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방[7394]이성(李晟) - 귀전영(歸田詠)
귀전영(歸田詠) - 고향으로 돌아가리
이성(李晟) 1251 – 1325
藥砌淸風欺我老 竹溪明月誘吾情
약체청풍기아로 죽계명월유오정
약초섬돌 맑은바람 내늙음을 가려주고
대나무숲 밝은달이 내마음을 유혹하네
昨宵已決歸田計 雪盡江南匹馬行
작소이결귀전계 설진강남필마행
지난밤에 귀농설계 빠짐없이 꾸몄으니
눈 녹은 강남길을 필마타고 내달리리.
약체(藥砌) ; 옆에 약초를 심어놓은 섬돌.
축담을 돌아 뒤안으로 가는 오붓한 곳에 지황이며 박하 따위를
관상용겸 비상용으로 약초를 심어두곤 했었다.
기아노(欺我老) ; 나의 늙음을 속이다. 늙음을 가려주다.
작소(昨宵) ; 간밤.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홀연히 무너져 내리는 회의감과 의문들. 으스스 진땀이 흐른다.
하고 싶었던 공부도 다 못하고. 세상사 휩쓸려 이도 저도 아닌 세월.
고향집 섬돌 밑엔 잡초만 무성하겠구나.
존재감 없는 삶의 무게 앞에 세월만 흘러가고 내가 누군지, 어디로 갈 것인지
아무것도 잡지 못한 세월 이제 그만 둘 때가 된 것 같다.
명예도 하찮고, 권력도 귀찮다. 목구멍에 풀칠이야 무얼 한들 못하랴.
바람결에 일렁이는 약초 향기에 세월을 잊고,
대숲 시냇가를 비추는 밝은 달빛에
마음을 씻으며 그렇게 사는 것이 오히려
명예니 권력이니 하는 것보다 더 나으리.
내일은 이곳을 떠나야겠다.
올 때 그랬던 것처럼 눈 녹은 강남길을
말잔등에 몸을 실어 고향으로 가야겠다.
시인 이성은 여러 차례 관직을 던지고
낙향하여 경서연구에 몰두하였다.
이성(李晟)
본관은 담양(潭陽)이다. 약관(스무살)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온
수감무(溫水監務)를 거쳐 수원사록(水原司錄)이 되었으나
벼슬을 그만두고 죽계촌사(竹溪村舍)로 낙향하여 벼슬을 하지 않고
경서(經書)를 연구하는 데 전념하였다.
뒤에 천거되어 국자박사(國子博士)와 합문지후(閤門祗候)가 되었다.
1309년(충선왕 1) 좌사보(左思補)가 되었는데,
죽계촌사를 그리워하여 벼슬을 그만 두고 다시 낙향하였다.
충선왕이 연경(燕京)에 있으면서 그의 이름을 듣고
내서사인(內書舍人)으로 특진시켰으며,
뒤이어 전의부령(典儀副令)・예문응교를 거쳐 선부의랑(選部議郎)이 되었다.
1314년(충숙왕 1) 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므로 민부전서(民部典書)로 올려
치사(致仕)하게 하였으며, 뒤에 화평부사(化平府使)가 되었으나
얼마 안 되어 사직하고 죽었다.
어릴 때부터 학문에 힘써 오경사(五經笥 : 五經에 능통한 사람)라
하였다고 한다.
나는 가겠다_이성(李晟, 1251-1325)
<고향으로 돌아가리 歸田詠귀전영>
藥砌清風欺我老(약체청풍기아로)
약초 섬돌 맑은 바람 내 늙음을 가려주고
竹溪明月誘吾情(죽계명월유오정)
대숲 시내 밝은 달빛 내 마음을 꼬득이리.
昨宵已決歸田計(작소이결귀전계)
간밤에 귀전(歸田)의 뜻 이미 결심했으니
雪盡江南匹馬行(설진강남필마행)
눈 녹은 강남 길을 필마 타고 가리라.
약체 藥砌 옆에 약초를 심어둔 섬돌
기아로 欺我老나의 늙음을 속이다. 늙은 줄을 모르게 함. /작소 昨宵 간밤.
*砌 섬돌 체 石(돌 석) + 切(끊을 절) stone steps, brick walk.
[이성(李晟)은?]
1251 고종38 ~ 1325 충숙왕12
벼슬보다 학문과 절개를 중시한 선비.
어려서부터 오경에 능통, 오경사(五經笥)로 불림
*笥(상자 사) 𥫗(대죽 죽) + 司(맡을 사)
a hamper, wicker basket.
고려후기 혼란 속에서도 권세보다 학문, 출세보다 청빈,
관직보다 수양을 주시한 전형적인 유학자형 인물
|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 | 동국여지지 제5권하 | 전라도하(全羅道下) | 담양도호부〔潭陽都護府〕 |
이성(李晟)= 과거에 급제하여 수원 사록(水原司錄)이 되었다.
임기가 다 찬 뒤에는 가족을 이끌고 죽계(竹溪)의 시골집에 돌아가 벼슬을 구하지 않았다.
59세에 좌사보(左司補)에 제배되었다. 서성(西省 중서성)에 입직하면서 지은 시에,
작약 섬돌 청풍은 늙은 나를 조롱하고 / 藥砌淸風欺我老
죽계의 명월은 내 마음을 이끄는데 / 竹溪明月誘吾情
전원에서 살 생각을 어젯밤 정해 놓고 / 昨宵已決歸田計
눈 다 녹은 강남을 필마로 돌아가네 / 雪盡江南匹馬行
하고, 다음 날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가니 일시의 명유들이 술상을 차려 전별하였다.
뒤에 충선왕이 그 명성을 듣고 순서를 뛰어넘어 내서사인(內書舍人)에 발탁하였고,
민부 전서(民部典書)로서 치사(致仕)하였다.
사람됨이 질박하고 소탈하며 게을리하지 않고 공부에 힘써서 종유하여
배우는 자들이 매우 많았다. 당시 사람이 그를 일러 ‘오경 상자〔五經笥〕’라 하였다.
동사강목 제13하
을축년 충숙왕 12년(원 진종 태정 2, 1325)
3월 전 화평부사(化平府使) 이성(李晟)이 졸하였다.
성은 담양인(潭陽人)이다. 과거에 올라 수원 사록(水原司錄)을 지냈는데,
임기가 차자 죽계(竹溪)의 촌사(村舍)에 돌아가 벼슬을 구하지 않고
날마다 분전(墳典 고서(古書), 또는 성현의 글)을 연구하는 것으로 일삼았다.
후에 천거를 받아 합문지후(閤門祇候)에 이르고,
나이 59에 좌사보(左思輔)를 배수하고 서성(西省)에 입직(入直)하였다.
시를 지어 자기의 회포를 말하고 이튿날 벼슬을 버리고 떠나는데
당대의 명유(名儒)들이 모여 전송하였다.
그가 떠나면서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약체의 청풍은 나의 늙음을 비웃고 / 藥砌淸風欺我老
죽계의 명월은 나의 정을 유혹하네 / 竹溪明月誘吾情
지난밤에 전리로 돌아갈 계획 결정하고 / 昨夜宵已決歸田計
눈이 다 녹은 강남을 필마로 가네 / 雪盡江南匹馬行
뒤에 화평부사가 되었으나 얼마 후에 다시 사양하고 졸하니, 나이 75였다.
사람됨이 질박하고 사치하지 않았으며, 어려서부터 힘써 배워 손에서 책을 떼지 않았다.
그가 이르는 곳마다 배우러 온 자가 구름같이 모여들어
당시 사람들이 오경 상자[五經笥]라 일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