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6일 새벽 조계사 대웅전에서 열린 하안거 토요철야 참선법회에 참가한 불자들이 참선을 하고 있다. |
“구미호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형태를
바꿔가며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스트레스 상징
탐.진.치 삼독에 빠져
고통 받는 현대인들에게
청량한 마음의 평화
제공하기 위해 실시
‘나는 누구인가’
스스로 묻고 또 물으며
복잡한 생각 정리하고
잿빛 마음 털어내”
꼬리 아홉 개 달린 여우가 예쁜 여인으로 변신해 사람을 홀린다는 전설의 요괴. 바로 구미호다. 한 마디로 사람에게 해악을 주는 존재이자 공포의 대상이다. 요즘 같은 한여름 밤에 전설의 고향에나 등장할 법한 구미호가 조계사에 나타났다. 그런데 다른 곳도 아니고 불자들이 밤낮으로 정진하는 신성한 법당에 꼬리 아홉 달린 여우라니.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보기 위해 지난 15일 조계사로 향했다.
오후9시 하안거 토요철야 참선법회가 시작되자 조계사 대웅전에 모인 50여명의 시선이 일제히 대형스크린을 향했다. 검은 얼굴에 붉은 두 눈을 부릅뜨고 있는 모습이 영락없는 구미호였다. 참선법회와 구미호, 왠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요상한 여우의 이미지를 화면에 띄운 까닭을 도대체 알 수 가 없었다. 하지만 여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꼬리 아홉 구미호의 정체는 바로 여러 가지 모습으로 형태를 변화하며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스트레스 즉 번뇌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조계사 선림원(禪林院) 종무원의 명쾌한 설명에 고개가 저절로 끄덕여 졌다. 그래서 법회 이름도 ‘여름 밤 구미호를 쫓다’이다. 하긴 스트레스의 근원 탐진치(貪嗔痴) 삼독심이야 말로 호환마마 전쟁보다 무서운 고통의 근원적 뿌리가 아니던가. 이때부터 프로그램 이름이 귀에 착착 감기면서 내용이 쏙쏙 들어왔다. 이날 기자를 포함한 50여명의 불자들은 마음 속 구미호를 몰아내고 옛 조사들의 평화로운 마음이 어떤 것인지 공부하기 위해 한자리에 모였다.
이 프로그램은 탐.진.치 삼독심에 빠져 고통 받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청량한 마음의 평화를 제공해 주고자 지난 2011년부터 진행하는 야심찬 체험 프로젝트. 매주 토요일마다 대웅전에서 진행하고 있다. 삼독심이 본래 없었음을 깨닫고 이를 제거하는 것을 덕목으로 철저하게 수행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참선을 꾸준히 하면 꼬리 9개 달린 구미호에게도 시달리지 않고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설명에 끝까지 남아 정진하기로 마음을 굳게 먹었다. 1차부터 11차까지 모든 정진을 마치면 회향 날 여우가 앉아서 참선을 하는 모양의 배지도 기념으로 나누어 준단다.
조계사 전법국장 용주스님과 함께 <잡보장경> 가운데 ‘지혜로운 이의 삶’ 부분을 낭독하며 일정을 시작했다.
“무엇을 들었다고 쉽게 행동하지 말고 그것이 사실인지 깊이 생각해 이치가 명확할 때 과감히 행동하라. 바위처럼 침묵하고 임금처럼 말하며 흰 눈처럼 냉정하고 불처럼 뜨거워져라. 태산 같은 자부심을 갖고 누운 풀처럼 자기를 낮추어라. 터지는 분노를 잘 다스려라.” 경구가 가슴에 와 닿아 또박또박 읽었다.
이어 약 3시간 동안 명상음악을 들으며 전문지도자를 따라 요가를 하고, 걷기 운동에 대해 공부하는 시간을 가졌다. 걷기 운동으로 자세를 교정하고 건강도 지키는 일석이조의 강의였다. 대웅전 앞마당에서 실습의 시간도 했다. 팔을 흔들면서 걷고, 어깨운동은 팔꿈치를 밀어주면서, 무릎의 하중을 줄이는 자세 등을 공부했다. 다들 ‘왜 이런 걸 몰랐지’하는 표정을 지으며 동작을 놓치지 않으려 열심히 따라했다. 문화와 참선이 어우러진 프로그램이 색다른 경험을 선사했다. 한 마디로 종합선물세트를 받은 기분이랄까. 게다가 이렇게 알찬 프로그램이 무료라니.
본격적인 참선은 새벽1시부터 진행됐다. 부끄럽지만 철야정진을 한 게 언제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해 시작 전부터 과연 잘 해낼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중고등학교 때 수련회에서 관세음보살 정진을 한 게 전부였다. 심하게 졸다가 머리를 바닥에 부딪히기라도 하면 두말할 나위 없이 창피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참선체험이 끝나는 시간인 새벽3시반까지 졸지 않았다. 온전히 혼자 있는 시간이 소중하기까지 했다. 눈은 반쯤 감고 혀를 구부려 입천장에 붙였다. 허리는 반듯하게 세우고 시선은 한 곳에 고정시켰다. 때때로 반가부좌한 다리가 저리면 양반다리로 자세를 바꿨다. 저림 증상 때문에 애먹지는 않았다. 참선을 하는 동안 복잡한 생각들이 차곡차곡 정리되어 가는 듯했다. 모두가 잠든 시간에 깨어 있으니 방금 씻고 나온 것처럼 기분이 개운했다. 40분 정도 참선을 하고 10분간 경행하는 방식으로 진행해 무리없이 따라 갈 수 있었다.
끝없는 고요 속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나는 어디서 왔고 또 어디로 갈 것인가’ ‘나는 누구인가’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분노는 어디서 오는가’ 를 스스로 묻고 또 물었다. 기획국장 명조스님은 참선에 앞서 법문을 통해 부처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신심이 있어야 한다고 당부했다. 신심을 기본 바탕으로 인간 몸 받고 태어났을 때 자신이 부처임을 깨닫기 위해 반드시 원을 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처음 접하는 것은 익숙하게 하고 삶에서 오래된 업식은 약하게 해 생활 속에서 꾸준히 참선 수행할 것을 조언했다. 가끔 목적 없이 표류하며 남 탓만 늘어놓은 모습들을 반성했다.
경내를 벗어나 도시의 소음이 모두 사라진 거리로 나왔다. 보통 구미호는 인간 남자를 사랑해 100일간 살생하지 않고 열심히 수행해 인간이 되려 하지만 결국 정체가 탄로나 원을 이루지 못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미완의 존재로 생을 마감하는 장면을 보고 안타까워했던 적이 있다. 자기가 부처인줄 모르고 그저 눈에 보이는 대로 귀에 들리는 대로 느끼는 것만 믿으며 속고 사는 것 또한 미물과 다를 게 뭐가 있겠는가.
올 여름밤 조계사에서 전 일정을 함께 하는 것도 인생에 있어 참으로 뿌듯한 도전일 듯하다. 나 만의 화두를 벗 삼아 심신의 때를 벗겨내고 싶다면 ‘구미호를 쫓다’를 적극 추천한다. 새벽에 끝나도 집에 갈 걱정은 할 필요 없다. 첫차가 운행되는 시간까지 경내에서 잠시 쉴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