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치 ; 표선면 성읍리 605-1번지
시대 ; 일제강점기(1935)
유형 ; 비석(기념비)
규격 ; 높이 71㎝, 너비 34.5㎝, 두께 11.8㎝
문화재 지정 사항 ; 비지정
이 기념비는 독립운동을 하다 숨진 박인생의 어머니를 기념하여 세운 비석이다. 표선면 성읍리에서 아버지 박종신(박종신은 정의향교 장의(掌議)를 지낸 지방 유림의 대표였다), 어머니 이학의 아들인 박인생(1903∼1929)은 보통학교 때부터 수재로 알려졌으며 당시 독립운동의 거목인 교사 김문준을 만나면서 애국사상과 국권회복운동에 뜻을 두게 되었다. 제주도 유일의 중등학교인 제주농업학교에 입학하여 1924년 수석으로 졸업하였고, 동년 4월에 광주농업학교 4학년에 편입하여 이듬해에는 졸업예정자 가운데 학업성적이 수석이며 학생자치회의 간부로 지도력을 발휘할 뿐만 아니라 남을 설득하는 달변가로 알려졌다. 1926년 3월 졸업하고 11월 3일 장재성과 함께 학생항일비밀결사대인 '성진회'의 창립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이 조직은 광주 학생운동의 지도적인 조직으로서 '항일민족독립'이라는 한민족 공동의 대국적 상황을 학생의 처지에서 집약하고 광주 학생계의 현실에서 조직화된 항일적 교양과 저항을 목적으로 하였다. 당시 광주 부동정(不動町)에 있던 최규창의 하숙집에서 광주고보 학생 김광용·정우채·임주홍·국순엽·안종익·김창주·최용호 등 7명과 광주농업학교 학생 정남균·정동수·문승수·정종석·김한필·박인생 등 6명이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목표로 조직하였다. 초창기의 조직은 총무 왕재일, 서기 박인생, 회계 장재성이었다. 회비는 1개월에 1전씩 갹출하였으며 매월 제1, 제3 토요일에 회합하여 연구와 아울러 비밀엄수와 동지 포섭을 결의하였다. 또한 조선의 독립, 사회과학 연구, 식민지 교육 체제 반대 등 뚜렷한 민족적·사회적 방향을 대전제로 하였다.
이러한 성진회도 주요 구성원은 조직 내용의 전환이 필요하게 됨에 따라 독서회로 확대 개편하게 되었다. 1927년 2월 경 성진회는 발전을 위해 임주홍의 집에서 해산하고 동년 3월 박인생과 왕재일 등은 졸업하게 되었다. 성진회 회원들은 시내 남문통 중국 요리점에 박인생과 왕재일을 초대하여 졸업을 축하하며 "졸업 후라도 계속 공산주의를 위해 사회운동에 적극 노력하여 주기를 당부한다"고 역설하였다. 이에 "졸업 후 우리는 계속 사회주의를 연구하고 실천운동에 노력하려니와 더 나아가 만일 외지에 가더라도 우리의 연구와 노력이 후배들에게 전해지도록 온 힘을 발휘하겠다"고 화답하였다.(제주항일인사실기 339∼340쪽)
그 후 박인생은 도쿄 와세다대학 전문부에 입학하여 대학 2학년 때 도쿄 중앙대학 예과 장재성 및 성진회·독서회의 후배들과 함께 동맹휴학을 주도하는 등 항일운동을 펼쳤다. 이어 일본에서 항일운동을 펼치던 은사 김문준을 다시 만나 1929년 봄 장재성과의 만남을 주선하던 중 일본 경시청 형사에게 발각되어 연행되었다. 모진 고문을 받고 부득이 귀향했으나 후유증으로 시달리다가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기 5개월 전인 5월 12일 세상을 떠났다. 성진회 회원으로서 실질적으로 항일운동을 주도했으나 항일운동이 일어나기 전에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박씨의 업적이 묻혀져 버린 것이다.
성진회 회원 가운데 왕재일·최규창·문승수 등은 독립유공애국장을, 제주 출신으로 광주학생운동에 참가한 성진회 및 독서회 회원으로는 홍원표가 애국장을, 강문범·강윤석·김대원이 각각 애족장을 받았다. 정부는 박인생 지사에게 2005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했다.
한편, 1929년 11월 3일 성진회 창립 3주년을 기해 일어난 광주학생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어머니 이학(李鶴)은 아들의 혼이 살아난 것이라고 여겼고 외아들의 떳떳한 죽음을 기리기 위해 사후 6년이 지나 성읍 마을에 의연금 1백원을 기증하여 500평 부지에 마을 향사를 짓게 했다. 그리고 일관헌도 중수하였다. 어머니 이학의 큰 뜻에 감동한 성읍 주민들은 1935년 기념비를 세웠다.(제주항일인사실기 340쪽, 한라일보 2003년 11월 3일)
비석에는 〈朴仁生 萱堂 夫人李鶴記念碑 敎倣孟母 媚思周姜 捐金百圓 資我一鄕 昭和十年五月三十日 城邑里〉라고 새겨져 있다.
기념하는 내용은 독립운동과 관련이 없지만 독립운동가의 어머니를 기리는 비석에 일본 연호(昭和)를 쓴 점은 안타까운 일이다.
김태국 선생님은 이 글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朴仁生萱堂(박인생훤당): 박인생 어머니
夫人李鶴記念碑(부인 이학 기념비): 부인 이학을 기념하는 비석
敎倣孟母(교방맹모): 교육은 맹자 어머니를 본받았고
媚思周姜(미사주강): 아름다움은 주나라 邑姜(읍강: 주나라 무왕의 부인)을 생각하였도다(사모하였도다).
捐金百圓(연금백원): 돈 백원을 출연하니
資我一鄕(자아일향): 우리 온 고을이 의지하였다.(도움이 되었다)
주석
邑姜(읍강): 주나라 무왕의 명신 10명 중 1인으로 내명부를 잘 다스려 무왕을 잘 보좌하였다고 한다.
萱堂(훤당)은 살아계신 남의 어머니를 높여 부르는 존칭어인데 옛날에는 어머니들이 北堂(북당)에 거쳐하였고 그 건물 주위에 근심을 덜라는 의미로 원추리 꽃을 심었다고 한다. 또 원추리는 노란색인데 5방색 중에서는 중앙을 뜻하며 각 방향에서 오는 잡귀를 막아준다고 본다. 따라서 집안의 중심이며 깊숙한 내당 뜰에 심는 꽃이라고 한다. 이 꽃을 훤초라고 하였으며 원추리라는 말도 훤초에서 변형된 것이라고 한다. 어머니들은 예부터 원추리를 가까이하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 믿어 왔다. 임산부가 원추리 꽃봉오리 말린 것을 갖고 다니면 아들을 낳는다고 믿었다. 이 말은 원추리 꽃봉오리가 아기의 고추를 닮았기 때문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그래서 원추리를 득남초(得男草), 의남초(宜男草), 모애초(母愛草)라 하고, 아들을 얻으면 근심걱정이 사라진다 하여 망우초(忘憂草)라고도 한다. 또는 원추리 나물을 많이 먹으면 취해서 의식이 몽롱하게 되고 무엇을 잘 잊어버린다고 해서 망우초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도 한다. 원추리는 노란꽃을 나물로 하는 까닭에 황화채(黃花菜), 화채(花菜)라 하는데 꽃봉오리를 따 말려두고 나물로 했다. 몇 해를 기다려도 아들이 태어나지 않으면 어머니의 긴 고독이 시작되고 그날부터 원추리는 가까운 벗이 된다. 원추리 꽃을 머리에 꽂기도 하고, 자수를 한 땀씩 떠 병풍을 수놓는가 하면, 장독 가에 심어놓고 아들을 점지해 달라 정성 기도를 올리기도 한다.
원추리꽃은 피었다 질 때면 꽃잎을 오므린다. 꽃봉오리가 긴 원추형이고 활짝 피면 나팔 모양이 되었다가 질 때는 다시 봉오리처럼 오므라들기 때문에 헤어졌다 다시 만나는 모양에서 부부의 금슬을 생각하여 합환화(合歡花)라고도 한다. 원추리꽃에서는 성적 흥분을 일으키는 정유물질이 들어 있다고 하여 중국의 옛 황실에서는 꽃을 말려 베개 속을 채웠다고 한다. 꽃에서 풍기는 향기가 정신을 혼미하게 하고 성적 감흥을 일으켜 부부의 금슬을 좋게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원추리를 황금의 베개를 뜻하는 금침화(金枕花)라고 불렀다고 한다. 침실 뒤뜰에 은밀히 심는 것도 부부의 금슬이 좋으라는 뜻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작성 070316, 보완 1506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