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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울싱잉커플즈 (서울부부합창단) 원문보기 글쓴이: 주형동
동행의 길, 스페인 산티아고 여행기
2부
여행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음미할만한 좋은 격언이 있습니다.
․ 사람을 젊게 만드는 것이 둘 있다. 하나는 사랑이요, 또 하나는 여행이다.
․ 젊어지기를 원하는가? 될수록 여행을 많이 하라 -미상-
․ 여행과 변화를 사랑하는 사람은 생명이 있는 사람이다. -바그너-
․ 바보는 방황하고 현명한 사람은 여행을 떠난다. -T.플러 -
․ 세계는 한 권의 책이다. 여행하지 않는 자는 그 책의 단지 한 페이지만을 읽을 뿐 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산티아고로 가는 옛길이 오랫동안 마비 상태에서 있다가 다시 깨어났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한층 더 확산되는 순례 열풍이 이 길에 불어 닥치고 있습니다.
초대형 항공기와 고속열차가 관광객을 실어 나르고 초고속 요트가 대서양을 횡단하지만, 또 한편으론 수 천 명의 수 만 명의 사람들이 배낭을 짊어지고 집을 떠나 달팽이처럼 느릿느릿 흙길을 걷고 산야을 누빕니다.
아마도 그들은 이 시대를 앞서 나가는 선구자들인지도 모릅니다.
일곱 살에서 일흔 일곱 살 때로는 그 이상 연령대도 다양한 이 장정의 신봉자들은 6대주에서 왔고 갖가지 사회계급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온갖 종파에 속한사람들과 종교가 없는 사람들로도 가득 길을 메웁니다.’
- 어느 산티아고 여행기 中 -
나의 친구 노란 화살표..
이제 안내 표시인 노란 화살표는 어느 새 정이 들어 안 보이면 불안하고 허전하여 친구를 잃은 것처럼 조바심이 날 정도가 되었다. 그러다 화살표가 나타나면 그리도 반가울 수가 없다. 산티아고 카미노에서는 길을 안내하는 몇 가지의 표시가 있다.
노란색의 화살표이다. 노란 페인트를 이용해 직접 땅 바닥 혹은 전봇대나 담장 또는 큰 돌맹이 등 눈에 잘 띠는 곳에 표시해 놓는다. 그것도 도로의 차선 라인처럼 정형화된 것이 아니고 약간은 비뚤고 크기도 제 각각이며 일일이 손길이 간만큼 친밀감이 느껴진다.
또 하나는 조가비의 표시이다. 보통은 길가에 비석처럼 약 1미터 가량 높이의 사각 기둥을 세워 노란색 조가비를 표시해놓는다. 또는 조가비만 화살표처럼 필요한 자리에 붙여놓는 경우도 있다.
지나는 길마다 헷갈리지 않도록 정성을 들여놓지만 시가지에서는 가끔씩 놓쳐서 애를 태울 때도 있다. 하지만 사람들을 통해 물어보면 잘 가르쳐 주어서 길 찾는 것은 어려움이 없다.
순례자(Peregrinos, a Pilgrim)의 표시, 또한 카미노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수도사가 한 손에 지팡이를 들고 걸어가는 모습을 새겨놓아 성지 순례길 임을 표시해 놓는다.
조가비는 산티아고 카미노의 상징이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순교한 야고보의 유해를 몰래 싣고 야고보의 제자들이 도망을 한다. 세계의 끝 지금의 피니스테라까지 싣고 가다 추적자들에게 쫒겨 강에 빠지게 되었는데 야고보의 이름을 부르자 조가비가 감싸서 그들이 살아났다고 한다. 그리하여 카미노의 순례자들은 조가비를 달고 다님으로서 야고보 성인이 순례자를 지켜 줄 거라고 믿고 있다고 한다. 생장피드포르 순례자 사무실에서 수속을 마치고 맨 먼저 받는 선물이 바로 이 조가비이다. 첫 인상의 깊은 감동이 밀려온다.
추수가 끝난 들판에 멀찌감치 젊은이들이 지름길로 가로질러 간다. 그들을 따라 갔다가 결국 길을 헤매고 말았다. 뒤를 따르던 사람들과 뒤늦게 지도를 꺼내 길을 찾아 나섰다. 갈래 길에서 비행장 담장 옆으로 새로 개통이 되어 있는 것을 놓친 것이다. 여기서 공장 지대를 지나 대로를 건너게 되는데 간혹 표시가 명확치 않아 표지판을 눈 여겨 보아야 한다. 한 여자 순례자가 잰걸음으로 앞서가기에 아내에게 걸음이 빠르다고 얘기하며 걷고 있는데 삼거리 길에서 사라지고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한참 만에 씨익 웃으며 다시 나타났다.
아내가 그녀에게 “길을 잘 못 들었어요?” 그녀는 표지판을 잘 못 보았다고 한다. 우리도 몇 차례 길을 잘못 들어 시간을 허비한 적이 많았다.
16일 째에 접어들지만 아직까지 비 구경을 할 수 없다. 새벽공기는 쌀쌀하고 한 낮은 더위에 걷기가 더디다. 스페인은 금년 가을 비교적 비가 적다고 한다. 우리나라 같으면 농촌에서 벌써 가을 가뭄이다 물이 부족하다하여 방송에 나오고 소란스러울 것이다. 이곳은 밀농사가 끝나 해바라기와 포도농사를 하는 시기여서 오히려 충분한 일조량이 요구되니 비 걱정을 덜 할 것 같다.
어느덧 9월의 초순이 지나면서 일교차가 심해 옷을 껴 입었다가 오전 11시가 넘어서면 점점 더워지고 등에 땀이 흐르기 시작한다. 생각 같아서는 옷을 벗고 싶지만 햇볕 때문에 엄두를 낼 수가 없다. 나는 챙 모자를 쓰고 긴 바지와 반팔 상의에 팔 토시를 착용하고 있다. 하지만 얼굴은 더욱 새카매졌다. 서양 사람들은 거의가 반팔 반바지에 모자는 쓰지 않고 우리와 정 반대로 다 드러내놓고 여행을 즐기는 모습이다.
숙소에 도착하면 아가씨들은 한 술 더 떠 일광욕을 한다며 따가운 햇빛에 몸을 내놓고 있어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피부 자체가 우리와는 달라 그들은 아무리 태양열을 받아도 시간이 지나면 원래 피부색이 되어 별로 걱정을 안 하고 되레 태우는 걸 자랑으로 아는 것 같다. 특히 한국인은 전신을 감싸고 머리는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다녀 금방이라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이다.
아내는 여기에다 얼굴 가리게까지 하여 외국인들이 가끔씩 쳐다보며 지나가는데 마치 가면을 쓰고 다니듯 해 눈길을 끌었다. 식당에서 만난 낯익은 아일랜드 할아버지가 아내에게 다가오더니 얼굴을 가리키며 “얼굴을 가린게 뭐요?”하고 물어온다. “햇빛 가리게 예요”하며 열어 보여주었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다는듯 웃어보인다. 아마도 얼굴에 피부병이나 또는 상처가 있어서 가리고 다니는 줄로 알았던 모양이다. 햇빛이 필요한 그들에게는 왜 가려야 하는지 이해를 못 할 것이다.
이곳 스페인 땅에 와서도 한국 여인들은 햇빛 때문에 타지 않으려 갖은 애를 쓴다.
우리를 만날 때 마다 코리아 파이팅을 외치며 아주 반가와 하신 할아버지이다.
팔십 가까이 된 이분은 둘째 날 수비리 식당에서 알게 되었는데 일행과 함께 왔다가 혼자서 보름 이상을 걷고 있다. 어느날, 손녀같은 젊은 여자와 다정하게 함께 다니기에 딸인 줄 알고 여인에게 " 혹 할아버지와 손녀사이 인가요?" 하고 물었더니 손을 가로 저으며 아무사이가 아니라 해서 낭패를 본적이 있다. 그들은 나이 고하를 막론하고 쉽게 친해져서 함께 다니는 경우가 많다.
오르테가에서 부르고스는 산 하나를 넘어서 30킬로 가량을 가야한다. 1시간을 걸어 작은 시골 마을이 보였다. 대학생들로 보이는 젊은이들 한 떼가 몰려가니 이른 아침 조용하던 마을이 갑자기 시끌벅적 해진다. 걸음이 어찌 빨라 뒤를 따랐지만 결국 놓치고 말았다. 우리는 우리보폭이 있어 따라가기에 무리다.
바로 보폭 때문에 생긴 일이다.
어느 날 새벽, 안개 자욱한 숲 길을 걷고 있는데 유럽에서 온 남여 대학생 7명을 만났다. 아무래도 함께 걷는 게 편할 것 같았다. 길을 찾으며 가는 것 보다는 뒤따르면 훨씬 부담이 적기 때문이다. 헌데 그게 문제였다. 두 시간 가량 같이 걷는 동안 그들과 걸음을 맞추느라 아내와 나는 있는 힘을 다했다. 약간 숨을 돌리면 저만치 멀찌감치 달아나는 그들을 보며 걸음을 재촉하였다. 호흡은 가빠오고 땀이 흘렀다. 이들은 어둠속에서 어찌 빨리 걷는지 따라가기에 정신이 없을 정도이다. 걸음이 빠른 것 같지 않아 보이는데도 그들은 보폭이 큰데다 쉬지 않고 걷기에 만만치가 않았다. 산길을 지나 마을에 접어들자 바아에서 커피를 마신다며 쉬어간다 했다.
그제서야 우리는 헤어져 천천히 걸었다. 하지만 이것 때문에 이튿날은 힘이 들어 제 컨디션을 찾지 못하고 그 다음 날까지 이어졌으니 하나의 좋은 경험을 한 셈이다. 우리 속담이 생각난다. ‘뱁새가 황새 걸음하다 가랑이가 찢어진다’ 딱 맞는 말이다. 이 나이에 젊은이들과 함께 하려고 오버 페이스를 했으니 그러할 밖에 없다. 우리는 우리의 걸음으로 걸어야 제격이다.
왕국의 도시 부르고스 ( 오르테가- 부르고스 30k. 9/9)
해발 860미터에 위치한 부르고스는 카미노에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로서 중세 때 이미 눈부신 산업발전을 가져왔다. 한때 카스티야 왕국의 수도이기도 한데 여기에는 스페인 3대 성당중 하나인 부르고스 산따마리아 대성당이 있다. 실제 성당의 규모가 커서 상상을 초월하였다. 스페인 3대성당은 세비아, 톨레도, 부르고스 대성당이다. 중세 고딕양식의 대표적 건축물로서 세 번째에 해당한다고 했다.
오르테가를 출발하여 부르고스에 도착하면 신시가지를 관통하여 성당 뒤에 공립 알베르게가 있다. 침대가 많고 시설이 매우 좋아 순례자들이 모여든다. 시간 여유가 있다면 이 도시에서 천천히 하루 이틀 쉬어가도 아쉽지 않을 만큼 볼거리가 많고 거리가 고풍스러워 여행자의 발길을 잡게 만든다. 원래 계획은 여기서 하루를 쉬기로 했다. 아내의 조급증이 발동하여 다음 날 출발을 하고 말았지만 아쉬움이 남는 도시이다. 한때 왕국의 수도인 만큼 고적과 역사적 가치가 있는 건축물들이 즐비하게 있어서 눈을 행복하게 해 준다.
멀리서 건물들 사이로 고딕양식의 성당 탑이 뾰쪽하게 보인다. 눈이 번쩍 뜨였다. 신시가지와 구시가지사이로 강이 흐르는데 다리건너 아름다운 산따마리아 아치를 통과하면 산 페르난도 광장에 이른다. 나체의 순례자상도 보인다. 광장 건너편에 웅장하고 위용을 자랑하는 대성당이 드디어 눈에 들어왔다. 산따마리아 대성당이 보는 이를 압도할 만큼 거대하다. 순례자들은 입장권을 구입하여 성당 내부를 둘러보면 좋다. 나는 성당안을 들어가서 ‘대성당의 십자가상’을 자세히 살펴보고 나왔다. 십자가상의 유래 또한 머리를 숙연하게 만드는데 뒤에 소개를 하기로 한다.
이런 도시의 중심에는 성당이 자리 잡고 있으며 건물 앞에 광장이 펼쳐지고 저녁이면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몰려든다. 광장 주변에 각종 상점을 비롯해 레스토랑과 카페 바아 등 가게가 빙 둘러 자리하고 있다. 여기에는 드물게도 광장이 2곳이 있어 저녁 8시경이면 만원을 이룬다. 그들은 맥주와 와인을 마시며 밤늦도록 시간을 보낸다. 시가지를 흐르는 아름다운 강과 석조 다리들은 옛날의 풍체를 자랑하며 과거의 위용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시내 구경을 하며 내일 먹을거리를 사러 대형 마트에 들렀다. 마침 오후 2시-5시까지는 휴식시간이라 문은 열었지만 손님은 우리 둘 뿐. 농산물이 싸다는 것은 익히 경험으로 알 수 있었다. 와인 1병 값이 1유로부터 시작한다. 이곳에서 굳이 비싼 와인 보다 값싼 토종 와인도 맛이 그만이다. 토마토와 과자 빵 등을 5유로에 샀다. 우리나라에 비하면 아주 저렴한 편이다.
부르고스 구 시가지에는 흥미있는 유적들이 셀 수없이 많다. 대성당을 비롯하여 15세기 건축물인 산 후안 수도원, 부르고스 수호 성인 무덤이 있는 산 레스메스 성당, 산 후안병원, 산따마리아 아치, 산 마르띤의 문등 둘러볼 것이 많다. 이곳에서 머물렀다면 모두 둘러볼 수 있었을 터인데 그렇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부르고스 대성당의 십자가 상’
부르고스 대성당에 있는 십자가상은 이 지역에서 가장 많이 경배 받는 성상이다. 중세의 한 부유한 상인이 플랑드로 여행을 떠나며 아구스띠노스회 수도자들에게 자신이 여행을 잘 다녀올 수 있도록 기도를 부탁했다. 보답으로 돌아오는 길에 좋은 선물을 가져오겠다고 했다. 그러나 상인은 배를 타고 귀국하면서 약속한 선물을 준비하지 못했다. 그런데 갑판 위에 서 있던 상인의 눈에 바다 위를 떠다니는 큰 궤가 보였다. 상인이 궤를 건져냈더니 그 안에는 사람 크기의 십자가상이 들어 있었다. 상인이 십자가가 담긴 궤를 싣고 부르고스로 돌아오자 도시의 모든 종이 저절로 울리기 시작했다.
죽은 이를 18명이나 살려냈다고 전해질 정도로 이 십자가상은 수많은 기적을 일으켰는데, 이 십자가에 메달린 그리스도 상을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아직까지도 의견이 분분하다. 이 그리스도상은 사지와 머리를 구부리고 움직일 수 있게 만들어져있다. <안내 자료에서>
실제로 부르고스 대성당의 북쪽 탑에는 두 마리 닭이 우는 조각과 내부 성당 정면에 십자가상이 걸려있다. 미사시간에 들어가 보니 많은 순례자들과 신자들이 십자가상에 경배하는 모습이 자못 경건하다. 십자가상을 직접보니 고개가 숙여졌다.
시내에는 수많은 성당이 분포하여 가히 스페인의 카톨릭 종교의 힘이 대단함을 느끼고 과거 이슬람과 카톨릭의 대립에서 현재는 전 국민의 80%이상이 카톨릭을 믿을 만큼 국교로 인정하게 되었다.
이틀 전, 작은 마을에서 60중반의 한국인을 만났는데 그이는 분당에서 왔다. 혼자서 산티아고를 30일 일정으로 걷고 있는데 배낭 무게만도 15kg이 넘고 하루에 30킬로 이상을 걸었다 한다. 그러다보니 발목에 이상이 생겨 쉬어간다며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기 아내가 배낭을 싸주는 대로 짊어지고 왔더니 20kg이나 되어 덜어낸 것이 이무게라 한다. 체구가 커서 별로 무게감을 못 느끼는가보다. 보통배낭의 1.5배의 무게인데도 말이다.
“누구를 기다리고 계세요?”
“제가 기다리는 사람은 한국인 한의사입니다.”
“한의사요? 이곳에도 한방병원이 있습니까?”
“아니요. 한국을 떠나올 때 여길 지나가면 한 번 만나 보라고 지인이 부탁을 해서 만나려는 겁니다.”
“그래서 전화를 해 기다리고 있지요.”
“여기서 30분 거리의 그리 멀지않은 곳에 한의원이 있답니다.”
그 한의사는 한국에서 대학을 나와 스페인으로 건너와서 병원을 개업한지 15년이 넘었다고 한다. 이민자인 셈이다. 잠시 후 둘이는 만나서 우리는 헤어졌다.
그런데 오늘 부르고스에 도착하니 헤어졌던 그 사람을 다시 만났다.
“그 날 한의사분과 잘 가셨나요?”
“예, 하루는 종일 골프를 쳤지요.”
“그리고 다음 날 쉬고 승용차로 이곳 부르고스까지 데려다주어 방금 도착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다시 얼굴을 보게 된 것이다.
부르고스에 도착해 셋이서 저녁을 먹기로 하고 같이 시내 구경에 나섰다.
문래동 부부가 뒤에 쳐져오면서 우리에게 부르고스에 먼저가면 성당 정문에 한국인이 운영하는 신라면 집이 있는데 꼭 가보라고 당부한다. 그동안 매일 빵과 과일 고기만 먹다 우리 라면과 음식을 먹지 못해 안달이 난 참이었다. 라면집을 물어가며 찾아보았지만 아쉽게도 찾지 못하고 말았다. 빰플로나에서 유일하게 중국인이 운영하는 가게에서 라면을 살 기회를 놓친 후 한국 라면을 파는 곳은 없었다.
알베르게에서 멀지않은 식당에 들어섰다. 이미 셋팅을 해놓은 식탁에 앉아 주문하여 나온 사라다를 먹고 나니 두 번째 메뉴로 불고기가 나왔다. 제법 큰 스테이크가 나왔다. 아내는 절반쯤 먹고 내 놓아 내가 먹었다. 그는 우리 부부가 함께 온 것을 부러워한다.
“왜 혼자서 왔나요?”
“아내는 몸이 허약하고 건강이 안 좋아서 나만 왔지요.”
“교회에 다니는데 그것 때문에도 못 올 겁니다.”
어딘지 약간 허전한 목소리이다. 우리는 와인까지 모두 비우고 식당을 나섰다. 다음날 오르니요스를 같이 걸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그는 전 삼성건설 사장을 지낸 장 0 0 이었다. 많은 얘기들을 나누고 헤어졌다.
오늘은 추석날, 지구촌의 보름달이 스페인에서도 여전히 둥글고 밝다. 7시 이전이면 사방이 어둡고 고요하지만 부르고스는 외곽을 빠져나가는 동안 거리의 불빛과 달빛으로 길을 환히 비추어 주었다. 거리를 벗어나자 넓은 광야가 희미하게 시야에 들어온다. 추수한 밀밭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비슷한 시간에 나온 순례자들이 각자 길을 향해 떠난다. 아침을 대강 먹었지만 아내는 얼마가지 않아 배가 고파온다고 한다. 이럴 때에는 희망사항이지만 마을 카페가 나타나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어림없다.
거미줄 같은 도로와 오가는 차량, 사람들로 붐빈 도시를 벗어나니 시원함을 피부로 느낀다. 배낭을 정리하여 길을 나서면 배낭의 무게감으로 오늘의 컨디션을 체크 할 수 있다. 전날 30킬로를 걷고서 시내 관광까지 몇 시간을 더 걸었으니 피곤한 채로 잠이 들었다. 역시 배낭의 느낌이 무겁다. 왼쪽 어깨가 불편하여 맬빵을 느슨하게 풀었더니 오른쪽 어깨로 무게가 옮겨온다. 2시간 쯤 걷자 이번에는 오른 쪽 어깨도 아파오기 시작한다. 컨디션이 그리 좋지가 않은 것 같다. 배낭은 가벼울수록 좋고 군더더기는 버려야 한다는 생각이 다시 떠오른다. 그러나 버릴 만한 것이 없으니 문제가 아닌가.
어느 순례자의 말처럼 ‘짐이 무거울 때는 눈썹도 내려놓고 싶다.’는 말이 생각이 난다. 고행 속에 체력의 한계에 다다르면 그러하리라. 지니고 있던 가이드 북이 무거워 하루 지나면 한 장씩 떼어냈다지 않은가. 나는 걷는 도중에 영어 회화 책과 가지고간 우산을 버렸다. 그리고 네모난 깔개는 잃어버렸는데 잘 됐다 싶었다. 무게가 조금이라도 줄어들어 아깝지가 않았다.
드디어 따르다호스 마을이 보인다. 반갑기 그지없다. 일행 셋이서 카페에 짐을 내려놓고 잠시 쉬며 음식을 주문을 했다. 커피와 샌드위치를 잘도 먹는 아내! 식성도 변하는가보다. 즐기지 않던 커피를 거침없이 맛있게 마신다. 휴식이 좋긴 좋은가? 배낭에 짓눌린 어깨가 한결 가벼운 것 같다. 오늘 멀지않은 길이라 쉬면서 천천히 걸으면 수월할 것 같다.
육사출신 여행자 한 분은 군대식으로 1시간 걷고 10분 휴식을 엄수한다며 걷다가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쉰다. 나를 보며 먼저 가라고 한다. 나중에 알베르게에서 다시 만나게 되지만 걷는 방식이나 걸음걸이가 다르기에 결국은 각자 따로의 길을 걷게 마련이다.
잊지못할 산 니꼴라스 수도원(오르니요스-이떼로 타스띠요 31km 9/11)
“오늘은 걷기를 일찍 마치고 나니 허전하네요.” 걷는 구간이 짧아 성이 차질 않는지 불만을 토로하는 아내! 전날 21킬로를 걸었는데 힘이 남는 것 같다.
“당신은 시간만 있으면 휴대폰에 매달려 맨 카톡이나 하고 말예요.”
“내일은 더 많이 걸읍시다.”
“이미 계획을 세워 걷는데 그리 조바심을 내며 걷다가 일정이 남으면 어쩌려고?”
“다 걷고 시간이 남으면 다시 걸어 돌아오면 되잖아요.”
완주한 길을 다시 되 걸으면 어떠냐고 할 정도이니 잠시 머리가 띵하니 무거워 온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보름 넘게 걸어왔던 길이기에 쉴 만도 한데 의욕이 앞서가 있다.
개인이 한국으로 사진이나 카톡을 보낸다면 데이터 요금이 장난이 아니다. 잘못하다가는 수십 만 원의 폭탄요금을 낼 수도 있다. 방법은 와이파이를 이용해야하는데 두절되는 알베르게가 많아 결국 와이파이가 연결 되는 곳에서 모아두었다 바쁘게 연락할 수 밖에 없다. 카톡은 이때 무료이다.
부르고스에서 레온에 이르는 약 180여km 는 메세타 지역이다.
해발 800미터의 고원으로 이루어진 지평선은 끝이 없다. 오로지 들판이다. 마을이비교적 멀리 떨어져 있어서 중간에 쉬어 갈 곳도 물 마실 곳도 마땅히 없다. 약 7,8일에 걸쳐 걷게 되는데 많은 순례자들이 이 구간을 가장 힘들어 하고 지루한 구간이라고 말한다. 며칠 동안 변화 없는 대평원을 걷기 때문일 것이다. 허나 우리는 전혀 지루함을 느끼지 않고 가벼운 마음으로 걸었다. 평원에서 떠오르는 태양과 싱그러운 자연과 순례자들과 하나가 되어 매일 새로운 장면을 보여주기에 그럴 일이 없다.
카스뜨로 헤리스 마을에 도착하니 정오가 조금 지났다. 이미 알베르게에 짐을 푼 순례자들이 마을 구경을 다니고 있었다.
오늘 목적지가 이곳인데 아내는 지치지가 않는 모양이다. 다음 마을까지 한 구간만 더 가자고 재촉한다. 나야 상관없지만 더위에 가게에서 맥주 한 잔에 목을 축이고 배낭을 짊어졌다.
가이드북에는 6킬로 쯤 마을이 표시되어있어 그곳까지 가보기로 했다. 마을을 빠져 나와 앞을 바라보니 결코 낮지 않는 앞 산이 보인다. 우리는 저 산을 넘어가지 않길 바랐다. 약간 지친데다 아마도 산 아래 둘레 길을 따라 가면 마을이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길은 산을 향해 뻗어있다. 땀이 등을 타고 흐른다. 낑낑대며 언덕받이 고개 길을 천천히 올랐다. 아내도 이제와서 아까 마을에서 여장을 풀었으면 좋았을 텐데. 힘들어하는 표정이다. 하지만 이미 나섰으니 어쩌랴.
고개에 올라선 순간 넓은 평원이 나타났다. 지대가 높아 멀리에 풍력 발전기가 끝없이 일렬로 서서 돌아가고 추수가 끝난 밀밭은 망망 바다를 연상시킬 정도로 넓은 평원이다.
3시간가량을 계속 걸었다. 지도상의 마을은 보이지 않고 멀리 점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가까이서 보니 들판가운데에 작은 성당 한 채가 덩그러니 서있다. 더위에 지쳐 더 걸어갈 기운도 마음도 이미 없어졌다. 성당에는 침대가 11개 있는데 먼저 온 이들로 차 있었다.
산 니꼴라스 소성당. 13세기경 축조된 오랜 석조 건물이다. 너무도 오래되어 교과서에나 소개될 법한 성당을 지금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다. 현재는 성 야고보에서 운영하며 순례자를 위한 숙소로 겸해 쓰인다. 세분의 수사님이 상주하면서 기부제로 숙소와 식사를 제공하고 있었다. 보통 정성이 아닌 것 같다. 매일 찾아드는 순례자를 위해 기도하고 음식을 제공하면서 봉사하며 수도 생활을 하는 고마운 분들이다.
오늘 여기서 머물 사람들은 모두 21명이었다.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이 대부분이고 그중에서도 여성들이 더 많았다. 침대가 부족하니 바닥에서 자야하는데 어떠냐기에 그러겠다고 했다. 어디 달리 갈 곳도 없고. 시멘트 바닥에 자려면 춥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지만 침낭으로 하루쯤 견뎌보자고 마음을 먹으니 걱정이 사라졌다.
성당의 특이한 점은 전기가 없이 밤에는 촛불을 켜서 미사와 식사가 이루어진다. 산티아고 전 여행을 통해 고전적으로 여행자를 맞이하는 곳은 니꼴라스 성당이 유일할 것 같다. 세분 수사(남자2 여자1)분은 음식 준비에 바쁘고 우리를 안내하느라 경황이 없지만 친절하기 그지없다.
저녁 미사에는 둥글게 의자를 놓고 21명이 둘러앉았다. 수사님이 잠시 후 일일이 국적과 이름을 호명하고 각국에서 온 이들의 무사와 건강을 빌어주는 기도와 함께 마지막으로 발을 손수 씻겨주는 것으로 미사를 마쳤다. 촛불아래 경건한 마음으로 모두 하나가 된 것 같아 흡족했다.
각국에서 모여든 젊은이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면서 인사를 나누고 간결한 음식에 와인을 마시며 친숙해져 갔다.
유머러스한 젊은 수사님이 여흥의 자리를 만든다. 기타를 내어놓고 한 젊은이가 반주를 시작하니 모두가 맞추어 밤늦도록 노래하고 춤도 추며 자리가 무르익어 갔다. 각 나라별로 나와서 노래를 한곡씩 하게 되었는데 유일하게 한국에서 온 우리는 앵콜이 쏟아져 세곡이나 불렀다. 작년 연주회에서 김준범 지휘자가 불렀던 ‘사랑합니다.’ ‘바위섬’ 등 한국풍의 리듬이 신기한지 소란스럽던 무대가 갑자기 조용해지면서 끝난 후에도 앵콜을 연발하며 환타스틱 보이스라며 좋아한다. 싱잉커플즈로서 노래실력을 여기서 보일 줄 누가 알았을까 계속해서 즐거운 분위가 이어졌다.
다음날 아침, 오찬을 마친 우리들은 헤어짐의 시간을 갖기 위해 수사님과 밖에 나와 모임을 가졌다. 간단한 기도와 함께 손에 손을 잡고 부엔 카미노를 연호했다. 그리고 서로 얼싸안고 작별의 순간을 가지면서. 우리들은 아마도 카미노를 통하여 계속 해서 만나고 헤어짐을 반복하며 걸을 것이다.
수고해주신 수사님과 기념사진을 찍고 비록 짧은 하룻밤이지만 일심동체 되어 함께 했던 이들과 아쉬움 속에서. 이런 자리를 갖게 해준 수사님들께 ‘그라시아스’하며 인사를 했더니 손을 흔들어 준다. 아는 인사말이라곤 이 말 이외에 달리 할 말이 없어 안타까운 마음이었지만 스페인어를 우리말처럼 잘 할 수 있다면 감사하고 고마운 마음을 담아 전달할 수 있었을 텐데 . ‘니꼴라스’ 는 잊지 못할 곳이자 추억의 파노라마로 오랫동안 남을 것같다.
니꼴라스 성당의 모습은 낡고 열악하고 불 품은 없지만 이렇게 순례자를 위해 애써준 분들로 인해 즐거운 시간과 추억을 새길 수 있는 곳이 어디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30분 가량을 걸었다. 2km 전방에 ‘베가 마을’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있다. 어제 이 마을을 알았다면 틀림없이 이곳에 도착했을 것이다. 하지만 모르는게 약이랄까. 이런 성당 알베르게에서 하룻밤을 묵었으니 말이다. 베가마을은 알베르게도 충분한 마을이지만 어제 차라리 모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니 사람의 일이란 한치 앞을 못 본다는 걸 알게 해 준다.
한편으로 아내에게 고마운 인사말을 해 주었다. 아내로 인해 고생하여 얻은 보람이니 말이다.
(프로미스타 - 카리온 21km, 9/12)
새벽 녘, 아내가 끙끙대었다.
‘어디 아픈데가 있나?’ 걱정이 되어 아침에 “간 밤 무슨 꿈을 꾸었어?”
“꿈속에서 당신과 다툰 것 같은데 그 후는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다” 고 했다.
그런데 이곳까지 와서 즐거운 꿈보다는 싸우는 꿈을 꾸다니 뭐가 마음이 편치 않은 일이 있는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별것 아닌 걸 가지고 언쟁을 자주 하곤 했으니 그럴 법도 하다.
카리온에 이르는 동안 사방을 둘러보아도 끝없는 평원에 밀밭과 해바라기 농장으로 덮여있고 우리는 그걸 보며 걸었다. 그동안 포도농원만 보다가 갑작스레 바뀌어지면서 다시 밀밭 중심의 농장이 이어지니 이곳이 스페인의 대표적인 농장지대이다.
메세타에서는 마을과 마을이 가까운 곳은 4-5km이지만 극히 드물고 넓게는 10km이상을 걸어야만 마을이 보이기도 한다. 교통편은 버스가 하루 몇 차례 다니는데 걷는 동안 별로 보지 못했다.
단위 부락이 멀고 넓게 퍼져서 산재하기에 이 지역은 말 농사가 끝난 요즈음 농한기를 어떻게 활용하는지 자못 궁금하다. 여름 가을에는 축제가 많은데 이른 아침 마을 공터를 지나가면 전날 축제를 마치고 마무리 청소 하는 걸 자주 목격하곤 하지만 새벽까지 마을이 떠들썩거리고 노랫소리가 이어진 경우도 있다.
달도 차면 기울고 그 사이 보름달은 반달이 되어 높이 떠서 길을 비추어 주고 있다. 두 갈래 길이 나왔다. 안내표시는 보이지 않는데 뒤에서 여자들이 따라오더니 성큼 성큼 오른쪽 길로 접어든다. 그녀들은 길을 알고 있다는 듯 걸어간다. 허나 이 길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조가비와 노란색 화살표가 멀찌감치 서있다. 마음이 놓였다.
이 구간은 p 980 번 도로따라 카미노가 계속된다. 앞서가던 스페인여자 셋이서 저만큼 가던 길을 되돌아온다. 물어보니 지금 길은 마을을 지나가는 우회도로여서 그냥 도로 따라 가겠다는 얘기다. 나중에 결국 만나는 길이 나오기 때문이다. 우리는 마을 구경을 할 겸 그냥 걸었다.
카리온에서 겜플라리오스까지의 26km는 추수한 들판을 보면서 산티아고로 향하는 고속도로와 나란히 함께 걷는다. 더구나 여기 18k는 지루할 정도로 지평선을 향해 걷는 길이 이어진다. 이렇게도 넓은 들판을 다시 걸어볼 기회가 있을까. 더구나 차량 왕래가 드문 고속도로를 친구삼아 휘파람을 불며 도란도란 아내와 걸을 수 있어 좋다.
카미노의 절반가량을 소화하며 몸도 약간 지쳐가는 것 같다. 아내는 깊은 잠이 들어 깨워서야 일어났다. 덜 풀린 종아리에 맨소래담을 바르고 근육을 풀어 주었다. 매일 발에 바세린을 바르는 것은 습관이 되었다. 발에 물집을 방지하는 방법 중에 바세린은 아주 좋은 약이다. 출발 전 꼭 발가락과 발 바닥에 이걸 바른다.
카미노는 걷는게 기본이다. 물론 자전거나 차를 이용할 수도 있지만 배낭을 짊어지고 걸어야 하기에 준비가 필요하다.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발이다.
도중에 발 때문에 고생하는 이들을 많이 보았다. 두꺼운 발바닥이 물집으로 고생하며 알베르게에 오면 찬물에 발을 담그는 이들, 뒷꿈치와 발가락에 물집으로 붕대로 포장하고 다니는 사람들을 많이 본다.
3년 전 제주도 올레길을 걸을 때에는 걸은지 3일 만에 발가락에 물집이 생겨 애를 먹었다. 통증으로 인한 불편함은 이루 말할 수 없고 등에 배낭의 무게와 함께 절뚝거리며 걷다보면 힘이 풀린다. 일본 홋카이도 배낭 여행에서는 여행 중 발가락 물집으로 귀국하는 날 까지 고생한 적이 있다. 그때는 일반 운동화를 신고 집을 나섰다가 사서 고생을 한 경우로 큰 경험이 되었다.
발을 잘 보호하기위해서는 등산화가 좋다. 돌멩이를 밟았을 때 발바닥에 직접 전달되지 않을 정도의 두께가 있는 성능 좋은 신발이 필요하다. 물론 트레킹화나 조깅화를 신고 걷는 이들이 있지만 이는 장거리에는 적합 치 않다. 준비없이 등산화만 신는다고 해서 안전한 것은 아니다. 사전에 걷고 미리 대비하고 최소 두 시간에 한 번씩은 양말을 벗어 통풍을 해주고 마사지와 함께 바세린을 바르면 건강한 발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된다. 아내는 이번 여행기간동안 한 번도 발에 물집이 생기지 않고 걸었는데 그 동안의 운동이 주효할 수도 있지만 현지에서 발 관리를 잘한 덕이기도 한 것 같다. 걷다 신발에 돌이 들어가면 지체하지 말고 꺼내고 그대로 걸었다가는 물집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재미교포와 함께 (템플라리오스-베르시아노스 23.8k 9/14)
전날 저녁, 부자간처럼 보이는 남자 두 명이 늦게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저녁 식사를 하며 물어보니 젊은이는 부산이 고향이고 나이든 분은 재미교포였다. 교포 분은 70년대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꿈을 가지고 이민 길에 올랐다고 한다. 다정스럽게 보여 부자간 인줄 알았다고 했더니 씩 웃는다. 이들은 길에서 만나 3일간 같이 걸었다. 혼자 걷다가도 이렇게 함께 다니기도 한다.
“미국에서 오셨군요.”
“예, 처음에 아내와 함께 이곳에 오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산티아고 여행기를 읽고 나서 마음이 변해 안 가겠답니다.”
“왜요?”
“가고싶지만 장거리를 걸을 자신이 없답니다. 그래서 저만 한 달간 이곳을 걷고 나머지는 프랑스에서 아내를 만나 유럽을 여행하기로 했습니다.”
부부간에도 취향이 달라 어쩔 수 없이 떨어져 여행을 하고 있었다.
그는 67세의 나이로 이 길에 도전하였다.
“정년퇴직을 하셨나요?”
“우리회사는 정년 퇴직이 없어요. 나이에 상관없이 더 할 수도 있어요.”
“그런데 왜 회사를 그만 두었습니까?”
“3년 전에 사표를 냈었는데 회사에서 간곡히 붙잡아 이제야 그만두고 나온 겁니다.”
“아, 그럴수도 있군요.”
“인생이 벌어서 사는게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례지만 어떤 회사인데요?”
“ 3M 이란 회사예요.”
그는 중책을 맡은 간부로 근무하다 퇴직했다.
회사의 사업현황과 이모저모를 들려준다.
3M은 우리나라에서는 ‘포스트 잇’으로 익히 알려져 있지만 여러 분야에서 사업을 하는 미국의 다국적 기업이다. 작년 3M의 연간 총생산액은 33빌리언 달러라고 소상하게 소개하였다. 1빌리언을 환산하면 대략 1조원이다. 33조의 매출을 올리는 대단한 기업이다. 전 세계 약 170여 개국에 지점을 두고 활동하고 있다는 3M, 이곳에서 청춘을 보낸 교포분과 얘기를 나누고 보니 초창기 부지런한 이민 세대로서 정착을 잘하여 성공한 케이스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 길은 N120 번 도로와 구 도로를 옆에 두고 카미노 길이 함께 있다. 걷기 쉽고 단조롭지만 낮은 산과 들 철도가 지나가며 볼거리들이 있다. 길을 나서 1시간쯤 지나자 마을이 보였다. 간단히 커피를 마시고 4시간을 쉬지 않고 걸었다. 일요일이어서 마을이 한산하고 쉬는 분위기이다. 다행히 마트는 문을 열어서 과일로 점심대용을 하고. 길이 들판 한쪽으로 돌아서 표시가 되어있기에 이상하다 싶었더니 오래된 성당 한 채가 덩그마니 서있었다.
카톨릭 국가인 스페인은 마을마다 성당이 있는데 성당을 중심으로 광장이 있다. 때로는 마을이 번성하여 커지면 신시가지가 생겨서 자연스럽게 성당이 따로 떨어져있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지금 들판에 서있는 성당은 역사적 가치를 지난 고 성당으로 사용하지 않고 있지만 보존의 가치가 있어 순례자들에게 이곳을 지나가도록 해 놓았다.
오후 4시경, 소나기가 갑자기 쏟아져 비를 흠씬 맞고 순례자들이 들어오고 있다. 갑작스레 내린 비에 대처를 하지 못한 모양이다. 쌀쌀해진 날씨에 이미 만석이 되었지만 마루바닥에 매트를 내주어 함께 투숙할 수 있어 다행스러웠다.
이 알베르게는 수녀분들이 운영하는 건물로서 겉은 오래되어 허름한 옛 성당건물인데 내부는 새로 수리를 하여 현대식으로 꾸며놓았다. 먼저 도착한 우리들은 침대를 배정받고 마을 카페에 들러 맥주 한 잔을 시킨 후 이곳에 있는 와이파이를 이용해 인터넷과 사진과 문자를 지인들에게 보냈다. 수도원에서 운영하는 알베르게에는 와이파이가 없어 가끔씩 밖으로 나온다.
오랜만에 비가 온다. 스페인에서 20일을 보내는 동안 너무 덥고 메말라서 고대하던 비다. 전날 소나기와 새벽에 다시 바람과 함께 비를 퍼부어 길을 나설 수 있을는지 걱정이 됐다. 같이 투숙한 성당팀의 수사님은 “새벽기도를 하며 원만한 여행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다.”고 하며 걱정 말라 하신다.
그런데 아침이 되자 하늘이 말끔히 개어서 걷는데 더 없이 좋은 날씨가 되었다.
기도의 덕분인가? 나중에 들은 얘기인데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어 주셨다고 여간 흐뭇해 했다한다. 반신반의하면서도 비가 그쳐주었으니 잘 되었다 싶었다.
어제도 아침에는 쾌청한 날씨 속에 출발을 하였다. 정오가 가까워 올 무렵 날씨가 흐려지면서 맛 바람이 불어와 곧 비를 몰고 올 기세다. 먹구름과 함께 부는 바람이 심상치 않았다. 곧 비가 쏟아질 것 같아서 판쵸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먹구름이 오다가 서서히 북쪽으로 비켜가며 비를 피해 갈 수 있었다. 이때도 수사님은 내 기도를 들어 주셨다며 하나님을 칭송하는데 순례자들이 걷는 길을 보호하는 믿음과 신념을 가지 분이다.
레온에 가까워 오다. (만시아- 레온 19.5k 9/16 )
산티아고 327km 지점에 이르렀다. 꽤 많은 거리를 걸어 도착한 레온. 대략 470km를 걸은 셈이다.
레온의 인구는 약 13만 명 가량이다. 인구로 비교한다면 우리나라에 비해 작은 도시에 불과하지만 스페인 북부지방의 인구 분포 상 레온은 대단히 큰 도시에 해당된다. 이 구간은 짧아서 이웃집 같은 기분이 들 정도로 마음이 가벼웠다.
그렇지만 습관이 들어서인지 숙소를 6시경 일찍 출발 하였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걸어보기는 처음이다. 레온까지 가는 길은 N120번 도로와 나란히 하여 거의 같이 걷는 길이며 평탄하다. 새벽 화물차의 이동으로 자동차의 불빛에 신경이 쓰인다. 뒤에서 오는 차량보다 앞에서 라이트를 켜고 오는 차량이 많아 눈이 부시다. 단조롭지만 전날 비로 인해 생긴 물구덩이를 피하기 위해 정신을 바짝 차리고 걷기도 했다.
빰플로나, 부르고스 등 큰 도시를 제외하면 시골 마을이 많고 조그마한 마을을 많이 지나왔는데 레온은 어떤 도시인지 궁금하다.
뿌엔떼 비야렌떼는 도로를 따라 레스토랑 바아 등이 일렬로 길쭉하게 늘어서서 마을을 이룬다. 여기서부터 점점 가파른 오르막길을 올라 가면 공장 지대가 나타난다. 이곳을 지나 경사진 비탈길을 오르면 뽀르띠요 언덕에 다다르고 멀리 시가지가 보인다. 바로 레온이다.
해발 838M의 이 도시는 옛날 주변의 금광에서 캐낸 금이 이곳으로 모여 사람들이 북적이고 레온 왕국의 수도로서 풍성한 문화유산이 남아있다. 지금은 북서부 경제발전의 중심이자 스페인 최고의 식도락을 전하는 도시로 발전했다. 레온에 가면 추천 요리중 하나가 문어요리이다.
아내에게 “이 근처에 문어요리를 잘 하는 곳이 있는데 거기서 저녁을 할까?”
“좋아요.”
의기가 투합되어 저녁식사를 문어요리로 정하고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데 하필 이 시간에 맞추어 억수같이 내리는 비로 발을 동동 구르다 결국 식당을 가지 못하고 알베르게 식당에서 저녁을 해결하였다.
레온 대성당은 스페인 역사상 가장 위대한 건축물 중 하나로 꼽히며 13-6세기에 걸쳐 지어졌다. 늘씬한 탑과 우아한 아치는 고딕시대의 대담함을 표현하고 중앙 파사드는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의 석조 조각과 비슷한 화려한 조각이 있다. 석양이 질 무렵 화려하게 빛나는 스테인드 글라스의 장관은 유럽 예술의 최고점이라고 한다. 후에 파리 노트르담 성당을 들렸을 때 인상이 당시 레온의 대성당과 건축양식에서 비슷한 점이 많아 친숙한 느낌이 들었었다. 당시 유럽의 성당은 건축양식이나 시기가 대동 소이하므로 규모의 차이가 나지만 어쩐지 낯익은 모습이다.
다음날 아침 일찍이 아내와 레온 시가지를 구경하기 위해 성당 알베르게에 짐을 맡기고 거리를 나섰다. 레온의 대성당과 메르까도 성당 ,마르셀로 성당은 구시가지에 있어서 살펴보기에 좋았다. 성당을 중심으로 시가지가 조성되어있고 넓은 평야의 곳곳에 새로운 건축물이 제 모습을 갖추고 신도시로 변모해 가는 느낌을 받는다.
변두리로 나갈수록 주택이 새로 들어서서 골목과 도로가 잘 단장되어 도시 전체가 어쩌면 이렇게도 깨끗할까 그네들의 성숙한 시민의식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꾸며놓아 우리와 비교해보면 다른 점이다. 유럽풍으로 들어선 아파트와 잘 정돈된 시가지를 보며 아내는 이곳이 좋아서 살고 싶다고 한다. 아는 사람이 없고 민족이 다르지만 느긋한 성품의 이곳 사람들과 같이 살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도시 초입으로 나가 외곽을 돌아보기로 했다. 3시간에 걸쳐 레온 시가지의 둘레길 3/4을 돌고 도시를 관통하는 베르네 강을 끝으로 시내 구경을 대강 마쳤다.
나흘 전, 알베르게를 나서려는데 내 스틱 한 개가 사라졌다. 대신 다른 것이 남아있었다. 가볍고도 튼튼한 스틱인데 누가 욕심을 냈을까? 이곳에서는 남의 것을 가져가거나 물건을 분실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지만 한국에서부터 정이든 스틱인데 바뀐 채로 나흘 내내 짚고 다녔다. 그런데 오늘 레온 알베르게에서 내 스틱이 다시 되돌아왔다. 스틱을 두고 잠시 다른 데를 갔다가 돌아와 보니 내 것이 와있는 것이다. 너무도 반가왔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슬그머니 놔두고 갔다. 그럼 그렇지! 바꿔간 이도 그걸 짚고 다니면서 얼마나 미안해 했을까 생각하니 괜히 지나치게 의심했던 내가 헛 웃음이 나온다.
패키지 여행이나 배낭여행자들은 관광지에서 소매치기 및 물건 분실이 허다하여 낭패를 본 경우가 많다. 마지막 날 문래동 부부는 우리와 헤어진 뒤로 바르셀로나로 떠났다. 얼마 뒤 좋지 않은 소식이 들려왔다. 시내관광 중에 여권만 남겨두고 나머지 귀중품을 모두 소매치기를 당했다고 한다. 현금, 카드, 휴대폰까지 분실하여 꼼짝을 못하다가 간신히 귀국했다고 한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황당한 일이 발생하면 힘이 빠질게 분명하다. 수백 번 조심하는 수밖에 없다.
산티아고 카미노에서는 장기간의 여행을 하면서도 물건을 분실하여 소동을 벌이는 경우를 보지 못했다. 이렇게 스틱 하나도 며 칠 후에 되돌아 올 정도이다. 물론 분실할 경우도 있겠지만 순례자들 간에 보이지 않은 동지애가 자리잡아 동아줄처럼 연결되어 있어 끈끈함이 있는 것 같다.
간밤에는 많은 비가 쏟아져 다음날 떠날 일이 걱정 될 정도로 퍼부어 대다가도 아침에는 말끔히 개어 걷기에 지장이 없게 되니 하늘의 조화가 신비롭다.
오늘은 오전 한나절을 시내구경을 한 터라 레온에서 가까운 Virgen 마을에서 여장을 풀기로 했다. Virgen은 레온에서 불과 7.5k의 거리에 있는 마을로 도로변을 중심으로 조성되어 있는게 그동안 보아온 마을과는 다른 점이다.
비르헨 마을의 카미노 성모 성당 (레온-비르헨 7.5K 9/17 )
생장 피드포르를 거쳐 오는동안 수많은 알베르게 중 가장 인상적인 알베르게를 여기서 만났다.
안토니오 도냐시니아 알베르게.
시설 면에서 별 5개를 부여할 만큼 최상급이다. 알베르게는 대로에서 조금 떨어져 안 쪽에 있다. 얼핏 보면 단층 슬라브 주택처럼 보인다. 넓은 잔디 마당과 실내에는 휴게실, 독서실, 분리 화장실과 잘 갖추어진 취사시설까지 호텔 급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숙소 앞의 잔디밭에서는 사람들이 앉아서 휴식을 취하고 글을 쓰고 있는 모습이 동중정 그것이다.
한 독지가가 선뜻 거금을 내어 순례자들을 위해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요금 또한 여느 사설 알베르게와 다르지 않다. 레온에서 숙박을 했다면 이곳을 통과하기 마련이기에 관심 있는 여행자들만 놓치지 않고 이곳으로 찾아든다. 운 좋게도 머문 우리는 여기서 마음 편히 쉬었다.
도로변 마을이라선지 성당 또한 도로변에 자리하고 있다.
이 성당은 성모가 발현했다하여 ‘카미노의 성모성당’이라고 불린다. 카미노 성모는 가족문제 순례에 대한 문제 등 여러 기도를 들어준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해마다 많은 카톨릭 신자들이 이 마을을 찾는다고 한다.
그런데 그동안의 성당과는 달리 현대식으로 건축된 성당으로서 카미노 중 보아온 성당과는 모습이 판이하고 지붕에는 십자가를 세우지 않고 성당 정문 옆에 거대한 탑으로 십자가를 높다랗게 세워놓은 것이 특이하였다. 여기에도 성당에 대한 유래가 전해진다.
카미노 성모 성당
1505년 7월 2일, 목동 알바르 시몬 페르난데스가 가축을 돌보던 중 성모의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 그는 성모에게 다가갔고 성모는 그에게 말했다. “도시로 가서 주교에게 알리고 이곳에 내 조각상을 보관하기위한 성전을 세우도록하라.” 목동이 놀라서 대답했다. “성모님 어떻게 하면 절 보낸 분이 성모님이라는 것을 그들이 믿겠습니까?” 그러자 성모는 마리아 목동의 새총과 작은 돌을 집어 들고 돌을 멀리 쏘아 보낸 후 말했다.
“주교와 함께 돌아오면 이 돌이 거대한 바위가 되어 있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너를 보냈다는 증거가 되리라.”모든 것이 성모가 예언한 대로 일어났다. 주교는 이곳에 우미야데로 성당을 지었다. 이 성당은 1961년에 현대식 성당으로 재건축되어 ‘카미노 성모 성당’이라고 이름 붙였다. 또 다른 성모의 기적이 일어났는데 지금도 이 성당에는 기적의 일부였던 쇠사슬과 나무로 된 우리가 남아있다.
<안내자료에서 >
여행자들이 도시나 마을을 지나다보면 이렇게 성당과 여기에 얽힌 사연과 기적 발현 등을 많이 듣고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순례자와 수많은 신자들이 찾아든다.
우리가 묵은 알베르게에 한국인 단체팀 10명(남3 여7)이 들어왔다.
이들은 오늘 비행기로 마드리드를 거쳐 레온에 도착해 산티아고까지 2주 예정으로 왔다고 한다. 리더격인 건장한 남자는 스페인 카미노를 4회나 한 베테랑이었다. 그리하여 이곳 지리에 밝아서 이 알베르게를 찾아 왔다.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자들은 하나같이 선글라스에 등산복차림의 화려한 옷을 입고 여행기분에 신나고 들떠있었다.
시장을 보아 저녁 준비를 하고 와인까지 가져와 전야제를 하고 있다. 다음날 아침,아내의 말에 의하며 세면실에서 여자들이 화장을 어찌 열심히 하던지 관광여행 오는 사람 같다고 했다.
이제부터 걷기에 들어갈 터인데 이구간은 27킬로나 되는 먼 거리이다. 본격적인 순례길과 여행삼아 오는 것과는 차이가 날 터이다.
이틀 후에 10명 단체팀의 남자 한 분을 길에서 우연히 만났다. 우리를 보고 반가워하며 “또 뵙게 되는군요. 부부가 함께 다니는 것을 보니 부럽습니다.” 한다.
“왜 혼자서 여기에 계세요?”
“먼저 와서 일행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일행 여자 분들은 잘 걷고 있는가요?”
“큰일입니다. 어제 27킬로를 걷고 나더니 파김치가 되어 힘들다고들 합니다.”
“다음날 자고 일어나 발이 아프고 등이 아파서 더 이상 못 가겠다고 하며 불평이 많습니다.”
“가까운 알베르게에서 쉬자고 해 숙소를 알아보고 있는데요.”
“오늘은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힘들어해서 일정에 차질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 팀은 겨우 이틀 걷고서 힘들다고 아우성이라면 아마도 남은 산티아고까지 300여킬로를 어떻게 소화해낼지 결코 쉽지가 않을 것 같다. 준비가 부족하면 어려운 점이 많은 법이다.
아마도 한국에서 2주를 계획 했을 때는 세계적으로 걷기 열풍으로 널리 알려진 산티아고이기에 부푼 기대감이 충만하여 왔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배낭을 메고 묵묵히 걸으며 자연과 하나가 되어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길이다. 몸은 고달프고 어렵지만 마음과 정신은 청풍명월에 비할 바가 아니다. 고진 감내 우선 힘들고 고달픔을 이겨내지 않고서는 보석을 손에 쥘 수 없는 것은 자명하다.
오르비고의 다리 (비르헨 - 호스피탈 오르비고 27K 9/19)
산길이나 마을을 잇는 농로를 따라 걸을 때는 적적하고 고요함이 동반하여 사색의 길이 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이 길은 도로를 벗 삼아 걷고 있어 자동차의 소음과 새벽 불빛이 길을 비춰 주어 길을 찾거나 잃을 염려는 없어 안심이 되기도 한다.
여명이 걷히고 주변을 둘러보니 비르헨을 지나 오르비고에 오는 동안 평야는 밀밭과 해바리기 농장에서 이제 옥수수 밭으로 변해 있었다. 신기하다. 어찌 하여 서쪽을 향해 발 걸음을 옮겨놓을 뿐인데 이 곳의 토양은 다른 작물을 필요로 할까. 모르는 사이 기후와 토양과 지역의 차이가 이러한 변화를 가져오기에 오묘한 자연의 이치를 체험할 수 있게 해준다.
고대 로마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산천은 변함이 없으되 다만 달라진 것은 인간 일 뿐. 우리 고 시조에 소개되는 ‘산천을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 없네’ 바로 그것이다.
날씨는 쌀쌀하여 아침저녁으로 일교차가 큰데다 동부 지역에 비해 비가 자주 보이기 시작한다.
생장피드포르에서 시작하여 500킬로를 지나는 지점. 오르비고 표지 석에는 산티아고 298K라고 찍혀 있다. 들판을 가로질러 마을 초입에서 옥수수와 함께 울창한 검은 버드나무가 반겨준다. 버드나무의 아랫둥은 기둥처럼 쭉 올라와 윗부분에서 가지가 하늘을 향해 힘차게 뻗어 숲을 이루어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모습이다.
오르비고 강을 사이에 두고 마을이 둘로 나누어져서 이를 이어주는 석조다리가 유난히 눈에 띤다. 난간이 없는 순전히 돌로 된 이 다리의 시작은 처음 로마시대부터 축조가 되어 변형되어 오다가 계속해서 늘려나가 지금은 전체 카미노 석조다리 중 가장 긴 다리를 만들었다.
이 다리는 20여개의 아치로 이루어져 있는데 가장 오래된 것은 13세기의 아치이다. 다리 중간에 지금도 당시의 사건을 설명하는 이야기가 새겨져 있다.
스페인어로 소개되어 이해를 못하고 후에 한글 안내자료를 살펴보니 알 수 있었다.
정작 강의 넓이에 비해 다리가 아스라이 길지만 그 아래에는 고수부지처럼 넓은 잔디 경기장이 갖추어져 있는데 바로 당시 이곳이 기사들의 결투장이었다. 다리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나무로 돤 말 고삐 걸이가 많이 있어서 승마 경기장처럼 보였는데 그러나 이곳에서 기사들이 모여 결투를 하는 장소였다.
오르비고 다리 결투장
후안 2세 시절, 기사 돈 수에로 데 끼뇨네스는 그의 연인 도냐 레오노르 또바르와 기묘한 약속을 했다. 그녀에 대한 사랑의 표시로 매주 목요일 목 칼을 차고 다니기로 한 것이다. 만약 약속을 어기면 300개의 창을 부러뜨리거나 오르비고 다리에서 한 달 동안 결투를 하기로 했다. 돈 수에로는 이 약속을 지키는데 지쳐서 싸움을 허락해 달라고 왕에게 요청하고 ,유럽 전역에 있는 여러 명의 기사들에게 자신이 목 칼을 벗을 수 있게 도와달라는 편지를 썼다. 이에 수많은 기사들이 싸움에 참가해서 그의 편에 서기도 했고 그와 맞서 싸우기도 했다. 1434년 7월 10일부터 한 달간 창 싸움이 이어졌다. 수많은 창이 부러졌고 기사들 중엔 부상자도 있었고 한명은 사망하기까지 했다. 마침내 결투가 끝나자 돈 수에로는 목 칼을 벗었다.
이처럼 외따로 떨어진 마을이지만 당시에는 이 지역이 교통의 요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 곳이다. 마을 특유의 역사를 지닌 곳이 있기에 유래를 이해하고 보면 훨씬 현장감 있게 느낌이 와 닿는다. 이 다리는 기사 돈 수에로가 약속을 지키기 위해 결투를 치른 장소이다. 일명 ‘명예로운 걸음의 다리’로 불리운다.
이러한 시설을 지금도 잘 보존하고 있는 그들의 노력에 대단함을 느낀다.
산간 여행 (레치발도-엘 아세보 33.6K 9/20)
메세타 평원은 끝이 보이지 않고. 도착한 곳은 마을 인구가 불과 100여명밖에 안 되는 레치발도. 시골 마을이 평온하게 보인다. 조그마한 알베르게와 바아가 두어군데 있을 뿐 이다. 한국이나 이곳의 시골은 사는 것이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젊은이는 보이지 않고 대부분 노인들이어서 마을이 너무나도 조용하다.
오후가 되면 노인들이 운동을 나와 마을을 걷거나 작은 광장에 모여 담소를 나눈다. 경로당은 없는지 마을 공터에 모여 시간을 보낸 것 같다. 수사님 한 분이 알베르게를 관리하고 계셨다. 침대는 불과 14개에 불과하지만 깔끔하여 순례자들이 좋아했다. 바아에서 저녁을 먹고 아내와 동네를 한 바퀴 돌아보았다. 오랜만에 포근한 고향 마을에 온 것처럼 따뜻한 정이 느껴지는 이곳. 꽃을 좋아하는 어느 집을 들여다보니 화초를 잘 키워 테라스와 마당이 꽃으로 넘쳐나서 행인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하다.
북서부 메세타의 석양 노을이 유난히 붉고 아름답다. 구름의 조화는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없는 여러 폭의 추상화를 여기저기에 펼쳐 놓았다. 오염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투명한 공간에 오로지 구름만이 자유로이 그림을 수 놓았다. 청아하고 수려한 도자기처럼 품위있는 노을의 화폭을 레치발도에서 감상하며 즐기고 있다. 넓은 들녘의 밀밭이 노을과 잘 어울린다. 내일 걸을 길이 들판 가운데로 쭉 뻗어 보인다. 가리비 조가비 비석이 카미노 길 가운데에서 안내를 해준다. 새벽아침은 이 가리비를 따라가면 될 것이다.
라바날, 해발 1000M 지점에서 1500M를 향해 고지를 오르는 구간에 이르렀다. 첫날 피레네 산맥을 걸었던 구간 다음으로 높은 산언덕을 넘어야 한다. 3시간 이상의 오르막길을 계속 해서 걸었다. 20여명의 단체 팀이 저만치 몰려가고 있다. 이들은 스위스에서 온 70세 이상의 노인으로 구성된 순례팀이었다. 한국에서 온 우리부부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함께 걸었다. 이들은 버스로 구간이동을 하며 일정한 목적지까지 걸으면 버스가 대기했다가 다음 코스로 이동해 주고 있었다. 성지 순례를 목적으로 이곳까지 오기 쉽지 않을 터인데 대단한 용기를 가지고 나선 분 들이다.
발 아래의 낮은 산들이 엎드려 자태를 뽐내 보인다. 이번 여행에서 두 번째로 높은 지대이다. 피레네 산맥은 하루동안에 넘었지만 이곳도 만만치 않은 지역이다. 해발 1500미터를 걷는 동안 산간 지방 여행을 하는 기분이 들었다. 산 아래 마을이라고 부르는 소모사와 엘간소 라바날이 조용히 자리잡고 특히 폰세바돈은 마치 스위스의 산마을 풍경처럼 낭만적인 경관이 자연에 동화되어 흡사하다.
주위 전체가 모두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에서 다음 마을을 가기위해서는 산길이 연결 되어 이어져있다. 1400미터의 폰세바돈에 이르니 구름이 발아래에서 안개처럼 자욱히 서려 있다. 아주 조그마한 마을이지만 알베르게는 2군데나 있었다. 내려다보면 산들의 바다를 이루고 너무 한가롭고 평화로운 풍경이 맘에들어 묵어가려는데 다시 아내의 조급증이 발동한다. “이른 시간이니 고개 너머 만하린 까지만 가요.” 정점 만하린 까지는 4.5K 이며 산길이니 1시간 반 거리이다.
여기서 문제의 발단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폰세바돈에서 머물러야했다. 산간지역의 특성상 마을이 멀리 산재해 있어 이곳을 지나치는 순간 이미 4시간을 더 걸어갈 수밖에 없는 일이 예견되어 있었는데 그때는 모르고 발걸음을 내딛고 만 것이다.
만하린, 이곳 알베르게는 너무 작아 우리가 도착 할 즈음에는 받아 줄 수 없다고 딱 잡아뗀다. 침대가 부족한 모양이다. 길가에 원래 폐허가 된 집을 재건하여 알베르게로 만들었다. 주위에 마을은 없고 황량한 폐허가 된 건물만이 몇 채 서 있었다. 지붕위에 슬프게 보이는 십자가와 함께.
알베르게에서는 몇 가지 특산물과 종교적 기념품을 팔기도 하며 조그만 가게를 운영하는데 책임자 한 분이 여기를 지키고 있었다. 순례자 사무실에서 준 한 장짜리 알베르게 안내서에는 분명히 명시가 되어있었지만 현지에서는 사정이 다르니 잘못하면 낭패를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만하린을 지나치게 되면 호젓한 산길을 많이 걸을 수 밖에 없다.
언뜻 보기에는 한국에서 볼 수 있는 무당집처럼 무슨 옷과 헝겊이 걸려있고 약간 음산한 기분이 들기도 하였다. 비좁은데다 차라리 다음 마을로 가는 것이 낳겠다 싶었다. 며칠 전 라바날에서 본 용감한 아가씨를 만났다. 캐나다에서 단신으로 왔는데 혼자서 잘도 다닌다. 그런데 그녀는 먼저 와서 이곳에서 머물기로 했다며 이미 여장을 풀어 놓았다. 호기심이 많아 이것저것 캐물으며 열심히 메모를 하는 모습이 당차게 보인다. 몇 안 되는 침대가 금방 다 차서 이곳은 기약할 수 없는 점이 있었다.
여기서 약 20여리에 아세보 마을이 있다. 아직 해는 남아서 다시 길을 나섰다. 우리보다 앞서간 사람 몇 명이 마찬가지로 만하린을 지나 그늘아래에서 쉬고 있었다. 낯익은 얼굴이어서 손을 흔들고 반가와 한다. 산에서 흘러내린 물을 모아 마실 수 있도록 샘이 있기에 여기서 물을 담고 마시며 천천히 걸어 나갔다.
해발 1,147M의 아세보 마을은 특이하게도 마을 전체 지붕이 검은색 기와지붕을 얹어 놓은 것 같았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고원의 산지를 평평하게 깎아 그 터 위에 마을을 올려놓은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 지붕은 돌이나 석판으로 만들었는데 검은 색깔로 깔끔하게 만든 것이었다.
들판 가운데 단 하나 순례자를 위한 알베르게겸 니꼴라스 성당이 있습니다.
니꼴라스 수도원에서 젊은이들과 함께... 조가비 조끼를 입은 분이 수사님들
고성당이 보존되어 자나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르비고의 다리 결투장이 다리 아래에 보입니다.
아주머니가 아들을 데리고 이렇게 카미노를 하고 있습니다.
산티아고 전 100km 기념비석에서 사진입니다.
아반트 팔라스에서 내려다보면 아름다운 미뇨강이 외곽을 흐르고 아래 다리를 건너 돌문을 지나 시내로 진입한다.
아반트 팔라스의 미뇨강의 다리 옛날 흑백사진임
천지창조 (신비로운 저녁노을의 아름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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