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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결자해지의 달, 2월
-1. 2월이란 달
1년 중 제일 짧은 달 2월. 2월을 의미하는 February는 '죽음의 신'의 이름이기도 하다. 이런 부정적인 기운이 서려있는 달은 짧으면 짧을수록 좋다고 하여 1년 열 두 달 중 가장 작은 달, 2월을 만들었다고 한다. 왜 옛 사람들은 2월을 꺼렸던 것일까.
우리는 2월을 ‘추운 겨울이 이제 지나가나 보다. 입춘이 문밖에 기다리네. 봄을 기다리는 따뜻하고 설레는 마음이다. ’ 늘 이 정도로 갈음을 하곤 한다. 겨울의 끝자락이란 계절의 위치선상에서도 그렇고 날도 짧아서인지 보람이나 성과의 의미로 나타내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일까. 함영숙 시인은 이렇게 말했다. 겨울 껍질 벗기는 숨소리 봄 잉태 위해 2월은 몸사래 떨며 사르륵 사르륵 허물 벗는다. 자지러진 고통의 늪에서 완전한 날, 다 이겨내지 못하고 삼일 낮밤을 포기한 2월. 봄 문틈으로 머리 디밀치고 꿈틀 꼼지락 거리며 빙하의 얼음 녹이는 달 2월.
오세영시인은 또 이렇게 표현했다. '벌써'라는 말이 2월처럼 잘 어울리는 달은 아마 없을 것이다. 새해맞이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2월, 지나치지 말고 오늘은 뜰의 매화 가지를 살펴보아라. 항상 비어 있던 그 자리에 어느덧 벙글고 있는 꽃, 세계는 부르는 이름 앞에서만 존재를 드러내 밝힌다. 외출을 하려다 말고 돌아와 문득 털외투를 벗는 2월은 현상이 결코 본질일 수 없음을 보여 주는 달, '벌써'라는 말이 2월만큼 잘 어울리는 달은 아마 없을 것이다.
이렇듯 단순히 2월은 봄을 기다리듯 아직 여물지 않은 준비의 시간으로 묘사를 한다. 과연 그 정도에 불과하던가. 두 시인으로부터 내가 얻는 감상은 기다림과 무심코 지나치는 양 하는 시간의 2월이다. 2월이란 시 제목이지만 정작 2월은 그 주역이 되지를 못했다는 생각이 들고 만다. 나 역시도 2월쯤엔 ‘어느새 2월이네요.’ 란 인사말을 많이 썼을 뿐 별반 2월에 기대 선 적도 기대한 바도 없다싶다.
오히려 봄이 올 듯 따뜻하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한파가 닥치기도 하는 2월로서 한 때는 얄밉다 여기기도 하였다. 이는 오시인의 말처럼 정말 현상이 본질이 아니기에 2월은 ‘그냥’ 이란 의미로서 잠시 스쳐 지나는 격에 불과한 것이기도 하다. 새끼손가락은 짧지만 예쁜데 2월은 부정적인 느낌으로서 신년이란 1월에 치이고 봄이란 3월에 치여 단순히 아니 벌써 라든지 그냥 그렇게 낀 달이다.
그럴 바엔 잔인하다지만 4월이 훨씬 더 나은 달이다.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기억과 욕망을 뒤섞으며 봄비로 잠든 뿌리를 뒤흔든다는데 아니 그런가. 기실 '4월이 잔인한 달'이란 역설이 많은 공감을 얻게 되는 데는 단순히 계절로서가 아니라 수많은 젊음과 숭고한 영혼이 무고한 붉은 피를 뿌려야 했다는 역사적 사실에 보다 더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한마디로 2월은 예쁜 새끼손가락의 가녀린 느낌의 달도 딱히 희망을 말할 달도 아니다. 그저 아니 벌써 이 만큼 하면서도 별 현상도 꿸 수 없는 아쉬움 속에 처절한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오히려 황무지의 잔인한 달이 2월이 아니겠는가 싶다. 이외수는 이런 2월을 적절히 묘사했다. 밤이면 선 잠결에 그대가 돌아오는 발자국 소리 소스라쳐 문을 열면 아무도 보이지 않고 뜬눈으로 정박해 있는 도시 진눈깨비만 시린 눈썹을 적시고 있다
한 해가 저무는 12월의 음영보다 더 깊숙한 음력 동지섣달은 줄곧 2월에 껴 있다. 쓸쓸한 그믐달. 짧아서도 현상에서도 확연하지 않기에 안타까움은 더하다. 우리는 보이는 현상에 너무 급급하다. 역사적 배경부터서도 만족스럽지 못하다. 로마인들이 쓰던 달력은 처음엔 달 이름이 10개 밖에 없었다. 11월과 12월에 해당하는 두 달은 이름조차 없이 무시됐지만, 그 기간이 농한기이기 때문에 로마인들은 별로 불편해하지 않았다.
춘분일 즉 봄을 한 해의 처음으로 잡았으니까 고대 초기 로마 시대에 1월은 March였다. 하지만 Julius Caesar가 B.C. 46년에 계절과 달력을 일치시키기 위해 나중에 January를 1월로 만들어 March는 3월로 밀려나게 되었다. January는 로마의 시작과 끝, 문의 신인 Janus 이름에서 유래한다. Janus는 앞뒤로 얼굴이 두 개 있는 신이었는데 초기 로마시대에는 그가 새벽에 천국의 문을 열어 아침을 오게 하며 황혼 무렵에는 천국의 문을 닫았다고 믿었고 그래서 그를 모든 문, 입구의 신으로 숭배하였다고 한다. 즉 1월을 Janus의 달로 믿었던 것이다.
2월(February)도 1월(January)과 같은 이유로 누마황제(Numa) 시대에 추가된 달이며 율리우스 시저(Julius Caesar)에 의해 밀려난 달이다. 태양의 주기와 달(month)의 길이가 일치하지 않아 Numa 시대에 한 해의 끝이었던 February의 길이를 조절하게 되었고 이후 태양의 주기와 달(month)의 길이가 일치하지 않으면 February를 수정하였다. 그래서 윤년(leap year)이 들어가는 달이 2월이 되었다.
그 무렵부터서 로마는 혼탁했다. 부가 넘치며 사치와 방탕이 도를 넘어섰다. 도시의 환락과 더불어 그로 제일 두려운 것은 로마 멸망과 죽음이었다. 죄를 많이 지은 자, 그들이 두려운 것은 바로 2월의 의미와 같았다. February는 정화의 신인 februa 에서 유래한다. 왠지는 모르지만 이 달에 로마 사람들은 정화축제를 열었다고 한다. 라틴어로 februare 는 “죄를 속죄하다(expiate)” 혹은 “정화시키다(purify)” 라는 의미를 지닌다. 즉 이 달에 마음을 정화시키고 다가오는 봄을 맞이하자는 의미가 담겨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이 원래 한 해의 시작으로 보았다는 2월 다음 달의 의미를 보면 2월의 엄중함과 그들이 두려워한 2월 달의 의미를 엿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로마력으로 첫 번째 달 March. 이는 로마의 전쟁신(god of war)인 Mars에서 유래한다. 대개 전쟁은 봄(3월)에 시작했기 때문이다. 지은 죄를 정화 못한 채 그들은 또 전쟁터로 나서야 했다. 전쟁은 야누스( Janus)의 환상과도 같은 것이다. 승리의 쟁취 뒤엔 탐욕이 넘쳐난다. 그러기에 속죄 없는 로마인들은 제발 두려움의 달이 빨리 끝나기만을 밤새 기도하였을지도 모른다.
1월을 희망, 3월을 푸르른 날개라 한다면 과연 2월을 뭐라 말할 텐가. 2월을 단지 ‘그냥, 아니 벌써’ 로 매도하고 죽음에 연결시킨 두려움으로 낙인찍고 잠잠히 묵혀두어야 할 것인지에 나는 회의감이 든다. 내가 경험한 2월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 달리 생각해 보면 로마인이 그러했듯 2월은 침잠하여 자숙하고 정갈한 마음을 얻고자 품성을 깨끗이 하는 달이다. 나는 추락하여 더는 어쩌지 못할 위인이 갖는 체념과 낙막한 그믐 같은 전락의 느낌을 연상하며 12월을 맞곤 했다. 그때쯤은 한해의 기운이 다해 꼭 그러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2월은 12월과는 좀 다르다. 광채 없는 그믐은 12월 같이 여전한데도 어느 깊게 패인 정체성을 서서히 허물며 다른 틀을 새긴다. 실망과 실패의 끝에 엄숙히 자리한 그 무엇, 쇠잔하여 죽던지 다시 돋아나던지 하는. 2월은 짧지만 아주 당차고 간결하게 비로소 지난해를 말끔하게 청산을 한다. 졸업이 그렇고 추운 겨울이 또 그렇다. 입춘도 2월이요 인사이동도 2월이고 퇴임도 2월이며 헤어짐도 2월이다. 낙방의 발표는 큰 고통이면서도 감내해야할 또 다른 선택된 길이다.
2월은 엄중한 심판의 달이다. 봄을 기다리는 마중물이나 준비의 계절이 아니다. 지난한 과거는 꼭 2월에서야 청산이 됐다. 연말결산도 꼭 2월에 파장 한다. 누구든 벌써 이렇게 빨리 하며 2월을 말하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어느새 닥쳐온 바로 심판의 결말들에 대한 당혹감과 아쉬움 때문일 것이다. 당찬 마감이 즐비한 짧은 2월의 시간 속에는 당연 명쾌함도 절망도 아쉬움도 모두 들어 있다. 큰 결말 하나로 종지부가 찍히고 그래서 평생 미련도 남고 아픔도 남는 잊지 못할 때가 2월인 것이다. 진급도 그렇고 대입낙방도 꼭 2월에 있다. 당해 본 그들도 그럴 것이지만 우리 집도 황량한 벌판 한 가운데의 황무지를 2월에 참담하게 맛보아야만 했다. 문득 떠오르는 아들의 대입낙방. 어딘가에 가슴 조각낸 아픔의 글이 남겨져 있었다.
-2. 대전사는 얄리에게 아빠가
**큰 아들이 장가를 가고 이제 곧 박사학위를 받는다. 문득 한 시절 아들의 서울행이 떠오른다. 아들은 삼수생 출신이다. 참 마음이 아팠던 그 무렵. 차마 말로는 위로를 못하고 글로 남겨 어딘가 쑤셔 처박아 놓았었다. 그리고 까맣게 잊었던 글들인데 오늘 문득 아들 별명이 생각나 우연히 인터넷에서 ‘얄리’라 치고 다시 들여다보니 아래 글이 여직 살아 있다. 아직도 이글이 남아 있다니 참으로 희한한 일이다.
그때 이글을 보고 많은 동병상련의 아이들이 수없이 댓글을 달았었다. 아마 인터넷 내 글에 달린 댓글 최고의 기록일 것이다. 500회가 넘는다. 내 글에 댓글을 달아준 아이들도 벌써 30대로 어디선가 이 나라의 주역으로서 우뚝 서있지 않을까. 그런 지금 아팠던 그 때가 왜 그토록 그리운 것인지 모르겠다. 대견하게 성장해준 내 아들...감개무량할 뿐이다. 유수같이 흐른 세월이 그 언제였던가, 아픈 시절이 그저 아득할 따름이다. (2018년 3월 16일 새벽에)
대입 낙방
대한의 추위가 닥쳐왔다. 당연 떠오르는 것이 아버지다. 바로 이 맘 때 당신 갈 길을 떠나셨다. 이번엔 아버지 제사에 때 맞춰 아들놈 대학 입시 발표가 겹쳐 있다. 졸이는 마음에 당신께 드리는 독백이다. ‘아버지 저 지켜보시지요. 저를 도와주세요. 잘 해드리지도 못했으면서 늘 도와 달라 하기만 해서 송구하네요. 그래도 어쩌겠어요. 제가 그때도 그러했듯 당신이 가신 지금도 여전히 저를 지켜주고 있다고 믿는 것을. 저번 때 운 좋게 비켜 사고가 안 난 것도 그건 재수가 좋아서가 아니라 아버지가 그리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제 힘으론 역부족이다 싶습니다. 이번 당신의 장손 대학에 꼭 붙게 도와주세요.’
난 평상시 일이 안 풀린다 싶을 때나 간절히 그 무엇인가를 바랄 때 아버지를 몰래 찾곤 한다. 신위께 간곡히 청하는 신자의 마음이다. 맹목적 추종으로서 살아왔던 신자가 아버지에게 못할 말이 따로 있겠는가. 당신이 그러한 아들의 마음을 모를 리 없다 싶은 것이다. 고달픈 혈육의 정으로 애써 살다 가신 당신이 그 질긴 끈으로서 또 이어지는 아들의 마음 저림을 왜 모를까. 그리하여 또 마음속에서 되 내이고 되 내이는 것이다. 아버지 도와주세요.
요즘처럼 아들을 아들로서 절실히 느껴 본 적이 없는 듯싶다. 하는 것이 안쓰럽다 싶어 쳐다보면 아들은 분명 세속의 짐으로 느껴지고 의자에 올라서 방 전구를 갈아 끼우는 의젓한 모습을 쳐다보자면 신주단지 같은 나의 분신이다. 지금 나는 그 분신의 아들로 신음하고 있다. 떨쳐지지도 않고 지워지지도 않는 수많은 난상이 거듭되어 지금 나를 옥죄는 것이다. 1월 7일 일차의 기대가 무너졌다. 그리고 1월 20일 설마 하였던 이차의 기대마저 사그라지고 말았다. 맥 놓고 한숨으로 끝날 일이 아니다. 재수를 한 놈인데 이마저도 안 되니 장차 이일을 어찌하면 좋을까.
속에서 불이 나 뒤틀려 오그라들고 생난리다. 이럴 수는 없는 것이다. 자식의 앞날이 손에 잡히는 것 같아 며칠째 잠을 이룰 수가 없다. 먹히지도 않는다. 뒤집힌 속이 불붙은 기름 구덩이지만 그렇다고 속을 까서 뒤집을 수는 없다. 어떻든 간에 치밀어 오른 것을 잠재워야 한다. 속 죽여 우는 아들의 울음이 바로 나의 눈물이다. 아들은 숫제 말을 잃었다. 심난이 파국으로 치닫고 있다. 그러니 마냥 또 이럴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아들에게 용기를 주자. 삶의 희망을 만들자.’ 하면서도 되지가 않는다. 방에서 나오지도 않는 놈을 억지로 끌어낼 수도 없고 아쉽고 안타까운 심정을 감추기도 싶지가 않다.
때론 글이 안 펼쳐질 때가 있다. 꽉 막혀 오도 가도 못하는 지경에 이르러서는 그 막막함으로 스스로 열이 올라 갑갑하여 견디지 못한다. 그래도 어느 상황 용케도 빠져나가 마침표를 찍곤 하였는데 지금은 아예 글 자체를 쓰고 싶지가 않다.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지금이 바로 그러하다. 글로서 속 풀이도 안 되고 속을 들여다보는 것조차 아니 되겠다 싶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아들에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것이 무엇일까 생각을 해 보면 글 외에 달리 생각 드는 것이 없다. 마음을 전하고 마음을 열고자 힘든 마음 더딘 착상에 겨우 글 하나를 만들었다.
-(대전사는 얄리에게 아빠가)
아들아! 그동안 수고 많았다. 마음고생이 많지.
허망한 마음에 혹시나 하며 이곳을 기웃할 것 같아 이곳을 찾았다.
너랑 비슷한 다른 친구들에게도 다소나마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
아빠 역시도 솔직히 마음이 꽤나 저리구나. 하지만 어찌 하겠니.
세상이 이것으로 다 끝난 것이 아니다.
아니 지금부터가 더 중요하다.
아마도 너를 되는 사람 만들려고 모진 시련을 네게 주는 것 같구나.
차분한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는 것으로 눈물은 마음 깊숙이 묻어두자.
이제 너는 냉기가 가슴깊이 파고드는 차가운 일 년을 다시 맞이할지 모른다.
하지만 네가 곧고 굳은 마음으로 잘만 견뎌 낸다면
그 쓰디쓴 고난이라는 것 1년 별 것은 아니다.
구만리 길 너의 삶의 여정에 잠시 머무는 정거장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세상 속에서 잘 지탱하고 지지목이 되는 긴 시간을 위해 2년 정도는
그리 길거나 고통 받는 것이 아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용기를 잃어서는 안 된다 하는 것이다.
좌절하면 얻어낼 것도 하나 없다.
냉혹한 현실은 늘 노력하는 자의 몫이었고 최선을 다한 자는 아낌이 없는
마음의 양식이 늘 주어져왔다. 비록 성취가 안 된다하여도
과정 중에 놓인 가치를 하나하나 줍게도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설령 다다르지 않는다하여도 디디고 온 성실한 발걸음에 다져진
믿음이 굳기에 또다시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내 경험으론 그 시절에 남겨둔 서정이 지금도 오래 마음속에 살고 있다.
아마도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못났다고 생각도 해보고 하는
자성의 시간이 마음속에 깊이 각인되기 때문에 그러한 것 같다.
너도 너의 일생에서 두 번 다시는 갖지 못하게 될
고독을 감내하고 행복을 그리워하는 낭만의 시간으로 생각해 두렴.
고독한 낭만은 어느 때 너를 찾아올 자만과 오만을 단숨에
부수어 버릴 수도 어리석은 좌절과 옹졸함을 쉽게 용서해 줄
마음의 터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아들아! 아빠는 늘 그랬듯 너를 믿고 너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네가 주눅 들지 않고 자신감을 보일 때 엄마도 덜 괴롭고 침울함에서 벗어날 것이다.
가정이 화평해지도록 서로 노력하자.
자 그럼! 우리 새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자.
우리는 다시 해 낼 수 있다. (연구단지에서 아빠가)
그리고 아들이 잘 가는 인터넷카페에 글을 밀어 넣었다. 원서를 제출한 학교의 지원 생이 모여 정보를 교환하는 그런 카페이다. 집안에서 장난삼아 부르는 아들의 별명을 넣어 아들만이 알아보게 그리 써 두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식탁에서 아들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었다. 아마도 아들이 그 글을 본 모양이다. 아들의 눈가가 부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이제는 됐다 싶어 다시 쳐다보는 아들의 모습이다. 돌아서서 나가는 순간 괜스레 내 눈가에도 맺히는 것이 있다. 분신이 울었으니 그 본신이 어찌 안 울까. 착잡한 심경엔 차라리 눈물이 고맙다. 혈육은 그래서 마음 하나다.그나저나 이 험한 세상 우리 아들은 어찌 될까.(삼수생 낙심천만 2005.01.21. 15:39)
-이별연습(재수생 서울 길)
사람은 누구나 길을 걷는다. 길을 걸어야만 한다. 길이 있으니 걷는 것이고 설사 길이 없는 절벽 끝이라 하여도 숨통 막힐 때까지 걸어야 할 팔자가 또 인간이다. 인간의 운명은 그야말로 다시 되돌아 갈 수 없는 외딴 길과도 같다. 하늘 위 펼쳐진 은하수같이 길의 공간은 태초부터 펼쳐져 흐른다. 가는 세월이다.
어디쯤 얼마만큼 가고 있는지 시간의 개념은 인간이 만들었을 뿐이다. 천 갈래 만 갈래 갈라진 그 길엔 질곡의 사연들이 널 부러져 각자의 운명이 된다. 정유 생 사주팔자에 운명의 첫 운은 천인이다. 나는 그 말을 전적으로 믿지 않는다. 정유 생은 누구나 몸에 아닌 말로 상처를 지니고 산다는 그 계시를 어찌 믿어 둘 것인가?
하지만 그 길을 따라 걷노라니 그 외딴 길엔 꿈길 같은 봄날의 꽃길에 창창 대해 같은 큰 대로도 더러 있더라만 대개는 방화의 늪과도 같은 불길 속을 헤매는 여정이 바람 드세게 많이도 펼쳐져 있어 안개 비 자욱한 몽상의 꿈같은 아련한 길도 걷고 질식 할 것 같이 조여드는 염천아래 몸을 팔아버리고 싶은 심정으로도 걸어야 하고 눈비 나리는 허황한 거리 지나 사막도 지나야 한다.
어느 날 황황한 벌판 위 그림자를 겨우 챙겨 이정표 정하지 않은 고개를 겨우 넘었다 싶어
뒤돌아보니 앞은 막막하고 뒤는 더 이상 보이지가 않아 긴 한 숨을 나도 모르게 내쉴 때 몸은 운대로 상처투성이 인 것 같아 나는 사주팔자 운세를 그대로 믿기도 한다. 나의 두 번째 운에는 천문이 들어있다. 맞는 것도 있다고 믿고 싶어지는 구석이다. 오늘 이불 보따리 싸 메고 아들놈을 싣고 서울로 향했다. 그 놈의 운세에 천역이 필시 들어 있던가.
아들과는 첫 이별이다. 앞으로 잦을 이별을 위한 연습쯤으로 생각해두자고 했으면서도 막상 아들놈 방문을 닫고 길을 나서니 마음이 처연해진다. 아들에게 넌지시 아쉬움을 비쳤다.
“너 아빠보고 싶어 어떻게 할래.”
“엄마가 벌써 가족사진 짐에 껴 넣었어.”
순간 젊은 시절 엄마를 안쓰럽게 했던 어둑한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내 젊을 적 난 울산현대에서 근무를 한 적이 있다. 당시 아버지는 공무원이셨는데 고위공직자 숙정이란 미명아래 80년 7월4일 직장을 잃으셨다. 그 이후 아버지는 낙담이 너무 컸는지 화병이 생기셨고 줄곧 집안에서만 머물렀다.
우울한 대학 4년이 끝날 무렵 난 비행기 탈 생각을 아예 포기하고 취직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광주문제하며 독재정권의 차디찬 시선으로 호락호락한 취직자리는 결코 아니었다. 매년 000명으로 찍혀 나오던 모집광고는 숫제 자취를 감추던 때이다.졸업을 한 그 이듬해 처음으로 모집공고가 나온 것이 현대그룹이었다.
난 특채로 들어간 롯데그룹의 연수원을 몰래 뛰쳐나와 건국대학에서 입사 시험을 보았다. 을씨년스런 겨울 날씨에 수험생보다 더 많은 젊은 처자들이 교문 안에 몰려들어 북새통을 이루었다. 취직을 해야 결혼을 할 수 있는 늙은 처지들인지라 합격에 대한 간절함은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도 생생하게 당시 광화문 사옥에서 보았던 면접을 기억하고 있다. 각 사 전무 급 이상 되는 면접관들이 필기시험 합격자 세배 수를 뽑아 한 번에 네 명 씩 앞줄에 불러 앉혔다. 나에게 질문을 던진 사람은 한때 BUY THE KOREA로 증권계에서 유명했던 지금도 가끔 신문지상에 오르내리는 이익치란 분이었다.
"자네 아버진 무직으로 되어 있는데 그 전엔 무엇을 하셨나?"
"공무원이셨습니다."
"그런데 정년퇴직도 아니고 왜 그만두셨지?"
"작년 공무원 숙정 때 그만두셨습니다."
"그렇다면 부정을 했다는 이야기네."
고개를 반듯이 치켜세웠다.
굳이 대답을 할 필요까지는 없어 보였다.
순간 화병을 앓는 아버지가 부르르 앞에 계신 듯 밀려왔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잘못된 정치상황에 희생당하신 겁니다."
모든 면접관들이 고개를 들어 일시에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그 날 북아현동 굴레방 다리 밑 사는 친구 놈 동네에서 밤새 술을 퍼마시다가 결국 파출소에서 잠을 잤다.
"지가 대기업 전무면 전무지, 말 함부로 해도 되는 거야."
"롯데서 껌이나 팔지 뭐."
그리고 나는 그 전무를 81년 3월 2일 울산에서 다시 만났다. 입사 성적 상 굳이 그곳까지 안가도 될 상황이라는 귀띔을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울산을 자청했다. 부모님과 한 번도 상의를 하지 않고 몰래 결정을 하였다. 당시 집에 계신 아버지와 엄마는 매일같이 부부싸움을 했다. 나는 세상을 등지다시피 포기한 아버지가 야속도 하였지만 그 나이 뾰족한 수 없는 아버지에 대하는 엄마의 불충한 태도가 늘 불만이었다. 그런 엄마는 그 이후부터서 지금까지도 삶의 요령이 대단하여 집안경제를 짊어지고 산다.
당시 집안이 밥을 굶을 정도의 궁핍한 정도까지는 아니었으나 장남으로서 회색빛으로 변해버린 집안에 힘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었던 것인데 솔직히 말해 부모님들의 불화가 너무도 답답하고 성가시기까지 해 도망치고 싶은 심정이 보다 강했고 그 도피처로서의 울산이 내겐 안성맞춤이었던 것이다. 난 한동안 숫제 집을 찾지 않았다.
그곳의 근무환경이란 것이 당시로선 열악하기 그지없어 토요일도 5시에 퇴근을 하니 동대구로 나와 그곳에서 다시 기차를 집어타고 수원에 도착하면 새벽 4시가 되고 통행금지가 막 해제되는 때 번개택시를 타고 집에 당도하는 경로를 밟아야 하는데 그것이 그리 쉽지가 않았고 그렇게 까지 할 포근한 집이라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엄마는 왜 안 오느냐고 전활 수십 차례 했었지만 이 핑계 저 핑계 대가며 나는 가지 않고 주말이면 부산으로 포항으로 혼자 여행을 다녔다.
지금 문득 그 시절의 못났던 내 사고가 불쑥 치밀고 다시 떠오른다. 얼마나 당신 마음이 아프고 속이 저렸을까.그 전엔 늘 혼자만의 생각으로 덮어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는데 아들놈이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성큼 앞서 자기 길을 나서니 그 놈의 속을 엿보고도 싶고 예전에 전혀 갖지 못했던 묵혀두었던 엄마에 대한 불충이 눈물이 된다.내 팔자엔 역마살이 없는데 그 울산의 작은 이별이후 줄 곧 나는 엄마와 떨어져 지금껏 살고 있다. 엄마는 아시려나.그 때 조선소가 바빠 안 온 것이 아닌 것을.
두 시간 남짓 지나니 서울 땅이다. 자주 다니는 서울이지만 오늘은 영 다른 도시를 다니러 온 기분이다. 서울은 늘 샛노란 하늘이다. 그 하늘아랜 목적 뚜렷한 길들만이 이리 포개지고 저리 흩어져 삶의 길을 혼란으로 이해하고 뚫고 덮어둔다.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가 시시각각 시간으로 달리는 정체 모를 길이다.
비밀에 쌓여 풀리지 않는 숨 막히는 길. 알지 못하면 엄두도 못 낼 길의 행방이고 길의 추적이다. 빈틈을 내주어선 손해가 되고 적이 차지하고 말 것 같은 생각을 자연스레 같게 되는 서울의 길이다. 황사를 잔뜩 뒤집어 쓴 어찌 보면 번듯하고 어찌 보면 거추장스럽기만 한 넝마주이가 쓴 모자를 닮은 것도 같고 반들반들한 세단 차만 받아들일 것 같은 여우 털을 뒤집어 쓴 탄력도 지닌 마법에 걸린 서울의 길이다.
이제 아들은 들어설 때부터 모를 길 때문에 주눅이 들고 마는 비밀통로 같은 서울의 길을 자연스레 익숙한 몸짓으로 밟고 다닐 것이다. 길의 비밀을 하나씩 더듬어 챙겨 훗날 그 길의 비밀 통로에 의젓하게 서서 안내해줄 아들이기를 바랄 뿐이다.
아들이 기거 할 곳은 강남 무역전시장 주변이라고 했다. 엄마까지 맏손자 잠 잘 곳이라고 굳이 찾아 나선 3대의 가족 행렬 길.큰 빌딩으로만 연상되는 동네의 뒤편에는 개미 소굴 같은 짤막한 연립가옥이 숨 막히게 웅크려 앉아 있다. 재수를 하는 아이들 수십 명이 꽉 들어찬 밀실은 차라리 성냥 곽에 가까웠다.
아들은 하나의 성냥개비가 되어 잠잘 시간 쏙 들어가 누우면 딱인 그 만큼의 장소를 할애 받았다.지금부턴 부모 면회도 사절이고 휴대폰도 금지고 한 달에 한번만 집에 다녀올 수가 있다고 한다. 순간 엄마의 얼굴이 찌푸려진다. 나 역시도 옹색해지는 마음이다. 마음이 너덜너덜 바람맞은 포장마차 휘장이 되어 흔들린다.집 식구가 얼른 말을 돌린다.
"어머니! 여기가 종로학원 지정 하숙집인데 작년에 애들 성적이 많이 올랐대요."
화장실 옆에 공중전화통이 매달린 것이 천만다행으로 느껴진다.아들은 굳은 표정으로 말이 없다.아마도 들어갈 학비에 재수란 족쇄가 입을 막았을 것이다. 돌아서는 길 엄마는 안타까운 마음을 계속적으로 말한다. 부부는 잠자코 들을 뿐이다.
"애 장래를 위해서 어쩔 수 없겠지만 "
대전 내려오는 내내 엄마가 말머리에 붙여 하던 말이 머리속에서 뱅뱅 맴돈다. 엄마는 늘 엄마이다. 빨리 9개월이 지났으면 좋겠다. 서울에 우뚝 선 아들의 훤한 길을 빨리 보고 싶다. 제대로 안된 이별연습 탓으로 벌써부터 아들 사는 집 화장실 옆 공중전화통이 자꾸 떠오른다. 우리는 제대로 된 길을 걷고 있는 것일까? 엄마와 아들 그리고 손자가 콧노래 부르며 걷는 길이 꿈처럼 아른거리는 까만 겨울밤, 여전히 밤기운은 차다.
-3. 나의 2월도 그러했다.
분명 2월은 낀 달이 아니라 인생 절대 절명의 신중한 달이고 엄숙한 인생의 전환점에 위치한 달이다. 너무도 가혹하고 무서웠던 2월의 달. 동지섣달이 왜 그렇게 캄캄한 나락인지 생각해보는 2월, 나의 2월도 그러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도 2월이었고 직장에서 돌연 직책을 잃고 방황을 했던 때도 바로 그때였다. 감당하지 못할 것이란 두려움이 컸던 2월. 나는 겨울추위보다 더한 혹독한 달이 2월이라고 생각을 한다.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무조건 적으로 다가온다고 말하는 봄. 봄만이 그러한 것이 아니다. 불행 또한 온다 싶으면 기다릴 리 없는데도 기다릴 것 없이 혼연히 불시에 찾아온다. 꽃피는 계절 3월을 코밑에 두고 예견치 않게 닥친 불행은 그러기에 더욱 진저리 날 수밖에는 없다. 불행도 여러 질이 있다. 연륜으로서 겨우 얻는 행복의 꿈처럼 세월 따라 겪는 불행, 이를테면 갱년기 같은 시간의 허술 함이나 일상적 변화 생김 등으로서의 불행은 도래한 처가 어디든 그런대로 겪음을 자임한다지만 우연히 만난 행운들처럼 불시에 들이닥치는 불행은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에 휘말려 비관을 넘어 스스로 비극적인 삶에 빠지기도 한다.
우리는 때론 현실과 부딪히며 머리 터져라 싸우고, 때론 험한 꼴을 당해 악몽 속에서 진저리를 치기도 한다. 이는 엄습할 것 같은 어느 불행을 막겠다는 예비훈련과도 같은 것이다. 하지만 준비 없이 졸지에 찾아 온 불행은 막아설 겨를도 없고 또한 평정을 잃기 십상이다. 이는 대적해봐야 별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아차린 불행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비관을 넘어 스스로 비극적인 삶에 빠지기 쉬우며 세상에서 버림을 받거나, 핍박을 당하면서 정말 소외됐다는 생각에 좀처럼 빠져나오기가 쉽지도 않다. 그렇게 내 불행은 시작됐다.
2012년 2월 10일, 나는 직책을 놓으라는 통보를 받았다. 전혀 예기치 않은 것이었기에 놀랄 수밖에 없는 나는 더불어 근무처 지소 격인 경주 양성자 가속기 건설 현장에 파견을 명받았다. 잘은 모르지만 노조에 누가 투서를 했고 어쩔 수없이 따르는 게 좋겠다는 인사권자의 한마디 말이었다. 조직 사회에서 명에 항거할 방도가 있겠는가. 아프지만 나는 짐을 꾸려 경주로 향했다.
그리고 보름 쯤 지나서였다. 금요일이라 일과를 끝내고 고속열차를 타고 대전 집으로 오는 중이었다. 대전 본원의 현장에서 일하는 현대건설 소속 현장소장이 전화가 왔다. 꼭 좀 만나자는 것이다. 만나서 이야기 하겠다고 하였지만 나는 그의 신중함으로부터 어느 불행이 피할 수없이 다가온다는 것을 알 것 같았다. 그의 말은 아주 간결했다. 내 뒷조사를 감사실에서 벌써 수주일 째 계속하는 중인데 나에게는 절대 발설하지 말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대전 근무처에는 공사가 년에 최소 두세 건은 있기 마련인데 업체들과 어울려 다니며 향응을 제공 받았다는 어느 제보에 혹여 돈까지 챙기지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까지 포함되어 주변을 샅샅이 뒤졌던 모양인데 정작 나는 하나도 모르고 경주에 틀어박힌 형국이었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지은 죄 때문이 아니다. 너무 화가 나고 두려웠다. 나는 그들과 잘 어울렸다. 현장이 여러 곳이니까 저녁에 시간을 내 가끔 이야기를 들으면 그들의 고충도 이해하게 되고 또 우리가 관철시킬 것을 자연스레 수용하도록 유도하는 것도 한결 부드러웠다.
대개의 건설현장이 그렇지만 공사를 하게 되면 돈은 자꾸 늘어난다. 특히 내 근무처 현장은 연구원들의 작은 욕심 때문에 한 번도 정한 금액내 공사가 마무리 된 적이 없는 곳이다. 그렇다고 정부가 돈을 추가로 더 챙겨주지도 않는다. 건설의 특성상 현장과 소통만 잘 이루어져도 원가 절감은 어느 정도 가능하다. 내역서 작성 때부터 일종의 편법 같은 절감 방식 (공사 원가에 오버헤드라는 마진을 줄이는 등등)이나 추가비용에 대한 작은 꾀가 여러 방도로 모색되는 경우가 많다. 현장에서 산 사람들은 감독들보다 난관을 헤쳐나가는 지혜가 의외로 많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 인식은 그들과 저녁 때 어울리면 뭔가가 있다고 보는 편견이 있다. 낮에는 공정회의 같은 공식적 회의 말고 그들을 대하기가 쉽지 않으며 속내를 듣기도 어렵다. 요즘 현장은 돈을 주고받지 않는다. 현장은 카드결제이고 거의 권한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배나무 밑에서는 갓을 고쳐 매지 마라’라는 말처럼 오해를 불러일으키자면 내 행위가 그와 거의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실제 나는 근무처에 짓다 만 중성자 시설 관리동을 건설업체를 열 댓번 쫓아가 시간이 흘렀음에도 에스칼레이션 없이 종전의 가격으로 완결 짓도록 한 경험이 있다. 그런 류의 일을 이상하게 나는 많이 겪었다.
노내조사시험 설비란 공사도 그렇지만 내 근무처에 제2주차장이란 것도 그렇게 해서 얻은 산물이다. 정부가 주차장을 확충하라고 돈을 대줄 리는 만무고 나는 업체(주차장 옆 원자력 사업지원시설 신축 업체)를 설득해 잉여금을 활용해 단번에 그 일을 해치웠었다. 그 바람에 당시 감사라는 사람에게 호되게 당했었다. 그는 내가 업체를 봐주기 위해 일을 일부러 더 준 것으로 몰아붙였다. 나로선 참 어처구니없는 상황이었었다. 돈이 없어 설게도 없이 한 일, 주차장을 굳이 설계까지 할 일이 뭐 있을까. 아마도 나의 흔적을 쫓았지만 업체와의 결탁은 결코 찾아내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그들이 1차로 식사대접을 하면 반드시 생맥주 한 잔은 내가 샀다.
아무튼 순탄치 못한 한 겨울 같은 상황, 내 가슴 속 잔인한 겨울과 다르게 겨우내 잠잠하던 어느 기운은 온 누리에 매무새를 살랑살랑 흔들며 그 기운을 한껏 드리우고 곳곳에 아지랑이는 몽실몽실 피어오르고, 꽃망울마다 막 터뜨릴 채비를 서두르는 2월 끝자락에 서서 春來와는 상관없이 나는 그렇게 추락하고 환멸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일은 그때부터였다. 드디어 꼬투리가 잡힌 것이다. 물론 나 때문에 지금은 없어졌겠지만 내 팀에는 장부라는 게 예전부터 존재했다. 내 역무는 건설도 하지만 시설관리도 하는 좀 광범위한 영역이었다. 시설 용역직 46명, 청소 용역직 까지 하면 거의100명에 육박하는 인원이다.
그들은 한 솥밥을 먹는 것으로 늘 우리를 인식을 하고 잘 따랐지만 우리는 갑으로서 행동하는 게 많았다. 나는 그게 늘 마음에 걸렸다. 내 수필집에 그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실린 것도 다 그러해서다. 실제 그들의 열약한 환경은 말할 수 없는 정도다. 170만원으로 온전히 가족을 꾸리기가 어려운 게 사실 아닌가. 나는 그들 현장에 신문이나 먹거리를 제공해주는 작은 기쁨이 있었다. 물론 내 사비로 해야 맞을 것인데 나는 꼭 그렇게 한 것만은 아니다.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처럼 팀에 할당된 출방비 명목을 십분 활용해 돈 충당을 하곤 했다. 이는 바로 감사실에서 찾는 규정위반으로 큰 징계 깜에 해당 된다.
나는 사실 누군가로부터 장부를 없애 빌미를 주지 말라는 충고를 사전에 받았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직원들에게 오해를 살까 봐 일부러 장부를 공개적으로 한 마당에 새삼스럽게 장부가 없다고 발뺌을 한다는 것은 지은 죄를 회피하는 더 악질 같이만 느꼈다. 나는 2012년 봄 철 내내 경주와 본원을 오가며 심문 아닌 심문을 받았다. 지금도 생각하지만 당시 감사실 사람들은 내 말은 전혀 믿지도 않고 들어주지도 않으면서 검찰청 사람들인 양 격에 맞지 않는 추궁을 지속했다. 내가 용역 시설직 불쌍한 사람들에게 잘 대해준 내면에 뭔가가 있다고 아무래도 생각한 것인지 그들도 불러 엄청 따졌던 모양이다. 이 또한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결국 나는 그 일로 6월에 이르러 파면을 당했다. 징계의 내용은 시간 흐름과 더불어 수차 바뀌었는데 최종의 주된 요지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귀하는 부서장으로서 직원을 격려하고 올바른 업무수행을 지시할 의무가 있음에도 팀장 재임 시 허위출장및 업무와 무관한 출장지시(총 100건)로 연구원 예산을 8년에 걸쳐서 총 목적 외로 사용(약 1,038만원)하였으며, 이중 56건(약600만원)이 징계시효 내의 징계시효에 해당되는 바..”>
그 돈이 8년이란 긴 세월 그러니까 년에 채 백만 원 정도에 해당하는 돈이기는 하지만 나는 나의 잘못에 대해서는 유구무언이다. 가짜 출장을 끊어 그 돈을 비록 전체 시설유지를 위해 썼다지만 유용한 것이고 이는 명백한 징계감이니 더 할 말은 없다. 그런데 죄의 양정에 문제가 있다 싶었다. 나는 그 일로 파면을 당했고 또한 검찰청에 고발까지 당한 것이다. 나는 지금도 검찰청 주변에만 가도 속이 뒤틀린다. 참 사람 못 갈 곳이 바로 거기다 싶은데 아무렇지 않게 드나드는 사람들은 어찌된 인물인가 반문을 하게 된다.
감당하지 못할 것이란 두려움이 컸던 그 무렵. 나는 그렇게 거듭 추락하고 환멸하고 있었다. 하지만 질곡 끝에선 높은 산이 있으며 분명 먼 동이 튼다. 로마인이 믿었다는 정화의 달 2월. 내게 2월이 없다면 어느 결말도 또 어느 지표를 향한 구심점도 도래하지 않았으리라. 흔들리지 않는 인생이 어디 있으랴. 넘어지지 않는 삶은 또 어디 있겠는가. 우리는 다 몹시 아파하면서 이승에서의 생활을 열심히 꾸려가지 않는가. 고진감래(苦盡甘來)를 떠올리면서, 고난을 헤치고 겪으며 지내야 한다는 신조는 어쩌면 내 삶이 억울하다는 심층에서 본능처럼 욕구 적으로 분출한 삶의 실마리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멋진 세상'을 한 번 다시 봐야겠다는 의지를 품고 말이다. 분명 "겨울이 오면 봄도 멀지 않으리." 이 말은 진리다. 나도 이를 믿었다.
2. 봄꽃을 보며 분연히
28년을 다닌 직장인데 몸이 성할 리 없었다. 아무런 위협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가슴은 두근두근 거리고 잠도 못자고 식은땀도 나고 혼자 있을 때 질식할 것 같은 그런 충동은 시도 때도 없이 옥죄어왔다. 정신과를 찾았다. 이야기를 듣던 여의사는 그 증상은 당연한 것이라고 했다. 만약 그 증상이 안 나타난다면 더 큰일이라고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는 공황장애의 초기 증상이었다. 그녀는 찾아가면 무슨 말이든 해보라며 말을 시켰다. 하지만 말이 안 나왔다. 말을 하려면 식은땀부터 줄줄 흘렀다. 그러던 어느 날 나도 모르게 봇물처럼 말이 이어졌다. 옆에 있던 아내가 그 광경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그녀의 치유는 그렇게 내 말을 들어주는 것이었다. 그녀는 분명히 억울한 가혹한 처사라고 했다. 사실 이 말이 그 당시에는 왜 그렇게 크게 울림이 되는 것인지. 나는 나이 주체도 못하고 젊은 여의사 앞에서 펑펑 눈물을 쏟았다. 사건 후에 몇몇 사람들은 다 그렇게 동조를 해주었고 이는 알게 모르게 큰 힘이 되었다. 곽김구 부장님 강경철 실장님 도재범 박사님 이규암박사님 박근배 박사님 화영동 박사님 임성팔 박사님 등등 . 지금도 직장동료이며 인생선배로서 그들은 내 마음의 피앙새이기도 한 분들이다.
분명 건강은 몸의 문제만이 아니다. 의학계 저명한 리처드슨 박사는 “분노, 증오, 슬픔, 두려움은 생명력을 파괴하는 주된 요인이라고 했다. 이 상처를 치유하고 해결하지 않으면 이 상처는 곪게 되고 만다는 그의 말에 나는 전적으로 동감한다. 그런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좋은 방법은 여의사가 그러하였듯 그 당시와 현재 느끼고 있는 감정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녀는 피해자가 자신의 마음을 충분히 표현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도록 하는 조력자 역할을 부단히 했었다.
사실 이 말도 지난 일이라 그렇게 말하는 것이지 당시로서는 살얼음판 위에 선 기분으로 이런 생각을 미처 하지는 못했었다. 그 무렵 나는 줄곧 아버지가 떠올랐었다. 불쌍한 나의 아버지, 당신은 얼마나 아팠을까. 나는 그 생각만 하면 눈물이 지금도 솟구친다. 벌써 38년이 지난 시간, 1979년 12월12일의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전 대통령은 초법적 지위의 국보위란 것을 신설했다. 이 국보위는 ‘사회정화계획’의 일환으로 1980년 7월까지 8667명의 공직자를 ‘숙정(肅正·부정을 엄격히 단속하여 바로잡음)’했다. 이 중 ‘7ㆍ9 숙정조치’에 의해 자리를 뺏긴 2급 이상 고위 공직자는 232명이었다.
아버지는 바로 232명 명단에 들어 있었다. 1980년 7월 2일, 아버지는 당시 동물검역소 소장으로 부산에서 급히 상경하셨다. 당시 남욱 차관(고등학교 동기의 아버지)은 일괄 사표를 내라는 상부지시라 하며 사직서를 모두 내도록 시켰다. 그리고 3일 후 아버지 아름이 숙정자 명단에 들어가 있었다. 무슨 사회정화 차원의 잘못이 있어서가 아니라 슬픔은 화목한 온 가정을 뒤엎었다. 아버지는 수의학 박사학위를 갖은 당시로서는 몇 안 되는 유능한 인재였다. 고위공무원 숙정은 우리 집에게는 그야말로 치명적인 것이었다. 2년간 재취업도 금지한 상황, 앞이 안 보였다. 과외수업을 불법으로 간주하여 아르바이트도 할 수가 없었다. 일시에 모든 것이 사그라져버린 암울한 상황, 당시 우리는 고구마 밭에다가 새집을 지었었는데 이사 올 때의 가족들의 밝은 미소는 단 두 달 만에 울분으로 변하고 말았다. 부정부패자라 하니 억울했지만 말을 할 수도 없는 처지. 엄마는 새 집이 화근이 된 것이라고 호화주택도 아닌 새집을 밤낮없이 나무라고 아버지와의 싸움도 잦았다. 왜 하필 아버지만 당하느냐는 것인데 나는 그런 말 하는 엄마가 무척 미웠다.
아버지는 한동안 두문불출하시다가 어느 날부터 가끔씩 서울을 오르셨다. 해직자 동지들의 규합이라도 하는 것인지 그들을 만나고 오는 날이면 한결 표정이 밝으셨다. 그러던 것도 물거품이 된 것인지 아버지는 안방에서 조차 나오지도 않았다. 한국 사람에게서 대표적으로 나타나는 화병, 우울감, 식욕저하, 불면 등등 아버지는 일종의 화병을 앓았다. 참 안타까운 그 시절이다. 참 아이러니한 게 당시 억울하게 쫓겨난 사람들은 면직무효 확인 소송이나 해고무효 확인 소송 등으로 법정투쟁을 시작했었는데 19년이 지난 쯤 (1999년 )확정판결이 떨어졌다. 그런데 판결이 참 묘하다. ‘사건번호 99두5481’ 판결문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1980년의 공직자 숙정계획의 입안과 실행이 전두환 등이 한 내란행위를 구성하는 폭동의 일환에 해당한다는 점만으로 원고의 사직원 제출행위가 강압에 의하여 의사결정의 자유를 박탈당한 상태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1999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그해 이런 판결이 있었다니. 차라리 모르고 돌아가신 게 백번 나은 결과였다. 나로선 법도 믿을 게 못 된다 싶다. 그런데 이 판결을 보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요즘 유명한 김기춘 비서실장, 그는 당시 국보위 시절 대검찰청 특수1과장으로 검사로서 승승장구하던 때였다. 그런 그가 이번 블랙리스크 관련 하여 말을 듣지 않는 1급 공무원의 사직원 제출을 한 것이 권력 남용이라는 것에 대해 아이러니하게 이 판결 등을 근거로 “1급 공무원의 사직원 제출은 장관 교체기에 장관의 의사에 따라서 얼마든지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라고 주장을 했다는 것이다. 내성적인 아버지는 이를 감내하며 결국 큰 병으로 도져 돌아가시고 말았다. 억울하기로 치면 아버지만 할까. 아버지는 어이없이 그냥 앉아서 당한 시대적 비극이고 참사가 아닌가.
내가 그 무렵 대학교 4학년이었는데 내 아들이 또 똑같이 대학교 4학년으로 앞날을 걱정하던 시기다. 아들이 진학을 안 하겠다고 나선 것도 똑같은 모양새였다. 아버지는 신문에 해직공직자 이야기만 나오면 스크랩을 해서 고이 보존했었다. 아버지의 억울함이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이다. 별무 소득이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아버지는 그렇게 자신의 마음을 스크랩북에 열심히 담았다. 나도 그렇게 항변하다 말지도 모른다 싶었다. 설령 법정에서 내가 이긴다 치더라도 그 지난 세월이 얼마이겠는가. 아버지 경우는 최종 판결이 19년이 지나서 나왔다.
어쩌면 좋더란 말인가. 나날이 저물어가는 우리 집, 마음을 고쳐먹는 수밖에는 없다. 하지만 번번이 가시나무 울타리에 갇힌 절해고도의 심정만큼이나 많은 번민이 뒤엉키고 만다. 무엇보다도 내 안에 함성이 사그라지지 않아 그런 내가 두렵다. 욕되고 떳떳하지 못하여 참혹하였던 시간들. 간뇌도지에 이르는 패망에는 채 가시지 않은 상흔이 여전하다. 모두 잠든 새벽, 원성의 곡절을 어쩌지 못하여 검게 탄 속을 자학삼아 걷고 걸으며 나는 울고 또 울었다. 수십 명을 부수고 나 또한 수십 번 죽었다. 지우고 비우고 그렇게 헛헛함을 사르는 새벽길은 차라리 까만 음영 속 외톨이가 나라서 좋았다.
그런 나는 나와 다를 바 없다는 속절없다 싶은 음영으로부터 이 또한 자연의 이치로서 인과의 한 흐름이며 바탕이고 그리 다가온 여명은 암영의 깊이만큼 선명하다는 사설을 언제부터선가 나도 모르게 기다리며 자연 믿게도 되었다. 어차파 질풍노도의 혹독한 계절은 지났다. 바깥문이 닫히면 안의 문이 절로 열린다는 말처럼 절박한 원성의 절곡과 긴 나락 허망을 비집고 어느 참 독야의 빈 틈새로 여명이 비치고 낮은 문턱 앞에 서있는 듯도 싶다. 다가온 봄볕은 따스하고 향기롭기 그지없다. 산다는 게 무엇이고 어찌 사느냐의 숙제를 여직 풀지 못하는 소인배로서 곡절의 삶, 행간을 거울삼아 지표로 삼고 행복을 일구고자 함이 우선해야 할 것이다.
비로소 내 안의 좁은 문틈으로 찾아든 여명, 이는 희망이기 전에 필시 時不家室한 하늘의 뜻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더 이상은 아버지처럼 묵고하며 가슴을 애타게 태우며 세월을 떠안을 수는 없다. 또 다시 이를 되풀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것이 아버지의 상처를 떠안은 나로서 할 도리가 아닌가. 엄마는 큰 두번의 아픔을 온몸에 맞고 나날이 노쇠해가며 전화통을 놓지 않는다. 분연히 일어서자. 그러면서도 자꾸 떠오르는 초췌했던 아버지 뒷모습이다. 위로의 말 한마디도 못했던 그 시절의 어리석음, 당신은 너무 아팠다. 나도 그럴 것이겠지만.(2012년 5월의 어느 날)
3. 검찰청 가는 길
요즘 전직 대통령을 포함 해 지도층 인사들이 검찰청 현관 저지선에 걸음을 멈추고 서서 사진기자의 카메라 앞에 얼굴을 추켜든 모습을 자주 본다. 하나 같이 준수하고 잘 생긴 얼굴들이다. 나 같이 못 생긴 얼굴은 없다. 당당하게 서서 후레쉬를 받는 얼굴들, 수 억 내지 수백 억 짜리 얼굴들이다. 배임, 횡령, 알선수뢰, 그런 범죄형의 얼굴이 내 눈에는 그저 당당한 지도자의 얼굴로만 보일 뿐이다. 그들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주목받는 것처럼 그들을 맞아들이는 검찰청은 추상같은 곳이며 또한 영화로운 곳이기도 하다. 아무나 그곳을 향할까.
내 집에서 불과 30분 안쪽 거리에 있는 검찰청 건물은 위풍도 당당히 네모반듯한 게 마치 철옹성 같이만 느껴진다. 일부러 검찰청은 당당하고 빈틈이 없다 하는 의미로 그렇게 두터운 시멘트로 탄탄하게 건물을 만드는 것만 같다. 나는 둔산동에 위치한 그 건물을 오가다 보면서 평생 곳을 들어갈 이유는 없다 싶었는데 추상같은 그곳에서 나를 호출할 것이라니 믿기지도 않고 가기 전부터 오금이 저리고 사시나무 떨리듯 떨려온다. 꿈에서도 소스라쳐 놀라 깨면 푸른 죄수복에 어딘가를 무작정 걷는 모습이 자꾸 연출됐다. 나는 어디로 향하는 것일까.
그러고 보면 내 안목(眼目)은 얼마나 틀리는 어리숙한 잣대인가. 평생 갈 리 없다는 나부터서도 그렇고 모든 것은 법정에서 밝혀질 거라는 그들의 당당한 말투로 부터서도 나는 그들의 혐의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의 말처럼 무슨 착오가 발생했지 싶기만 했다. 하지만 그들은 며칠이 지나면 한 결 같이 모두 푸른 복장으로 갈아입고 호송 버스에 올랐다. 여지 없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나도 그럴까 싶어 더욱 긴장하고 초조했었다. 급한 마음에 고발조치를 했다는 다음 날부터 나는 변호사를 찾아 다녔다. 그 분야를 알 리 없는 나는 기껏 찾은 맨 처음 찾은 인물이 근무처의 고문 변호사였다.
그런데 만나기로 한 날 변호사 측에서 아내 상을 당했다며 장기간 자리를 비울 수밖에 없는 처지임을 알려 왔다. 올해는 하는 일마다 꼬이고 만다는 막연한 두려움이 무섭게만 느껴졌다. 그분 아내의 죽음이 내 일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별개의 것인데도 불길함으로 연관 지어 생각한다는 것은 그만큼 나약해진 내 처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잠도 못 이루고 갈증은 심해만 갔다. 해갈이 안 된다면 그로 죽고 말지도 모른다는 어리석은 생각도 들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인터넷에서 광고 한 줄을 발견했다.
나는 그곳조차도 너무 떨려서 내 직장 상사이면서 인생선배인 강경철 실장님이란 분하고 같이 갔었다. 개업을 한 지 얼마 안 된다는 대전 특수 형수부장 출신 변호사 아무개.걱정하지 말라는 말로부터 시작한 그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의 사무실은 문을 열면 그 안에 변호사 방이 별채처럼 또 따로 있었고 그 방 앞에는 부지런히 컴퓨터 자판을 치는 여직원이 차지하고 한쪽에는 내방객을 맞이하는 소파가 놓여 있었는데 그 뒤로 사무장이라는 나이든 노인이 뭔가를 연실 끄적거리고 있었다. 변호사와는 첫 대면뿐, 나는 그 늙은 사무장이 주 차지였다. 연필을 들고 종이를 채우는 것을 보니 그는 아무래도 컴퓨터는 못 다루는 것 같았다. 상황을 소상히 말하라는 그에게 열심히 설명을 했는데 기껏 다 듣고서는 헷갈린다며 따로 적어오라고 했다.
글 쓰는 게 취미인 나로서는 그와의 대화보다는 적어 갖고 가는 게 차라리 더 편했고 그는 내 글 내용을 보고서는 어느 정도 납득을 했는지 아니면 일 꺼리를 줄이려는 속셈인지 글의 전후를 바꾼다든지 몇몇 법률 용어를 껴 넣는 정도로 갈무리를 했다. 그렇게 한 열흘 쯤 지나니까 나도 그 사무실의 종업원이 된 것인 양 어느 새 뒷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내 글을 들여다보다 이력이 나면 검찰청에 들고 갈 서류뭉치를 어쩌다 들여다보곤 했는데 당시에 제일 많은 소송 껀은 세종시의 땅 보상비에 대한 다툼이었다. 대개의 소송은 돈에는 부모 자식 간도 형제도 모두 남남으로 국물도 없다는 귀결로서의 하소연과 억울함이 봇물을 이루었다. 고모부와 멱살잡이를 하는 조카 모습을 그곳에서 봤다. 참 못 올 곳이 바로 이곳이구나 하는 생각이 또 다시 드는 곳을 나는 그렇게 한 달 남짓 출근하다시피 다녔다.
물론 그쪽에서 나오라고 한 것도 아닌데 초조한 나머지 서류를 보태는 척 그냥 나가 앉아 있었다. 한 달 정도 되니 눈에 들어오는 게 많았다. 변호사님은 형사특수 부장 검사 출신답게 교도소 출입 아니면 법원출입이 대부분이었고 삼청교육대 때 군수사관이었다는 무용담을 말하는 사무장은 거의 독립 적으로 민사 껀을 다루고 여 직원은 서류 제출 내지 타이프를 치는 둥 내부 운영을 전담하는 그런 체제였다. 변호사는 첫 대면에서 내 고발 껀에 대해 연구단지가 이 정도 밖에 안 되는 줄 몰랐다고 하며 이것을 꼭 검찰에 고발해야하는지 의문이라고 말을 했었다. 이는 그가 수임한 사건이 워낙 굵직한 것들이라 눈에 안차지만 돈벌이로 어쩔 수없이 한다는 소리로도 들리고 정말 하찮은 사안이라서 그렇게 말하는 것 같기도 한데 아무튼 둘 중 하나 일 텐데 한 달을 지나서 보니 나로선 일생일대를 가르는 큰 사건이지만 내가 보기에도 사건 축에 낄 것은 정녕 아니다 싶었다.
변호사는 내게 물었다. 이것 말고 또 다른 사유가 있는 것은 아닙니까. 뭐 잘못 보인 것이라도. 나는 근무처 감사부서가 압수한 장부를 증거로 갖고 있으면서 그 안에 적힌 내용에 대해서도 추가로 조사를 해야 한다는 식으로 고발을 했다고 말을 했다. 허위출장 말고도 간간이 서너달에 한번 정도 나는 팀의 운영비 쪼로 많게는 1백 만원 적게는 5십 만원 씩 여사무원에게 주었는데 이것이 검은 돈일 수 있다는 게 그들의 추정이었다. 나는 그에 대해 지금도 반문한다. 팀 운영비를 꼬박꼬박 거의 십년 째 정기적으로 상납을 할 업체가 있다는 게 가능하다고 보는 것인지. 나에게는 직책판공비란 게 있다. 나는 아내에게 이 돈은 내 월급이 아니고 직원을 위해 쓰라는 돈이니 손을 대면 안 된다고 일렀고 이는 십 년째 지켜온 행실인데 근무처 감사부서에서는 이를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나는 그때까지도 직책판공비가 개인의 월급처럼 취급되는 돈인 줄을 몰랐었다.
따지자면 직책판공비를 월급으로 순순히 쓰는 연구원 전체의 직책자들이 모두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다. 나는 이를 입증하기위해 은행 본사까지 찾아가 내 통장으로부터 인출해 때때로 건넨 돈의 행방을 빠짐없이 모두 증명해보여야만 했다. 나중에 경찰서로 불려갔는데 그들은 인출금말고도 혹시나 검은 돈이 들어온 흔적이 없는지를 샅샅이 훑는 듯 했다. 그런 경찰관은 듣기 좋으라고 한 소리이겠지만 ‘선생님은 오히려 표창장을 받아야겠는데요.’ 하였다. 아무튼 당시 형사담당 검사 출신답게 변호사는 물증도 없고 증거도 앖는 데 그것은 말도 안 되는 고발내용이라고 코웃음을 쳤었다. 그러면서 ‘감사부서가 너무 나갔네요.’ 하는 말도 빠트리지 않았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검찰청에서는 나를 부르지 않았다. 유명명사들은 속전속결로 일도 처리가 되던데 나만 애가 타지 세상은 나를 쳐다도 안 본다. 아무나 유명세를 타고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게 아니다. 변호사사무실도 나가기가 그러해 집에서 묵으려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어쨌든 퇴직을 했으니 실업수당이라도 받아야겠다 싶었다. 전화기를 들었다. 갑자기 코 맹맹하던 안내 멘트가 조용해졌다. 순간 직감하였다. 아내 역시 뭔가 낌새가 다르다 싶었던 모양이다. 아내가 재빨리 수화기를 바꿔들었다. 아내의 순간 판단은 옮은 것이었다. 전화를 바꾸자 코 맹맹 소리가 다시 들렸다. 금세 ‘어쩌지요.’란 말이 새 나왔다. 괜스레 창피하고 면구하여 나는 창밖을 향하였다. 창에 비추어진 허망한 내 모습. 구질구질한 비는 그러한 나를 세차게 후려치듯 창밖에서 한창 요란했다.
조금 전 까지 만해도 전화를 해보라고 성화였던 아내인데 수화기를 내려놓자 뭐가 미안했는지 ‘대충 안 거잖아.’ 하며 자리를 슬슬 피한다. 놀랄 일이 아니라는 태연한 아내의 숨죽은 말이 오히려 폐부 깊숙이 닿는다. 차마 그 누구도 제대로 말을 할 수 없는 현실. 파면자의 신세. 실직과 파면은 또 다른 형국임을 나는 그때 비로소 제대로 알았다. 파면자에게 실직급여는 주어지지 않는다. 실직은 처량하다 보지만 파면은 순순하게 보지 않는 것이다. 월급쟁이 30년에 종지부를 찍는 사회의 매장을 말한다. 이는 외길로 산 소심하고 소신 없는 사람에게는 그야말로 생의 파멸을 의미하는 중벌이다. 이 나이 취직도 어렵지만 꿈도 못 꿀 일이다. 내게 이러한 시련이 닥치리라고는 정녕 꿈에라도 생각을 했겠는가.
어느 덧 7월이 넘어서고 8월이 다가 왔다. 한창 런던올림픽으로 후끈 달아오른 우리나라, 여느 때라면 밤잠 설치며 설쳐댔을 텐데 세상의 화창함이 야속하고 그저 나는 섭섭했을 뿐이다. 나는 옥상 평상에 누워 진 더위를 차라리 달게 마셨다. 너는 하늘아래 서서 울고 있는가. 세상은 또 다시 뜨거운 계절이 와서 감꽃이 피고 쥐똥나무 흰 꽃이 쏟아져 벌들이 괜스레 서성이는데. 감나무 새 잎 새에 비단 햇빛이 흐르고 길섶의 양달개비, 파란 혼불 꽃은 저마다 무더기로 피어 흐드러지는 데. 나는 하늘 너머 은하수 멍하니 바라보며 울고 있는가. 내가 조금만 잘 했더라면 이렇게 내 자신을 나무라지도 이 세상을 원망하지도 않았을 텐데 말이다. 북극성 너머 아버지 계신 곳이 마냥 그리운 잠 못 이루는 여름 밤, 그렇게 꼬박 뜬 눈으로 밤을 지켜서야 했다. 죽을 때 죽더라도 하는 말이 연상되는 스포트라이트에 선 그들과는 판이하게 당당하지 못한 나의 검찰청 길은 그렇게 고달프고 마냥 떨리기만 했다.
4. 행운의 실마리 지노위 판결
올림픽이 다 끝날 쯤 둔산 경찰서에서 출두하라는 연락이 왔다. 검찰만 생각했던 나로선 아주 뜻밖이었다. 검찰의 지휘를 받고 경찰서가 일선에 나서서 수사를 한다고 했다. 내가 찾아 간 곳은 지능수사팀으로 사기유형을 맡아서 보는 곳이라고 했다. 내 죄목이 허위 출장으로 공금을 유용한 것이니 당연 그곳이 맞을 것이다. 그곳에 가던 날, 내 옆에는 휴대폰을 싼 값에 사주겠다고 인터넷광고에 올려 놓고 등쳐먹은 놈이 옆에서 조사를 받고 있었다. 한마디로 등 쳐 먹은 놈들은 모조리 그곳에 모이는 것이다. 그런데 그 친구는 반말을 찍찍해대며 몇 번의 호통을 얻어맞는 데 반해 나의 대우는 전혀 달랐다. 그에 비하면 극진함 그 자체였다.
잔뜩 긴장한 나로선 어쩌자고 그런가 싶고 오히려 더 겁이 났다. 죄를 져 온 마당 핀잔을 듣고 거칠게 굴어도 별 할말이 없다 싶은 심정이었는데 말이다. 별반 묻는게 없다 싶은 조사는 들어간 지 딱 2시간 만에 싱겁게 끝이 났다. 오히려 여기 오기전 받았던 근무처 감사부서의 추궁이 더한 조르기였다. 10년 치 아내와 내 통장사본을 내고 그 외에 몇몇 보충자료를 덧붙이자고 했다. 그간 나는 수사에 대비해 쓰던 휴대폰도 가급적 피하고 탐문할지도 모른다 싶어 거동도 삼가고 수사에 만전을 기한다고 준비했는데 이렇게 허술하다니 오히려 그간의 진땀 어린 노고가 아깝다 할 정도였다. 하기야 나같은 피래미를 처넣는다고 뭐 이 세상이 환해지겠는가.아무래도 나는 그간 드라마를 너무 본 모양이다. 미리 준비해 둔 것으로 딱 하나 맞춘 것이 있기는 있다. 나를 호출하기 전 돈 관리를 맡아서 했던 근무처 팀에 계약직 여직원을 부르지 않을까 싶었는데 이는 생각 그대로였다.
사전에 나는 곽김구 부장님이란 분에게 부탁을 했었다. 그는 같은 기계쟁이를 한 선임자로서 전직 팀장님이셨던 분으로 당시는 정년퇴직을 하고 위촉 직으로 근무를 하고 계셨던 것인데 나를 위해 선뜻 나서서 여직원을 만나주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겁에 질린 여직원은 나오지를 않았다고 했다. 나 때문에 곤욕을 치룬 여직원이 아니었겠나 싶다. 감사부서에서 꽤 많은 시달림을 당했다고 들었다. 대신 그녀의 아버지가 나왔기에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혹시 부르면 있는 그대로만 말하라고 했다고 했다. 그리고는 서류를 제출하러 경찰서를 한 번 더 갔다. 그때는 채 한 시간도 안 걸렸다. 허위로 쓴 출장비 전액을 환수조치까지 했다면서 그 안에서 징계를 하고 말 것인데 왜 여기까지 보냈는지 모르겠다고 투덜거리며 담당 형사는 아무리 봐도 과도하게 대한 것이라고 말을 했다. 그러면서 선생님의 공적 사항이 있다면 아주 써넣기가 좋은데 그것이 못내 아쉽다고 한마디 더 덧붙였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사람들의 말이다. 나는 그의 말 그대로를 철석같이 맏고 경찰서를 흡족한 마음으로 나섰는데 결과는 그렇지가 않았다. 그곳을 다녀오고 바로 다음 날 변호사 사무실에서 급히 나오라는 전갈을 받았다. 여직원의 상기된 목소리가 내 가슴을 쿵쿵 뛰게 만들었다. 그리고 만난 변호사님, 그는 대뜸 ‘뭐 그놈들 기소의견으로 송치했던데 뭘. ’로 말을 이어갔다. 말인 즉 안 좋은 의견으로 온 것을 그가 기소유예로 풀어냈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의 수고덕분인지 아니면 사안이 워낙 시답지 않아 그냥 묻어버리게 된 것인지는 잘 모른다. 다만 그는 일이 잘 성사되면 받는다는 성공보수를 정하기는 했는데 받지 않았다. 결국 검찰청 가는 길에 선 나로선 천만다행으로 문턱만 잠시 넘었을 뿐이다. 역시 검찰청은 아무나 드나드는 곳이 아닌 모양이다. 민원실이란 곳에서 기소유예란 통보서를 받아쥐고 문턱을 다시 넘을 때 담당자가 한 말이 지금도 생생하게 느껴진다. 5년 안에 똑같은 일로 문제가 생기면 가중 처벌되니 명심하세요.
이는 죄는 있지만 정상을 참작해 봐주는 것이니 앞으로 정신 차려 똑바로 살라는 검사님 말씀을 대신 한 것이나 진배없을 테다. 하지만 기소유예라고 끝이 날 것이 아니다. 여전히 앞이 캄캄한 현실,원래 법상으로는 3백만 원이상 벌금형이 아니고서는 부당한 해고를 할 수 없는 게 법 조문이다. 그런데 내 경우 이미 파면을 시켰기 때문 원상복구가 되려면 또 법에 호소를 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공무원과는 달리 내 경우 근무처가 정부출연기관이라 이때는 민간인으로 취급되어 행정소송이 아니라 민사소송을 거쳐야만 한다. 기관은 책임성의 문제가 있기 때문 대법원까지 가 최종 적인 결정이되어야 어쩔 수없다는 듯 이를 수용하는 것이 태반이다. 갈길이 너무 먼 현실, 나로선 불명예가 어느 정도 씻겨졌다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그 정도로 말 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그런 나에게 서광 [曙光]같은 빛이 깃든 것은 나로선 전혀 생각하지 못한 곳에서였다. 생각해보면 강변호사는 나에게는 구세주 같은 존재라 아니 할 수없다. 그는 8월 초순 내게 밑져야 본전이니 지방노동위원회에도 제소를 해보는 게 어떠냐고 했다. 퇴직하고 3개월이 지나면 제소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했다. 이는 보통 노무사들 아니면 본인이 직접도 하니 그쪽도 마저 알아보라는 거였는데 변호사도 취급을 하기는 한다고 하기에 그에게 간곡히 부탁을 해 일단 그쪽에도 제소를 해 놓은 상태였다. 나는 보직을 놓으면 자동으로 노동조합원이 되도록 10년 전에 해놓았는데 내 스스로도 내가 노조원인줄은 까맣게 몰랐다가 근무처에서 마지막 받은 5월 달 월급에서 노조비가 떼인 것을 보고 안 내 신분이었다. 이는 나에게는 고귀한 혜택이었다. 9월 초던가 저녁 무렵 갑천을 걷는데 나의 처지를 말하는 왠 사내의 전화 한 통을 받았었다.
그는 자신을 소개하기를 민주노총 소속의 지방위에 파견 나간 전교조를 대표한 국어선생 아무개라고 했다. 그는 다짜고짜로 3일 후 날짜가 잡혔는데 증인으로 같이 올 사람이 있는냐고 했다. 전혀 뜻밖이고 아무런 생각이 없던 상황이라 뭐 그런 것이 필요하느냐는 듯 반문하자 그는 내 말에 적이 당황 한 것 같이 보였고 나 역시도 엄청 당황을 했었다. 무슨 증인이 필요하죠. 그는 이어진 이 말에 더욱 놀라고 있었다. 그의 말은 대충 이러했다. 이명박이 들어서서 여실히 좁혀진 노동자 인권이긴 한데 선생님 껀은 심한 점이 있다싶어 구제가 가능하다고 보는데 증인이 뒷받침을 해주면 아주 좋을 것같다는 그런 말이었다. 무슨 증인이 필요한 건가요? 고작 남은 3일, 관례처럼 허위 출장을 썼다는 말을 해줄 사람이 과연 내게 있을까.
지노위 개최 당일 , 나와 변호사 그리고 전임 팀장이셨던 곽김구부장님 또 전전 실장이셨던 강경철 실장님을 모시고 법정에 들어섰다. 변호사는 지노위는 결정까지 3개월이 안걸리기 때문 노동자들에게는 돈도 안들이고 빠른 결정으로 아주 좋은제도라고 했었다. 3명의 판결관을 앞에 두고 그 다음 줄에 지노위 진행사항을 속기하자고 지노위 소속 직원이 앉고 그리고 양 쪽으로 갈라서 누가봐도 양편으로 갈라선 것을 한 눈에 알 것 같은 충남 지방노동위원회 사무실 대전시 서구 청사로 189, 정부대전청사 2동 12층(둔산동)의 홀. 3명의 심판관은 노동자와 경영자 층에서 각 한명을 추천하고 남은 한 분은 중재자 입장으로서 위원회에서 추천을 한다고 했다.
얼마전 까지만 해도 직장동료로서 선후배로서 한 얼굴을 맞대고 수십년을 같이 한 사람들인데 이제는 상황이 전혀 다르다. 마치 시위대와 대치한 청경인 양 양측은 니편 내편으로 진영을 갈라 열변을 토해내야만 하는 착잡한 상황, 그런데 보자면 한 쪽은 청경들에 중대병력에 버스까지 대동한 첩첩산중인 큰 진영인 모양새인데 이쪽 시위대는 고작 4인에 불과한 실로 가소로운 세발의 피같은 처참한 풍경, 서서히 싸움은 시작됐다. 단련된 노무사가 한 껏 호기를 부리며 먼저 침공을 했다. 그 사람은 근무처에서 늘 보던 작자인데 여직 내가 잘못안 게 있었다. 노무사라해서 노동자를 위한 중재자라 생각을 했는데 전혀 딴판이었다. 이야기는 드디어 첨예한 접경에 이르렀다. 분명 그는 나를 대변하는 전문가라 믿어졌다. 이쪽은 별로 증인이 없으신데 오신 분들 잠시 소개를 해보시죠. 내가 나섰다. 이분은 전임 팀장님이시고 또 이분은 전전임 팀장님이십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그가 묻는다.
이런 허위출장이 전례가 있습니까. 곽부장님이 일어서 짧게 답했다. "네" 그러자 그가 또 말을 했다. 옆에 계신 분도 똑 같습니까. 그러자 이번에는 강경철실장님이 똑같이 답을 했다. 그러자 상대방 진영에서 웅성거림이 나오고 감사부장이란 사람이 시키지도 않는데 불쑥 말을했다. 그런 것 없어진 지가 오랩니다. 그러면서 노무사가 말을 이었다. 주말까지 이에 대한 추가자료를 내겠습니다. 그는 당황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의 밥벌이에 흠집이 가해지는 것 같아 보였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그 자리에 모인 것도 다 저마다의 밥벌이로서 모인 것이다. 뭐 원수진 사이도 아니고 저마다의 밥벌이로 이렇게 다투는 것이 아닌가. 거의 회의가 종착지에 닿는 상황, 내 편에선 심판관이 내게 묻는양 스스로 답을 했다. 그 유용한 돈이 결국은 소속원들을 위해 쓴 것이고 그런 것들이 수필에 쓴 것처럼 그대로라는 것이죠. 나는 일어서 답변을 했다. 맞습니다. 열명의 할머니같은 글들에서 알 수 있듯이 열약한 환경에서 일하는 분들의 복지차원에서 썼던 게 사실이고 대부분입니다.
이제는 막바지, 가운데 정좌한 좌장이면서 중간 입장인 듯 보이는 심판관이 내게 말했다. 이곳은 복도에 들어올때부터 시끄럽고 난리법석이기 마련인데 꽤 조용하신데 선생님은 근무처가 한 것에 대해 원망스럽지 않은가요. 최후진술이다 싶으니 섧기도하고 안타깝기도 한 그러한 내 처지가 가련하단 생각이 먼저 들었다. 나는 거의 울먹이며 말을 했다. 30년 가까이 봉직한 내 친정을 상대로 이런 소송을 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습니다. 억울하다기 보다는 창피하고 안타깝습니다. 다만 저는 개인 착복을 한 것은 절대 아니니 이점을 헤아려 주십시요. 그리고 변호사가 제일 마지막으로 기소유에가 된 현 상황과 개인 유용이 아님과 더불어 이미 손상액은 전액 반납했음을 상기시켰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다. 최소 며칠은 걸려야 최종판결이 나올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당일 저녁 민노총소속의 국어선생님이 다시 연락이 왔다.
3명 중 두 사람이 완강하게 돌려보내야 한다고 우기는 중인데 확정적이지는 않지만 아마도 잘 될 것 같다는 그런 말이었다. 눈물이 왈칵 솟았다. 사실 근무처에 허위출장이 많이 없어지기는 했지만 아주 근절이 된 것은 아니다. 그 전해만해도 내가 직접 상대하기를 시험실 수리를 한다고 게정통보를 해온 측이 연말에 쓸 자금을 못만들었다고 부랴부랴 회수를 해갔었다. 당연 출장비 명목등의 목간 전용을 해서 망년회라도 하겠다는 것이다. 아무튼 3일 쯤 지나 지노위 담당자란 사람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서류를 꾸미는 중인데 늦어도 1달이내 복귀를 시키라는 공문이 기관에 갈 것이라고 전했다. 그렇다면 종결이 되는가. 결코 그렇게 끝날 내 근무처가 아니다. 지노위에서 지면 중노위로 거기서도 지면 그들은 행정소송을 또 할 것이다. 강변호사는 내게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했으니 당장 원장님을 찾아가 무릎 꿇고 복귀시켜달라고 애원을 하라고 했다. 기관장이라면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거였는데 파면이 준 고통과 파문의 여정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은 것이었다. 과연 나는 이후 어찌됐을까. 추석을 10일 정도 앞둔 어느 날, 나는 그 날을 도저히 잊을 수없다. 아니 그때의 만남과 그 분을 나는 정녕 잊을 수 없다. 인연과 악연, 그 어느 것으로 생각해야할지 나는 여태 잘 모르겠다. 아무튼 불행이 불시에 찾아오듯 행운도 어느날 갑자기 홀연히 찾아오는 것도 분명 맞는 이치이지 싶다. 행복하다는 말 보다는 서광이 비친다는 말이 보다 달게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흐릿한 빛 속에 스며든 어느 희망때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