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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7월3일(금)흐림
<대중공양 온 학생들에게 해줄 말>
➀스승은 학생에게 ‘나만 믿고 맨발로 강을 건너오라’고 하자, 학생은 스승에 대한 믿음으로 물 위를 걸어서 건너왔다. 자기 말에 그런 능력이 있음을 목격한 스승이 자기도 물 위를 걸을 수 있으려니 생각하고, 강으로 들어가자 돌멩이처럼 강바닥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이 이야기를 들은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학생이 물 위를 걷는 신통력이 있으니 스승보다 낫다고 여기는가? 아니면 학생이 스승의 말을 듣고 그런 신통이 나왔으니 그건 스승의 영적 능력이지 않은가? 그런데 스승은 물 위를 걸으려고 했으나 가라앉고 말았으니 신통력이 없는 평범한 인간에 불과하지 않은가? 스승과 학생 중 누가 더 나은가? 사람들은 대개 이런 생각을 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스승과 제자의 우열을 따지는 일이 아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런 생각을 했다면 여러분이 일상생활에서 항상 누가 잘 하나, 누가 누구보다 나은가, 우열을 따지는 습관이 깊이 배였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능력 있는 사람이 더 나은 대우를 받는 보상의 법칙에 길들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여러분은 일생 동안 남보다 나은 능력을 갖춘 사람, 남보다 나은 사람, 남보다 나은 인생을 살려고 아등바등 애썼으나 결국은 지금 이 자리에 앉아있는 평범한 중년이 되었음을 확인할 뿐이지 않은가?
➁바닥을 칠 때 안심하라. 바닥에 가라앉을 때 가장 안전하다. 바닥이 아닌 곳은 아직 공중에 붕 뜬 불안정한 상태라 들뜬 지경이다. 그것이 아무리 환희롭고 경이로운 순간이라도 한때에 불과하여 마침내 거기에서 떨어질 때가 꼭 오고야 만다. 삼매와 해탈, 열반은 몸과 마음이 바닥에 가라앉은 상태이다. 완전히 내려놓아, 더 이상 내려놓을 수 없이 안정된 상태이다. 그래서 나-없음, 텅 빔이다. 무엇을 짊어지고는 오래 버틸 수 없다. 무엇을 소유했다면 마침내 잃어버리거나 사라지고 만다. 나-있음이 몸무게이다. 내가 없다면 나는 무중력이다. 나-있음과 나의 소유를 던져버리고 바닥으로 가라앉으라. 낙엽은 저항 없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떨어진 그곳이 낙엽이 있을 자리이다. 바람이 불면 다시 자리를 옮기지만, 바람 부는 대로 날려가는 그곳이 낙엽의 자리다. 위로 던져진 돌멩이는 땅바닥으로 떨어진다. 아무런 저항이 없느니 자유낙하이다. 수행자의 용심도 그와 같다, 백척간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라. 그리고 툭 떨어져 바닥을 쳐라. 더 이상 낮아질 수 없는, 가장 낮은 곳보다 더 낮은 곳. 더 이상 떨어질 곳이 없는 밑바닥을 쳐라. 그것은 누가 뺏어갈 수도 없고,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든든한 자리다. 제로 포인트! 만물이 시작되는 곳이며 끝나는 곳이다. 그곳은 어디인가? 지금 바로 여기! 평범함 가운데 비범함이 있다.
2020년7월4일(토)맑음
<개심사 대중공양 산행 일정>
일시: 2020.7.4.(토)
출발: 진주선원 7:30AM/참석인원: 14명/차량운전 3대: 하산, 송계, 혜광
점심공양: 해미읍성
개심사 보현선원 도착: 12:00AM
보현선원에서 명상: 20분
산행출발(12:30)→아라메길→보원사지→마애삼존불(03:00PM)도착&참배
(산행거리 약3KM, 1:30~2시간 소요, 평탄 혹은 내리막길)
선원 차량2대(명섭, 성원)로 보현선원 돌아옴(03:30PM) & 진주로 출발
<오브제 a>는 잡히지 않는 욕망-환상(欲의 幻, 幻의 欲)이다.
잡았다면 손아귀를 벗어나며, 놓아버리면 드러난다.
잡으면 (대상a는) 물러나고, 주체가 물러나면 (대상a는) 드러난다.
대상a는 없이-있기도 하고, 있이-없기도 하다.
이중의 환상: 주체가 대상에 투사(projection)하는 환상, 대상이 주체에 불러일으키는 환상 (intro-jection). 대상을 바라보는 너의 눈은 이중의 환상에 덥혀 있다. 그러니 무엇을 제대로 볼 수 있겠는가? 사정이 이러하니 소위 ‘있는 그대로 본다’. 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지 않겠는가?
2020년7월5일(일)맑음
자신이 욕망하는 것이 진실로 자신의 욕망인지 아닌지 알기 위해서 주체는 다시 태어날 수 있어야 한다. 모든 욕망에는 타자의 욕망이 묻어있다. 어린애는 엄마가 자신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을 느끼면서 방안을 돌아다닌다. 인간은 타자의 응시를 자각하며 살아간다. 명품 의상을 걸친 여자가 패션 거리를 당당하게 걸어가는 건 타자의 응시를 즐기려는 짓이다. 나는 누군가의 눈에 들기 위해 행동한다. 나는 타자가 나를 욕망하는 걸 욕망한다. 그러므로 내가 그 사람에게 어떤 존재인가를 묻기 전에 그 사람은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가? 라는 가면을 벗기는 질문을 해야 한다.
무엇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남아 배경이 되라.
타자가 자기만을 욕망해주기를 바라지말라. 타자에게 욕망을 선택할 자유를 주라.
서로 자기만을 욕망해주기를 바라지 말고 홀로 있되 넉넉한 사람이 되라.
<殺佛殺祖살불살조에 대한 이야기>
살불살조를 말하는 자기 자신을 먼저 죽여라. 불조를 죽이기 전에 왜 먼저 자기를 죽이지 못하는가? 살불살조라는 관념이 남아 있는 한 그는 아직 법-무아조차도 이해하지 못한 범부가 아닌가? 그런 자의 살불살조는 사실상 惡口악구죄를 범한 것이다. 그래도 조직의 창시자인 부처와 조사를 죽인다는 말이 선종 집안에서 허용된다는 게 통쾌하고 여유롭기는 하다. 유일신을 믿는 타 종교에서 천주님을 죽이고 여호와를 죽이고 알라를 죽이고 예수를 죽이고 무하마드를 죽이라는 말을 할 수 있을까?
無碍行무애행, 세속적인 도덕률을 파기하고 모든 금기를 파괴하는 자유분방한 행위를 하는 자는 왜 자신의 무애행에서는 자유롭지 못한가? 무애행이 습관이 되어버려 오히려 무애행이란 장애를 지닌 장애인이 된 것이 아닌가?
인간의 잔혹성은 “동물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능가”하며, 포악한 “육식 동물조차 인간이 자연 전체에 가하는 위협 앞에서는 두려움에 떨며 뒷걸음질 칠” 것인데 이런 “잔혹 자체가 인간성을 함축한다”. -자끄 라깡
옛 군자들은 여름의 멋을 西池償荷서지상하 東林聽蟬동림청선이라 했다. 서쪽 연못에서 연꽃을 감상하고 동쪽 숲에서 매미 소리를 듣는다. 절집의 풍경이 그러하다. 돌샘에 솟는 물 흘러 절 앞 蓮池연지에 고이니 연을 심어 꽃을 보고, 법당 뒤 죽림을 병풍 삼으니 새와 매미가 때맞춰 울어 풍류가 족하다.
2020년7월7일(화)흐림
명섭스님과 보원사지 길을 2시간 20분 걸려서 다녀 오다. 몸이 뻐근하다.
오후에 칠불사 주지 도응스님 와서 대중과 저녁 공양 함께하고 차를 마시다. 부천 석왕사에 계신 고산스님께 문병 간다고 하다.
孤峰頂上進一步, 고봉정상진일보
淸風匝地有何極. 청풍잡지유하극
외 봉우리 꼭대기에서 한 걸음 나아가니
온 누리 가득 맑은 바람 끝없이 불어오네!
2020년7월8일(수)맑음
맑은 아침 홀로 작설차를 마심. 역시 차는 살그머니 혼자 마셔야 제격. 커피도 있고 중국 차도 있지만, 청량삽상한 맛은 죽로 우전차가 독보적. 종일 구름 위에서 구름을 굴리듯 몸을 굴리며 논다. 空魚가 空海를 헤엄치며 다닌다. 바람이 숲을 밟고 다니며 춤을 춘다. 마음이 녹아 구멍 난 곳에 푸른 하늘-지평선 끝-바다가 있다.
2020년7월9일(목)맑음
무위의 진제에 발 들여 놓은 자는 무영토의 원주민 the aboriginal of nowhere-land 이다. 無領土, 無의 영토. the land of nothing-ness. 그는 세계와 무영토 사이를 넘나들며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이방인이다. 세계와 무영토는 이질적이며 서로 단절되어 있으나, 이중-소속된 double belonging 이방인의 존재로 말미암아 그 둘은 연결되어 소통된다. 그래서 이방인은 사이의 존재 inter-being이다.
2020년7월10일(금)맑은 후 차츰 흐려짐
<박원순 서울시장의 죽음을 생각한다>
1. 대타자(大他者)의 응시에 노출된-그래서 그 응시를 이용하는-정치인의 삶을 생각한다. 대중의 시선을 의식하고 살 수밖에 없는 그들의 삶은 겉과 속이 충돌할 수 있다. 비극적으로 든지, 아니면 희극적으로 든지. 권력을 가진 갑남甲男들은 내면에 억압된 리비도를 자기보다 약한 을녀乙女에게 투사하는 행동을 할 기회가 많다. 성인지-감수성이 없는 갑남의 무의식적 성적 표현은 을녀에게 해를 끼치고 상처를 준다. 남성 위주 문화에 젖어 있는 구세대의 남자들은 성인지 감수성이 둔감하여 자기가 저지른 죄를 미투 바람에 걸렸다고 여긴다. 다들 그러는데 자기만 재수 없이 걸렸다는 것이다. 문제는 올드보이들의 성인지-감수성 결여가 아니고 인간에 대한 존중과 타자에 대한 배려가 없다는 점이다. 우리는 남녀평등시대를 살아가는 지성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성인지-관점, 인권의식, 약자에 대한 배려를 공인에게 당연히 요구해야 하고, 그대로 실천하는지 감독해야 한다. 이제 우리에겐 타자에 대한 배려와 약자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훈련이 필요하다.
2. 인간의 내면은 겉보기처럼 단순한 것이 아니다. 마음 밑바닥에서 욕동欲動drive이 폭류처럼 흐르는데, 밖에서는 사회규범과 법률이 그것을 감시하고 통제한다. 그 사이에서 낀 자아는 눈치를 보면서 간신히 제 몫의 욕구를 관철한다. 주눅이 들었던 에고가 권위와 힘을 가질 경우, 틈만 나면 사회적 규제의 망을 뚫고 자신의 억압된 리비도를 발산하고자 호시탐탐 노리다가 만만한 상대가 나타나면 거기를 향해 달려간다. 타자의 감시의 눈길이 없는 사각지대에서 상급자 갑남이 하급자 을녀에게 행하는 짓거리는 거의 고양이가 쥐를 움켜쥐었다 놓아주었다 하면서 희롱하는 것과 같다.
3. 우리는 타인에게 완벽함을 요구할 수 없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간통죄를 범한 창녀를 둘러싸고 돌을 던져 죽이라는 심판을 내리자 예수가 말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이 여인을 돌로 치라. 안희정이 그랬고, 박원순이 그랬듯 대개의 남자들은 사회적 지위를 가지게 되면 권력을 이용하여 하급자인 여성을 상대로 성 충동을 해소하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 욕망에 물든 감각기관이 욕망할 만한 것으로 보이는 감각 대상을 향해 본능적으로 달려간다. 자신의 감각기관을 다스리지 못하는 인간은 꿀 병에 빠져나오지 못하는 개미처럼 저 죽을 줄 모르고 환상을 향해 치닫는다. 타인을 비난하기에 앞서 우리는 다음 두 가지를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하나, 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나의 감각기관을 제어할 수 있는가? 둘, 욕계에 태어났다는 자체가 벌써 달콤한 미끼에 유혹되어 걸려든 것인데, 나는 나의 욕망이 불러일으킨 유혹에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나? 네가 비난하는 사람의 얼굴에서 자기의 모습을 비쳐 보라. 너는 어떤 인간인가? 네가 얼마나 도덕적으로 완벽하기에 감히 타인을 심판할 수 있느냐? 우리 모두는 다소간 인간적인 약점이 있다. 자신의 내면에 깃든 不善불선의 씨앗을 모두 소멸하기 전까지 자신이 타인보다 도덕적 우위에 있다고 자만할 수 없다. 자신의 내면에서 욕망의 꿈틀거림은 목격할 때마다 자기가 욕계에 속한 중생임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4. 대타자의 응시가 완전히 사라진 곳에서 인간은 어떤 짓을 벌일까? 모든 규제와 도덕률이 완전히 사라진 무법천지 가운데 그 사람을 놓아두어 보라. 그는 어떻게 행동할까? 인간 내면에 억눌린 리비도와 폭력성과 잔인성이 폭발하면서 좀비 떼처럼 광분하리라. 만인에 대한 만인의 폭력이 난무하여 약육강식하는 축생과 아수라의 세계가 벌어질 것이다. 그러나 무법천지 가운데서도 법을 행하는 사람은 있다. 그는 범부의 마음을 다스리고 리비도와 폭력의 에너지를 전환하여 자비와 연민을 개발하고 공평무사한 법을 실현한다. 그는 마음의 법을 따르므로 그가 가는 길이 법이 된다. 그 길은 팔정도, 여덟 가지 바른 삶의 길이다.
5. 약점이 있는 자는 인간적이다. 누가 타인의 삶을 심판할 수 있으랴. 누가 다른 사람의 인생을 이해할 수 있으랴! 평생을 다 살아본 다음에도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인데, 누가 다른 사람의 인생에 대해 시비와 공과를 따질 수 있단 말인가? 오직 당사자만이 알 것이지만, 당사자 자신도 모를 수 있다. 無明무명에서 시작하여 無明무명으로 돌아가는 인생이여. 무명을 깨치지 못하는 한 모두 가련한 중생일 뿐이다. 얼마나 오랫동안 윤회의 쳇바퀴를 돌려야 안식을 얻을 수 있으랴. 욕계를 유랑하는 자여, 너와 나는 업의 그림자를 끌고 다니는 나그네이다. 자신의 약점조차 미워하지 않고 껴안으며 자기 업의 그림자를 밟고 가는 자여,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이지 아니한가!
2020년7월11일(토)맑음
신흠(申欽, 1566∼1628)은 인간 삼락(三樂)을 이렇게 노래했다.
閉門閱會心書, 폐문열회심서
開門迎會心客; 개문영회심객
出門尋會心境, 출문심회심경
此乃人間三樂. 차내인간삼락
문을 닫고 마음에 드는 책을 보는 것,
문을 열고 마음에 맞는 손님을 맞이하는 것,
문을 나서서 마음에 끌리는 곳을 찾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인생의 세 가지 즐거움이다.
여기에 덧붙여 담박한 마음으로 차를 마신다면 호시절이지 않은가!
2020년7월12일(일)흐림, 그리고 부슬비
몸은 빈방. 머리에 맺힌 물방울이 떨어져 심장을 지나 배꼽 밑 회음을 친다. 반딧불 반짝이며 안개에 피어올라 빈방을 채운다. 구름 팔다리, 구름 몸. 구름이 뭉글뭉글 커져 하늘을 덮고 땅을 덮는다. 구름이 회오리치며 빛난다. 척추가 뚝뚝 부러지고 휘어지며 용틀임한다. 나무가 자란다. 기맥의 나무, 잔가지를 뻗지 못해 굵은 가지만 뭉툭하다. 그것은 미묘한 고통이다. 고통이 부서지며 전율한다. 감전된 듯 움찔거리며 근육이 팔딱인다. 명상은 감각이 사라진 진공이 아니고 미세한 전율과 진동이 진득하게 이어지는 과정이다. 들려오는 소음과 바람소리는 흔적없이 날아가고 빈방은 묵음-아무 일 없이 처음 그대로. 옆방에서 목구멍에 걸린 것을 뱉는 소리 캑캑 들리고 바람은 웅웅거리며 마당을 쓸고 간다. 지금 여름 한낮 그림자도 졸지 않는다.
禪堂暮雨蕭蕭落, 선당모우소소락
萬松彈琴灑灑樂; 만송탄금쇄쇄락
忽然鐘聲透溪煙, 홀연종성투계연
靑鶴歸巢入寂默. 청학귀소입적묵
선방 저문 비 소소하게 내리니
솔숲에 거문고 타듯 싱그러운 음악 울리고
문득 범종 소리 계곡 구름 뚫고 들리는데
푸른 학은 둥지로 돌아와 침묵에 잠긴다.
2020년7월13일(월)비, 바람
밤새 비바람 섞어 치다. 바람이 우는 소리 귓가에 윙윙거린다. 검은 유령들이 계곡을 훑고 산꼭대기로 달아나며 소나무 머리칼을 쥐어뜯고 기와지붕을 와작작 밟고 우루루 몰려간다. 문짝이 덜컹 처마가 덜썩 나뭇가지 떨어지며 툭딱. 선방에 앉아 소리를 관하니 고요함에 윤기가 돌아 섬돌에 물 흐르는 소리도 정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