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회를 마치고
글/송악
늠름한 산을 보라
유장한 물을 보라
하늘은 높고
산천은 푸르러
덕유산 정기 뻗어 내린 곳
예부터 아주 오랜 예부터
대대손손 살아온
앞으로도 오래도록 길이길이
대대손손 살아 갈
으뜸승지 유토피아
바로 이곳이 갈천 동천
자랑스러운 북상
우리들의 고향이로세
같은 교문을 드나들었던
형이여
아우여
누이여
자매여
같은 창을 통해 배웠던
선배여
후배여
벗이여
동문이여
같은 해를 바라보고
같은 달을 노래하고
같은 도랑에 발 담그고
같은 숲을 딍굴었으니
어찌 닮지 않으리오
초록은 동색이요
가제는 게편이라
모두가 닮은 꼴
맑고 선한 얼굴이로세
오늘은 동문회날
길한 기운 가득한 날
병신년 유월 초나흘
모교 교정 가득가득
우정이 꽃피는 날
오늘은 동문의 날
북상의 날 북상인의 날
(졸시)
제 31회 북상초등학교 총동문회!
세월호사건 메르스사태 등등 큰일만 닥치면 터지던 악재도 금년은 무사히 잘 넘기고 뜻깊고 성대한 잔치를 벌였습니다.
주최기수 38회님들의 노고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북상초등학교를 개교한 1928년 7월 1일은 일제강점기였습니다.
조선 총독부의 조선식민통치정책의 일환으로 3개면에 하나의 보통학교 설립 정책에 따라 개교한 위천초등학교 보다 8년이 늦었는데 이는, 1면 1교제라는 일제의 제2기 교육정책에 따른 것으로 정식 명칭은 북상공립보통학교이며 4년제였습니다.
이후 해방을 맞을 때 까지 황국신민화교육이 행해졌습니다.
학교가 위치한 자리는 산골짜기 북상에서는 가장 넒은 들의 한 복판이요 오른쪽에 갈계숲을 끼고 갈천서당의 앞을 차지한 최고의 터였습니다.
당시 공사 책임자였던 일본인 무시기마까네상이 꿈에 나타난 지킴이의 경고를 무시하고 공사를 강행하는 바람에 미처 이사를 하지 못한 지킴이 이무기가 다치게 되었습니다.
무지막지한 그 자는 이무기가 살았던 그 자리에 일본의 상징인 금송을 심어버렸습니다.
그 때 부터 소풍날이나 운동회나 중요한 행사가 있을라치면 한 맺힌 이무기의 눈물이 비가 되어 내린답니다.
우리 기수인 35회는 4 학년 때부터 공동으로 모내기 보리 베기 나락 베기 등을 하여 경주를 목표로 수학여행 자금을 벌어 놓았었는데 출발 며칠 전 어느 학교의 수학여행버스 전복사고로 수학여행금지령이 내렸던 쓰린 기억도 있습니다.
눈치를 봐가며 1박2일로 간신히 해인사만 다녀오고 말았었지요.
지난 추억은 그리움과 함께 아름답게 반추되는 법입니다.
콜타르 칠한 널빤지 학교 건물도 그립고 신발장에 둔 새 고무신 잃어버릴까 봐 선생님 말씀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고 종일 불안에 떨던 그 시절이 아련합니다.
1년에 한 번이나마 동문회가 있어 모교를 찾고 옛 친구들을 만날 수 있어 행복합니다.
환갑이 넘은 나이 어느 듯 동문회에서도 윗참 기수가 되어버렸습니다.
윗 기수 노릇이 더 어렵다니 말과 행동이 더욱 조심스럽고 신중을 기합니다.
38회 주최기수님들 수고 많으셨습니다.
39회 차기 주최기수님들 내년이 기대됩니다.
동문들이시여!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건강하게 다시 만납시다.
첫댓글 우아ㅡㅡ 짝짝짝. 너무. 멋진시요 멋진글입니다.
내년에는. 꼭 선배님 얼굴볼수있기를 소망합니다
ㅎㅎㅎㅎㅎ 꼭 지기님 알현토록 명심하겠습니다.
따봉! 이어요.
감성이 풍부한 선배님 글은 참 좋아요.
혹여 글들을 묶어서 출판하심이 어떠실런지요.
요새는 자기글들을 모아서 책으로 많이 내잖여요. 흔적을 남기시면 참 좋겠어요.
내년 주최가 벌써 39회여요?
오마나~~
내후년이면 40회 차례네요.
바쁜일이 있었나요?
울 친구 병선이도 불참했던데.........
ㅋㅋㅋ 아직은.....꼭지수도 부족합니다.
멋진 글 에 학교의 역사 까지-
느낌이 풍부하신 송악 선배님의 글이 북상 하늘에
뭉게구름 배경 삼아 마치 그려 지는 듯 -합니다. 감사 드립니다.
윤덕봉 처럼 자리 잡은 영원한 고향 지킴이 온달님께 무한히 감사를 드립니다.
역사의 한 면을 알게됐
습니다 감사합니다
고맙 습니다
살아 있는 학교 살아 있는 역사!
정말 공감이 팍팍 가는 글입니다. 찾아뵙고 인사드릴려고 했는데 여의치가 못했습니다.
또한 교목으로 금송은 적합하지 않음을 제가 여기에 글도 올리고 학교에 건의도 했는데,
아무런 답이 없었습니다.
錦松에 얽힌 아픈 역사가 아직도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어 가슴아파하는 일인입니다.
일본 천왕의 상징인 이 나무를 가장 좋아했던 인물이 박정희전대통령이었으며 청와대 뜰에 묘목원을 두고 키워서 안동의 도산서원, 아산의 충무공 현충사, 금산의 칠백의총 사당, 홍성의 만해 한용운 생가 등등에 기념식수를 했던 것을 문화제제자리찿기운동본부의 혜문스님이 바로 잡으려 했으나 일부 보수를 표방하는 세력들의 반대로 순탄하게 진행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제가 설립한 초등학교의 교정에는 비싼 錦松보다는 사쿠라나무를 많이 심었습니다.
해방 후 뽑히거나 사라져버린 것도 많겠지만 지금도 상징교목으로 까지 보존되어 있는 학교도 전국에 꽤 많은가 봅니다.
나무야 무슨 죄가 있으리오만은 알 것은 알고 짚어야 할 것은 짚어야 합니다.
어저께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밝힌 바에 의하면 이토히로부미의초석 글등 일제만행의 상징들이 여러점이나 아직도 서울 장안에 버젓이 남아 있다는군요.
선배님 멋진글 잘 읽고갑니다
늘 감사드립니다~^^
고생많으셨습니다.
미인 미남 군단 막강 38회! 역시 대단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