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곡 물놀이/靑石 전성훈
계절이 8월 중순을 넘었는데 아직도 헉헉 숨이 막힐 것 같은 한여름이다. 하긴 습도가 높은 여름날이 한증막 가마솥처럼 펄펄 끓지 않으면 여름답지 않아서 어딘가 허전할지도 모른다. 그칠 줄 모르는 땀에 기력이 쇠약해지니 입맛을 잃는다. 입맛이 없어 기운을 잃으니까 기분도 가라앉고 몸도 덩달아 갈수록 무겁게 느껴진다. 병이 나서 어딘가 아프지 않은 게 그나마 천만다행이다. 마음을 잘 다독여서 짜증 나는 기운을 다스리지 않으면, 뭔가 일을 그르칠지도 모르고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가 무심코 실수할지도 모른다. 이렇게 몸과 마음이 엉망이 되고 가라앉게 되면 생각나는 게 있다. 끝 모르는 수평선을 따라 펼쳐진 검푸른 바다와 숲이 무성하게 우거진 깊은 산속의 계곡이다. 숲속 계곡에 손과 발을 씻고 몸을 담그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보거나, 아름다운 산수화를 바라보면 시원한 느낌이 들것 같다. 옛 선비들은 ‘세족’이니 ‘탁족’이니 하는 즐거움으로 한여름 보내기도 했다고 하던데.
입추가 들어서고 처서를 앞두고 큰마음을 먹고 친구들과 계곡을 가기로 했었는데, 갑자기 사정이 생겨서 물놀이 계획이 취소되어 아쉽다. 섭섭한 마음을 달래며 머릿속으로 물놀이 추억을 헤아려본다. 사는 장소에 따라 조금씩 다르겠지만 서울에서는 어디서든 계곡을 쉽게 만날 수 있다. 내가 사는 창동에서 가기 쉬운 북한산 우이동계곡과 송추계곡은 예전부터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계곡이다. 그 외 수락산 주변에는 의정부 석림사와 남양주 청학리에 제법 물이 많은 계곡이 있다. 언제 물놀이를 했었는지 떠올리니 아련한 추억이 되살아난다. 어린 시절 부모님을 따라서 정릉계곡에서 물장난을 치면서 보냈던 즐거운 추억이 생각난다. 결혼하고 첫 아이를 낳고서 여름 휴가를 먼 곳으로 갈 수 없어서 가까운 우이동계곡에서 쉬면서 보냈던 30대 초반 젊은 날 기억도 떠오른다. 차가운 계곡물에 수박과 참외를 담가 놓고 삼겹살을 구워 먹던 그 시절, 술 한 잔씩 하면서 화투놀이에 도낏자루 썩는 줄 모르며 신선 놀이하던 중년 시절의 여름도 머릿속 한구석에서 고개를 내밀어 온다. 나이 육십이 넘어 계곡물에서 볼품없는 몸매를 자랑하며 겁도 없이 놀던 때도 그립다. 이제는 젊은 날처럼 먹을 것을 바리바리 준비하고 산이나 바다를 찾는 것이 번거롭고 귀찮다. 그냥 간편한 차림으로 사람이 적은 곳에서, 분위기에 파묻혀 적당히 시간을 즐기고 근처의 음식점에서 편안하게 식사하는 게 더 좋다. 이렇게 변한 내 모습을 보니, 나이를 먹어 노년이 된 게 틀림없는 것 같다. 젊은 시절처럼 배 터지게 마음껏 음식을 먹지도 못하고, 술도 서넛 순배 돌면 취기가 금방 올라서 더 마시지 못한다. 세월이 가르치는 대로 주변에서 즐겁게 떠드는 어린아이나 젊은이들 모습을 보면서 흘러간 잃어버린 세월을 바라본다. 그렇다고 가버린 세월을 원망하는 것도 아니고, 그때 그 시절을 흑백 영화 필름 돌리듯이 되돌려보고 싶은 마음도 없다. 다만, 머릿속 한 모퉁이에 자리를 차지한 추억의 단편 조각을 하나씩 주워 모아, 일그러지고 찌그러진 젊은 날 한때의 그림 조각을 맞추어보는 것도 제법 쏠쏠한 재미가 있다.
몇 년 만에 가려던 계곡 물놀이, 다음 기회를 기약해본다. 그런데 하루 이틀도 아니고 내년 여름이라는 세월이 기다려줄지는 모르겠다. 아직 70대 초반 나이지만 인간의 삶이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다. 늙어서는 그야말로 내일이 아닌 오늘이야말로 소중하고 귀중한 순간임이 틀림없는 것 같다. 처서가 지나고 9월이 오면 우리 곁으로 다가오는 가을 소리를 들으며 그동안 더위로 못 자던 잠을 푹 자고 싶다. 여름날의 한바탕 꿈에서 깨어나 세상에서 처음 맞이하는 가을처럼, 아름답고 멋진 우리나라 산천을 찾아서 길을 나서고 싶다. 누구라도 함께 동무가 되어 살가운 마음을 담아 손을 잡고 떠나고 싶다. (2024년 8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