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혁명으로부터 파리코뮌까지]
5. 혁명의 중심이 파리로
8월 4일과 27일의 두 선언은 국민의회의 승리인 동시에 프랑스 국민의 위대한 승리로 기록되었다. 국민의회는 인권선언을 가결한 후 곧 헌법 토론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왕과 주변 일파가 중심이 된 반혁명 세력은 국민의회의 승리를 수포로 만들 궁리에 열중하고 있었다. 왕은 8월 4일 국민의회의 결의와 인권선언에 대한 비준을 차일피일 늦추는 한편 플랑드르 용병 연대를 불러들일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용병 연대를 불러들여서 국민의회를 폭력으로 해산시키려는 음모를 진행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이 음모는 곧 드러나게 된다.
헌법 토론이 시작되자 국민의회 안에서 귀족의 이익이 옹호하려는 보수 세력이 대두하여 개혁파와 보수파가 대립하게 되었다. 보수파는 새 헌법의 권력 구조에 왕권과 귀족의 세력을 온존하려고 획책하여, 입법부를 귀족원과 서민원의 양원제로 하여 귀족원으로 하여금 서민원의 개혁을 저지시키려고 하였다. 이 보수파의 주장은 9월 10일 849 대 89(122명 기권)라는 압도적 다수로 분쇄되었다. 그러나 헌법 제정을 분쇄하려는 보수파의 움직임은 오히려 더 커가고 있었다. 의회 밖에서는 물론이고 의회 안에서도 혁명과 반혁명의 대립이 팽팽히 맞서고 있었던 것이다.
파리에는 빵과 일자리가 없었다. 사회적 불안이 커져가는 데다가 혁명의 결과가 어이없이 무산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운 생각이 번져갔다. 이미 7월 14일과 17일을 경험한 파리 구(區)를 코뮌(Commune)이라는 자치체로 개편하고 있었는데, 각 구의 자치 위원회는 플랑드르 용병 연대를 돌려보낼 것을 요구하였다. 파리의 분위기는 다시 술렁거리기 시작하였다.
파리의 분위기가 이렇게 험악했는데도 베르사유 궁전에서는 경솔한 짓을 서슴지 않았다. 10월 1일 오페라 하우스에서 폴랑드르 용병연대의 환영 파티를 연 것이다. 이 파티에서는 지난 7월 17일 파리 시장이 왕에게 달아준 삼색 휘장을 짓밟아버리고 백색 휘장과 흑색 휘장을 바꿔 달았다. 백색은 왕을 상징하고 흑색은 왕비를 상징하였다. 이 휘장 사건은 7월 14일 바스티유 사건 이래의 혁명의 성과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왕실의 의사 표시였다. 오페라 하우스에서 벌어진 용병 연대 환영 파티와 휘장 소식이 곧 파리로 전해졌다.
파리의 코뮌들은 과격파의 선동에 따라 무장을 하고, 베르사유의 국민의회와 왕궁으로 진군할 채비에 착수하였다. 10월 5일 흥분한 파리의 빈민 부녀자들이 시청으로 몰려들었다. 시청을 지키던 국민 방위대가 여인들의 폭동에 동조하였다. 여인들은 빵을 요구하면서 베르사유로 행진하였다. 여인들의 시위행렬이 출발한 지 몇 시간 뒤 국민 방위대의 시위가 뒤따랐다. 방위대 사령관 라파예트는 시위군 행렬의 선두에 서지 않을 수 없었다.
이날 오전 국민의회는 왕이 8월 4일과 27일의 결의에 대한 비준을 지연시키고 있는 데 대하여 “헌법적 권력은 왕권 위에 있다. 그러므로 왕은 헌법에 반대할 권한이 없다”고 결의하였다. 이제 왕은 보통법에 대해서는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으나, 헌법에 관계되는 법률들에 대해서는 무조건 승인해야 했다. 따라서 왕은 봉건제도의 폐기 선언과 인권선언에 대해서는 비준이 아니라 무조건 승인해야 했다. 이렇게 왕의 거부권 제한을 결의한 국민의회는 그 자리에서 “의장은 곧 왕에게 달려가서 왕의 승인을 즉각 요구할 것”을 아울러 결의하였다. 의회는 루소의 사회계약설을 실제로 실천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찰나, 오후에 파리의 여인 시위대가 국민의회에 나타났다. 의회는 파리 시민의 요구를 왕에게 전달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날 밤 10시경 약 2만 명의 국민 방위대가 베르사유에 도착하였다. 국왕은 이들의 무장을 헤제시키려는 의도에서 의회에 8월의 두 선언을 승인한다고 통고하였다. 그러나 이는 혁명의 성과를 확보하게 하는 것은 결국 민중의 봉기밖에 없다는 것을 국민들로 하여금 한 번 더 확인시킬 뿐이었다. 앞으로도 계속 혁명을 추진시키는 중추 세력은 파리의 민중이 될 것이다.
아무튼 그날 밤은 별일 없이 조용히 지나 갔는데, 이튿날 6일 새벽 궁성 밖에 진을 치고 있던 파리 시민 중 한 무리가 왕궁 안으로 침입하여 왕비의 내실까지 들어갔다. 그들과 경비병 사이에 충돌이 일어났다. 왕비는 잠옷 바람으로 왕에게로 피해야 했다. 그녀는 하마터면 살해될 뻔하였다. 경비병 몇 명의 목이 잘려 창 끝에 꽂혔다. 왕은 학살을 중지시키기 위해서는 군중의 요구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군중은 왕에게 왕궁을 파리로 옮길 것을 요구하였다. 오후 1시 대포 소리를 신호로 국민 방위대가 선두에서 행진하고, 그 뒤를 약 6,000명의 여인들이 밀과 밀가루를 실은 수레를 호위하며 따랐다. 여인들의 뒤로 군대, 국왕과 국왕의 가족들이 탄 사륜마차, 약 100명의 국민의회 의원, 군중과 국민 방위대의 순서로 긴 행렬이 뒤따르며 파리로 향하였다. 밤 10시 왕은 튈르리 궁전에 들어갔다. 수일 후 국민의회도 파리로 옮겨 튈르리 궁 북쪽에 위치한 마네지라는 조련원에 자리 잡았다.
파리 민중에 의한 강제 천도의 의미는 바스티유 사건 이상으로 중요하였다. 왕과 의회는 혁명의 인질이 되고 행정부와 입법부는 파리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왕이 이미 승낙한 헌법적 법률들은 이제부터는 왕의 의사 바깥에서 그 힘을 발휘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10월의 승리는 8월의 성과를 확보하여 구제도를 철저히 부수고 혁명의 절차를 밟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