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마을...8..130823
의흥장터...1
의흥
장터는 장승백이에서 신작로 따라 소전걸(우시장) 까지며 의흥 내동 전체의
중심부를
관통한 저역이며 이 장터 에서 겪은 일들은 추억이라기보다는 개인의 역사
(개인사)
가 옳은 듯 하고 의흥 읍내 중심부를 관통하는 신작로를 끼고 신작로 좌우로
펼쳐진
의흥 장터..이 장터의 추억과 그리고 그리움은 말로 할 수 없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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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흥
장터는 소년. 청년시절. 까지 살던 곳 이며 6.25.한국전쟁으로 인한 피난이전
에는
안보도랑가 에 살다가 전쟁으로 집이 폭격을 맞아 없어지고 소전걸 에 새집을
짓고
살게 되었고..그 바람에 장터의 이런 저런 진한 애환과 사람사는 또다른 풍습
들을
많이 접하게 되고 장터 특유의 인심도 체험 하게된 추억의 장소 들 이다..
의흥
장터는 장승백이 의흥향교가 있고 안보도랑 과 남천방 사이 수멍이 있는 곳 나무전
으로
시작 되었다..소깝.둥그리. 짐을 파전.신덕.안태동.연계동. 지호동.매성.에서
그
먼길을 지게에 지고 와서..일열로 지게작대기 공궈(받쳐) 두고 널어선 모습 은
언뜻
스치며 보기에는 장관을 이룬 듯하나 그 안 속살을 파보면,,,
가난하고
절박했던 삶의 현장이며 아픈사정 들이 지게짐에 얹혀서 외출을 나오는 곳 이
라는
느낌이 든다..이 갈비. 안차리. 소깝. 둥그리. 한짐지고 수 십리길을 집신신고
조밥으로
잡곡으로 간신히 배를 채운 이 들이 고픈배 뚜거운 입김 동무하여 나무팔러
나온다..이
한짐 나무를 팔아 어른반찬 으로 고등어 한손사고 나서 막걸리 한사발..
이면
그날 수입은 종을 친다..빈속에 들이킨 막걸리의 취기가 지게목발 치며 노랫가락
을
흥얼데며 때를 지어 빈지게로 수십리 씩 걸어간다..하는 행동은 단순하고 간단 하
여도
그 짐을 지기까지의 삶의 과정을 살펴보면 눈물없이는 보지 못할 지경이다.
그레도
이들의 얼굴에는 웃음끼를 잃지 않았으니..이만큼 흥이 넘치는 민족성 인 것..
고무신
살돈이 없어 집신을 삼아신고..구멍난 버선 으로 발등만 덮어도 먹거리 부족하여
조밥.기장밥.감자밥.무우밥..온갖
잡동사니 밥 이라도 먹어면 다행이고 이도 없어 덩개죽.
술찌기미.
시레기죽. 어쩌다 콩죽. 호박범벅..그야말고 짐승의 사료나 될 것 들이 먹거리
였지만..봄지나
여름되면 시커먼 겉보리밥 한 그릇을 기다리며 삶을 이어온 이들..
이
들이 웃음을 잃지 않고 산것은 가난이 절대로 사람을 잡아가지 않는 다는 진리를 몸소
체험해
왔고 또 체험 해 가면서,,수치없는 삶..진실한 참 삶을 살아온 연고가 아닐까?
누무꾼
나무짐. 그져 흘려들을 말들(단어)가 절대로 아니다..이들의 삶이 공자.맹자.장자.
노자.
보다 질이 높고 깊이가 있으며 어떤 선비도 따라 잡지 못 하는 이름이 나무꾼 이다.
나무전
지나면 편수간. 이 있고 현편수(우리 여자동기 현정자의 부친) 가..흙가마 불아궁이
에
발 풍구로 밟아 바람을 일으켜 숯불을 지피고..호미. 낫. 작두. 괭이. 칼. 등 온갖
농기구
를 만들고 굵은 쇠는 큰망치(오햄머) 로 두드리고 장간망치 작은 망치질 하시는
소리
가 음악처럼 들리고 낡은 기구 벼르고 갈던 그 편수간..
이런
편수간이 학교앞 어물전 구석진 곳에도 하나 있어며 이는 김종덕군 의 부친이
경영
했으며 이 편수간은 각종철 로된 농기구와 생활도구를 만들어 판매도 겸해서
했고
다른 편수간에서는 판매는 하지 않았다..그리고 또 한군대 편수간은 신작로
공굴
모서리 김동필 네 방앗간 앞에 손편수라는 분이 계셨다..
매일
편수간 문을 열지 않고 장날만 문을 열었으며 김종덕 군네 편수간 만 평일에
도
문을 열었지..편수간 요금(일종의 임금형태)는 농사철이 끝나면 보리 몇말.나락
몇
말이 전부 였으나 이 것으로 자녀교육 하고 생활을 해..당시 까지는 어려운 문턱
이던
중 고등학교 까지 교육을 시키던 그 높은 교육열 에 감탄 한다..
철없던
유년시절 편수간 주변에 흩어진 쇳동가리 주워모아 놀이 도구로 공기도 하고
많으면
엿도 바꿔 먹었다...내 표현력이 모자라 두서가 없으나 그 편수간..불질소리
퓨~~푹
망치소리 땡땡 장터소란을 넘어 귓가에 쟁쟁 하고 쇠 다루시는 편수님 들의
손길이
신기하여 정신 없이 구경을 하던 그 어린시절 이 있었다..
한여름
흐르는 땀은 폭포수 을 닮아도 그 뜨거운 불가 풍구질 이며 쇠 다루는 일을
하면서
신명을 섞어 육자배기 소리로 흥을 대던 그 풍경은..우리민족 만이 가진
어려움
속에서도 소리로 어려움을 극복할 만큼 신명이 많았다는 뜻이 아닌가 한다.
피어오르던
연기와 쇠를 달구던 흙아궁이..달구어 담그던 김(수증기)..참.
이
모습이 바로 뜨겁게 그리고 끈질기게 직분을 다하며 살아온 정직한 민족의 혼이
담긴
모습이 아니든가..지금사 여러 공장에서 기계로 전기로 동력삼아 여러 도구를
만들어
와서 편수간이 사라지고 일부 지방에서는 기계화 된 도구들로 편수간을 하고
있지만
그 시절은 처음부터 끝 까지 수(手)작업이 였다..
흰
바지저고리 이마에는 흰명배 수건 너나 없이 모조리 집신 에 미투리에..먹거리 발
가리우고
쪼그리고 앉아서 센 숫돌에 갈고 보드러운 숫돌 에 갈아 날을 세우고 엄지로
날을
가늠하는 군상이 득실 데던 풍경은 아련한 시절 민속화 인양 머리에 밖혀 잊어
지지
않고 있다..삶을 노래한다고 하지만 여기는 삶이 바로 노래가 되는 그런 곳 이다.
그
쉼 없는노동 이 이어지던 편수간이지만 해 질무렵 이면 파장 이라 모두들 갈곳으로
가고
일부는 주막거리로 가나..편수하시던 그 어른들은 겨우 허리 펴고 만만한 막걸리
한
사발 두부한모 로 요기를 때우고..곰방대 에 불붙혀 물고 애햄..헛기침 하시던 어른
들..한숨도
헛기침 으로 웃음도 헛 기침으로 대신 하신 그 어른신들..
나무전
나무를 팔려면 세금으로 소깝 몇가지..나무 세금을 내야하고 그 세금은 면사무소
에서
걷어들일 인물을 선발을 하고 이를 도맞다 싶이 한 x씨 네들..여름 가을 추수 이후
마을
을돌며 일년 간 작업하신 뎃가인 수곡 구루마..등짐.가마니.들은 이제는 다시
못보는
지난 삶의 한 장이며 건방지게 역사라고 해 둘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