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은 분명 백년지대계
예로부터 교육은 백년지대계(百年之大計)라 하여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겨왔다. 고전에 이를 이렇게 설명한다. “곡식은 하나를 심어 하나를 수확하는 것이라면, 나무는 열을 수확하고, 사람은 백을 수확한다.” 교육을 자연에 순화하면서 땀 흘려 씨뿌리고 열매 거두어 사는 농사에 비유한 것이다. 교육은 그런 의미에서 ‘사람 농사’임에 틀림없다. 교육은 백 년 앞을 내다보며 진리(Veritas)와 공정(Justica)에 맞게 사람을 키워야 하는 국가적 운영에 속한다. 여기에서 교육 복지도 나오고, 기회균등도 실천되어야 하며, 양극화와 차별 없는 세상으로 가는 길이 마련된다. 교육은 정말 중요하다.
현 세태의 왜곡된 교육관
그런데 무슨 일인지 교육이 이상한 방향으로 치닫고 있다. 주변을 둘러보면 희한한 세태가 보인다. 유치원에서부터 영어 교육에 열내고 있다고 한다. 초등학교에서 이미 대입 준비를 시키는 학원이 생기지를 않나, 중고등학생 중 학원 다니지 않는 청소년이 없을 정도다. 학원은 국어, 영어, 수학만이 아니라, 예체능까지 망라한다. 학생들은 아침에 등교하면 밤늦게 집에 와서는 파김치 상태로 잠에 곯아떨어진다. 이런 생활이 반복되니 우리나라 청소년 행복 지수는 세계에서 비극적 점수대에 속한다. 이 모든 왜곡이 명문대 합격이라는 최종 목표에 맞춰져 있다. 대학입학이 인생 성공이라는 공식이 판치는 세상이 우리의 현실이라니.....
미디어를 달군 드라마 <스카이 캐슬>, <펜트하우스>는 이런 풍경을 여실히 보여줬다. 물론 일부 상류계층의 모습이라고 여길 수 있다. 하지만 우리 교육 현실의 피라미드 구조를 상징하기에 사회 비판적으로 보아야 하겠다. 드라마는 서울 강남의 어떤 특정한 풍경만이 아니다. 우리나라 전 지역에 이미 성공 지향적 교육관이 전염병처럼 널려 있다. “그렇게 공부해서 일등 하겠니, 그렇게 공부해서 명문대를 가겠니.” 수험생만 듣는 말이 아니라 모든 청소년들이 자주 듣는 추궁이다. 그들의 말대로 ‘왕 짜증나는 잔소리’일 것이다. 요즘에는 ‘개 짜증’이라는 말도 들린다. 우리의 고뇌는 어서 속히 청소년들을 이런 교육 지옥으로부터 구출하도록 해야 한다.
<미나리>는 잔잔한, 그러나 깊은 삶의 애환이 깃든 영화다. 아메리칸 드림을 안고 이민 간 한국인 가정의 이야기. 어느 대사가 인상 깊다. 쓰레기가 타는 소각통을 보며 아버지가 아이에게 말한다. “저것 보라. 사람이 쓸모없으면 저렇게 태워진다.” 크게 성공하지 못한 아버지의 회한이 담긴 고백이다. 그 속에는 경쟁에서 성공하지 못하면 결국 무가치한 존재로 사라질 것이라는 의식이 배어있다. 무한경쟁에서 성공하는 게 인생의 가치라는 현 세태를 반영했다. 이는 ‘신자유주의시대 교육헌장’(김상회 정치학박사)이라 하겠다.
‘조국 사태’의 교육적 상징성
우리 사회를 달구었던 시사 사건 중 ‘조국 사태’는 역시 상징적이다. 교육의 관점에서 언급하자면 한국 교육 현실에 대한 자괴감이 증폭되어 사회문제화가 되었다고 본다. 언제부터인지 ‘부모 찬스’라는 말이 떠돌더니 마치 시사용어처럼 돌아다닌다. 취업이나 진학에 이른바 ‘부모 빽’을 활용하는 것이다. <친구>라는 오래전 영화(2001)에 나온 한 대사가 이십 년 후인 2021년에 다시 기억을 불러일으켰다. “느그 아버지 뭐 하시노?” 학생이 이렇게 대답한 듯하다. “조폭인데예.” 순간 선생님이 당황하며 놀라는 모습이 떠오른다.
조국 전 장관이 ‘조국 사태’라는 시사 사건의 대명사가 되도록 관심을 끈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 이 글은 정치평론은 아니므로 교육적 측면에서 보자면, 이른바 ‘부모 찬스’에 대한 국민적 반감이 작용한 때문이라고 보인다. 언급한 드라마 배경에는 ‘학종’(학생부종합전형)이 중요한 요소로 작동한다. 원하는 학교에 합격하기 위해 갖추어야 할 조건이다. ‘평범’이나 ‘상위’ 정도로는 어림없다. ‘학종’에서 신계(神界)의 이력을 제출해야 합격 보장이라는 의식, 그것이 문제였다. 최고 ‘학종’의 포트폴리오를 갖추려면 평범하게 공부해서는 안 되기에, 이러저러한 경력을 위해서 부모의 지위와 권력을 잠시 활용한다는 점이다. 공정에 위배된다는 국민 눈높이에 거부감을 일으켰던 것이다.
교육에 창조 질서를 세워야
교육은 과연 어떤 원리를 따라야 하는가? 교육철학은 시대마다 다를 수 있고, 새로운 발견에 따라 교육 방법이 수정, 보완될 수 있다. 아니 시대의 변화에 따라 교육은 변화되어야 한다. 이러한 면에서 교육은 인위적인 부분이 있다. 즉 교육은 기술(technic)적 성격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데올로기에 지배되지는 말아야 한다. 특정 세력에 휘둘려 교육관이 왜곡되어서는 더욱이 안 된다. 공산주의의 유물론, 사회주의의 집단체제, 듀이(John Dewey)의 실용주의, 자본주의의 신자유주의 등에 영향받은 인간관, 교육관은 인류사에 크고 작은 흔적을 남겼다. 이들에게 교육은 필요한 성과를 이루기 위해 인간 개조를 서슴지 않는 인위적 기술로 작동했다. 교육은 기술이 아니라 예술(art, Kunst)이어야 한다. 진정한 예술로서의 교육은 사람을 도구로 다루지 않고, 사람을 목적으로 여기는 창조 질서에 순종한다.
“하나님이 사람을 이처럼 사랑하사”(요 3:16a). 우리 시대의 교육이 하나님 사랑에서 다시 꽃피운다면 문화의 치유와 회복이 가능할 것이고, 인간 회복 역시 가능하리라 본다. 교육의 명제는 명확하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만드신 창조 질서에 따라야 한다. 우리 앞에 놓여있는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제거하고 땅이 소산을 제대로 낼 수 있도록 땀 흘리고 수고해야 이루어지리라.
첫댓글 교육의 명확한 명제는
사랑의 하나님께서 만드신
창조 질서에 따라야 한다는 것!
창조질서에 따라~
땀 흘리고 수고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