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직도 배우고 가르치는 박희열 영양 번개팅(번개 meeting)에 참가하면서 영양의 두들마을(우리나라 최초의 한글로 된 요리서 음식디미방의 저자 생가와 이문열 문학관이 있는 곳)과 주실마을(조지훈 문학관)을 답사하는 과정에서 나의 급우 박희열 교장을 49년만에 만나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그가 두들 마을과 주실 마을 안내하면서 같은 승용차를 타고 이동하는 과정에서 졸업 후의 그의 생활과 근황을 알게 되었다. 그가 살아온 인생 역정(歷程)이 너무나 드라마틱하여 여기에 소개한다. 박희열 교장은 영양군 입암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배우고 싶어도 배우지 못하여 13살에 안동으로 오입(무단가출)왔다. 그는 안동태화동에 소재하고 있는 서악사에서 잔심부름과 청소와 스님들의 공양 준비를 하면서 절에서 의식주 생활을 하게되었다. 스님이 똑똑한 어린 소년 박희열의 사람 됨됨과 가능성을 알아보고 서악사 바로 앞에 있는 경덕중학교에 입학시켜 중학과정의 학업을 이수하게 하였다. 열심히 공부하여 성적도 우수하하여 사범학교 입학시험에 응시했다. 경덕 중학교에서 여러 명의 친구들이 사범학교 입시에 응시했으나 박희열 학생 혼자만 합격의 영광을 안았다. 그러나 그의 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중학교 시절부터 숙식은 서악사에서 해결이 되었으나, 납입금과 생활비가 그를 힘들게 하여 그때부터 열차 안에서 행상이 시작되었다 사범학교에 입학한 후의 생활은 재정 곤란의 압박이 그를 더욱 괴롭혔다. 늘어나는 등록금이며 생활비, 피복비 등 모든 것을 혼자서 해결해야 하는 본격적인 고학생의 길이 시작되었다. 영양 고향 부모님은 여러 남매를 부양해야 할 형편에 끼니조차도 건너뛸 정도로 빈한 하였다고한다. 한 마디로 희열을 위하여 십원 한 장도 대어 줄 형편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중간에서 학업을 포기 할 수도 없고 해서 본인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 밤마다 안동역에서 밤 10시 30분 서울 청량리 행 기차를 타고 가면서 행상이 시작되고, 제천역에서 내려 다시 부산행 열차를 갈아타고 내려오면서 행상이 다음날 4시 30분에 마무리되었다. 잠은 주로 열차에서 해결하고, 안동역에서 서악사 까지는 너무 멀어서 갈수 없어서 곧바로 학교로 발길을 옮겨 그 때 자투리 시간을 활용하여 공부했다고 한다. 고달픈 학교생활을 하면서, 학업과 생활의 갈등에서 그를 얼마나 번뇌의 골짜기를 헤매게 하였을까? 기차가 자기 집이고 기차 안이 공부하고 잠을 자는 방이었다고 하니 눈물이 절로 난다. 지금 세대와 비교해보면 그 당시의 희열이 생활은 성숙한 어른이나 감내할 수 있는 생활이 아닌가? 13살 나이에 온갖 고생을 하면서 학업을 계속해온 것이 너무나 대견하고 자랑스럽다. 오늘날 학생들에게 들려 줄만한 인성교육 이야기 자료가 아닌가! 중학교와 사범학교 6년 동안을 고학으로 졸업했으니 그의 파란만장한 학창 생활은 누구에게도 귀감이 되는 것이다.그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너무나 딱하고 안쓰럽다. 옛날 말에 “가난이 호랑이 보다 더 무섭다”는 말과 같이 가난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새삼스럽게 느껴진다. 그러나 그는 가난을 꿋꿋이 이겨내고 물리쳤다. 서악사의 생활은 은연중에 자기의 힘든 생활을 불심으로 달랬다고 하며, 지금도 부처의 가르침인 자비정신을 제자 사랑과 농민 사랑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오늘 희열의 이야기를 듣고 나는 희열과 같은 <다>반이기 때문에 희열의 재미나는 교실생활이 떠오른다. 학교생활에서 조금도 어려운 티도 내지 않고 항상 명랑 소년이었다. 쉬는 시간이면 책상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염불도 외우고, 목청을 돋우어 “새우젓 사려“. ”구젓 사려“. ”창란젓, 명란젓 사려” 하면서 구슬프게 외치는 소리의 여운이 지금도 귀에 와 닫는 것 같다. 그는 위뜨와 유모어가 넘쳐, 수업시간 중 10분 노는 시간이면 그의 주변에는 친구들이 많이 모여들었으며, 우리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였고 한 시간의 수업의 스트레스를 확 풀어주는 청량제 역할을 톡톡히 하여 주었던 것이다. 그는 어려움 속에서 꿈을 가진 소년 이었다. 나는 사범학교 공부도 힘이 들어 어려움을 많이 겪었는데 희열이는 사범학교 교육을 다 소화하면서 보통고시 시험 준비 공부를 하고 있었다. 육법전서니 헌법책이니 행정법이니 하는 책이름을 나는 처음 들어보았고 두틈한 책도 처음 보았다. 나에게는 희열의 법과 관계있는 책을 보면서 문화적 충격으로 받아들여졌고, 희열을 우러러 보게 되었다, 불행하게도 보통고시는 합격하지 못했고 보통고시제도가 없어져서, 그는 꿈을 이루기 위하여 교단 생활 10년동안을 고등고시 시험 공부를 하여 사법고시1차 시험에 합격하고 2차 시험에 0.8점이 모자라 낙방했다고 한다. 대학교육을 받지 않고 법과 관계없는 사범교육을 받은 자가 사법고시에 응시한다니 총도 없이 호랑이 잡으러 호랑이 굴에 간 포수와 같은 느낌이 든다. 비록 문턱에서 고배를 마셨지만 희열이가 더욱 자랑스럽다. 그는 꿈을 저버릴 수가 없었다. 지금껏 공부한 학습능력을 발휘하여 중등학교 지구과학 교사 자격시험준비 3달 만에 당당히 <지구과학>교사자격증을 땄다. 정말 놀라운 사건이다. 중등교사 자격시험을 3달간 준비해서 자격증을 획득하다니 경이로울 따름이다. 그 당시하는 말로는 대한민국에서 고등고시 다음으로 어려운 국가고시가 중등교사 자격시험이란 말이 있었다. 어떤 사람은 몇 년 준비해도 낙방해서, 결국 포기하고 자격시험 준비를 접은 친구를 본적이 있었다. 비록 목표한 꿈은 이루지 못하였지만 끝까지 그의 도전정신과 진보정신 그리고 불굴의 의지를 높이 평가한다. 그는 초등학교 재직 12년 4개월이지만 잊을 수 없는 곳은 봉화군 춘양면 서벽초등학교 근무시절 이라고 한다. 57명의 아동들을 5학년, 6학년, 2년 동안 담임하면서 졸업생 중에 가정 형편이 어려워 중학교 진학한아이가 57명중 7명이었다고 한다. 그는 이 모습을 보고 그들에게 희망의 빛을 비치게 하였다. 그 자신도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배움에 굶주려본 적이 있기 때문에 비진학 졸업생 50명을 구제할 생각을 여러 방면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고등학교 입학자격 검정고시 야간교실을 운영하였다. 희열이 혼자서 모든 과목을 다 가르치는 전지전능한 만능 교사인 중학교 선생님으로 변한 것이다. 실력도 있었거니와 열성과 체력도 겸비하고 있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모두 합격의 영광을 얻었다. 너무 좋아서 학생들도 선생인 희열이도 울었다고한다. “하면 된 다 ”는 믿음 하나만으로 낮에는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정식 근무하고, 밤에는 고등학교 입학자격 시험반 중학교 선생님으로 봉사 근무한 것이다. 참으로 놀랍다. 어떻게 그렇게 초능력이 나오는지! 우리나라 근대문학자인 심훈의 “상록수” 가 떠오른다. 비진학생 50명은 그의 야간교실 지도가 밑거름이 되어, 그들은 훌륭한 사회인으로 성장하여 대한민국의 동량(棟梁)이 되었다. 현역국회의원, 현역 장성(將星), 정부 행정기관의 고위층, 남자CEO(사장) 20명, 여성CEO(사장) 3명 그 외 각지에서 사회에서 훌륭한 직업인으로 활동하고 있다니 교육의 힘이 얼마나 큰지를 알려주는 나침반이다. 희열의 투철한 교육관과 희생정신이 없었다면 비진학 학생 중에서 이러한 훌륭한 인재가 탄생했을까? 희열 자신은 이 아이들에게는 선생님인 동시에 아버지와 같은 존재인 것이다. 그의 말을 들어보면 스승의 날을 전후해서 그의 전화통은 서벽 초등학교 16회 졸업생들의 전화로 불이 난다고 한다. 그의 참 스승의 모습을 여기서도 볼 수 있고, 닥아 오는 6월 6일(09. 6. 6)에 그의 7순 잔치를 그의 고향 영양에서 서벽초등 16회 졸업생들이 열어준다고 하니 너무나 감격스럽다. 희열은 그들에게 진짜 아버지와 같기 때문에 7순 잔치를 열어주는 것이 아닌가! 초등학교를 그만두고 중등학교 과학교사로 영양중고등하교 12년, 입암중학교 12년 6개월, 청송 부동중, 구천중을 거치면서 독학으로 이룬 중등교사 지구과학교사 자격증을 바탕으로 재직하는 학교마다 발명반 교실을 운영하였다. 도대회이상 전국대회 과학전, 발명품전에 150회입상의 성과를 올려, 그의 경북 중등교육계의 인지도(認知度)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울릉 북중에서 2년 동안 근무할 때는 울릉 북면에서 생활용수와 수력발전 용으로 쓰이고 있는 추산의 용출수(溶出水 1시간 용출량 80t)의 용출원인을 지금껏 아무도 규명 못한 것을 찾아내어 전국과학전람회에서 우수상을, 그 다음해에는 울릉도 지하수에 관한 연구로 같은 대회 대상을 수상하는 성과를 올렸고, 본인도 자료전, 과학전, 발명품전에 입상한 논문이 30여 편에 이른다고 한다. 마지막 재직학교인 입암중학교에서는 퇴임 1주일 전까지도 교장의 직위임에도 불구하고 발명반 교실을 지도하는 등 그의 중등학교의 생활은 연구의 연속이었다. 그는 6남매의 맏이로서 동생 다섯을 부모님을 대신하여 대학교육을 시켜서 모두가 훌륭한 가정을 꾸려 잘 살도록 하였고, 자녀 다섯도 모두 대학교육을 잘 시켜 훌륭한 삶을 영위하도록 하였다. 그는 평소에 농업에 뜻한바가 있어 농민들이 힘들게 농사짓는 것을 보고 과학 영농의 기틀을 만들고자 노력하였다. 한 때는 논 밭 합쳐서 농지 20,000평(100마지기)에 밭작물, 벼 재배, 사과, 수박 등 대농을 하였다. 그의 특유의 실험정신을 발휘하여 과학영농을 위한 발명과 현장 적용 실습지 역할을 한 것이 그의 농장이었다. “필요가 발명을 낳는다.” 는 말과 같이 그는 영농을 하면서, 고추말뚝 뽑는 기구, 간편한 자동 비닐피복기, 힘 덜 들이고 일하는 배낭식 살수기, 수박접목 방법 등 100여종의 농기구의 발명과 새로운 농사 기술을 개발 보급하였다. 그는 개발한 발명품을 특허청에 신청하지 않고 농민이면 누구나 만들어 사용할 수 있도록 기술을 공개하고 있으니 그가 바로 농민을 생각하고 농촌을 한 없이 사랑하는 농사꾼 박희열이다. 퇴직 후에도 그의 연구 활동과 가르치는 활동은 그칠 줄 모른다. 모두들 퇴직하면 이젠 좀 편안히 여생을 보내고 싶은 생각을 하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다. 그러나 그는 지금도 현직에 있을 때와 똑 같이 연구 활동과 가르치고 배우는 활동을 하고 있다. 재래종 고추(토종)가 병충해에 강하고 다수확을 올리기 위한 품질 개선과 종자개선에 노력하고 있다. 고추에 자주 발생하는 역병을 방지하기위해 우리나라 최초로 고추 접목법을 개발했다, 고추모를 접목하여 병해에 강한 고추를 만들어 내다니 생각이 범인들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감히 나무 아닌 초(草)에 접목을 하다니 말이다! 여러 번의 시행착오와 현장 실험을 통하여 고추 대목을 카차구루마(일본산 고추)와 영고(국산 고추)를 이용하여 역병 없는 고추를 개발했다. 그 넓은 고추 밭이 역병으로 고추 농사가 다 망하게 된 고추밭을 바라보는 애타는 농부의 한을 그가 개발한 “고추 접목법”이 해결한 것이다. 지금은 <친환경 무공해 제초제> 연구에 몰두하고있다. 현재 연구의 완성도가 80% 수준이라고 하니 머지않아 제품이 농민의 손에 닿을 것이라고 다짐해 본다. 이러한 연구 업적과 성과가 인정되어 지금은 그의 농장이 <농촌진흥청지정 체험교육장>으로 지정되었다. 이 체험장은 전국을 대상(對象)으로 흙 살리기, 친환경 농자재 개발과 사용, 무공해 살충제 개발, 농업 발명 교육, 초중고 대학생 체험학습장과 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그의 학교에서의 가르침이 그대로 지금도 영속(永續)되고 있다. 농사기술과 농민들이 힘을 적게 들이고 농사를 짓도록 하기 위해서 이 교육장뿐만 아니라 영양군 농업기술 센터에서도 농민을 상대로 기술 교육을 하고 있다. 그의 농장 300여 평은 체험 학습장으로 이용되고 있고, 체험교육장용 30여 평의 강의동도 짓고 있다. 작년에는 1000여명의 방문객을 맞이했는데, 금년에는 4~5000명의 방문객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지금 나이에 그의 배우는 열정은 글자 그대로 평생교육의 실천자이다. 영양농업 기술센터에서 영농교육을 받아서, 새로운 정보를 빨리 받아드려 자기의 농업기술을 업그레이드 하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안동대학교 4년제 <마이스터대학>에 입학하여, 주당 1번 출석 8시간 수강으로 고추 농사에 대한 공부를 하고 있다. 그의 체질은 배우고 가르치는 체질인 것 같다. 우리를 안내하면서도 “내일은 마이스터 대학 시험 있는 날인데” 걱정하는 모습은 영락없는 학생의 모습이다. 보기 드문 장면을 보았다. 이 모습이 희열의 행복한 모습이 아닌가? 그의 생활에서 가장 부러운 것은 역시 교육활동이다. 군자삼락(君子三樂)란 말이 있다. 전국 시대, 철인(哲人)으로서 공자의 사상을 계승 발전시킨 맹자(孟子)는 《맹자(孟子)》〈진심편(盡心篇)〉에서 이렇게 말했다. 군자에게는 세 가지 즐거움이 있다.[君子有三樂(군자 유삼락)] 첫째 즐거움은 양친이 다 살아 계시고 형제가 무고한 것이요. [父母具存 兄弟無故(부모구존 형제무고)] 둘째 즐거움은 우러러 하늘에 부끄러움이 없고 구부려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이요. [仰不傀於天 俯不作於人(앙불괴어천 부부작어인)] 셋째 즐거움은 천하의 영재를 얻어서 교육하는 것이다.[得天下英才 而敎育之(득천하영재 이교육지)] 라는 말이 있듯이 이중 “천하의 영재를 얻어 교육하는 것” 군자삼락의 마지막 부분은 희열이가 지금까지도 실천하고 있는 덕목이고 가장 행복해 하는 즐거움이 아니겠는가! 지금도 희열은 배우는 학생이다. 가르치는 현직교사다. 연구 활동가다. 그의 배우고 가르치는 교육활동은 끝나지 않고 지금도 진행 중이다. 평생교육의 실천자이다. 연구하는 농사꾼이다. 교육농사, 제자농사, 자식농사, 농업농사, 그의 인생 농사는 대풍을 이루었다. 농사꾼을 자처하는 그의 순박하고 인자한 모습에서 우리들의 넉넉한 시골 정서가 떠오른다. 농촌의 비젼을 밝혀주는 그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입지가(立志家)적이며 그의 모범적인 인생개척정신은 우리 동기생들의 기념비(記念碑)가 될 것이다. 09년 5월 30일 같은반 희열이를 만난 기현이가 |
첫댓글 박희열 동기의 인생 역정을 드라마틱하게 소개한 기현이에게 먼저 감사를 올리고 박희열은 학창시절에는 한반이 아니라서 잘은 모르지만 다른사람과는 다르다는 것만 알았지, 그러나 오늘 기현이의 소개로 소상히 알수가 있어서 기현이 고맙네 어려서 내가 꿈꾸던 그런꿈을 동기생 박희열이는 이루었고 지금도 이어가고 있구만, 장하고 장한 희열 동기생에게 한없는 박수를 보낸다. 이맹추는 꿈만 꾸고 말았으니 한심할 따름이다. 우리 동기생의 훌륭한 업적을 소개해주어서 기현이 정말 고맙네.
내가 기억하는 희열은 특별한 사람이었지. 반드시 뜻있는 일을 이룰 것으로 믿었었지. 지금의 희멸의 모습은 그의 인생각본에 따라 이룬 업적이라할 만하다네. 우리들 동기 중에 희열과 같은 큰 인물이 있다는 것은 기쁨이며 축복이 아닐 수 없다네. 그가 칠순 잔치를 한다니, 멀리서나마 축하의 마음을 보내며, 남은 세월도 더 아름다운 봉사로 세상을 밝게 해 주길 기원하는 마음 한결 같다네.
애국지사가 따로 있나? 박희열 교장이 진정한 애국지사야!!!
김기현 친구 박희열의 인생여정을 대충이나마 필요불가결의 요점을 어찌 이렇게 한편의 드라마 전문스토리처럼 잘 표현해 주었네. 난 박희열의 이 이야기를 하룻밤 자면서 들었었지만 표현력부족을 새삼 절감하면서 다만 ' 박희열은 입암면에서 치국하고 있었다."라고 간략히 표현한 적이 있지만 재삼 읽다보니 우리가 친구로서 존경할 만한 박희열임에 틀림업다고 생각하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큰 뜻을 이룬 친구 희열이는 건강한 체력 바탕에 막히면 뚫고 넘고 엎어지고 자빠지면서도 굳센 의지 집념 알뜰한 정성 용기 어이 그런 훌륭히 이룰 수가 있었단 말인가 정말 대단한 일들을 해냈고 지금도 하고 있다는 것을 기현이가 멋진 문장력으로 소개를 해 줘서 비로소 알았으니 두손들어 만세를 부릅니다. 박희열 만세!
박희열이 친구 정말 존경 스럽고 우리의 동기라는것이 한없이 자랑스럽다.박희열 화이팅! 아자~아자~그리고 자세하게 소개해준 윤중 김기현친구도 고맙고....나는 이래 아무렇게 살아도 되겠나? ㅠㅠㅠ
경북의 23개 시군중 유독 영양군을 가 본 적이 없기에 좋은 기회 였다. 차편 관광 대접받기와 문화유적 안내등 이자리를 빌어 감사의뜻 전하며 실은 동기 박희열의 삶의 모습에 많은 감동을 받았다. 윤중의 생동감 있는 멋진 전달은 그 친구의 눈물어리고도 억척같은 삶을 떠 올려 보게 하네. 같은 교직의 길을 걸었지만 오직 실력만으로 승부를 걸고 제자를 길렀다니 그 스승에 그제자가 아닌가! 불철주야 농민을 위한 농사방법의 연구와 고심 식지 않은 열정은 영원한 스승 훌륭한 교육자 像이 아닐가 !이번기회의 영양 번개팅은 물심 양면의 많은 소득이 있었음을 널리 알리며 다시한번 감사올림 권준현
희열이의 파란만장한 생도 드라마틱하지만 그것을 짧은 글로 잘 다듬어준 기현이의 수준이 보통이 아니다. --그런데 이러한 우리들의 카페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희열이가 모르고 있을것 같다. 누가 우리들의 마음과 생각을 그에게 전달한다면 조금이나나 동기들의 정을 실감하지안겠는가. -어쨋던 카페에 나와서 자기의 생각이며 감정을 표하는 친구들은 참으로 기특하고 활력있게 살고있는 노익장이라 할 것이다.
동몽,류진상, 권오규, 권준현, 안용진 과찬의 말을 들으니 그저 희열에게 누를 끼친 것 같네. 미안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