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오노 나나미의 ‘얼굴에도 격이 있다.’
나이를 먹으면 인격이 원만해진다는 것은 순전히 거짓말이다. 만약 그런 노인이 있다면 늙었으니 어쩔 수 없다고 포기하고서 나이에 걸맞게 자신을 가장하는 것이든지, 아니면 그저 늙기 전의 생명력을 잃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어느 쪽도 아닌 노인은 버럭버럭 화를 내는 방향으로 가는 듯한데, 그렇게 되면 주위에 폐가 될뿐더러 버럭버럭 화내는 노인만큼 추한 존재도 없다. 그렇게 되기 전에 나는 싫은 것에 대해서 당당히 말하기로 했다.
왜 갑자기 마음이 돌변했는지? 그건 어제 텔레비전에서 이브 생 로랑의 죽음을 전하는 뉴스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 옛날 프랑스 패션계의 리더였던 이 디자이너의 죽음 자체는 딱히 충격이 아니었다. 패션계에서는 뭐랄까 한물간 인물이기 때문이다. 내가 받은 충격은 그 소식을 전하는 프랑스 뉴스나 이탈리아 뉴스나 하나같이 너무 이른 죽음이다. 안타까운 죽음이다. 하는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점이다. 그러니까 그럴만한 나이가 되어 죽었다는 얘기이다. 이브 생로랑은 내가 태어나기 1년 전에 태어났다고 한다. 나 역시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 나이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하고 마음을 정했다. 싫어하는 것 은 전부 버리자고.
그래서 싫어하는 것 제 1조
일본에 있으면서 매일 접하다 보면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6개월에 한 번 일본으로 돌아간다. 근년 들어 일본에 돌아갈 때마다 아연해지는 일이 있다. 일본 사람의 얼굴이 유치해진 것이다. 젊은 것이 아니라 어리다. 젊음이 피어나는 얼굴과 어린 얼굴은 전혀 다르다. 남자든 여자든 이 현상은 다르지 않다.
기무타쿠라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남자 배우를 알고는 있었는데 이 사람의 얼굴을 처음 봤을 때 아연했다. 이것이 결혼해서 아이까지 있는 일본 남자의 얼굴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유리라는 이름의 게이샤가 주인공이 할리우드 영화에서 일본인 여배우가 아니라 중국인 여배구가 캐스팅되었을 때가 떠올랐다. 영어를 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할리우드 영화 제작에 관여한 적이 있는 아들 말로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한다. 더빙 기술의 발전으로 그 정도 결점은 메우기가 어렵지 않다는 것이다.
요는 주역을 맡을 수 있는 얼굴의 ‘격’이 문제다. 그게 있는 여배우가 지금의 일본에는 없다는 뜻일 게다. 과거에는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 요즘 일본 여배우는 모두 예쁘고 귀엽지만 여자가 아닌 셈이다.
인간의 얼굴에는 ‘격’이 있다. 요즘 유행하는 말인 ‘품격’이 아니라 격이라고 말하고 싶다. 품위나 아름다움이 부족해도 격은 있을 수 있다는 의미에서,
이런 의미의 격은 현실감이라고 바꿔 말해도 괜찮다. 컴퓨터 그래픽으로만 제작하는 영화를 봤을 때 이 점을 확실히 느낀다. 머리칼의 미묘한 흔들림까지 절묘하게 재현했는데도 누구 하나 살아있는 등장인물이 없었기 때문이다. 컴퓨터 상의 놀이라면 몰라도 영화관에 가서 돈을 내면서까지 볼 가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내게는.
<쓰바키 신주로(1962년에 개봉한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를 비롯해서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 예 명작의 리메이크가 붐인 듯하다. 이 대사업에도 도전한 감독들의 재능은 의심하지 않는다. 배우도 전력을 다해 연기했을 것이다. 그런데 과연 ‘얼굴’이 있는지 스토리와 연출은 차지하고 리메이크판의 주역들이 영화를 보는 관객이 납득할 만한 얼굴을 갖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배우의 존재 가치는 연기력에 앞서 얼굴과 눈에 있다고 나는 믿고 있다. 얼굴과 눈에 힘이 있으면 나머지는 감독의 역량에 따른다고 생각할 정도로 살아 있는 얼굴과 눈이야말로 배우가 실제로 연기하는 영화와 컴퓨터 그래픽의 차이니까.
그렇다고 일본에 얼굴이 좋은 남자와 여자가 영화계라면 얼굴이 좋은 남자와 여자를 연기할 수 있는 배우가 없는 것은 아니다. 때문에 문제는 더욱 절망적이다. 나는 요즘의 일본 사람들 대부분이 격이 있는 사람과 좋은 얼굴을 원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수요가 없으니 공급하는 쪽도 맥이 빠져 유치한 얼굴을 선호하는 흐름이 오늘날의 주류가 되고 만 것은 아닐까.
기무타쿠처럼 요즘 일본 사람들에게 큰 인기를 모으고 있는 또 한 사람의 일본 남자는 바로 얼마 전에 사장이 되었다는 만화 주인공 시마 코사쿠일 것이다. 사장으로 승진하면서 신문 한 면을 대대적으로 장식했던 이 사람의 얼굴을 보고서 나는 또 생각에 잠기고 말았다.
상큼한 얼굴이기는 하다. 상사에게도 인정받고 부하들에게도 인망이 높은 능력 있는 회사원으로서는 이상적인 얼굴이다.
하지만 이것이 사장의 얼굴일까? 사장이란 잘 나고 못 나고에 상관없이 근엄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 보통이다. 그에게 회사 전체의 존망이 걸려 있으니 그 긴장감이 절로 얼굴에 나타나기 때문일 것이다. 사장에서 회장으로 승격되면 그 순간 온화한 얼굴로 일변하는 것이 그 증거가 아니겠는가.
사장이 된 사마 코사쿠의 얼굴을 보면서 이런 얼굴은 기껏해야 과장이지, 아니 조금 더 잘 봐줘야 부장 쯤이려나, 앞으로 사장으로 일하는 과정에서 얼굴이 어떻게 변화할지 어떨지는 작가인 히로카네 갠시 씨의 생각에 달렸다. 지금처럼 환하고 유치한 얼굴로 계속 갈 것인지 아니면 세계이 긴박한 경제 상황을 반영해서 고뇌와 그에 따르는 후줄근함과 그 모든 것을 경험함으로써 나타날 높은 격을 지닌 남자로 변해갈 것인다.
과거 패전 후에는 ‘언덕 위의 구름(시마 료타로의 같은 제목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이 일본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지금은 시마 코사쿠가 의욕도 없고 기력도 없는 일본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우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최소한 ‘격 있는 시마 코사쿠’로 끌어 올려 주었으면 싶다.
사실 싫어하는 것이 열 가지 쯤 있는데 한 가지를 쓰고 나니 원고 분량이 차고 말았다. 하지만 심술쟁이 할머니 노릇 하는 것도 이 정도 선에서 머무는 게 좋을지 모르겠다. 나 시오노 나나미의 격을 유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앞으로 5년 정도는 더 살지도 모르니 그때 싫어하는 다른 것을 쓰기 위함이다. 아니 5년이 지나 기무티쿠가 마흔 살이 되었는데도 지금과 똑 같이 어리고 예쁘장한 얼굴이거나, 시마 코사쿠 역시 사장으로 승진했을 때의 조금도 다르지 않은 상큼하고 환한 얼굴이면 어쩌나.
만약 그때도 그렇다면 절망한 나머지 아무 말도 쓸 수 없을 것이다. 늙음 후에 오는 죽음도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늙지도 않았는데 맞아야 하는 죽음은 부자연스러움을 넘어 추악하다. 사랑하는 내 조국 남자들이 오스카 와일드의 명작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의 주인공과 같은 말로를 걷지 않기를 바란다.
2008
첫댓글 '젊은 얼굴과 어린 얼굴은 다르다. 젊은 얼굴은 격이 있고, 어린 얼굴은 격이 없다.'
나는 요즘 인형처럼 예쁘다는 아이돌의 얼굴을 보면서 어린 얼굴(철따서니가 없는)이라는 생각이었으니
'왜'인지를 설명하지 못했는데, 나나미의 글이 답을 주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