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ἐκκλησία) 는 건물이 아닌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광야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을 만들어 가시는 장소입니다. 모세는 온유함(아나부)으로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고, 백성들은 완악함(하자크)으로 버림을 받았습니다(민12:3, 시95:8).
D L 무디가 모세의 일대기를 세 가지로 구분하였는데 40세까지 모세의 인생은 ‘somebody’였습니다.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자라 애굽의 모든 학문을 배웠고 권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능력과 힘을 의지하니 선을 행하자고 자기 손으로 애굽 사람을 죽인 것입니다. 말씀이 없으니 살인을 하게 된 것입니다(23,24). 모세가 자신을 ‘썸바디’라고 생각했던 이유는 배웠고 실력 있고 의욕이 충만한 왕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모세를 광야에서 가루로 만들어 버립니다. 왕자였던 사람이 목동이 되고 처가살이 40년을 하며 ‘no body’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온유한 자가 될 때까지 광야의 바람에 풍화되어 가루가 되고 자기 소리가 다 사라지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 후에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신을 벗으라’ 하십니다(33). 신을 벗으라는 것은 내가 되고 싶은 것을 내려놓으라는 것입니다. 광야란 나를 드러내고 싶은 것들이 다 사라지는 곳입니다. 사업이 어렵거나, 건강이 악화하거나, 실직하거나, 실패하거나, 관계가 다 깨지거나, 사람의 손가락질을 받는 곳이 광야입니다. 신발을 벗었을 때 남아 있는 것 그게 진짜인데 그때 하나님이 계셔야 합니다. 초대교회는 조직도, 건물도, 권력도, 지위도, 은과 금도 없었습니다. 오직 예수 이름의 능력만 있습니다. 가루가 되고 난 다음에 하나님의 능력만 남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신을 벗게 하실 때 능력과 생명의 하나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광야는 하나님을 찾고 붙드는 곳입니다. 나는 ‘No body’이지만 하나님께 다 맡기면 하나님의 사람(God’s body)이 됩니다. 그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고백하게 됩니다.
‘신을 벗으라’는 또 다른 의미는 과거를 내려놓고 미래의 푯대를, 부르심을 따라 살라는 겁니다. 지금까지는 내 뜻과 나의 원함을 가지고 살았지만, 이제는 부르심에 목숨을 거는 온유한 자(아나빔)로 살아야 합니다. 온유한 자가 돼야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을 수 있습니다(34-36). 모세는 가장 약한 80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지만, 백성들을 구원할 능력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으니까 이름값을 하는 것입니다(모세=물에서 건져낸 자). 이제 이스라엘을 건져내는 부르심 가운데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온유한 자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맡기는 자며, 땅은 약속에 대한 성취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나라를 주겠다는 것입니다(시37:4,11). 땅은 목표가 아니고 온유한 자가 되면 저절로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자가 되면 땅을 차지하고 다스리는 자가 됩니다. 온유한 자가 되면 약속받은 것을 다 성취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가까우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번성하여 많아졌더니”(17) 애굽에서 이스라엘이 번성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고 섭리입니다. 하나님께서 때가 되니까 번성하게 만드신 것입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이 애굽 왕위에 오르매”(18) 악한 왕이 세워진 이유도 하나님이 세우신 것이고, 아이를 죽이는 핍박을 했는데 그때 모세가 태어난 것입니다. 이 어두울 때 모세를 갈대 상자에 띄워 하나님께 맡겼더니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성장하게 되었고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 만나 주신 것입니다(30).
인생은 우연이 없습니다. 다 하나님이 섭리하시고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과거를 하나님이 주관하셨다는 해석이 되면 미래의 삶에 대해서 신뢰할 수 있습니다. 내가 깨지면 하나님이 부르시고 하나님이 부르시면 땅을 차지하게 됩니다. 이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온유할 때의 모습이 순종입니다.
순종하지 못하는 대표적인 이유는 완악함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모세에게 복종치 아니하고자하여 거절하며 그 마음이 도리어 애굽으로 향하여”(39) = 완악함의 동의어는 불순종입니다.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안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은혜를 받고 깨우침도 있지만 거절하는 것입니다.
완악하여서 순종하지 않으면 별일 아닌 것 같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두 주면 갈 약속의 땅을 40년 동안 가지 못했습니다. 믿음의 새로운 세대를 만들고 완악한 사람들이 다 죽기까지 기다리신 시간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 빼고는 약속의 땅을 받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리고 다음 세대를 순종의 사람들로 만드셨습니다.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을 순종함으로 차지하였습니다.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합니다. 요단강이 갈라지고 여리고가 무너지며 약속하신 땅을 성취하는 거룩한 종들이 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거룩은 세상과 다른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거룩은 정의를 내릴 수 없고 개념화시킬 수 없는 큰 의미입니다. 거룩은 하나님의 백성이 순종할 때 나타나는 결과입니다. 순종했을 때 요단강이 갈라지고 여리고가 무너지고 영광이 임하고 아름다움이 나타나는 것, 이 모든 것들을 포괄하는 것이 거룩입니다.
율법은 ‘무엇을 하라 하지 말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이 되라’고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과 동의어는 거룩한 사람, 온유한 사람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온유한 사람만이 예수님처럼 나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끝까지 갈 수 있습니다. 그때 영생이 있고, 구원이 있고, 부흥이 있고, 다른 사람들을 건져낼 수 있는 영광이 있습니다. 깨짐과 부르심과 순종이 있는 온유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