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소개
대체로 만족스러운 요즘에도 사진을 보면 다시 그리워진다.
조지아, 그곳에서의 산골 생활은
내가 가질 수 있는 가장 신비롭고 몽환적인 경험이었다.
대치동 키즈, 카이스트 산업디자인학과 수석 졸업 등. 모두가 부러워하는 길을 뒤로한 채 여행 작가의 길을 걷고 있는 그가, 첫 여행 에세이인 『바나나 그 다음,』 이후 3년 만에 두 번째 책으로 돌아왔다. 낮은 구름과 높은 구름 사이에 숨어 있는 조지아의 어느 산골. 조지아어와 러시아어로 말하는 사람들이 살고 온순한 동물들이 가득한 작고 아름다운 곳에서 펼쳐지는 그의 이야기.
여행 인간의 삶을 살던 그는 스페인에서 카메라를 잃어버린 후 깨닫게 된다. 언제부터인가 여행이 사진을 찍고 기록하는 반복이 되어 버렸음을. 그리고 호기심과 감동이 고갈되었단 사실을. 그는 ‘여행이 내게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면, 계속 여행을 고집할 필요가 없다.’라는 생각으로 여행을 중단하고 조지아의 작은 마을이 절벽 옆 외딴집에서 은둔 생활을 시작한다.
이 책은 그때의 저자의 시간을 다듬어 한데 모은 것이다. ‘다만 조용한 외톨이로 지낸 터라, 이렇다 할 큰 사건도, 기승전결이 완벽한 감동 일화도 없다.’라고 밝히지만, 그의 시간을 통해 독자들은 깨닫게 된다. 극도로 단순한 삶이 되려 평범한 풍경에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음을, 지난 경험이 어떻게든 현재의 삶을 더 나은 삶으로 이끌어 준다는 사실을 말이다.
🏫 저자 소개
박성호
1992년 서울 출생. 수필가가 된 여행가. 개포동에서 태어나 대한민국 사교육 1번지 대치동에서 정해진 코스를 밟으며 세계 창의력 올림피아드 한국 대표 출전, 카이스트 산업디자인학과 수석 졸업 등 남들이 부러워하는 스펙을 가진 ‘엄친아’로 자랐지만 원하던 목표를 이룬 후에도 ‘가고 있는 길’에 대한 의문과 공허함이 그를 괴롭혔다.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비행기 표 하나만 들고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났고, 맨몸으로 부딪힌 호주의 바나나 농장에서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인생 최고의 행복을 느꼈다.
바나나 농장에서 1,000만 원을 모아 1년간 전 세계 6대륙 90여 개 도시를 여행하면서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꿈을 갖게 되었다. 하염없이 세상을 떠돌고 떠돌다 보니 어느새 80여 개 나라를 밟고 한국에 돌아왔다. 부모님은 이런 역마살 낀 아들의 미래를 걱정하지만, 정작 본인은 유전의 영향이라 생각한다. 아버지는 오토바이 타고 슬렁슬렁 새벽 공기 쐬기를 좋아하고, 걷는 것을 좋아하는 어머니는 언젠가 캠핑카를 타고 전국 일주하는 꿈을 꾸므로. 그래도 글을 쓰며 어찌어찌 제 갈 길을 찾아가고 있으니 다행이라 생각한다.
📜 목차
Prologue 은둔형 여행 인간
#01 시간을 멈추러 가는 야간열차
#02 절벽 옆의 주방 없는 집
#03 공양 냄비와 바닐라 아이스크림
#04 도시 탈출
#05 육 리터 와인
#06 낭떠러지 줄넘기
#07 동키 킥 레프트
#08 노르웨이 정어리와 창밖의 우유
#09 아날로그 인간
#10 강아지 사교 파티
#11 출근하지 않는 삶
#12 구름에 잠긴 마을
#13 선글라스 알의 협박
#14 나를 떠나는 여행
#15 아침 면도 의식
#16 새끼 거미 마이크
#17 어설픈 미국 사람
#18 거대함의 위안
#19 통조림 실험실
#20 네개의 싱글 침대
#21 청접장 출사표
#22 하산
#23 출항, 한 템포 느린 이별
Epilogue 사하라 모래
📖 책 속으로
사진을 보면 다시 그리워진다. 대체로 만족스러운 요즘에도, 가끔은 코카서스 산속 깊은 곳으로 돌아가고 싶을 때가 있다. 떠올려 보면 단칸방에서의 지독히 외롭고 심심했던 기억이 대부분인데도 그렇다.
도망치고 싶은 기분과는 다르다. 나는 내가 스스로 만든 고요한 세계를 그리워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생기 있고 떠들썩한 현실과는 다른, 시간조차 멈추어 쉬어가는 나만의 평온한 세계. 나는 종종 그런 한적함에 뛰어들어 자유로이 수영하고 싶고, 이기적이게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런 나를 기다려줬으면 좋겠다. 어쩌면 나를 여행 인간으로 만든 유전 정보 구석에는, 작게 ‘은둔형’?이라는 마크가 붙어 있을지도.
--- p.6~7
야간열차에서 내린 나는 버스를 타고 산속 깊은 ‘스테판츠민다’ 마을에 도착했다. 하늘에서 비가 추적추적 내렸던 터라, 마을의 첫인상은 적잖이 스산했다.
그때는 아직 마을의 모든 게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물론 낯선 세계에 홀로 떨어져 당장 보금자리를 구해야 한다면 뭔들 안 어색하겠느냐마는, 일단 제일 기본적인 마을 이름부터 어색했다. ‘스테판츠-민다’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이름이, 실은 ‘스테판-츠민다’라는 것을 표지판을 보고 알았기 때문이다. 민다든 츠민다든 무슨 상관인데 하겠지만, 누군가 당신 이름을 ‘김철-수’ 하고 부른다면 상당히 기분이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여하튼 나는 그 이상한 마을에서 주방이 없는 집을 찾아내야 했기에, 이곳저곳으로 바쁘게 뛰어다녔다. 흰 토끼는 없었지만,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기분이었다.
--- p.20~21
한참을 달리다 보면 설산 정상을 덮고 있는 만년설의 색이 변하기 시작한다. 나는 그것을 신호로 삼아 다시 왔던 길로 되돌아간다. 만년설은 채도가 낮은 보랏빛에서 점차 황금빛으로 변한다. 빛나는 부근 말고는 여전히 어둠에 잠겨 있기 때문에, 마치 금박지에 싸인 키세스 초콜릿이 하늘에 둥둥 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 황홀한 빛이 가장 찬란하게 번쩍이는 순간, 설산 뒤에서 천천히 해가 떠오른다. 뛰는 것을 멈추고 가만히 그 장면을 바라본다. 그때마다 나는, 오직 혼자 그날의 생명을 부여받았다는 느낌을 받는다. 내가 가장 살아 있음을 느끼는 순간이다.
--- p.39~4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