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句麗 四太王記
서(序) : 이전의 기록들중 빠진 것을 보완하고 왜곡,잘못되어 있는 것을 수정,바로잡고자 했
다.
西文太王記
봉명태왕(鳳鳴太王)이 28세의 나이로 즉위 이후 42년간 왕위에 있으면서 구려(句麗) 제2의 전성기이자 문치부흥(文治復興)의 시대를 열었다. 70세의 나이에 세상을 뜨니 태자 이홍(伊弘)이 42세의 나이로 즉위 그가 서문태왕(西文太王)이다.
2년. 백잔(百殘)과 신국(新國)이 사신을 보내와 즉위를 축하하였다. 양국 사신에게 선물을 하사하고 국가간 화친과 교역을 더욱 돈독히 할 것을 명했다.
5년. 원봉국(院奉國)에서 사신을 보내왔다. 본래 이전에 중원을 지배하던 대국(大國)이 있었는데, 대국이 망하자 북적(北狄)이 침입하여 이후 5호16국의 열국시대(列國時代)가 열렸다. 하북에는 묘족(妙族)이 세운 동탄,서탄,남탄,북탄 네 개의 나라가 생겼는데 이들을 통털어 사탄(四灘)이라고도 불렀다. 사탄이 이후 일시적으로 지룡국(知龍國)으로 통합되었다. 지룡이 하북 대다수를 지배했다. 허나 150년후 지룡도 망하고 이후 원봉(院奉)과 주령(周靈)이란 두 개의 나라가 생겼는데 주령이 서부, 원봉이 동부에 위치하여 원봉은 구려(句麗)와 접경(接境)하게 되었다. 사신의 방문을 승인하고 양국화친을 허(許)하였다.
7년, 북적의 거란,여진 일부 세력이 복속을 청해오니 무리거 700여인에 달했다. 북부 접경 세원(世原)이란 지역에 마을을 지어주고 거란,여진의 복속해온 무리를 살게하였다. 원래 구려 북부에는 거란,여진,흉노,말갈등 다양한 이민족이 살고있어 구려에선 이들을 통털어 북적(北狄)이라 불렀다. 이들은 때로는 복속을 청하기도 하고 때로는 침략해와 복속을 원할 경우 받아들였고 노략할 경우 격퇴하였다.
9년. 구려가 본래 소노부,관노부,순노부,절노부,계루부 5개의 부족이 하나로 통합하여 나라를 세웠는데 때에따라 이들 5부족중 정국의 주도권을 행사하는 세력이 있어 그 실권파가 매번 바뀌었다. 그러다 서문태왕대에 이르러 탕평(蕩平)을 쓰니 국상(國相)에는 소노부의 태완선을 부상(副相)에는 순노부 출신 엄주환,어흥준을 이부대형(吏部大兄)에는 관노부 출신 능만을 재정대형(財政大兄)에는 절노부 출신 백충국을 법무대형(法務大兄)에는 계루부 출신 이장곤(伊長坤), 국방대형(國防大兄)에 소노부 출신 서무수를, 형부대형(刑部大兄)에 순노부 출신 안부웅을, 문교대형(文敎大兄)에 관노부 출신 만일준을, 예부대형(禮部大兄)에 절노부 출신 조민국을 임명하고 비서실장격인 비무대관(秘務大官)에 해태루를 의전대관(儀典大官)에 형승원을 임명하였는데 비무대관과 의전대관은 왕족회(王族會)의 추천을 받아 임명하였다.
또한 국서(國書)를 반포하여 천명(天命)하기를 ‘구려가 본래 다같인 천군(天君)의 자손으로 그 뿌리가 본래 하나인데 오랜 세월이 흘러 여러 부족과 씨족으로 갈라지니 뿌리는 같되 자손은 흩어졌도다. 이로써 나라를 세우고도 오랜세월 서로간에 길항(拮抗)하였으니 실로 통탄할 일이로다. 이로서 짐은 400년 이어온 오부(五部)의 갈등을 종식시키고자 탕평을 명하노니 이제 구려의 5부는 다같이 통합하고 화친하여 밖으로는 외적의 침입을 방비하고 안으로는 백성들을 평안케하고 안분지족(安分知足)케 할 지니라. 짐이 비록 재주없는 몸으로 태왕의 지위에 올랐으나 이는 실로 하늘과 옛 선조를 대신하여 내리는 명이니 이 탕평의 도는 앞으로도 천년세월 구려의 근본법도로 하여 질서를 어지럽혀선 아니될것이니라’ 하였다.
11년. 원봉의 북쪽에 지명국(志明國)이란 나라가 새로 세워졌는데 그 실체를 알 수 없어 불안해하였다. 원봉에 사신을 보내 진상을 물으니 원봉의 태조(太祖) 모용황이 답서(答書)를 보내 말하기를 원래 ‘구려와 하북의 이북은 근본된 나라가 없이 오랜세월 많은 이민족이 서로 싸우고 흩어지며 살아왔나이다. 그러다 간간히 새 나라가 세워진바 있으니 이번에 세워진 지명국도 옛 거란,흉노.몽골인등이 일시적으로 규합하여 세운 신생국가(新生國家)일뿐 근본은 별것이 없나이다. 또한 여러부족이 일시적으로 하나로 묶였으니 통합하기 쉽지 않을것이며 지명국을 세운 난담(蘭潭)이란 자도 한낱 천한 무뢰배에 불과할뿐 별것이 없나이다. 또한 지명국의 영토라고 해봤자 사방 500여리도 안되는 저희 원봉의 절반 수준이며 구려에겐 3분의1도 못미치는 작은 나라이니 어찌 근심이 있으리이까. 구려는 물론 저희 원봉에조차 해끼칠일이 없을듯하니 너무 심려마시오소서’ 하였다.
13년. 서문태왕이 하늘로 돌아가니 이때 나이 55세요 즉위 13년이다. 태자 윤봉(允奉)이 대(代)를 이어 즉위하니 그가 진명태왕(眞明太王)이다.
眞明太王記
2년. 왕후(王后)박씨가 세상을 떠났는데 이때 왕자는 겨우 세 살난 어린아이였다. 박씨는 진명태왕이 태자시절 국법에 따라 비(妃)로 맞은 부인(婦人)인데 젊은 나이에 요절하여 다들 애석해 하였다. 박씨(朴氏)가 본래 신국(新國의 성씨(姓氏)라 구려에선 천시받았는데 오히려 이때는 왕비를 배출했으니 이례적인 일이다.
4년. 3월. 지명국에서 사신을 보내 개국의 승인을 청하니 가납하고 공물을 받았다. 선물을 하사한뒤 개국을 축하하며 사신을 돌려보냈다.
10월. 이해이 봄인데 눈이 오고 겨울인데 강물이 얼지않는 천변(天變)이 있었다. 관상감을 불러 물으니 ‘천지(天地)의 기운(氣運)을 바로잡을 제(祭)를 올려야한다’고 해서 이와같이 시행하였다.
6년. 봉상현(奉相縣)에 원세현이란 귀족이 살았는데 젊은 후처가 있었다. 사위가 장인의 후처와 사통하여 아이를 낳는 나변이 벌어지니 태왕이 상소를 받고 격노하였다. ‘친가는 오대팔촌, 외가는 이대사촌이내는 근친이라 혼인하거나 관계를 갖지 않는다는 것이 천지법도인데 어찌 이런 무도한일이 벌어진다는 말인가’ 하고 관계한 사위와 장인의 후처를 모두 참형에 처하고 다만 생겨난 아이는 지울수 없으니 국경밖으로 추방토록 했다.
8년. 거란과 여진에서 복속해온 세력중 일부가 말썽을 일으켰다. 예부터 구려가 종종 거란이나 여진,흉노에서 투항해오는 유민(流民)들이 있었는데 개중 종종 말썽을 부리거나 노략질을 하거나 심하게는 반란을 일으키는이도 있었다. 태왕이 명하여 복속한 무리중에 난(亂)을 일으키는 이가 있을시 엄단하거나 국외추방등의 강경한 조치를 취할 것을 천명하였다.
10년. 4월. 왕자가 어느덧 11살이 되니 태자로 봉하였다. 이후 태학에 보내 학동(學童)들과 함께 수학(修學)케 하였는데 태학의 교수(敎授)들이 상소를 올려 청하기를 ‘태자가 학업에 열중하지 않고 자주 빠지며 심지어 자주 혼자 놀러나가 사냥과 활쏘기따위만을 즐긴다’ 하였다. 태왕이 직접 불러 태자를 꾸짖기를 ‘너를 태학에 보내 공부시킴은 그 하나는 장차 구려를 물려받을 후계자로서의 자질을 양성케함이요 둘째로는 어려서부터 태학의 동문들을 사귀어 훗날 함께 일국을 이끌어갈 동지를 만들게 함이다. 헌데 너는 어찌 이와같이 학문을 게을리 하느냐 ?’ 물었다. 태자가 나름 반박하기를 ‘구려(句麗)가 본래 무(武)의 도(道)로써 나라를 세웠거늘 어찌 문무(文武)에 차별이 있겠나이까. 소자(小子)는 문치를 빙자하여 탁상공론만 일삼는 유약한 왕이 되느니 몸소 칼을 들고 활을 잡아 외적을 격퇴하는 태왕(太王)이 되겠나이다’ 하였다. 태왕이 이 말을 듣고 더는 반박하지 못하였다.
10월. 흉노의 백광(白光)이라는 이가 있었는데 무리를 지어 종종 어린아이나 부녀자를 납치 머나먼 외국에 팔아넘기니 그 피해가 거란,여진은 물론 이웃 원봉국이나 지명국은 물론 구려(句麗)에까지 미쳤다. 백광의 무리가 인신을 팔아넘기는데는 그 신분을 가리지 않아 귀족가문은 물론 왕족에서까지 피해자가 나올 지경이었다. 태왕이 더는 두고볼수 없어 장수 임종(林宗)을 보내 백광을 징벌하려 했으니 생각보다 세력이 막강해 임종이 두 번이나 패퇴하였다. 하는수없이 거란,여진은 물론 지명국,원봉국과도 연합전선을 짜서 오국연합으로 마침내 백광의 무리를 토벌하였다. 토벌후 동맹국들에게 일정한 댓가를 지불하였다.
12년 1월. 구려에 개국초부터 나라에 공을 세워온 최고 명문가로 을씨(乙氏)와 연씨(延氏)가 있었다. 이때는 을씨는 을관(乙官)이 연씨는 연홍(延洪)이 가문의 수장이었는데 둘이 만나 나라의 일을 근심하였다. 내용이 이와 같았다.
“ 선대에서 탕평의 도를 밝히시오 구려의 뿌리깊은 내환(內患)인 5부족의 갈등을 없이하고자 함은 모르는바 아니나, 덕분에 오히려 실력있는자가 배제되고 무조건 5부족이 ‘나눠먹기’식으로 요직을 차지하고 있어 장기적으로 나라에 해가 될까 걱정되오. 무릇 벼슬자리는 공이있는자에게 주는 ‘논공행상(論功行賞)’의 전리품이 아닌 적재적소에 인재를 써서 나라를 평안케 하고 백성들의 삶을 풍족케 해야 하는데 오직 5부족의 기득권만이 강화되어서야 어찌 나라꼴이 제대로 된다 하겠소. 지금이라도 선대의 잘못된 법도를 바로잡아야하고. ” 하고는 직접 조정에 출사하여 선대의 탕평책을 폐하고 대대적인 인사개편을 해줄 것을 건의하였다. 이에 오부족이 모두 반발하여 대대적으로 태왕에게 상소하여 말하기를
“ 선대에 탕평의 도로 조정의 요직을 오부가 골고루 나눠갖게 하고자 함은 나라에 더 이상 갈등이 없이하여 부족간에 화친하여 더 크게는 나라가 제대로 돌아가고자 함인데 이제와서 한낱 공신가문의 자손이란 이유로 이를 폐하려 한다니 이런 망발이 어디 있을수 있나이까. 생각건대 을씨와 연씨는 한때 나라의 공을 세운 공신가문이었으니 이제 오부족의 득세에 비주류로 밀려나는 것을 질시하여 이와같은일을 벌이는것이니 청컨대 태왕께선 통촉하여 주시오소서‘ 하였다.
태왕이 근심 끝에 쉬이 결정을 내리지 못하자 을관이 다시 조정에 나와 절충안을 제시하기를 ’이부와 재정 그리고 국방과 법무만은 마땅히 그 분야의 전문성 있는 인재를 등용해야하니 이를 통촉하소서‘ 하였다. 이에 태왕이 을관의 청을 받아들이고 이부대형에 도진, 재정대형엔 계철, 국방대형엔 기수, 법무대형에 이민을 임명하니 5부족의 불만이 적지 않았다.
14년 3월. 을관과 연주,연경 형제가 다시 조정에 나와 오부족의 요직 나눠먹기를 경계하는 소(疏)를 올리니 연주와 연경은 연홍의 아들이다. 을관의 세아들 을태,을길,을두남도 함께 청을 올렸다. 이에 다시 5부족의 300여인 신료들이 나와 연좌하여 농성하기를 ’연씨와 을씨는 마땅히 옛 제 조상의 공을 내세워 자신들이 비주류로 밀려나는 것을 두려워하여 이런일을 벌이고 있으며 선대의 일을 폐하려하니 이는 역심을 품은 것이 분명하나이다. 마땅히 을씨와 연씨가를 엄히 문초하소서‘ 하였다. 태왕이 난감해하며 두 가문이 구려초부터 개국공신인데 어찌 쉬이 벌을줄수 있단말인가 하자 소노부의 수장 엄준(嚴俊)이 반박하여 말하기를 ’구려의 법도에 공신의 가문의 수혜는 4대 이상에는 미치지 않는다‘ 하였는데 을씨와 연씨가 나라에 공을 세운 것이 이미 300년전 일인데 어찌 그런 까마득한 일로 지금의 죄를 면죄(免罪)할수 있겠나이까 하였다. 태왕이 쉬이 결정을 내리지 못하자 5부족 300여인이 모두 파업하여 조정에 업무를 거부하였다.
6월. 백잔과 신국에서 사신이 왔는데 오부족이 모두 파업중이라 맞을 사신이 없었다. 왕실에서 대신하여 고상과 고일, 그리고 해태루가 대신 나와 사신을 맞았다. 이때 백잔과 신국은 구려의 복잡한 내부사정을 잘 알지 못했는데 다만 자신들의 방문한 뜻을 밝히기를 ’선대(先代)에 구려와 양국의 국경을 분명히 하기를 구려와 백잔의 경계는 한수로 하고 신국과의 경계는 봉래산(蓬萊山)을 중심으로 한다‘ 하였는데 오늘날 그 무제가 잘 지켜지지 않고 있소이다. 마땅히 북국(北國)의 태왕(太王)께서 통촉하여 주시오소서’ 하였다. 이때 태왕이 오부족의 갈등문제를 제대로 해결 못한때라 더욱 근심하며 ‘나라의 내부사정이 좋지않아 널리 살필길이 없었나이다. 모쪼록 용서하시고 국경의 문제는 선대의 일을 그르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할테니 그리알고 돌아가주시오.’ 하고 왕족회에 명하여 사신들을 후히 대접하라 하였다. 백잔과 신국의 사신들은 구려의 처사를 납득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16년 10월. 을씨(乙氏) 가문의 을경(乙景)이라는 이가 있어 다시 ‘7대개혁안’을 소(疏)로 올리니 그 내용이 이와같았다. ‘① 인사와 인재등용은 능력위주를 원칙으로 하되 선대의 탕평의 도를 흩트리지 않는 선에서 특히 5부족간에 나눠먹기가 되지 않도록 주의하소서 ② 백성들에게 지나친 세금을 부과하지 마소서 ③ 농사철에는 함부로 전쟁을 일으켜 백성이 부담가게 하는일이 없이 하소서 ④ 구려(句麗) 황실(皇室)의 순혈(純血 : 순수 고구려 출신 혈통)이 그르치는 일이 없도록 하소서 ⑤ 천리자순(天理自順)의 이치(理致)를 살피소서 ⑥ 공신가문과 권세가의 부패와 전횡을 엄단하소서 ⑦ 황실의 1년 예산은 왕족회의 승인을 받도록 해 권문세도의 관여를 없이하소서’ 였다. 이에 5부족이 반발하여 ‘을씨(乙氏)는 분명 구려(句麗)에 역심을 품고 외부와 사통(私通)하여 구려의 대권을 그르치려 하는 저의가 있어보이나이다. 마땅히 엄단하소서’ 하였다. 태왕이 말하기를 ‘을경의 개혁안이 다소 무리가 있는 것은 사실이나 들어줄 말도 있고 또한 외적과의 내통여부는 증거가 없는데 어찌 함부로 벌을줄수 있는가’ 하며 결단내리지 못하였다. 이에 소노부 일부가 을씨집안을 몰래 면밀히 살핀뒤 ‘을경과 을우 형재가 사병(私兵)을 두고 있는데 그 세력이 지나치게 커지고 있고 심지어 이민족출신까지 받아들이고 있나이다. 어찌 역심이 없다 하리까’ 하여 태왕이 그제서야 놀라 잔싱을 조사토록 했다.
을경이 태왕앞에 머리를 좋아려 세 번 땅에 찧으며 피눈물 흘려 말하기를 ‘을씨가 대대로 구려의 충신이며 신(臣) 또한 선대(先代)로부터 충의(忠義)의 도(道)를 가르침 받아왔거늘 어찌 이제와 다른뜻이 있으리이까. 단지 구려의 만세평안과 백성들의 안녕을 바랄뿐 다른뜻이 없나이다’ 하였다. 5부족이 거듭 반발하며 을경을 탄핵하려드니 다시 태왕에 말하기를 ‘신의 어린딸을 후비로 바쳐 신에게 다른뜻이 없음을 밝히겠나이다.’ 하였다.
이때 태왕에게 정비(正妃) 박씨가 세상을 떠난지 14년 세월이건만 다만 시녀(侍女)출신 후궁 둘이 있을뿐 새로이 장가들지 않아 후바(後妃)가 없었다. 신료들이 여러차례 태왕애게 재가를 권하였으나 태왕이 듣지 않았는데 이때 을경의 청을 받아들여 그 외동딸 을홍(乙紅)을 후비로 받아들이니 이때 나이 17세였다.
앞서 태자가 동문(同門)들과 함께 성천(成川) 고을을 순행한바 있는데 성천은 본래 을씨(乙氏)의 경작지(耕作地)였다. 이전에 백광이라는 자가 있어 종종 부녀자나 어린아이를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납치하여 먼 외국으로 팔아넘기는 나변이 있어 나라에서 외국과 연합국을 결성 토벌하였는데 백광의 무리는 이때 멸살(滅殺)되었으나 이후 잔당이나 혹은 그 흉내를 내는 아류들이 있었다. 성천 인근지역에도 비슷한 흉내를 내는 무리가 있어 경계하였는데 이때 을경의 딸 을홍이 납치될 위기에 놓였는데 을홍은 을경의 무남독녀 외동딸이었다. 태자가 꾀를 내어 친우들과 함께 극적으로 도적떼에서 을홍을 구해낸뒤 연모하는 사이가 되었다. 을홍이 태왕의 후비가 된 것이 이후의 일인데 태자의 동문친우 극히 일부를 제외하곤 이 내막을 알지 못하였다.
18년. 태왕이 비로소 하늘로 돌아가니 즉위 18년이요, 향년(享年) 47세였다. 후비 을홍이 눈물로서 태왕의 장사(葬事)를 주관하였다. 태왕이 승하하기전 밀지를 내렸는데 태자에게 주는 것으로 세가지 내용이 적혀있었다. ① 북적 오랑캐는 경계하며 남의 우호국과는 화친할 것 ② 5부족을 화친케 하여 분란을 없이할 것 ③ 을씨(乙氏)와 연씨(延氏)는 구려의 오랜 가문으로 충신가이니 그들의 충언은 받아들이되 어좌를 범하는 일이 없도록 경계할 것‘ 이었다. 을홍이 밀지를 전해주니 태자가 눈물로 받았다.
天開太王記
새로운 태왕이 즉위하니 그가 천개태왕(天開太王)이다. 이때 나이 19세였다. 법도대로 선왕(先王)의 정비(正妃)가 태후가 되어 신왕(新王)의 즉위식을 주도하고 손수 면류관을 씌워주었다. 조서를 반포하였다.
1년. 태왕이 몸소 태후가 거처할 전각을 세워주고 이름을 태모전(太母殿)이라 하였다. 본래 황궁안에 태후나 태황태비가 거처하는 처소가 있었는데 별도의 전각을 세워주는 것이 이전에 없던 일이라 다들 의아하게 여겼다.
구려가 태초부터 철따라 하늘에 천제(天祭)를 올렸는데 제천행사를 올리는 곳을 천궁(天宮)이라 불렀다. 황도에 있는 천궁이 규모가 가장 커서 평상시 10여명의 도사(道師 : 도사는 급수에 따라 태을도사(太乙道師),태도사(太道師),대도사(大道師),해도사(海道師)로 나뉘어져 불렸다)와 30-40여명의 신녀(神女)를 두어 천궁을 관리하며 제사와 백성들의 소원(所願)의식을 관장하였다. 신녀의 공식 명칭은 선녀(仙女)였는데 급수에 따라 대선녀,중선녀,소선녀라 불렸고 아직 수련중인 신급(新級) 신녀는 ’애기선녀‘라고 했다.
아때 중선녀(中仙女)로 소희(素希)라는 이가 있었는데 태왕보다 나이는 네 살 많았다. 태왕이 어릴때부터 제천의식때 들르다 가까워졌는데 태자시절부터 종종 개인적 근심이나 국정과 관련된 일을 의논하다 가까워졌다. 다만 신녀의 신분상 소희가 혼인할수 없고 태자 또한 그 신분 때문에 두 사람은 개인적인 고민이나 국정을 의논하는 친우(親友) 그 이상의 사이가 될수 없었다.
태왕이 태자시절 한번은 이런일이 있었다. 한 고을을 옛 벗들과 거닐다 한 여인을 알게되었는데 이름은 백옥(白玉)이라 했고 대사자(大使者) 벼슬을 하는 백만경(百萬敬)의 손녀였다. 혼인할수 있겠다 하여 태왕이 마음에 두었으나 백만경이 내막을 알고 기겁하여 반대하였다. 사연인즉슨 이랬다. 본래 태왕의 생모(生母)였던 진명태왕의 정비(正妃) 박씨는 본래 신국에서 귀순해온 집안의 자손으로 조부때부터 국경 인근 지역에서 살고 있었다. 5자매가 있었는데 그중 맏이가 박씨요 이때 살림이 가난하여 딸 하나를 입양보냈는데 넷째딸로 원래 어릴 때 이름은 아진(娥眞)이었다. 입양보낸곳이 대사자 백만경의 집안으로 백만경은 이때 조정의 하급관리로 일하는 젊은 나이였고 이미 아들 셋이 있었다. 아진이 세월이 흘러 혼인을 하여 딸을 낳으니 그 이름이 ’백옥‘이다. 따라서 혈연으로 따지면 태자에게 외가로 사촌뻘이라 혼인할수 없었다. 백만경이 뒤늦게야 진상을 알리고 불가(不可)의 뜻을 밝혔다.
한번은 또 이런일이 있었다. 구려가 종종 거란이나 여진 혹은 말갈에서 귀순해오는 이들중 여인을 귀족집 시녀나 하녀로 쓰는일이 있었는데 이때 구려의 공신가문인 엄상원의 아들 엄기준의 집에서 일하는 말갈족 출신 설란(薛蘭)이란 여인이 있었다. 말갈족 시절에 무예를 배웠기에 집안에서 사병들을 관리하는 일을 맡겼다. 태왕이 태자시절 역시 종종 집에 들르다가 친분이 생겼다. 허나 구려의 법도상 황족은 구려의 순혈을 지키기 위해 외족(外族)과 혼인할수 없어 이 역시 이룰수가 없었다.
어떤이가 탄식하여 말했다. ’우리 태왕(太王)께선 참 복도 없으시지. 천하를 다 가지셨으나 다만 여인은 취할 수가 없구나. 한 사람은 이미 부왕(父王)의 여인이 된 이라 취할수 없고, 또 하나는 순결(純潔)을 지켜야 하는 신녀(神女)이니 그리할수 없고, 또 하나는 알고보니 외가쪽 혈연으로 연결된 여인이라 그리할수 없고 또 다른 하나는 외족혈통이라 황궁의 법도상 취할 수가 없으니 이런 딱한 나변이 어디있단 말인가.‘
2년. 이때에 태왕은 종종 태모전에 들렀는데 안에서는 종종 구슬픈 울음소리가 들려 내인과 궁녀들이 그 뜻을 몰라 당황하였다. 태왕은 태모전에 들르면 보통 일주일 이상을 안에서 나오지 않기도 하며 때로는 국사의 처결까지 그곳에서 하였다.
태왕이 태자시절 사냥을 하며 순행하다 얻은 친우가 넷 있는데 이름이 조표(趙票),진경(陳景),어성규(漁成圭),서태원(徐泰原)이었다. 모두 용맹이 절륜하여 태왕이 된뒤 이들을 모두 대장군(大將軍)으로 중용하니 세상이 이들을 태왕의 ’측근 4대장‘이라 불렀다.
어느날 태왕이 일주일만에 태모전에서 나와 비상회의를 소집한뒤 조표와 진경을 앞세워 거란과 여진을 습격하였다. 70여 부락을 격퇴하고 1천인도 넘는자를 노예로 삼으며 그 세력이 마침내 염수(鹽水) 바닷가에 이르렀다. 거란과 여진의 족장들이 두려워하며 공물을 바쳐 사죄하였다.
3년. 원봉국에서 사신을 보냈다. 이때 원봉국은 태조(太祖) 모용황에 이어 즉위한 중제(中帝) 모용수마저 세상을 떠나고 삼대(三代) 모용보가 즉위해 있었다. 즉위 사실을 알리는 사신을 보낸뒤 이전 태조시절 확정한 양국간 국경이 문제가 있다며 재논의를 제안하였다. 태왕이 듣지않자 모용보가 친정하여 구려 10여고을을 습격하였다.
태왕이 태모전에서 사흘을 울다 뛰쳐나와 군사를 이끌고 원봉을 습격하였다. 300여 결사대로 원봉국 7천여 병사를 격퇴하니 원봉이 두려워 감히 가까이하지 못하였다. 태왕에게 사죄의 공물을 올린뒤 화친을 청하였다.
5년. 3월. 태왕이 태모전에서 일주일만에 나왔는데 다리를 상했는지 약간 절고 있었다. 얼마후 장수 어성규,서태원을 시켜 백잔을 치게 하니 백잔 50여 고을이 항복하였다. 백잔의 어라하가 공물을 보내 사죄하였다.
5월. 태왕이 사흘만에 태모전에서 나왔는데 이유없이 칼을 들어 장막 여기저기를 치니 다들 뜻을 알 수 없어 의아하였다. 이때 원봉에서 사신이 왔는데 이전의 일들을 사죄하며 다시 화친키를 청했다. 태왕이 듣지않고 4대장에게 두시 명해 군사를 일으켜 원봉을 쳤다. 원봉인 1천여인을 포로로 잡거나 투항을 받아들였다.
10월. 태왕이 이번엔 거란,여잔을 다시 치니 태모전에서 나온뒤 얼마 지나지 않을때의 일이다. 4대장을 앞세웠는데 조표의 용맹과 서태원의 지략이 빛을 발하였다. 거란,여진 70여 부락을 함몰하고 1천여인도 넘는 오랑캐를 짓밟았는데 이때 거란은 아직 이름이 없이 서로를 ’야야(也也)‘라고만 불렀다. 야야중 어떤이가 참형을 당하기전 하늘을 우러르며 울며 말하기를 ’오늘은 우리 거란이 힘이 없어 구려 오랑캐의 말발굽에 짓밟히나 훗날 나의 자손들이 남과(南傀)의 창자를 씹어먹을날이 올겄이다.”
6년 1월. 태왕이 다시 백잔을 치니 다들 두려워하며 벌벌떨었다. 신국이 백잔의 화가 자신들에게도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공물을 보내 화친을 청하였다. 태왕이 공믈은 받되 회찬의 청은 들어주지 않았다. 4대장에게 명해 다시 거란,여진을 치게했다.
3월. 다시 군사를 일으켜 원봉국을 치니 원봉국은 영토 절반이상을 잃어버리고 수도를 서북쪽 500리 떨어진 알천(軋泉)이란 곳으로 옮겼다. 알천은 지명국과 흉노왕국등과 국경을 맞닿은곳이다. 태왕은 기세를 몰아 지명도 칠 기세였으나 지명이 사신을 보내 공물로 달래니 태왕이 일단 돌아갔다.
5월. 태모전에서 슬피우는 소리가 들리더니 태왕이 다시 군사를 일으켰다. 원봉국을 멸하게 하고 지명국에 이어 흉노의 국경까지 침탈하였다. 흉노가 노하여 우리에게 반격하려 들었으나 조표와 서태원이 파놓은 함정이 있어 모두 그곳에 빠져 패퇴하였다. 거란,여진을 쳐서 다시 1천여인을 척살하고 2천여 포로를 붙잡아왔다. 포로로 잡은이들은 모두 구려귀족의 노예로 삼게했다.
7월. 태왕의 거듭된 침탈로 멸망직전에 이른 원봉이 부흥하였다. 모용부가 죽고 4대 모용희가 즉위하였는데 모용희는 모용보가 그 부왕의 후궁과 사통하여 낳은 아들이었다. 이때 나이 16세였다. 총명하여 원봉의 옛 충신가 자손들을 규합하여 세력을 일으키려 들었다. 태왕이 다시 침힙하려 들자 충산 원규(原圭)가 말렸다. ‘옛부터 어린아이는 학대하는 것이 아니요, 갓태어난 신생국은 함부로 침략하는 것이 아니라’ 했습니다. 원봉이 예전 태왕께 굴복한 전례가 있으니 지금 치지 말으시고 다만 화친의 뜻을 청하여 백성을 평안케 하소서‘ 하였다. 태왕이 충신의 뜻을 받아들였다.
10월. 금강산 유역에서 잦은 말썽이 있었다. 금강산은 신국과의 접경지대다. 신국이 태왕의 침탈을 두려워하여 사신을 보냈으나 태왕이 듣지 않았다. 신국의 황도를 급습하니 왕은 왕은 악룡담 연못에서 자결하였다. 첨성단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7년 2월. 백잔의 어라하가 몰래 원봉과 지명에 사신을 보냈는데 서찰의 내용이 이와 같았다. ’구려의 태왕이 이전과 달리 이웃국 침략이 잦으니 이는 사사로운 감정과 관련이 있다 들었소이다. 이제 마땅히 태왕의 사감을 건드리고자 하니 두 나라가 협조해주시오‘ 하였다. 태왕이 서찰의 내용을 강탈한뒤 노하여 백잔을 침략하였다. 50여 부락을 빼앗고 700명도 넘는 백성을 학살하니 마침내 어라하가 몸소 무릎꿇고 피눈물을 흘리며 청하였다. ‘천한 어라하가 태왕께 반역한 죄는 백번 죽어도 남음이 있으니 불상한 백성들을 해치지 마소서. 특히 힘약한 노인과 아녀자,어린아이,장애인은 궁휼히 여겨주시옵고 다만 이 천한 어라하의 목을 베어 사지를 찢으신다면 천한 어라하는 저승에서도 태왕을 원망치 않겠나이다’ 하였다. 태왕이 뜻대로 목을 베었다.
5월. 태왕이 다시 사흘만에 태모전에서 슬피울며 나온뒤 대대적인 북방정벌을 천명하였다. 4대장을 앞세운뒤 거란,여진을 정벌하여 100여 고을을 침탈하고 1천여인을 죽이고 2천여인을 포로로 잡으니 거란,여진은 모두 태왕을 두려워하여 ‘살생태왕(殺生太王)’이라 불렀다. 또한 마침내 원봉국을 멸하고 이어 지명국까지 정벌한뒤 흉노의 국경과 대치하니 흉노에선 우리 태왕을 ‘개광태왕(介狂太王)’이라 불렀다. 이때 원봉국을 멸하면서 백성 1천인을 죽이고 3천인을 포로로 데려오며 원봉국 왕족을 모두 멸살하였으나 다만 모용희만은 처지를 딱히여겨 살려주었다. 모용희는 이후 자신의 무리 일부를 데리고 1천여리를 달아나 그곳에서 소왕국(小王國)을 세웠다. 훗날 모용희가 나이 70에 이르렀을 때 나이어린 첩실을 두었는데 첩실은 근시와 사통하여 아이를 낳아놓고 모용희의 아이라 속였다. 나중에 모용희가 이를 알고 격노해 어린 첩실의 등뼈를 꺾어 죽였다. 하지만 이는 먼훗날의 일이다.
태왕이 주령국마저 정벌할 기세였다. 주령국이 본래 원봉국 서부에 위치해 있었는데 공물과 사신을 보내 태왕을 달래니 그제서야 태왕이 돌아갔다.
8년. 이때 한 상신이 말하기를 ‘태왕이 늘상 태모전에 들어갔다 나오기만 하면 외적정벌에 나섰는데 그 곡절을 알만한 이가 있을까 ?’ 하니 아무도 그 뜻을 알지 못하였다. 다만 시절이 많이 흐른후 태왕이 썼다는 시 한수가 발견되었는데 내용이 이와같았다.
‘ 이룰수 없는 연분있어 천지를 헤매이네 / 천리사방을 다 얻어도 가질수 없음이 있나니
하찮은 풀벌레는 짐의 마음을 알까 / 천지황제(天地皇帝)의 처지가 미물만도 못하더라 ’
5월. 신료 일부가 신녀 소희의 태왕과의 옛 인연을 알고있어 소희로 하여금 태왕을 달래게 하였다. 이때 소희는 천궁의 대선녀로 있었는데 신료들의 청을 받고도 ‘나는 천명(天命)을 받들어 천제(天祭)를 받드는 몸이니 국사에 관여할수 없고 또한 천국(天國)의 신녀(神女)로서 지켜야할 순결이 있나니 어찌 내가 태왕을 달랠수 있겠는가’ 하며 도울수 없음을 탄식하였다.
9년. 마침내 한 상신이 나서서 말했다. ‘그대들이 구려(句麗)의 녹을 먹으면서도 불충함이 어찌 이와같을수 있는가. 무릇 한 집안의 자손이면 적절한 나이가 되면 혼사를 이루어 집안의 대를 잇게 하는게 가문의 근본이요. 한 나라의 임금도 마땅히 적절한 때에 국혼(國婚)을 이루어 후사(後嗣)를 보아 대통의 근본이 끊이지 않게 하여야하거늘 어쩌 이 문제를 이토록 소홀히 하는가’ 하였다. 중신(中臣) 백청(白靑)이 탄식하며 반박하기를 ‘태왕께서 남다른 사연이 있으시에 혼사에 뜻이 없음을 알만한 이가 다 아는데 어찌 우리가 쉬이 논할수 있겠는가’ 하였다. 다시 한 노신(老臣)이 나서서 말하기를 ‘백방으로 노력하면 어찌 하늘이 감읍하여 우리의 염원을 듣지 아니하겠는가. 무릇 ’사람이 힘써 일을 다한후 천명을 기다린다’ 했거늘 무릇 백방으로 태왕의 적절한 혼처를 찾아보도록 하세’ 설득하였다.
10년. 이때 구려에 철과 구리제품 그리고 금은세공품을 만들어 팔아 부자가 된 안영기라는 이가 있었는데 세상은 그를 ‘안행수’라 불렀다. 천한 장사치였으나 어느덧 구려에서 세손가락 안에 드는 부호가 되어 종종 조정에서 그를 불러 종사를 함께 논의했다. 이때 그에게 딸이 하나 있음을 안 신료들이 안행수에게 제안하니 안행수가 감읍하여 ‘신의 여식으로 구려의 대통여 이어진다면 이 은혜 저 세상에서도 잊지 않을것입니다’ 하였다. 다만 안행수도 태왕의 사연을 대충은 들어 아는지라 다소 근심하였다.
안행수의 딸 정연(貞蓮)을 마침내 황후로 맞이하니 그녀의 나이 20세였다. 혼례식을 마치고 태왕은 모처에서 술을 잔뜩 마신뒤 취해서 들어왔는데 황후를 품에안고 흐느끼며 독백하기를 ‘다만 태후꼐서 그저 평안케 사시기를 바라오’ 하였다. 황후가 기겁하여 태왕을 밀쳐내며 ‘내가 태후의 대신인줄 아는가 ? 나를 품에 안고 속으로 태후를 생각하면 이런 혼사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 하며 장검을 뽑아들어 태왕에게 덤벼들었다. 태왕이 만류하려 하였으나 쉽지 않았고 시녀들이 달려들어 만류하려다 애꿎은 한명이 칼에 찔려 사망하였다. 황후가 그제서야 놀라 ‘신의 용렬함을 사죄하옵니다.’ 하니 태왕은 근시와 시녀들을 불러 ‘오늘의 일은 모두 내죄다. 이 일을 더는 거론치 말라’ 하였다.
13년. 혼인 3년동안 황후가 아이가 없다 그제서야 딸을 낳았다. 첫딸을 낳은뒤 황후가 혼자 태후전에 들어 독주를 내밀며 자결을 권하니 태후가 울며 ‘내가 종사에 지은죄가 많음을 아니 황후의 뜻대로 하겠다. 다만 하늘에 맹세코 한번도 태왕과 불결한 행각을 벌인일이 없으니 믿어주기 바라오’ 하였다. 황후는 더 듣고싶지 않다며 다만 독주를 거듭 들것을 권하니 마침내 태후가 마시고 자결하였다.
이어 황후는 신녀전을 찾아 소희를 불렀다. 소희가 이때 ‘대선녀’로 있었는데 다른 중선녀,소선녀를 모두 부르게 한뒤 소희를 묶게 하고는 ‘네 스스로 죄를 알렸다’ 호통쳤다. 소희가 억울해하며 ‘소녀는 다만 국사에 근심하는 태왕께 잠시 위로와 상담처가 되어드린것뿐 다른뜻이 없었나이다’ 하였다. 황후는 더 듣고 싶지 않다며 소희를 자루안에 넣도록 한뒤 신녀들로 하여금 몽둥이로 때려 죽이라 했다. 처음 선녀들이 차마 대선녀를 치지 못하자 ‘만일 인정을 남길시 소희와 같은 죄가 있는 것으로 간주하겠다’ 호통치니 비로소 선녀들이 있는힘껏 소희를 쳐 결국 죽게 하였다. 말갈녀 설란은 이때 종종 거란,여진등을 오가며 태왕의 밀서를 대신 전달하였는데 과정에서 의문의 병사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백옥은 이때 이미 다른이와 혼인하여 아들셋이 있었는데 자신에게도 화가 미칠 것을 우려하여 자녀들과 함께 신국으로 망명하였다.
태왕이 격노하여 7천의 병사를 이끌고 백잔과 신국을 쳤다. 백잔 50여 고을 신국 70여 고을을 쓰러트리고 1천여 백성을 죽이거나 잡아가니 백잔과 신국의 왕이 모두 두려워 울면서 공물을 보내 태왕을 달랬다. 태왕은 이때 진섭과 마승이란 책사까지 등용하여 왜국정벌까지 논의하려 들었으나 신료들이 만류하여 그만두었다.
15년. 황후가 2년만에 또 딸을 낳으니 둘째였다.
이때 황후가 조정에 명하여 구려 귀족가의 성씨들을 조사,정리하도록 했다. 조사해보니 5부족중 소노부의 성씨가 8개, 순노부의 성씨가 9개, 관노부의 성씨가 7개, 절노부의 성씨는 6개, 계루부의 성씨는 5개, 여기에 공신가문인 을씨와 연씨 왕족가문인 고씨(高氏)와 해씨(海氏)를 포함 구려에는 총 39개의 성씨가 있었다. 황후가 이들 성씨 세보를 편찬케하니 ‘구려성씨록(句麗姓氏錄)’이라 불렀다. 1천여부를 발행하여 각 귀족가문마다 보관,보존케 하여 성씨의 뿌리를 바로하고 혼란이 없도록 하였다.
18년. 황후가 3년만에 다시 딸을 낳으니 셋째였다. 무탈하게 지나갔다.
20년. 황후가 2년만에 다시 넷째로 딸을 낳았다.
태왕이 이때 왜국정벌을 구상하고 천명하였다. 신료들이 반대하며 말하기를 ‘왜국은 예부터 반도 동남방에 위치하여 섬이 7천여개가 되고 수로가 복잡하나이다. 또한 풍속이 미개하고 날씨가 더워 정벌한들 아무런 실익이 없나이다. 태왕께서 즉위후 10년동안 너무 잦은 전란을 일으키시어 다들 근심하시다 한동안 정벌을 꾀하지 않으시어 안심하셨는데 어찌 이제외서 다시 무리수를 두시나이까 ?’ 하였다. 이에 태왕이 말하기를 ‘왜국이 예부터 잦은 노략질로 백잔과 신국의 남해한을 핍박하였고 많은 부녀자와 아이들을 납치해가 고통이 이만저만 아니라는 보고를 들었다. 본래 반도에 삼국이 있어 구려,백잔,신국이니 그 뿌리가 환인(桓因)에 있어 어찌 한 형제라 아니할수 있겠는가. 옛 문헌을 고찰하면 삼국중 구려가 제일먼저 났으니 이는 집안의 3형제중 맏이와 같다. 형으로써 어찌 동생들의 고통을 보고만 있겠는가 ? 내 이제 스스로 칼을들어 저 방자한 바다건너 오랑캐를 쳐 아우를 핍박하는 저자깡패들의 만행일 징벌하여 그 본보기를 삼고자한다’ 하였다. 황후도 반대하며 말하기를 ‘폐하께서 이전에 일으킨 잦은 전란을 두고 어떤이들은 이는 태후전의 문제와 무관치 않다하여 말들이 많았나이다. 이제 음탕한 태후는 죽고 구려에 평안이 와서 왕실 법도를 바로 잡을수 있게 되었는데, 어찌 태왕께서 다시 무리하시나이까 ?’ 하니 태왕이 뿌리치며 ‘여인이 나설일이 아니다’ 하였다.
마침내 임충,몽염이라는 이를 책사로 등용하고 해동환(海東煥)을 수군대장으로 임명 대대적인 왜국정벌을 꾀하려했는데 이때 마침 태풍이 불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오고야 말았다.
22년. 황후가 2년만에 또 아이를 낳았는데 마침내 원자를 보았다. 혼사를 치른지 무려 12년만이요 딸 넷을 내리 낳은뒤 본 아들이다. 이름을 이홍(伊洪)이라 지었다. 황후가 원래 천성이 잘 울지 않아서 남자같다는 소리를 들을 지경인데 이제야 비로소 눈물을 흘렸다.
태왕이 다시 왜국정벌을 꾀하였다. 신료들이 때가 좋지않고 명분이 없다며 만류하였으나 태왕은 거듭 칼을들어 ‘내 저 방자한 오랭캐들에게 천지법도를 제대로 가르치고 신묘년(申卯年)의 치욕을 씻고자한다’ 하였다. 몸소 다시 수군을 조직하여 출병을 독려하는데 황후가 근심하다 출진전날 태왕을 침소에 들게했다. 그리고 독이든 환약을 술과함께 먹이니 태왕이 세상을 떠났다.
황후가 국상을 반포했다. 그리고 법도대로 자신이 태후가 되어 왕자를 차기 태왕에 앉히려 하니 신료들이 반대하였다. ‘원자아기씨는 이제 갓돌도 지나지 않은 어린 아기입니다. 이제 우리가 태왕(太王)의 갑작스런 붕어(崩御)란 망극지변을 만나 그 황망하기 이를데 없고, 나라에 하루도 근본이 없으면 안됨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나 자고로 후계자가 어릴때는 섭정이나 수렴청정을 하는 사례도 없지는 않았나이다. 다만 우리 구려의 법도는 타국(他國)과 달라 장자(長子)가 현명치 못하면 다른 왕자들중에 후계를 정하기도 했고, 왕자가 너무 어릴시엔 섭정이나 수렴청정을 한 사례도 없지는 않으나 이럴때는 항상 왕족회의의 승인을 받았나이다. 마땅히 태후께서도 왕족회의로부터 다른 승계후보 추천을 받아보신뒤 논하소서’ 하였다.
이때 왕족회에서 ‘옛 서문태왕의 장남 일동(逸東)의 아들 승규(承圭),승진(承眞)이 모두 나이 스물이 넘어 장성하였으며 삼남 일원(逸原)의 아들 효천(孝川)과 효국(孝菊) 역시 그 학문과 기상이 남다를데 없다하니 황후께서 친히 이들을 직접 면담해보신후 결정하소서’ 하였다. 허나 황후가 몸소 칼을들고 회의장에 들어와 말하기를 ‘지금 엄연히 선대의 정비인 내가 있어 법도대로 태후가 될수 있으며 이미 원자가 있어 능히 즉위식을 치러 후계를 세울수 있는데 다른 대안을 의논함은 당치않다. 어찌 이미 선황의 혈손이 멀쩡히 있는데 이제와 먼 종친을 후계로 세우는 무리수를 둘 필요가 있는가. 더는 거론치 말라’ 하며 거듭 칼을 휘두르니 종친도 신료들도 아무도 감히 나서지를 못했다.
마침내 황후가 몸소 태후가 되어 즉위식을 치르고 새 태왕을 세우니 그가 장봉(長奉太王)이다. 나이가 어려 태후가 몸소 국정을 주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