임자(責任者)가 열매가 아니라구요. 열매가 아니에요. 비료(肥料) 영양소(營養素)를 보급(普及)해 줘가지고 열매를 맺게 해야 되는 거예요. 씨(氏)를 뿌려가지고 자기(自己)를 희생(犧牲)시켜서 열매를 잘 맺게 하기 위한 것이 책임자(責任者)라구요. 자기(自己)가 해 먹겠다고 하는 녀석들은 벼락을 맞아야 돼요.
<말선54-205> 책임자(責任者)는 선(善)을 가르쳐주는 사람이기 때문에 맞는 자리에 서야 한다. 선(善)은 먼저 맞는 것이기 때문에 책임자(責任者)는 맞는 자리에서 가인을 이끌어주고 모셔주어야 하는 것이다.
<말선54-207> 지혜(智慧)로운 책임자(責任者)는 한번 쳤으면 두 번 쓰다듬어 주는 것이다. 한 사람 교회(敎會)에서 떨어지게 되면 그 떨어진 모든 사람의 책임(責任)을 그 책임자(責任者)가 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책임자(責任者)가 제일(第一) 무서운 자리라는 것이다. 유명(有名)한 목사(牧師)나 지도자(指導者)에게서 훌륭한 아들이 태어날 수 없는 것은 그래서이다.
즉 책임자(責任者)는 사탄이 최고(最高)로 겨루고 있기 때문에 걸리게 되는 날에는 직접적(直接的)으로 자기자체(自己自體)라든가 아니면 자기(自己) 아들딸이 잘못되게 된다. 그래서 대게 훌륭한 부흥강사(復興講師)나 목사(牧師)라든가 혹(或)은 하늘 편(便)에서 충성(忠誠)하는 사람들의 아들딸들은 망나니가 되기 쉬운 것이다. 까딱 잘못하면 불량자(不良者)가 된다는 것이다.
<말선458-19> 교회장(敎會長)은 상대(相對)가 아니다. 자기(自己)를 중심삼고 잃어버린 사랑을 회복(回復)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할아버지 입장(立場)에서 고개를 넘어야 되고, 아버지 입장(立場)에서 고개를 넘어야 하고, 오빠입장(立場)에서 동생(同生) 입장(立場)에서 고개를 넘어야 한다. 남편(男便) 이상(以上)으로 사랑하면서 자기(自己)에게 아무런 욕심(欲心)이 없는 것이다. 영원(永遠)한 이상향(理想鄕)의 공명권(共鳴權)에 관계(關係) 맺어 가려고 해야 한다. 자기(自己) 오빠, 동생(同生), 부모(父母), 할아버지라고 생각(生角)해야 된다.
상대(相對)라고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不可能)하다. 상대적(相對的)인 입장(立場)에 서는 사람은 없어지는 거예요. 자멸(自滅)하는 거라구요. 대표자(代表者)는 자기(自己)보다 높기를 바라고 또 상속자(相續者)는 대신자(代身者)보다도 높기를 바라는 거예요. 저쪽이 아버지이면 아버지의 가치(價値)를 플러스시켜 나에게 돌리니 아버지보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것입니다. 3대주체(三大主體) 사랑을 중심삼고 내가 주인(主人) 만들어 주었다 이거예요.
<말선48-126> 제물은 존재의식도 가질 수 없고 소유관념도 가져서는 안 된다 *신앙생활을 지도하는 데에 있어서는 어떤 수단과 방법으로는 안 된다 교회의 지도자는 수단과 방법을 이용해서는 안 된다. 자기의 위신과 체면이 깎이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하늘과의 호흡과 같은 생명선이 끊기는 것이 문제다.
<말선153-248> 또 지역장이라는 자리는 자기책임을 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여러분이 기뻐하면 그 지역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만물까지도 기뻐하는 것이요, 여러분이 기뻐하면 그 지역에 살고있는 사람도 기뻐하는 것입니다. 또 여러분이 기뻐하면 여러분을 지도하는 지구장, 협회장, 선생님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입니다. 내가 기뻐할 수 있는 자리에 나간다는 것은 천지가 기뻐하는 동시에 인류가 기뻐할 수 있는 하나의 터전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책임을 못하게 될 때는 그책임 못한 것은 어떻게 되느냐? 여러분들이 책임 못한 그 사실은 이 시대적인 책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지방이면 지방 지역권내에 있는 수많은 생명들이, 그때에 있어서 혜택ᅟ받고 준비된 영혼들이 여러분과의 관계를 맺게하기 위해서 하늘은 여러분을 대표자로 세웠는데도 불구하고 여러분이 인연맺을 수 있는 활동과 실력을 갖추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인연을 못 맺고 영계에 갔을 때는 영계에 간 애혼 들이 여러분을 대해서 참소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생각할 때에 오늘날 우리 지역장의 책임이 얼마나 지중한가 하는 것을 더욱 느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말선237-36>선생님이 말씀을 그렇게 길게 하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끝을 내려고 하다가도 계속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끝을 내려고 하면 턱이 올라간다구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것은 누구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럴 때 말씀을 더해주면 생명이 살아난다구요. 그것을 앉아가지고 불평하는 사람들은 갈 길이 막힙니다. 하늘의 일은 시간을 가지고 측정할 수 없는 것이라구요. 그 자리에 있어서 무엇이 벌어지는지 모르는 사람은 하늘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이고, 모르고 평하면 당한다구요. 법에 걸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법에 규정된 법규를 모른다고 해서 법규에 위반된 일을 하는데 처벌받지 않나요? 모르거나 알거나 위반하면 어차피 법의 처벌을 받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령한 사람들의 집회에 갔을 때, 화를 받는 것이 누구냐? 은혜 받은 부흥사의 뒤를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화를 받는 것입니다. 하늘의 대언(代言)을 하고 있는 자리이지만 계속 따라다니다 보면 습관화되기 쉽다구요. 그런 사람들은 배고플 때는 배고픈 생각을 하고, 목이 마르면 목마른 생각을 한다구요. 그리고 보통시간에는 농담하고 키득거리는데, 그런 사람들은 절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사람들로 말미암아 그 곳에 좋지 않은 구름이 쌓이기 시작하는데 그러면 그 부흥사의 길도 막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흥사라는 책임을 진 사람은 언제나 어디서나 끝까지 자기의 사명을 다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옥중이라든가 강의실이라든가 어디에서나 그것을 해야 한다구요. 사람이 보지 않는다고 해서 그 곳을 피해갈 수 없는 것입니다.
<말선42-75> 신앙(信仰)자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타격받지 말아야 한다. 아무리 충격된 말을 듣더라도 타격받지 말라는 것이다. 설령 타격받을 일이 생겨가지고 자기가 억울한 입장에 서게 되어도 그것은 나를 망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흥하게 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해야 된다. 그러한 일이 생기면 생길수록 미래의 가까운 때가 올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환경을 넘기 위해 겸손한 마음으로 온갖 정성(精誠)을 다 들여서 기도해야 된다.
<말선237-40> 설교를 할 때도 전부다 하늘의 지시를 받아야 합니다. 어떤 날은 아무리 기도하더라도 주일날 단상에 설 때까지 제목을 안 준다구요. 그때는 십자가의 형장에 나가는 사형수와 똑같은 느낌을 느끼는 것입니다. 전부를 하늘에 맡기고 나서게 되면 그때 비로소 입이 열립니다. 그때서야 제목이 나오고 말할 내용이 나오는 거예요. 그것에 따라 얘기하면 청중이 자기도 모르게 숙연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조작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힘이 아니라구요. 따뜻한 방에 들어오게 되면 모든 일신이 그 따듯한 기운에 전부다 포용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설교가 좋으면 은혜의 분위기에 사무치게 된다구요.
그렇기 때문에 전부 언제나 조심해야 돼요. 설교를 잘못하면 회개해야 됩니다. 그것은 얼굴을 들수 없는 부끄러운 일이에요. 마음의 문이 닫혀 있으니 답답하게 된다구요. 그것은 설교한 모든 전체가 은혜가 안 되고 은혜를 쫒아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내 속에 있는 은혜로 이것을 전부다 채워줘야 돼요 그리고 자기는 어두움에 사무쳐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숨 쉬는 공기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흐르는 것은 높은 데서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 것입니다. 책임이 있는 주체의 자리에 있을 때, 자기가 잘못하면 탕감해야 됩니다.
여러분이 잘못하면 선생님의 가정이 탕감을 받는 것입니다. 통일교회의 모든 축복가정이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흥진이 같은 아들이 죽은 것입니다. 그 아들은 아직 죽을 아들이 아니에요. 건강으로 보나 사주를 보나, 모든 면으로 봐서도 아직 죽을 시기가 안 되었다구요. 그렇지만 전환시기였기 때문에 이런 놀음이 벌어진 것입니다.
<말선237-38~39> 제사장은 친히 제물을 잡아야 됩니다. 피를 보아야 되는 거예요. 제사를 지낼 그 제물을 다른 사람이 잡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제사장이 직접 피를 보아야 됩니다. 제물은 피를 보는데 있어서도 지극히 깨끗하고 지극히 거룩하고 지극히 가치 있는 것이 아니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피를 볼 때는 누구의 피를 보아야 되느냐? 제일 사랑하는 사람의 피를 보아야만 그것이 대속(代贖)의 피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망하는 거라구요. 함부로 잡았다가는 자기 일족이 망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헌제를 드릴 때 제물을 쪼개야 했던 이유가 그 때문입니다. 자기 아들을 세웠을 때에도 그 제물을 쪼개야 되었던 것입니다. 쪼개지 않으면 아들딸을 사랑하는 마음이 남아 있다는 조건이 되기 때문에 그것은 제물이 못 되는 것입니다.
더욱이 책임자는 누구든지 식구가 자기 사정을 얘기할 때 잘 듣고, 전체의 본이 될 수 있는 내용을 가진 얘기를 할 때는 그 자료를 잘 기록했다가 전체의 교재로 쓸 줄 알아야 됩니다. 거기에 감동을 받으면 일요일날 설교제목으로 정해가지고 정성을 들여서 식구들에게 그 감동을 전해야 합니다. 그렇게 언제나 하늘을 모시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하늘을 모시지 않고 자기를 중심삼아 가지고는 설교도 할 수 없다구요. 설교를 책보고 참조해 가지고 하면 하늘이 역사를 안 해요. 흘러가 버리는 것입니다. 생명의 씨는 하늘로부터 왔습니다. 인간의 부터가 아니고 지식으로부터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하기 전에는 반드시 눈물을 흘리고 나가야 돼요. 눈물을 흘려야만 회개시켜야할 주인이 되고 부모가 되는 입장에서 그 자식들의 모든 것을 회개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눈물을 짓기 위해서는 먼저 눈물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눈물의 문은 눈물로 열어야 됩니다. 눈물의 문을 열어야 비로소 눈물이 나오는 것입니다. 통회(痛悔)의 눈물을 흘려야 통회의 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돼요.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빚진 사람의 입장이 되어야 합니다. 공인(公人)이라구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자기가 책임을 못하면 다른 사람이 대신한다구요. 좋은 일이 있으면 말하는 것보다, 웃는 것보다 먼저 하늘을 생각해야 합니다. 슬픔이 있어도 하늘을 먼저 생각하라구요. 내가 슬픔을 당해도 ‘내가 하늘대신 당한다.’고 할 때 슬픔을 의연히 넘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슬픔을 당하고 나면 반드시 댓가가 따라오는 것입니다. 땅 위에서 탕감하는 과정 중에 참 선한 입장에서 슬픈 눈물을 흘리면 반드시 선한 기쁨이 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슬픔을 열만큼 당하면 기쁨이 천만큼 온다는 거예요. 그런 생활을 느끼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계속해 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못 느끼면···· 열만한 슬픔을 넘었어도 하나만한 기쁨밖에 찾아오지 않는다면 그런 기쁨은 며칠 만에 내려가게 되어 있습니다.
진정으로 하늘을 따라가는 길은 진정한 슬픔을 당하면 진정한 기쁨이 내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기쁨으로 다가오는 거라구요. 내가 못 받고 내가 못 느끼면 자기 아내라든가, 자기 자녀라든가, 자기조상에게 그런 기쁨이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알아야 되겠다구요. 그래서 모든 일을 경솔히 할 수 없는 거예요. 언제나 하나님을 모시고 의논하는 자세로써 생활해야 하는 거라구요. 답답하면 앉아가지고 기도해요. 자는 게 문제가 아니고 일하는 게 문제가 아닙니다. 기도하는 것이 생활화 되어야 합니다.
<말선237-36> 간증시간을 길게 갖는다고 불평하는 사람은 좋지 않아요. 간증하는 시간이 길어지는 것은 자기도 모르게 자꾸 끌고 가는 무엇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로 말미암아 생명이 새로이 나고 새로이 부활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아야 됩니다. 은혜의 세계는 그런 거예요.
<말선39-68> 통일교회 교인들은 누구를 만나더라도 한번 가서 배척받게 되면 두 번 가서 울고, 그래도 배척하면 종이 되고, 종이 되어도 쫒아내면 그 아들딸을 붙들고, 사정(事情)하라는 것이다.
<말선40-166> 신앙생활(信仰生活)에는 반드시 반성(反省)이 필요(必要)하다. 하루를 지내고 나서 아버지 오늘은 이렇게 지냈습니다. 하고 보고 들이는 생활(生活)을 해야 한다. 슬픔이 올 때는 자기 스스로 무릎을 꿇고 통회(痛悔)해야 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