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을 생각하다
신발장을 열어본다. 가끔 정리하지만, 가족 수에 비해 많은 신발이 들어차 있다. 구입 후에 한 번도 신지 않은 하이힐도 있다. 멋진 차림으로 나들이할 때 신을 요량으로 모셔뒀는데, 선택에서 자꾸 밀려난다. 편한 복장에 맞는 신발을 찾기 때문이다. 시간의 흐름 따라서 신발의 굽 높이도 달라진다. 운동화를 착용하던 어린 시절, 아버지는 신발을 구겨 신으면 여지없이 나무라셨는데, 신발을 소중하게 여기라는 의미일 것이다.
현관의 신발을 살피며 가족의 부재 여부를 헤아린다. 사람 수대로 놓인 것을 확인하면 비로소 마음이 놓인다. 가족의 연령과 취향에 따라서 크기도 모양도 제각각이다. 신발은 궂은 길 마다하지 않고 묵묵히 동행해 주는 고마운 존재다. 주인의 발길 따라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곳을 다니며 진자리에 주저 없이 자기 몸을 먼저 내민다. 우리의 몸 중에서 가장 아래쪽에 있는 발을 따뜻하게 감싸고 보호하면서. 오랫동안 편하게 신은 신발은 분신처럼 정이 들어서 쉽게 버리지 못한다.
오래전에 용평 리조트에 다녀왔다. 산책길에 가볍게 산에 올랐는데 내려올 때는 남편이 스키장 슬로프를 타고 내려오자고 제안했다. 언덕이 순탄해 보여서 무심코 뒤따랐는데, 막상 그 길에 들어서고 보니 생각보다 가파르고 들쭉날쭉 자란 잡초더미로 날카로웠다. 플랫슈즈를 신고 미끄러지지 않으려 힘을 주었더니 발바닥에 무리가 되었나 보다. 내려왔을 때 뒤꿈치가 찌릿하더니 그 이후로 통증을 자주 느꼈다, 그때마다 '아킬레스건'처럼 그 순간이 떠오른다. 사람은 누구나 상대방이 맞춤신발처럼 자신에게 꼭 맞기를 원한다. 가시밭길을 걷게 한 남편을 원망했지만, 내가 상대의 맞춤신발이 될 생각을 하지 못한 탓일 수 있다.
신발을 신는다는 것은 삶의 연장선일 것이다. 산모가 출산을 위해 신발을 벗고 방에 들어갈 때 ‘이 신발을 다시 신을 수 있을까’ 생각하며 뒤돌아봤다고 한다. 그만큼 산고가 컸기 때문이다. 오래 전에 시골의 친척이 출산 시기를 놓치다 도시 병원에 나왔지만 결국 세상을 하직했다. 다른 자녀를 두고 자신이 신고 온 신발을 신지 못한 채. 먼 길 떠난 엄마를 하염없이 기다리던 내 또래아이의 눈망울, 그때의 영상을 토막 난 흑백필름처럼 어렴풋이 기억한다.
신발은 마음의 행로를 의미하기도 한다. ‘고무신을 거꾸로 신는다.’는 옛말이 있다. 군대에 입대한 애인을 기다리다 도중에 변심한 여인을 빗대어 한 말이다. 애인을 생각하며 군대 생활을 견디던 장병에겐 하늘이 무너진 느낌이었을 것이다. 신던 군화를 벗어 던지고 주어진 틀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마음이 헤아려진다. 요즘엔 군대에서 휴대폰을 사용할 수 있다니, 수시로 연락이 가능해서 나라 뿐 아니라 애인을 지키는 것이 수월하지 않을까.
얼마 전에 임종한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는 우아한 패션의 상징으로 떠오른다. ‘패션의 완성은 신발’이라고 했으니 여왕의 의상 못지않게 구두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여왕이 즐겨 신는 구두는 장인이 수 제작한 제품으로 오랫동안 낮은 굽의 검은색 가죽 구두를 애용했다고 한다. 고액의 구둣값보다 ‘구두 상궁’을 고용했다는 내용이 인상적이다. 그 여성의 임무는 여왕의 편한 발을 위해서 며칠간 카펫 위에서 새 구두를 신고 걷는 것이다. 면 재질의 양말을 신고 궁전 카펫 위를 걸으며 새 신발을 길들인 역할이었다. 명품 신발을 신었다 해도 계급으로 따지면 가장 아래의 직위일 것이다. 잠시나마 여왕의 신발을 신고 무슨 생각을 했을지 궁금하다.
신발의 종류가 쓰임새에 따라 다른 것처럼 삶의 역할과 형태도 각양각색이다. 비싼 구두를 신고 세계를 누빈 여왕뿐 아니라 카펫 위에서 신발을 길들이는 상궁도 결국 생을 마감하게 된다. 안락한 삶이거나 고단하게 산 삶이라 해도 신발을 벗고 영원한 안식을 취할 것이다. 누구에게나 주어진 삶의 공평한 이치다. 아무렇게나 구겨 신어도 군말 없이 받아들이는 신발은 우리의 진정한 동반자이다. 때로 신발 끈을 묶기 위해서 상체를 숙이며 무릎을 구부리는데, 그때가 신발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모습이 아닐까.
무릎을 꿇고 제자의 발을 씻겨주신, 겸손하신 예수님이 떠오른다.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신발은 겸손한 존재이다. 어둡고 축축한 곳에서 주인의 발 냄새를 마다하지 않고 감내하는 신발. 주인이 가자는 대로 따르고 발을 보호하는 신발은 순종과 희생의 상징이다.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신발은 이웃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하는 분들의 삶처럼 높은 위치일 것이다. 기분 내키는 대로 함부로 대하던 신발이 그토록 소중한 존재일 줄이야. 새삼 신발의 가치를 깨닫게 된다.
첫댓글 신발의 역할에 대해 많은것을 생각
케 합니다.
유독 나의 엄지발가락 뼈부분은 불록
나와 내 신발은 주인을 잘못만나 지
난 70여년간 고생이 많았을같아 올
연말에는 무지외반증 수술을 한답니
다.
발바닥은 제 2의 심장이라는데
신발은 더욱 소중하지요
지송께서 좋은 소재에 의미를 주셨네요. 중학부터 운동화를 신고 두 달도 못되어 바닥에 구멍이 나고, 구두를 신을 때는 일주일 이상 길들이느라 발가락이 많이 아팠죠. 중매해주었다해서 선물받은 구두, 그 친구가 이혼하는 바람에 쓰레기 통에 버렸죠. 이젠 운동화가 더 편해져 구두 신을 일이 없어졌네요. 아! 젊은 날이여&&&
그냥 짐작으로 색의 마술사인 화가의 신발은 종류가 다양하지 않을까요? 값이 문제가 아니라 격에 맞는 신발을 신다보면 타인들은 모두가 명품으로 생각하겠죠?
글에서 표현한 것과 같이 이제라도 내 스스로가 아내의 발에 맞추는 신발의 역할을 해야겠네요! 습관이 되지않아 어려울 듯 합니다만~
옛날에는 신발은 그저 발만 보호하면 그만이었는데, 요즘에는 건강신발이 관심을 받고 있지요. 나도 젊은 시절 테니스를 열심히 칠 때 발뒷굼치에 통증을 느껴 정형외과를 방문한 적이 있었지요. 발뒷굼치 아래로 뻣은 날카로운 뼈가 근육에 영향을 준 결과로 판명되어 군의관의 처방대로 쿠션이 좋은 비싼 신발을 신고 해결한 적이 있지요, 안식구도 얼마 전에 무지외반증으로 보행에 불편을 느껴 비싼 건강신발을 사서 신고 조금 편하게 보행을 하고 있지요. 이제 신발은 그냥 신발이 아니라 우리 건강에 제일 중요한 발을 보호하는 도구라는 인식이 점차 확대되고 있는 것 같군요. 그리고 나는 물론 상대의 편한 신발이 되도록 노력해야지요.
신발에 얽힌 이야기를 보면 신발이 영혼과 밀접한 것 같습니다. 과거 상여가 나갈 때 고인의 신발을 머리카락과 손톱과 함께 모셨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도 신발이야기가 자주 등장하고 신데렐라 이야기도 신발이 주제가 된 걸 보면 신발은 매우 중요한 우리 몸의 일부가 아닌가 여겨집니다.
내가 상대의 맞춤 신발이 될 생각을 하지 못한 채 상대방이 나에게 맞춤 신발이기를 바라며 살아왔습니다.
죽비를 맞은 듯 합니다.
발바닥을 대신해 주는 신발,
두 발로 서서 걷는 호모 일렉투스의 걷는 특권과 축복을 한껏 누리게 해주는 게 신발이 아닌가도 싶습니다.
"현관의 신발을 살피며 가족의 부재 여부를 헤아린다"는 말에 가슴이 찡해집니다. 함께 있어야 하는 가족, 신발의 모습으로 가족의 부재를 인식하며 집 밖으로 나가 있는 다른 가족이 별고 없기를 바라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