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펀 신작시|윤희경
탱고라는 구멍 외
탱고 소리를 만져보라고요?
내가 서 있는 바닥 반대편은 부에노스아이레스, 피아졸라 탱고가 흘러나오는 그 도시 말인데요 그물 스타킹을 신은 붉은 새 한 마리, 조명 아래에서 우아한 리듬을 밟고 있어요 구멍 속으로 숨었다가 빛 속으로 나타나곤 합니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둥근 Hall, 텅 비어서 가득 찬 Hole
구멍 난 공장, 구멍 난 학교, 구멍 난 방송, 구멍 난 거짓말, 구멍 난♀, 구멍 난♂ 구멍을 통해서 보이는 도시의 얼굴들
구멍으로 꽉 찬 우주너머까지
말을 줄여주세요, 말을 가슴에 묻어두세요
피아졸라를 들으며 페터 한트케를 읽을 때 숨구멍이 열려요 점점 커져요 탱고는 나의 숨구멍, 그 숨구멍 안에서 차를 마시며 혼자 놀지요 창문 앞 벌새들도 한나절 춤을 춰요
벌새의 나라에도 구멍이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어떤 구멍끼리는 통 한데요 통해야 사니까요
당신과 나, 유통기한이 다하면 뼈마다 수천 개의 금이 생기지요 삭아서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 구멍들, 구멍이란 말이 거기에서 시작되었다는 히스토리도 있어요
그만 입 좀 다물어요 검은 목구멍에서 방울뱀이 기어 나오고, 박쥐가 쏟아지고, 가시덤불 속을 달리는 말, 귓바퀴 속으로 쳐들어오는 말발굽소리, 길을 다 덮어버리잖아요 그 빛의 세상으로 갈 수가 없잖아요
탱고 소리 찾아가게 해줘요, 춤을 추게 해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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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 이름 붙이기
당신을 청어라고 불러도 되나요?
가시고기라고 불러도 상관없겠죠
세찬 물살을 뚫고 홀로 나아가야 했던,
작고 날렵하고 단단한 물고기로
소중한 사람들과 아름다운 시간을 보내요
근거 없는 불안 따위는 함부로 소환하지 말고요
벼랑 끝이라는 선고
삶이라는 그물을 빠져나가는 게 그리 쉬운 일일까요
당신 머릿속을 갈라보고 싶었어요,
뇌를 꺼내어 바람에 샅샅이 씻어주고 싶었지요
마지막 시간을 함께 보내자는 말조차
굳어가는 당신 몸에 부딪쳐 튕겨져 나갑니다
물살 속으로 흩어지고 싶다고요
내 몸속의 바다에서 헤엄치던 기억들이 지워지고 있나 보죠
뒤척이는 몸에서 해거름녁이 시작됩니다
물새 떼들이 찾아드는 저녁 해변, 소란하겠지요
당신, 한 마리 외롭고 쓸쓸한 청어였어요
오랫동안 혼자서 소리 없는 손뼉을 쳤잖아요
당신, 점점 식어가고 있어요
사랑합니다……, 미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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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희경 2015년 《미네르바》 신인상으로 등단했으며 시집 『대티를 솔티라고 불렀다』와 전자시집 『빨간 일기예보』가 있다. 재외동포문학상, 경북일보문학대전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