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_ 나와 너 그리고 우리 (1)진정한 승자는 누구인가?
고등학교 시절 함께 어울려 놀던 친구들 중에 ‘요한’(가명)이라는 개척교회 목사님 아들이 있었다. 요한은 성당을 다니던 나를 어떻게든 개신교로 개종 시키기 위해 온 정성을 다하는 친구였다. 물론 다른 아이들에게도 기회만 되면 신앙 이야기를 꺼내는 친구였지만, 유독 종파가 다르다는 이유로 나는 요한이 걸어오는 종교토론에 본의 아닌 희생자가 되곤 했다.
종교나 신앙의 문제는 토론의 방식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나는 괜한 언쟁으로 친구들 간에 의가 상할까 봐 마음이 불편했었다. 이해를 위한 토론이 아니라 설득을 위한 논쟁이 되면 자칫 친구 간의 우정이 깨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한은 신앙과 교리에 관련해서는 결코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친구들끼리 어떤 주제로 대화를 하든 결국 신앙과 구원으로 초점을 맞추는 요한이를 보면서 친구들은 서서히 피로를 느끼기 시작했다. 입을 떼기만 하면 ‘기 승전-구원’으로 무장된 선교사 요한에게 마침내 한 친구가 제안을 했다. 나와 요한이를 단상에 앉혀놓고 끝장 종교토론을 벌이자는 것이었다. 다른 친구들은 맞장구를 치면서 박수를 쳤고, 누가 이기든 이 토론이 끝나면 더 이상 친구들 간에 종교 문제로 논쟁을 하지 말자는 합의를 보았다.
결국 나와 요한은 천주교와 개신교 교리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는 ‘선량한 이교도’(virtuous pagan)와 관련된 토론을 벌이게 되었다. 개신교 신학에서도 다루고 있는 이 주제의 핵심은 선량하게 세상을 살다 간 비그리스도교인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요한은 아무리 선하게 살았다 하더라도 결국 세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개신교 입장을 옹호했다. 다시 말해서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는 것이다.
반면 나는 평생을 선하게 살아온 사람들이 그리스도교인이 될 기회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세례를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구원에서 제외된다는 것이 이성적으로나 상식적으로 이해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하느님의 본성이 무한한 사랑 그 자체이시며 자비하신 분이라면 그런 교의가 과연 신앙적으로도 이해될 수 있는 주장이냐고 맞섰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천명한 ‘익명의 그리스도인’ 교의를 설명한 것이었다.
이 교의는 가톨릭 교회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교황으로 알려진 요한 23세의 노력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요한 23세는 인간적으로 검소하고 겸손했으며 소탈하고 서민적이었다. 온화하고 탈권위적인 모습으로 그는 가톨릭 교회의 권위적인 모습을 쇄신하는 현대화 운동(aggiornamento)을 이끌었다. 이 운동을 통해 교회는 권위적인 규율과 조직을 오늘날에 맞게 재정비하였고, 특히 동방과 서방으로 갈라진 교회의 형제들을 서로 일치시키기 위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개최하였다. 요한 23세는 비가톨릭 신자들(동방정교회와 개신교)을 이단이 아니라 ‘갈라진 형제이자 아들’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선언하였다.(회칙 Ad Cathedram Petri, 1959, 6, 29) 또한 4세기부터 이어져 온 교회의 배타적 구원론을 쇄신하고 교회 밖에서의 구원 가능성을 최초로 개방하였다. 오늘날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란 용어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요한 23세의 지대한 공헌의 결과였다.
당시까지만 해도 가톨릭 교회는 4세기 치뿌리아누스(Cyprianus) 교부가 주장했던,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Salus extra ecclesiam non est)”는 구원론을 굳게 옹호하고 있었다. 치뿌리아누스는 자신의 저서 『교회의 통일성에 관하여』라는 책에서 “교회를 어머니로 모시지 않는 자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실 수 없다. 노아의 방주 밖에 있었던 자마다 구원받을 수 없었던 것처럼, 교회 밖에 머물러 있게 될 자 또한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치뿌리아누스는 심지어 교회는 교회를 이끄는 감독(교황과 주교)과 하나라고 말했다. 그는 감독이 교회 안에 있고, 교회는 감독 안에 있기 때문에 만일 감독과 함께 있지 않는 자들이 있다면 교회 안에 있지 않다고 기술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의 구원관 덕에 나는 이 토론에서 배심원단인 친구들의 지지를 받고 승자가 되었다. 종교가 없었던 친구들 판단의 기준은 다름 아닌 상식이었다. 요한은 어떤 인간이라도 자신의 삶에서 적어도 한 번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기회를 맞이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예수님을 몰랐기 때문에 신앙을 가질 수 없었다는 말은 타당하지 않으며, 이러한 이유로 예수를 믿지 않는 자는 지옥에 가게 된다는 논리가 핵심이었다. 친구들은 인류의 역사를 놓고 볼 때, 이 주장을 신뢰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으며 자신들이 종교를 가진다면 가톨릭을 선택하겠다고 말했다.
그 날 요한은 너무나 당황하고 화가 나서 견딜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던 기억이 난다. 동시에 나도 친구들의 말이 고맙기도 했지만, 요한이 얼마나 무안했을까 생각하니 미안하고 안타까운 마음이었던 것도 생생히 기억난다. 요한은 상기된 얼굴로 자신의 감정을 추스르며 이렇게 말했다.
“지금은 내가 아직 지식이 짧아서 이런 취급을 받았지만, 나중에 목사님이 돼서 다시 보자. 그때는 확실히 이겨줄 수 있어!”
그로부터 30년도 훨씬 넘는 시간이 흘렀다. 우연히 걸려온 고등학교 동창의 전화를 통해 나는 요한의 근황을 알게 되었다. 요한은 자신의 말대로 목사 안수를 받고 남아메리카의 깊은 오지에서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예수님을 알지 못한 채 구원의 대열에서 소외될 어린 양들을 돌보기 위해 자신의 삶을 온전히 봉헌하고 있었던 것이다.
요한의 소식을 듣고 나는 가슴이 찡해지며 깊은 감동을 느꼈다. 나는 말로 복음을 전한다고 하면서 이렇게 편하게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요한은 말이 아닌 몸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다니 갑자기 마음이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한참 만에 나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그를 축복해 주며 이렇게 말해주었다.
“요한아~ 네 말대로 이제 네가 진정한 승자가 되었구나! 그때는 정말 미안했단다. 하지만 이젠 네가 정말 자랑스럽다. 꼭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만나자꾸나.”
글 _ 박현민 신부 (베드로, 영성심리학자, 성필립보생태마을 부관장) 미국 시카고 대학에서 사목 상담 심리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한국상담심리학회, 한국상담전문가연합회에서 각각 상담 심리 전문가(상담 심리사 1급) 자격증을 취득했다. 일상생활과 신앙생활이 분리되지 않고 통합되는 전인적인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으며 현재 성필립보생태마을에서 상담자의 복음화, 상담의 복음화, 상담을 통한 복음화에 전념하고 있다. 저서로 「상담의 지혜」, 역서로 「부부를 위한 심리 치료 계획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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