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속적 순간들
이경진
한여름 종잡을 수 없는 온도 속에
봉숭아, 작고 붉은 봉분 되어
그녀의 손톱 위에 얹혀진다,
손톱 위로 물드는 여름의 끝물 되어.
사랑, 여인, 상처, 성숙하는 것들
그리고 반짝이는 순간들.
그 뒤에 남는 건 주름진 손마디,
아내, 엄마, 아줌마라는 말.
한겨울, 꽉 찬 보름달이
속을 점점 비워
하현달로 뉘엿뉘엿 지고 있는데
세상 베개 삼아 저승을 꿈꿀 때
딸의 손톱에 봉숭아물을 들이는 엄마.
저 반짝이는 순간들!
* 창작동기 : 나는 지금 엄마를 준비하는 한때를 보내고 있다. 엄마도 돌아가신 외할머니도 그런 한때를 보냈을 것이다. 우리는 나름대로 우리가 긴 인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우주의 입장에서 보면 한 개인의 삶은 반짝이는 한 순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한 번의 반짝임으로 끝나지 않는다. 후손을 남김으로 순간들은 연속적으로 이어진다. 어느 날의 거친 비, 뜨거운 햇볕을 받고도 묵묵히 서 있는 봉숭아를 보며 엄마의 젊음을 생각했다. 나도 엄마가 보냈던 한때를 보내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 시를 쓰게 됐다.
제1관심사
이경진
안녕하세요. 저는 1974년생이고 올해로 35살입니다. 주민등록번호는 740621-*******이에요. 전화번호는 010-1357-0845이고, 키 168cm, 몸무게는 48kg이고, 옷 사이즈는 44에요. 수도권 4년제를 졸업했고 2개 국어 회화가 가능해요. 자격증은 워드자격증, 포토샵자격증, 컴활자격증, 이렇게 3개가 있어요. 결혼 1번에 이혼 1번 했고, 연봉은 3000 정도에요. 열쇠는 자동차랑 집이랑 2개 가지고 있어요.
이제 궁금한 거 다 해결됐나요? 정말 더는 궁금한 거 없어요? 내가 어떤 인생을 살아왔고 어떤 경험을 겪었었는지 말해주고 싶은데… 네? 괜찮다구요. 알겠습니다.
* 창작동기 : 문득 사람들은 숫자로 자신을 알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년제 대학을 다니며 학번은 몇 번이냐고. 선을 볼 때도 연봉이 얼마냐고 먼저 묻고, 소개팅을 할 때도 키가 얼마냐고 먼저 묻는다. 숫자가 전부인양. 사람들은 숫자에 매달린다. 인간의 삶을 편하게 하기 위해 사용되던 숫자가 이제는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다. 숫자가 사람들의 제1관심사가 되어 있는 것이다. 숫자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을 숫자 때문에 놓치는 건 아닌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 촌평 : 발상이나 문제의식은 좋군요. 일단은 발상이나 문제의식이 중요하지요.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좋은 시가 되지 못합니다. 정밀하고 정갈한 언어가 먼저 필요하기 때문이지요. 퇴고를 거듭하여 좀더 완미한 시를 쓰도록 하세요. 위와 같이 좀 다듬어 보았으니 참고하여 시를 완성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