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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22. 묵상글 들 ( 성녀 체칠리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 아끼다 똥이 되지 않도록.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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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22. 성녀 체칠리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아끼다 똥이 되지 않도록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오늘로서 <여기 국밥>이 개업한 지 5주 그러니까 35일이 되었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3,000 원짜리 콩나물 국밥을 하고 있는데
점차 찾으시는 지역 주민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 국밥집의 목적은 단지 주변 어려운 분들에게 무료 또는 저렴한 식사를
제공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이를 통해 주민들과의 친교를 넓히고,
그래서 넓은 의미의 복음화를 하는 것인데 며칠 전엔 근처 목사님 부부와
신자들도 오셨기에 지역 운동을 함께 하자고 제안한 적도 있습니다.
여기서 하는 또 하나의 의미있는 사업이 <아나바다> 사업입니다.
아시다시피 <아나바다>는 아껴 쓰고, 나눠 쓰고, 바꿔 쓰고, 다시 쓰자는
환경 친화적이고 생태적인 운동이지요.
저는 이 <아나바다>를 국밥집 못지 않게 중요하게 생각하고,
이것을 통해 역시 지역 사회의 환경 운동을 하려고 하는데
고맙게도 지역 주님들 중에 차츰 이 의미를 아는 분들이 생기고,
그래서 물건을 사가기도 하고 자기들 문건을 기증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참으로 흐뭇합니다.
이 얘기를 왜 길게 했냐 하면 아끼는 것을 나누는 것과
오늘 복음에 나오는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엮어 묵상하고 싶어서입니다.
물건을 아껴 쓴다는 것은 함부로 막 쓰지 않고 소중히 여기며 쓰는 겁니다.
요즘 너무 풍족하게 살다보니 사람들이 물건을 아낄 줄 모르고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물건은 곧 쓰레기가 되며, 그래서 쓰지 않고 버리게 됩니다.
그러니까 쓰는 것은 좋지만 버리는 것은 나쁜 거지요.
아껴 쓰는 것은 더 좋고 막 버리는 것은 더 나쁘고요.
왜냐면 너무 아끼기 때문에 쓰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끼다 똥이 된다고 하잖습니까?
너무 소중하고 그래서 아끼다 쓰지 못하고
주는 것을 아까워하면 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끼지 않고 마구 버리는 것도 나쁘지만
아끼다 쓰지도 않고 주지도 않는 것도 나쁩니다.
사실 아끼는 것이 아까운 것이 되면 안 됩니다.
아끼는 것이 사랑이 돼야지 인색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돈이든 물건이든 아낀다는 것은 매우 소중히 여기고 사랑한다는 것인데
아끼는 것이 지나치거나 잘못 되어서 쓰거나 주기 아깝다면 인색한 거지요.
그러니까 주면 사랑이고 안 주면 인색함이며,
주면 보물이 되고 안 주면 똥이 되는 겁니다.
오늘 과부의 봉헌을 부자의 봉헌과 비교하여
가진 것을 다 드린 것이고 그래서 더 많이 봉헌했다고 볼 수 있지만
관점을 달리하면 자신을 위해서 쓰지 못하던 돈을
아까워하지 않고 다 봉헌한 것이요 그래서 봉헌한 것은 돈이 아니라
사랑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돈이든 물건이든 사람이든 아껴야 합니다.
그러나 써야 합니다.
그리고 줘야 하고 나눠야 합니다.
이것이 아끼다가 똥이 되지 않고
더 소중한 것 곧 사랑이 되게 만드는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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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22. 성녀 체칠리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루카 21,3)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신심 깊은 가난한 과부를 만납니다. 그는 비록 렙톤 두 닢을 예물로 바쳤지만, 그것은 자신이 가진 전부였습니다. 그것은 아들과 함께 먹고 죽을 작정으로 마지막 빵을 만들면서도 엘리야에게 바쳤던 사렙다의 과부(1열왕 17,12)처럼.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일이었습니다.
이토록, 전부를 예물로 바침은 주님께 대한 전적인 내맡김이요 믿음이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진정한 마음을 바치는 표현이요, 자신보다 주님을 앞세우는 표시였습니다. 마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사람을 여관으로 데려가서 여관 주인에게 그 사람을 돌봐달라고 내놓은 그 값진 두 데나리온과 같을 것입니다(루카 10,35).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많은 양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마음으로 바치는 것입니다. 이는 무엇을 중히 여기고, 무엇을 앞세워야하는 지를 말해줍니다. 곧 봉헌은 자신의 계산에 따라 다 쓰고 남은 조각을 ‘나중에’ 바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꼭 필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먼저’ 바치는 믿음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녀는 과부의 딱한 처지인데도 불구하고, 곧 가난하고 어려운 처지인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가진 전부를 ‘맨 먼저’ 앞세워 바쳤던 것입니다.
대체 무엇이 이토록, 그녀로 하여금 그의 전부를 바치게 하였을까?
그것은 소중하고 귀한 분을 만난 까닭이 아닐까요? 전부를 건네주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드는 주군이신 분을 만난 까닭이 아닐까요? 바로 그러한 분을 만나면, 자신의 전부를 바치지 않고는 못 배겨나기 때문이 아닐까요?
사실, 우리는 그 소중하고 귀한 분을 이미 만났습니다. 그러니 여기 이 자리에 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을 향한 사랑이 더 깊어 가는지, 혹은 퇴색되거나 변하지는 않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전부를 바쳐 그분을 사랑하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암브로시오 성인은 가난하면서도 전 재산을 봉헌한 이 “과부”에 대해서, “교회를 나타내는 신비로운 표상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전부를 산 제물로 바쳐야 할 일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로마 12,1)
오늘, 저는 이 가난한 과부의 봉헌을 통하여, 나의 삶이 무엇을 우선하고 무엇을 앞세우는 삶인지를 들여다봅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하여 진정, 무엇을 바치고 있는지, 혹은 전부를 바치고 있는지를 봅니다. 나는 오늘 무엇을 봉헌할 수 있을까요? 대체 무엇을 봉헌해야 할까요?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궁핍한 가운데에서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루카 21,4)
주님!
온 마음과 정신과 힘을 다하여 섬기지 않았고
온 시간과 열정을 다하여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당신보다 제 자신을 앞세우며 살아왔습니다.
기도하면서도 마음을 다하지 않았고, 먼저 바치기보다 나중에 바쳤습니다.
당신은 저의 전부이오니, 저의 전부를 바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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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22. 성녀 체칠리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부분은 전체보다 많을 수 없다
오래전 일입니다.‘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자!’고 말하면서도 자구 비교를 하였습니다. 본당 사목을 하면서 현 임지에서 최선을 다할 생각은 안 하고 전 임지와 견주었습니다. 추수감사미사를 봉헌하면서 본당 규모가 큰 것에 비하면, 감사예물과 곡물이 적게 봉헌되었다고 생각하며 서운해한 적도 있습니다.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준비시키지 못하고, 믿음을 성장시켜드리지 못한 자신의 처지를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물질에 매이지 않고 믿음에 마음의 중심을 둘 수 있기를 기도해야 하지만 머리로만 그렇게 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떤 빈곤한 과부를 칭찬했습니다. 그는 자기의 생활비 전체를 예물로 바쳤기 때문입니다. 그에 반해 부자들은 풍족한 데서 일부만을 바쳤습니다. 부자가 바친 예물은 가난한 이의 것에 비하면 훨씬 많은 금액이었지만 예수님은 그보다 가난한 과부의 마음을 헤아리셨습니다. 아무리 적은 돈이라도 인생 자체가 담긴 것이라면 가장 많은 돈이 됩니다. 가장 적은 것이라도 보아주시고 그 가치를 알아주시는 분이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많은 사람이 먼 훗날 잘 되면 크게 돕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는 지금 할 수 있는 만큼 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렇지만 많은 경우 정성보다 액수의 많고 적음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의 잣대로 판단합니다. 제 모습이 꼭 그랬습니다. 우리는 속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주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한 때는, 건축 기금을 모으면서 나름대로 모금 액수를 정하고 아무개는 얼마, 아무개는 이 정도는 해 주겠지! 하며 기대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 후 그들을 바라보는 제 마음이 힘이 들었습니다. 각자에게는 남모르는 사정이 있을 수 있으니 정성을 보고, 마음을 보아야 하는데 봉헌한 현금의 많고 적음으로 사람을 보았습니다. 저도 별수 없이 물질에 휘둘렸습니다. 그 후로 ‘물질의 봉헌 이야기를 많이 하지 말자!고 다짐을 했습니다. 봉헌을 아까워서 억지로 한다면, 아무리 많은 액수를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자기를 선전하고 과시하며 위신과 체면을 생각하는 헌금을 하느님께서는 결코, 기뻐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믿음이 크면 모두가 주님의 것이요, 감사하게 될 것이니 믿음을 키우는 것에 마음을 두자. 믿음의 성장에…. 그러고는 비로소 자유로워졌습니다.
속마음을 헤아리시는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물질보다 주님을 선택하는 지혜로 모든 것을 차지하시길 기도합니다. 양적으로 더 많은 것을 추구하는데 익숙해진 부끄러움에서 벗어나길 바랍니다. 많고 적음의 차이는 무엇을 중심으로 바라보는가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부분은 부분입니다. 전체보다 클 수는 없습니다. 모두는 부분보다 큽니다. 먼저 하느님께 바칠 것을 떼어놓고 나머지를 가지고 나를 위한 계획을 세우면 어떨지요? 물질뿐 아니라 시간이나 공간, 재능도 말입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도둑의 뉘우침
한 성직자가 물건을 훔쳐 나가는 도둑을 붙잡았습니다. 그에게 “도둑질을 한다는 것은 인생에 오점을 남기는 것입니다. 순간의 잘못된 생각으로 큰 실수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도둑은 깊이 반성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네 맞아요, 물건을 훔쳐 나오면서 발자국을 닦지 않았어요. 바로 가서 닦아야 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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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22. 성녀 체칠리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 다니엘의 지혜, 가난한 과부의 모델
우리 교회는 그리스도왕 대축일을 지낸 주간을 성서 주간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성서위원회에서는 올해 제37회 성서 주간을 맞아 평화를 주제로 한 담화문을 발표하였는데,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 14,27)는 말씀에 따라서, 평화로운 세상을 건설하자고 전국 신자들에게 호소하였습니다. 세상은 정의가 실현되지 못해서 평화가 위협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의를 씨앗으로 삼아 평화라는 열매를 맺고자 하기는커녕, 불의한 현실은 그대로 두면서 무기와 군대라는 힘으로만 평화를 지키고자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 마음에 정의의 씨앗을 뿌리고 사랑이 가득차게 하지 않으면, 세상 끝 날까지도 무기가 필요없어 지고 전쟁이 사라질 날은 결코 오지 않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건네신 첫 인사도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19.21.26)였습니다.
다니엘은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 앞에서 하느님과 함께 살면 그분의 지혜가 주어질 수 있음을 입증해 보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재물과 돈을 어떻게 벌어야 하는지에 대해서가 아니라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가르치시고자 가난한 과부를 칭찬하셨습니다. 하느님 없이 돈을 섬기며 살아가는 부자 청년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 구멍으로 빠져나가기보다 어렵지만, 하느님의 뜻과 힘에 따라 살아가는 가난한 과부는 자신의 전 재산도 아낌없이 바침으로써 하느님 나라를 차지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넉근히 받으셨습니다.
다니엘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모범이요, 가난한 과부는 교회의 모델입니다. 흔히 우리는 돈을 쓰는 지혜보다는 버는 지혜에 목을 매달다시피 노력하는가 하면, 가난한 과부의 모범은 교회보다 부자나 신자들에게 적용하는 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천동설이 그럴 듯 보여도 지동설이 옳은 것처럼, 돈을 벌기보다 쓰기가 어렵고 부자보다는 가난한 사람이 돈을 더 잘 씁니다. 이렇듯 성서가 가르치는 이러한 지혜는 역설적입니다. 교회가 돈에 인색한 부자를 닮기보다는 나눔에 관대한 가난한 과부를 닮기를 바라셨던 예수님의 뜻을 명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교회가 돈에 관해 천박한 풍조가 만연한 세상에 대하여 관대한 나눔으로 평화를 선포하기를 바라십니다. 그에 대한 명쾌한 정답을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귀띰해 주고 가셨습니다. 바로,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교회, 가난한 이들의 교회, 가난한 교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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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22. 성녀 체칠리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신학생 때 방학이 되면 친구들과 산에 가곤 했습니다. 그중 인상 깊었던 산행이 떠올려집니다.
여름방학 때, 친구들과 설악산을 갔는데 그날 비가 주룩주룩 계속 내리는 것이었습니다. 오랜만의 등산인데 비 때문에 오르지 못하면 안 될 것 같아서 강행했습니다. 그런데 점점 몸이 무거워지는 것입니다. 그때 한 친구가 너무 힘들었는지 제게 부탁을 합니다.
“내 배낭에는 부식이 가득 들어있어서 너무 무거워. 배낭을 바꿔서 매면 안 될까?”
친구가 너무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흔쾌히 바꿔서 맸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제 배낭은 가벼워졌습니다. 왜냐하면 오랜 시간의 산행으로 힘이 빠진 친구들이 제 배낭 안의 부식을 먹었기 때문입니다. 밤늦게 숙소에 도착했을 때, 배낭은 거의 비어 있었습니다.
친구를 도우려는 마음이 오히려 저를 편하게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사랑의 실천은 원래가 이런 것이 아닐까요? 남을 위한 행동인 것 같지만, 결국은 자기에게 커다란 이득을 가져다줍니다. 특히 하느님 나라에서는 이 사랑의 실천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따라서 그 사랑의 실천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면 이보다 더 큰 이득이 어디에 있을까요?
가난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헌금합니다. 이는 아주 적은 돈이었습니다. 그래서 남 보기에는 놀림감이 될 수도 있는 봉헌이었습니다. 어떤 이는 “그렇게 적은 액수는 티도 나지 않아.”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가난한 과부에게는 하루치의 식량 값이었습니다. 다른 이에게는 티도 나지 않는 적은 액수이지만, 가난한 과부에게는 너무나도 큰 전부였습니다. 이를 예수님의 말씀으로부터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다.”
놀림감이 될 수 있는 봉헌이지만, 가난한 과부는 사람들의 시선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하느님께서 주신 사랑에 조금이나마 보답하고자 하는 마음이 더 컸던 것입니다. 그래서 생활비 전부를 봉헌할 수 있었습니다.
그에 반해 부자들은 어떠했을까요? 그들은 하느님의 눈치가 아닌 사람의 눈치만 보았을 것입니다. ‘이 정도면 충분할까? 너무 적지 않나? 아니 너무 많은 것은 아닐까?’ 등의 생각을 가지고 사람의 눈치만 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을 바라보지 않는 봉헌에 하느님께서 굳이 바라보실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가난한 과부의 정성 어린 봉헌이 결국 그녀를 구원의 길로 이끌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어떤 봉헌을 하고 있습니까? 정성 가득한 봉헌은 우리에게 더 큰 선물로 다가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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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을 가로막을 문도, 자물쇠도, 빗장도 존재하지 않는다(버지니아 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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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힘 있는 사람
군대 생활을 할 때의 선임병을 우연히 만난 적이 있습니다. 이 선임병은 그 당시 부대에서 ‘최고 병사’였습니다. 총도 잘 쏘고, 훈련 중의 작전 수행 능력이 가장 뛰어났습니다. 더군다나 운동도 너무 잘하고, 도대체 못 하는 것이 무엇일까 라는 생각을 하게 하는 선임병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잘살고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현재 취업이 되지 않아 하는 일 없이 쉬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제가 그래도 군대에서는 날아다녔었는데, 지금 왜 그럴까요?”
가장 많은 시간을 쓰는 일상에서의 힘이 진짜 힘입니다. 전쟁에서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전쟁에서 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일상 삶 안에서 전쟁의 힘은 필요 없습니다. 즉, 일상에서 필요한 힘을 키워야 합니다.
일상 안에서의 힘을 키우지 못하고 과거에 연연하고 미래를 걱정해봤자 어떤 변화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내 일상 안에서의 힘을 키우기 위한 노력에 집중해야 합니다. 과거의 일은 그냥 그리움으로 기억하고, 미래에 대해서는 목표를 떠올려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 일상에서 힘을 내는 진짜 힘 있는 사람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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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22. 성녀 체칠리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동북부 성령대회엘 다녀왔습니다. 작년에는 코로나의 영향으로 무산되었지만 올해는 방역에 만전을 기하면서 대회를 진행하였습니다. 강의를 해 주신 신부님들은 오늘 독서에 나온 지혜로운 젊은이들처럼 교우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 주었습니다. 어머니와 성모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힘들 때면 성모님의 삶을 생각하라고 하였습니다. 성모님처럼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면서 지내라고 하였습니다. 성모님처럼 어려운 일이 생기면 예수님께 의탁하라고 하였습니다. 성모님처럼 예수님 수난의 길에 함께 가라고 하였습니다. 강의를 하신 신부님은 기타도 치시고, 하모니카도 연주해 주었습니다.
성공과 성장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성공을 기대하면 만족하지 못할 때가 있다고 합니다. 성공을 원하면 양심을 속일 때도 있다고 합니다. 성공을 추구하면 삶이 고단하고, 힘들 때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성공이 아닌 성장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공이라는 불길 속으로 들어가려다가 상처를 받기도 하고,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장하는 신앙인은 늘 만족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성공하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성공하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성장하는 신앙인은 감사하면서 살 수 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들지 않는다면 성장의 신앙이 아닌, 성공의 삶을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진솔한 신부님의 강의는 마음을 따뜻하게 해 주었습니다.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서 멀리서도 성령대회를 찾아왔습니다. 버지니아, 보스턴, 코네티컷에서도 왔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났고, 가슴이 뜨거워지는 체험을 했습니다. 예수님을 집으로 모신 제자들은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성령대회에 온 교우들은 엠마오를 체험했습니다. 가족들에게, 이웃에게 주님 부활의 증인이 될 것입니다. 찬양 봉사자들은 찬양으로 성령대회를 뜨겁게 해 주었습니다. 음식 봉사자들은 참가자들이 넉넉히 먹고도 12광주리는 남을 정도로 푸짐하게 음식을 준비해 주었습니다. 매서운 바람도, 겨울을 재촉하는 비도 성령대회의 열기를 막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를 하느님께 인도하는 것은 우리의 능력, 재물, 학식, 직업이 아닙니다. 능력, 재물, 학식, 직업은 우리의 인격을 감싸주는 옷과 같은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셨습니다. 없는 가운데서도 주님께 기쁜 마음으로 봉헌한 마음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과부는 따뜻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하느님의 어린양을 따르는 흠 없는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의 겉모습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향한 우리들의 마음을 보십니다. 그 마음을 이웃과 세상을 향해 나누는 우리들의 정성을 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코로나 팬데믹 시대에 성령대회에 참석한 교우들을 칭찬하실 것입니다. 맛있는 점심을 준비해 준 봉사자들을 칭찬하실 것입니다. 찬양으로 성령대회를 뜨겁게 해 준 봉사자들을 칭찬하실 것입니다. 성령대회를 영상으로 제작하여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한 봉사자들을 칭찬하실 것입니다. 말씀으로 교우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었던 사제들을 칭찬하실 것입니다. 새로운 한 주간을 시작하는 월요일입니다. 일주일은 168시간입니다. 하느님을 찬미하는 시간, 이웃을 사랑하는 시간, 성서를 읽고 묵상하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요? 16시간을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서 사용한다면 그것이 바로 신앙의 십일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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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22. 성녀 체칠리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회개悔改의 여정, 성화聖化의 여정
- 참사람의 참나眞我 되기 -
가을 단풍 나뭇잎들 다 떠나보낸 만추의 배나무들이 참 초연하고 넉넉해 보입니다. 노년의 아름다움도 이와 같을 것입니다. 11월 위령성월, 연중 마지막 주간, 지난 밤부터 내리기 시작한 만추晩秋의 가을비 역시 봄비 이상으로 우리에게 깊은 평화를 줍니다. 인생사계 ‘봄-여름-가을-겨울’로 압축했을 때, 과연 우리는 어느 지점에 위치해 있을까요? 여름 혹은 가을입니까, 혹은 겨울입니까? 자연 성서聖書와도 같은 자연책의 순리가 우리에게는 좋은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일출日出시 찬란한 아침노을도 아름답지만 일몰日沒시 고요한 저녁노을도 더 깊고 아름답습니다. 봄꽃들도 아름답고 향기롭지만 가을단풍들의 초연한 아름다움과 편안한 향기는 참으로 ‘텅 빈 충만’의 행복을 선사합니다. 누구나 소망하는 바, 노추老醜나 노욕老慾이 아닌 이런 아름다운 노년에 향기 은은한 삶일 것입니다.
참 중요하나 뜻대로, 마음대로 안되는 것이 잘 떠나는 죽음일 것입니다. 참으로 잘 떠나는 죽음의 은총이 얼마나 절실한지 깨닫습니다. 떠날 때 잘 떠나는 죽음을 맞이하지 못해 병고나 치매로 무의미하게 지체되는, 짐이 되는 노년의 삶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수도자든 기혼자든 노년이 되어갈수록 얼마나 힘들어 하는지 듣고 보는 요즘의 날들입니다. 정말 신앙의 일치 없이 노년 부부는 남남일 수 뿐이 없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난 주 토마스 머튼의 삶과 영성을 주제로 연피정을 지도한 도반 안셀모 수도사제와 주고 받은 사진과 덕담德談의 메시지를 소개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동안 행복했습니다. 토마스 머튼이 환생할 줄 알았습니다. 사랑하는 도반 안셀모 신부님, Becoming Love(사랑되기)! 우리 영적 삶의 궁극 목표이자 희망이겠습니다. 축하와 더불어 감사인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신부님의 따뜻한 말씀과 격려에 힘이 납니다. 영육간 늘 건강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유종有終의 미美로 끝나는 인생은, 시종여일 한결같이 아름다운 인생은 얼마나 중요하고 힘든지요! 용두사미로 끝나는 인생도 많고 표리부동의 인생도 많기 때문입니다. 변질되거나 변절하거나 배신하지 않고, 배은망덕함이 없이 인생을 한결같이 아름답게 사는 것 역시 참으로 중요하고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배교, 변절, 변절 후의 삶이라면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배교, 변절, 변질보다는 죽음을 택함으로 영원히 살게 된 순교성인들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한결같이 충실한 아름다운 삶을 지향하는 우리 베네딕도회 수도승들의 정주서원입니다. 신뢰 상실을 뜻하는 배교자, 변절자, 배신자라는 말보다 치명적인 말도 없을 것입니다. 아주 오래 전 어느 자매의 넋두리처럼 흘러 나온 말도 잊지 못합니다.
“음식은 맛이 가면 버리기라도 하는데 사람이 맛이가면 버리지도 못하고---”
참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상한 음식은 버리면 되는 데, 맛이간 부패인생이라면 참 대책이 없을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착안한 부패인생과 발효인생입니다. 부패인생에서는 악취가 나지만 발효인생에서는 깊고 은은한 향기나 납니다. 바로 정체성 또렷한 참사람의 참나로 살게 하는 회개의 여정, 성화의 여정을 뜻하는 발효인생입니다.
바로 향기로운 발효인생의 모범이 오늘 축일을 지내는 순교 성녀 세실리아를 비롯한 가톨릭 교회의 살아 있는 보물들인 무수한 성인들이요, 오늘 복음의 가진 것 모두를 봉헌한 가난한 과부요, 제1독서 다니엘서의 다니엘을 비롯한 하난야, 미사엘, 아자르야의 이스라엘 출신 네 청년입니다. 참으로 모두가 초지일관, 시종여일 하느님께 충실했던 한결같은 참사람의 원형같은 성인들입니다.
우선 세실리아 성녀를 소개합니다. ‘천상의 백합’을 뜻하는 이름이 참 곱고 청순한 느낌을 줍니다. 순교연대는 3세기로 추정할뿐 정확한 연대는 모릅니다. 이교도 였던 발레리아누스 남편도 후에 개종하고 먼저 순교함으로 성인이 되었고, 세실리아 역시 끝까지 배교를 거부하고 참수형의 순교를 통해 성녀가 되니 부부성인이 되었습니다.
한결같이 성화의 여정에 충실하다 순교의 죽음을 통해 참나의 성인으로 생을 마감한 성녀 세실리아였습니다. 오래 살아 성인이 아니라 얼마를 살든 참으로 살 때 성인입니다. ‘순교는 성체와의 결합이다’ 새삼 떠오르는 말마디입니다. 사랑의 순교, 사랑의 성체이기 때문입니다. 비올라나 풍금을 연주하는 모습으로 그려진 세실리아 성녀는 음악인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고 있습니다.
둘째, 복음의 가난한 과부입니다.
가난한 과부는 그대로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과부는 외관상 가난하나 실상 내적으로 참으로 부요하고 자유로우며 마음 순수한 성녀입니다. 가진 것이 많아서 부자가 아니라 최소한의 소유로, 참으로 하느님 만으로 만족하고 행복한 부자가 최고의 부자요 자유인이요 마음 순수한 참행복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그러했고 예수님을 그대로 닮은 참 초연한 이탈의 영성 대가, 지혜롭고 겸손한 오늘 복음의 성녀 가난한 과부가 그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인정하신 가난한 과부입니다. 참으로 우리에게 신선한 충격과 더불어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
셋째, 다니엘서의 이스라엘 네 청년입니다.
참으로 하느님께 시종여일 충성했던 네 청년의 이름 뜻들도 심오합니다. 다니엘은 ‘하느님은 나의 심판자’, 하난야는 ‘주님은 은총을 주시는 분’, 미사엘은 ‘누가 하느님과 같으랴?’, 아자리아는 ‘주님은 도우신다’라는 이름 뜻이 마치 방부제처럼 이들의 변질을 막아주는 은총처럼 생각됩니다. 이들에 대한 묘사가 이를 입증합니다.
‘이 네 젊은이에게 하느님께서는 이해력을 주시고 모든 문학과 지혜에 능통하게 해 주셨다. 다니엘은 모든 환시와 꿈도 꿰뚫어 볼 수 있게 하셨다.---그들에게 지혜나 예지에 관하여 어떠한 것을 물어 보아도, 그들이 온 나라의 어느 요술사나 주술사보다 열 배나 더 낫다는 것을 임금은 알게 되었다.’
회개의 여정, 성화의 여정을 통한 존재론적 변화요, 우리는 참사람의 참나의 성인이 되어갑니다. Becoming Love(사랑되기)는 믿음, 희망에 모두에 적용되니, 바로 우리는 성화의 여정을 통해 신망애의 사람이, 진선미의 사람이 되어 가니 바로 이것이 존재론적으로 변화입니다. 단적으로 우리 모두 ‘하느님 되기Becoming God’, ‘예수님 되기Becoming Jesus’의 성화의 여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회개의 여정, 성화의 여정은 그대로 하느님 닮기의 하닮의 여정, 에수님 닮기의 예닮의 여정이라고 말입니다. 역설적으로 하느님을, 예수님을 닮아감으로 우리는 참사람의 참나의 성인이 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인생의 유일한 목표이자 보람이자 행복일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매일 평생 규칙적으로 끊임없이 바치는 찬미와 감사의 시편성무일도와 미사의 공동전례 은총이 우리의 부패와 변절, 변질을 막아주고 시종여일, 한결같이 발효인생을 살아가는데 얼마나 결정적 도움을 주는지 깨닫습니다. 주님은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회개의 여정, 성화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함으로 날로 예수님을 닮아 참사람의 참나의 성인이 되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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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22. 성녀 체칠리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봉헌의 내적 자세를 헤아리게 해 주십니다.
"어떤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거기에 넣는 것을 보시고"(루카 21,2)
예수님이 성전에서 가난해 보이는 어떤 과부에게 눈길을 주십니다. 보통 관심 있는 부분으로 시선이 가기 마련이지요. 봉헌은 당사자와 하느님 사이의 일이니 액수가 많건 적건 함부로 개입해서는 안 되지만 헌금의 양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차별하는 일이 없지 않았을 겁니다. 그녀가 헌금함까지 나아가 손을 뻗기까지 어쩌면 용기도 필요했을 것 같지요. 하지만 예수님께는 헌금의 액수가 아니라 간절함과 용기가 곧 의탁의 크기입니다.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루카 21,4)
예수님은 액수가 아니라 마음을 보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십니다. 세상이 정한 수량의 기준으로는 분명 미소하지만, 가진 것을 다 넣는 그녀의 용기는 어느 누구보다고 큽니다. 현재 자신이 가진 것, 그리고 미래까지도 모조리 바치고 싶은 마음은 믿음과 사랑에서 우러납니다.
제1독서는 바빌론으로 유배를 간 이스라엘 귀족 청년들 이야기입니다.
"궁중 음식과 술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하고"(다니 1,8)
그들은 이방인에게 끌려가서 낯선 문화와 풍습을 억지로라도 받아들여야 하는 처지가 됩니다. 어쩌면 목숨을 보전하기도 어려운 상황일지 모르는데, 패망한 민족 고유의 신앙과 율법, 관습을 지키는 일이 호락호락할 리 없지요. 그래도 그들은 용기를 냅니다.
"하느님께서는 ... 호의와 동정을 받도록 해 주셨다."(다니 1,9)
"하느님께서는 이해력을 주시고 모든 문학과 지혜를 능통하게 해 주셨다. ... 모든 환시와 꿈도 꿰뚫어 볼 수 있게 되었다."(다니 1,17)
하느님께서 이르신 것을 지키려는 마음을 먹고 용기를 낸 이는 이스라엘의 네 젊은이들이고, 그들을 보호해 주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들을 가상히 여기신 하느님께서 관리하는 이의 마음을 움직이시고, 또 그 젊은이들이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도록 채워 주셨지요.
"보라, 이제 순결한 예물, 정결한 희생 제물인 용감한 동정녀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어린양을 따른다."(입당송)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체칠리아 성녀 역시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지키려 목숨을 내놓은 순교자입니다. 박해의 칼날 앞에 왜 무섭지 않았겠습니까마는, 인간적인 두려움을 내려놓고 아무 계산 없이 자신을 하느님 앞에 예물로 내놓는 사랑이 하느님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그분께서 그 온전한 봉헌의 마음을 기꺼이 받아주셨지요.
우리는 저마다 가진 것도 다르고 그 종류와 수량은 더더욱 천차만별일 겁니다. 가난하고 미소해도 주님 앞에 나설 수 있는 건, 주님이 당신께 무어라도 드리고 싶어하는 바로 그 사랑의 마음을 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이지요.
사랑하는 벗님! 부족하나마 마음을 다해 사랑을 바치고 용기를 내어 의탁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의 막막한 처지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향하는 발길을 멈추지 않는 사랑을 그분께서 알아주시고 보호해 주시고 지켜 주실 것입니다. 그분께서 마음을 보시는 분이어서 참 다행이고 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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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22. 성녀 체칠리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이병우 루카 신부님.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루카21,3)
'마음을 보시는 예수님!'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헌금함에 예물을 넣는 부자들을 보고 계시다가, 어떤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넣는 것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가운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루카21,3-4)
예수님께서는 헌금의 양을 보시지 않고, 봉헌하는 이의 마음을 보십니다. 가난한 과부의 온전한 봉헌의 마음을 보시고 그를 칭찬하십니다.
가난한 과부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하느님께 봉헌했다는 것은 그만큼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이 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으뜸 계명, 곧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르12,)는 계명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겉을 보지 말고 속(마음)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종종 너의 겉을 보고 평가하거나 판단합니다. 외모나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그렇게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을 보셨습니다.
형식을 보지 않고 본질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온 마음과 정성을 담은 봉헌을 보시고 기뻐 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하느님께 드리는 나의 봉헌행위에 온 마음과 정성을 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아무리 나의 작은 자비와 사랑이라 하더라도 어여삐 보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 "아무도 나는 너무 가난해서, 가지고 있는 것이 초라해서 너를 도와줄 수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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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22. 성녀 체칠리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최종훈 토마스 신부님.
오늘의 묵상
주일 미사를 혼자 봉헌하기 싫어 옆 본당을 찾습니다.
제단이 아닌 신자석에 앉아 조용히 미사를
준비할 때면 또 다른 느낌이 듭니다.
미사가 시작되고 예물 봉헌을 할 때 순간 고민합니다.
평소에 헌금을 봉헌하지 않아 봉헌금을 들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어색해서입니다.
그러나 봉헌을 하지 않고 자리에 그냥 앉아
있는 것이 더 어색할 것 같아 봉헌을 합니다.
잠시 본당 사목의 소임을 맡았던 때
교무금으로 십일조를 하였던 기억도 납니다.
그런데 봉헌금과 교무금을 냈던
마음을 곰곰이 돌이켜 보면 부끄럽습니다.
봉헌금을 낸 이유가 다른 사람의
시선 때문은 아니었나 싶기 때문입니다.
교무금도 좋은 의도라기보다는 ‘본당 신부도 교무금을 낸다.
그러니 당신들도 십일조의 원칙에 따라 교무금을 내라.’ 하는
암묵적 지시였는지도 모릅니다.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고 계신 예수님께서는
봉헌금이 많고 적음을 떠나 그들의 마음과 자세에 집중하십니다.
가난한 과부가 넣었던 렙톤 두 닢은 지금 우리나라 돈으로 치면
1,500원 정도(1렙톤은 당시 하루 일당인 1데나리온의 1/128 정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과부를 보시고는 보잘것없지만 자신의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봉헌하는 마음, 그리고 많이
내지 못함을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칭찬하신 것입니다.
어머니께서는 신권을 쓰지 않고 모아 두셨다가 봉헌금으로 내셨습니다.
깨끗하고 구겨지지 않은 돈이 없을 때에는
다림질을 해서 봉헌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우리의 봉헌의 마음과 자세를 살펴보았으면 합니다.
무엇을 봉헌하는지, 어떻게 봉헌하는지,
그리고 그 마음과 의도는 어떠한지를 되돌아봅시다.
그런 우리를 보시며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오늘 복음 안에서 들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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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22. 성녀 체칠리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가난한 과부의 헌금
예루살렘 성전에는 나팔 모양의 헌금 궤가 13개가 있었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 나팔 궤 가까이 앉으시어 많은 사람이 헌금하는 것을 보고 계셨다. 그때 가난한 과부가 자신이 가진 돈이라고는 엽전 두 닢밖에 없었는데 그것을 다 넣는 것을 보시고, “저 가난한 과부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그 돈은 그 과부가 가진 것 전부였기 때문이다(3-4절 참조).
부자들은 교회에서 선행하지 못한다. 재물에 대한 집착으로 어두워진 눈에는 궁핍하고 가난한 이들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돈 많고 부유한 사람들이 헌금하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주님께 바치는 제물에 그리 관심이 없다. 그러기에 주님의 잔치에 참여할 수가 없다. 자기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바치지 않았고, 그 마음 안에는 하느님 대신 재물이 맨 첫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극심한 궁핍으로 시달리는 가운데서도 주님께 예물을 바친 과부가 나온다. 그 과부는 헌금함에 자신의 전 재산인 렙톤 두 닢을 넣었다. 이 과부는 심판 날이 되기도 전에 심판관으로부터 칭찬을 들은 복되고 영광스러운 여인이다. 교회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할 과부가 내놓았으니, 그런 칭찬을 들었다. 가난한 이들도 마땅히 선행을 실천해야 한다. 가난한 이를 돕는 것은 하느님께 예물을 바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선을 행하는 이를 어여삐 여기신다. 이러한 예물이 ‘하느님의 예물’이다. 예수님께서는 과부가 하느님의 예물 함에 렙톤 두 닢을 넣었음을 지적하셨고, 가난한 사람을 가엾이 여기는 이는 하느님을 돕는 사람임을 분명히 말씀하셨다. 과부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과부의 렙톤 두 닢은 그의 전 재산이었다. 그에게는 남은 것이 없었으며, 그래서 빈손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 빈손은 자기가 가진 것을 모두 주님께 바친 손이었다. 그 과부야말로 거룩하신 심판관께 최고의 칭찬을 들어 마땅한 사람이다. 마음으로 기꺼이 바쳤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것은 참된 제물이 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부자의 많은 예물보다 가난한 자가 사랑과 열성으로 바친 예물을 더 즐기신다. 과부의 가난은 신앙의 신비 안에서는 풍요로운 부였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사람을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여관 주인에게 그 사람을 돌봐 주라며 내놓은 두 데나리온(루카 10,35)도 그런 돈이다. 가난한 과부는 병자들이 치료받고 주린 이들이 배를 채울 예물을 헌금 궤에 넣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였고 그렇게 하여 교회를 나타내는 신비스러운 표상이 되었다. 친절을 베풀어도 온유해지지 않는 심술궂은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자선은 반드시 열매를 맺고 선행 역시 헛수고로 끝나는 법이 없다. 선행에 낯선 사람이어서는 안 된다. 하느님 앞에서는 모든 자선이 값지다. 모든 동정이 열매를 맺게 되어있다. 그분은 각기 다른 재산을 주시지만, 똑같은 사랑을 요구하신다. 이 사랑을 드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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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22. 성녀 체칠리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루카 21, 4)
마지막
한 잎 마저
떨어뜨리는
나무들의
온마음이다.
자아에서
벗어나야
하느님께로
돌아갈 수 있다.
생활의
최종목적지는
하느님이시다.
생활비를
다 바친다는 것은
자신의 뜻을
모두 다
내려놓는다는
것이다.
일상적인 생활을
떠나서는 봉헌을
이야기 할 수 없다.
주님께서
함께하시는
일상으로
우리를
초대하는 것이
봉헌이다.
모든 생활이
정성어린
봉헌의 연속이다.
봉헌은
주님을 드러내는
삶의 중요한
핵심이다.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바꾸는 봉헌이다.
하느님 사랑으로
이어지는 봉헌이다.
생활의 방향은
봉헌의 방향과
일치한다.
하느님을 향하는
봉헌이 필요할
뿐이다.
빈곤한 과부의
렙톤 두 닢은
생활의 집착이
아닌 생활의
봉헌을
우리들에게
가르쳐준다.
삶의 근본이
되시는
하느님께로
돌아가야 할
우리들이다.
생활이 되시고
생활을 주시는
하느님을
바라보는
성녀 체칠리아
축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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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22. 성녀 체칠리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 가난한 과부의 헌금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헌금함에 예물을 넣는 부자들을 보고 계셨다.
그러다가 어떤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거기에 넣는 것을 보시고
이르셨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루카 21,1-4)”
여기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다.” 라는 말씀은,
“가지고 있던 돈을 다 넣었다.” 라는 뜻입니다.
(‘생활비’ 라고만 생각하면, 부자들도 ‘생활비’를 다 넣었을 수 있습니다.
가난한 과부의 경우에는 생활비 외에는 다른 돈이 없는 상황이고,
부자들의 경우에는 생활비 외에도 다른 돈이 많은 상황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난한 과부를 칭찬하신 것은, 가지고 있던 돈을 전부 봉헌한
‘행위’를 칭찬하신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루카 10,27), 즉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하느님을 사랑한,
그 ‘사랑’과 ‘정성’을 칭찬하신 것입니다.
(물론 그 ‘사랑’과 ‘정성’에서 ‘행위’가 나온 것이긴 합니다.
그러나 ‘행위’만 보고 ‘사랑’과 ‘정성’을 못 보면,
그래서 ‘사랑’과 ‘정성’ 없이 그 ‘행위’만 흉내 내면 그것은 ‘위선’입니다.)
여기서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이라는 말씀은,
‘풍족함’을 누리고 있으면서도 사랑과 정성이 부족한 것을 지적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 말씀은, 부자들을 모두 싸잡아서 꾸짖으시는 말씀은 아닙니다.
부자들 가운데에는 나름대로 정성껏 봉헌한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난한 과부보다는 사랑과 정성이 부족했을 것입니다.
그들 가운데에는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많이 바친다.” 라고 잘난 체 한 사람이
있었을 수도 있는데, 그 ‘잘난 체’는 교만과 위선이고, 그것은 죄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과부가 바친 돈의 액수를 보지 않으시고, 그 과부의 ‘마음’을
칭찬하셨다고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인데, 그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그 ‘마음’은 자기가 가지고 있던 돈을 전부 다 바쳤다고 생색내지도 않고,
자랑하지도 않고, 동시에 다른 사람들보다 적은 돈을 바친다고
부끄러워하지도 않는 마음입니다.
생색내고 자랑하는 것은 위선입니다.
또 다른 사람들의 봉헌과 자신의 봉헌을 비교하면서 부끄러워하는 것도
올바른 모습은 아닙니다.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남의 사랑과 자신의 사랑을 비교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온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해서 바친다면,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적게 바치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많이 바치는 것을 부러워하는 것입니다.
부끄러워하는 것이나 부러워하는 것이나 모두
돈의 액수만 보고 판단하는 것이기 때문에 옳은 일이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는 헌금에 관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열의만 있으면 형편에 맞게 바치는 것은 모두 기꺼이 받아들여지고,
형편에 맞지 않는 것은 요구되지 않습니다(2코린 8,12).”
“저마다 마음에 작정한 대로 해야지, 마지못해 하거나 억지로 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2코린 9,7).”
가난한 과부가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전부 다 바친 것은
‘형편에 맞게’ 바친 일이었을까?
예수님께서 그 과부를 칭찬하신 것은,
‘형편에 맞게’ 바쳤기 때문에, 그러나 최대한의 정성으로 바쳤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그 과부가, 자기는 가지고 있는 것을 전부 다 바치는 사람이라는 것을
과시하려고 ‘형편에 맞지 않은’ 봉헌을 한 것이라면,
예수님께서는 그 과부를 칭찬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야기 속에 나오는 부자들의 경우에는, ‘형편’이 충분히 넉넉한데도
‘형편에 맞지 않게’ 최소한으로 적게 바친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전부 다 바친 일을 ‘형편에 맞는 일’이라고
어찌 말할 수 있는가?” 라고 물을 수도 있는데,
그 생활비는 아마도 교회에서 준 지원금이었을 것이고,
가난한 과부는 교회에서 준 돈을 다 쓰지 않고 남겨서 봉헌했을 것입니다.
‘형편’은 일률적으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 과부는 자기의 형편대로, 또 ‘기쁘게’ 봉헌한 사람입니다.)
우리에게 ‘봉헌’의 첫 번째 모범이신 분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요한 10,11).”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요한 10,17).”
예수님은 아버지를 위해서, 또 인간들을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모든 것을) 내놓으신(바치신) 분입니다.
순교자들은 예수님처럼 자신들의 목숨을(모든 것을) 봉헌한 분들입니다.
‘봉헌’의 두 번째 모범은 성모님입니다.
성모님께서는 당신의 전 생애를 바치셨습니다.
봉헌의 ‘나쁜 예’는 구약성경 판관기에 나오는 ‘판관 입타’입니다.
“당신께서 암몬 자손들을 제 손에 넘겨만 주신다면,
제가 암몬 자손들을 이기고 무사히 돌아갈 때,
저를 맞으러 제 집 문을 처음 나오는 사람은 주님의 것이 될 것입니다.
그 사람을 제가 번제물로 바치겠습니다(판관 11,30-31).”
하느님께서는 “전쟁에서 이기게 해 줄 테니 사람의 목숨을 제물로 바쳐라.”
라고 명령하신 적이 없습니다.
아마도 판관 입타는 자기 집안사람들을 자신의 소유물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서원을 했을 텐데, 그런 생각 자체가 잘못된 생각입니다.
또 자신의 목숨을 바치지 않고 남의 목숨을 바치는 것은
봉헌이 아니라 ‘죄’입니다.
(사실 판관 입타가 치른 전쟁은 주님께서 함께하신 전쟁이고,
주님의 전쟁이었기 때문에 애당초 그런 서원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하나니아스와 사피라’ 부부도 봉헌의 ‘나쁜 예’입니다.
“하나니아스라는 사람이 자기 아내 사피라와 함께 재산을 팔았는데,
아내의 동의 아래, 판 값의 일부를 떼어 놓고
나머지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다(사도 5,1-2).”
그 부부는 땅을 판 값의 일부를 따로 떼어 놓고서는,
전부를 바치는 것이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사도 5,8).
명예욕과 재물욕 때문에 그런 거짓 봉헌을 한 것인데,
베드로 사도는 그 일에 대해서
“사탄에게 마음을 빼앗겨 성령을 속인 죄” 라고 그들을 꾸짖었습니다(사도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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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22. 성녀 체칠리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순수한 지향으로 모두를 바침 >
"저 빈곤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루카 21,3)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는 율법학자들의 위선적인 비행을 질책하신(20,45-47)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그들이 멸시하는 빈곤한 과부의 봉헌이 더 경건하다고 가르치십니다. 과부의 처신을 통해 영성생활의 근간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를 짚어보았으면 합니다.
성전의 ‘여인들의 뜰’ 입구에는 보물 창고와 나팔 모양의 열세 개의 헌금함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자와 권력가들은 쓰고 남은 일부를 바치고,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은 의무감에서 헌금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헌금함에 넣는 것을 보시고,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고 하십니다(21,2-3). 과부가 봉헌한 렙톤 두 닢은 로마 돈으로 환산하면 동전 한 닢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토록 미미한 액수를 바친 과부를 오히려 칭찬하십니다.
과부의 헌금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영성생활은 무엇을 하느냐 하는 것보다 어떤 지향으로 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아무리 많은 기부와 봉사와 선행을 해도 명예욕이나 다른 이득을 얻으려는 마음으로 한다면 하느님을 욕되게 하고 슬프게 해드릴 뿐입니다. 어떤 일이든 일 자체도 의로워야 하지만 그걸 행하는 지향도 하느님 뜻에 맞고 순수해야 할 것입니다.
과부는 빈곤하고 소외된 사회적 약자였던 자신의 처지와 상관없이 자신의 마음과 삶의 뿌리를 주님께 두었습니다. 그녀는 비록 액수는 적었으나 오직 하느님만을 위한다는 마음으로 바친 것입니다. 그녀는 빈곤했으나 주님을 극진히 사랑하였기에 사랑하는 분을 위해 기꺼이 모든 것을 다 내놓았습니다. 사랑한 만큼 내놓을 수 있고, 사랑하는 만큼 상대방을 위해 희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과부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했기에 전부를 봉헌한 것입니다.
모든 것을 주님께 봉헌하겠다고 서약을 했지만 어느 새 자신을 위해 뭔가를 챙기려 하는 나를 봅니다. 피곤할 때 누울자리가 생각나고, 당장 필요하지 않아도 언젠가 필요할 것이라 여겨 책과 물건들을 쌓아두곤 합니다. 때로는 나에게 필요한 것, 내가 하고 싶은 것, 내 기준에 더 가치 있다고 여겨지는 것을 먼저 챙기면서 다른 이를 사랑하고 섬기는 일을 미루기도 합니다. 또 조건이 갖춰진 다음에야 자신을 내놓겠다고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과부처럼 순수한 사랑으로 '지금' 바로 내놓기를 바라실 것입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과부가 보잘 것 없었지만 생활비 전부를 봉헌했듯이 내 존재 전부를 아낌없이 봉헌하길 바라십니다. 우리는 전인적 봉헌을 살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일부가 아니라 나의 존재 전부임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시간, 돈, 은사, 재능 할 것없이 내 것이랄 게 없을 것입니다. 전부를 내놓을 때 주님께서는 전부를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보여주신 ‘거룩한 사랑의 교환’입니다.
온갖 선이요 으뜸 선이신 하느님께 ‘모든 것을’ ‘남김없이’ 되돌려드릴 때 비로소 ‘모든 것의 모든 것’이신 하느님을 소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소유하는 것이야말로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이며 우리가 찾는 행복입니다. 지금이 바로 조금 내놓고 많은 사랑과 은총을 받겠다는 망상을 떨쳐버릴 때입니다. 오늘도 주님께 대한 순수한 지향과 사랑으로 나의 전부를 기꺼이 봉헌하는 행복한 날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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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22. 성녀 체칠리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이 가난한 과부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은 돈을 넣었다."
빳빳한 봉헌금
가끔씩 미사 중 봉헌 행렬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신자분들의 모습이 각양각색입니다.
마치 크게 선심 써서 적선이라도 하듯이 봉헌금을 "툭" 던져 넣고 돌아서는 분이 계시는가 하면, 아주 경건한 얼굴로 조심스럽게 헌금을 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어린양께서 배춧잎을 좋아하신다는 것을 어떻게 아셨는지 꼬박꼬박 10,000원짜리 배춧잎을 바치는 분이 계신가하면, 천주교가 1,000주교인줄로만 아시는지 죽어도 1,000원짜리만 봉헌하는 분도 계십니다.
또 어떤 분들은 "떼구르르" 소리가 다 들리게 동전을 봉헌하는 분도 계십니다.
봉헌금을 많이 내라는 말이 절대로 아닙니다.
액수는 형편에 따라서, 살림살이 규모에 따라서 차이가 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집에 쌀이 다 떨어졌다면 당연히 봉헌금을 못내는 것이지요.
빌려서라도 봉헌금을 내겠다면 너무도 어색한 일이겠습니다.
봉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입니다. 정성입니다.
내가 지닌 가장 소중한 것을, 내가 열심히 노력해서 얻은 결실 중에 가장 좋은 것을, 내 인생을, 내 젊음을, 내 삶 전체를 하느님께 바친다는 마음가짐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저 봉헌행렬이 시작되니 의무감에 의해, 습관적으로 행하는 봉헌이 되지 않길 바랍니다.
속상해하면서, 아까워하면서, 마지못해, 적선하듯이, 무성의한 봉헌이 아니길 바랍니다.
생일 선물을 주면서 축하하는 마음으로 활짝 웃는 얼굴로 주어야지, 기분 나쁜 얼굴로 집어던지면서 선물을 주면 선물을 받는 상대방의 마음이 얼마나 언짢겠습니까?
아마도 안 받는 것이 차라리 마음 편할 것입니다.
봉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발적인 봉헌, 스스로 우러나와서 하는 봉헌, 잘 준비된 봉헌입니다.
미사에 오실 때마다 봉헌을 위해 미리 준비하신 빳빳한 천 원짜리 두 장을 깨끗한 봉투에 넣어서 오시는
할머니들이 계십니다. 비록 작은 액수지만 잘 준비된 봉헌, 정성이 담긴 봉헌, 사랑이 담긴 봉헌이기에 하느님 앞에 그 봉헌은 10만원짜리 수표보다 훨씬 가치 있는 봉헌이 되리라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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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22. 성녀 체칠리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하느님은 사랑이시기에 질투하신다
오늘 복음은 ‘과부의 헌금’입니다.
이것을 묵상하면 하느님의 이런 속성이 떠오릅니다.
“주 너의 하느님인 나는 질투하는 하느님이다.”(탈출 20,5)
왜냐하면, 예수님은 헌금통을 보시며 당신 아버지께 얼마나 정성을 바치는지 지켜보시기 때문입니다.
‘질투’라고 하는 말이 하느님에게 어울리지 않는 말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질투 없는 무한한 사랑을 부어주시는 분으로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느님이 질투하지 않으시면 우리를 물건 취급하시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사랑하는 애완견이 있다고 합시다.
산책하다 그 애완견이 나를 따라오지 않고 다른 애완견을 따라갑니다.
그럼 질투가 납니까? 애초에 애완견을 사랑하기는 하지만 나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거나 혼인할 사이는 아니기에 크게 질투가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약 애완견이 아니라 아내나 자녀라면 어떨까요? 자녀가 옆집 아빠를 더 좋아하면 어떨까요?
아내가 집에 들어와서 계속 직장 상사만 칭찬하면 어떨까요? 질투가 납니다.
왜냐하면, 아내와 자녀는 개가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질투’를 느끼신다는 말은 인간을 당신과 같은 수준으로 드높게 여기신다는 방증입니다.
그러니 오히려 질투하지 않으면 사랑이 아닙니다.
그런데 ‘질투’와 ‘시기’를 구분할 필요도 있습니다.
“라헬은 자기가 야곱에게 아이를 낳아주지 못하는 것 때문에, 언니를 시샘하며 야곱에게 말하였다.
‘나도 아이를 갖게 해 주셔요. 그러지 않으시면 죽어버리겠어요.’”(창세 30,1)
여기서 라헬은 언니 레아에게 질투하는 것일까요, 시기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시기하는 것입니다.
시기는 사랑하는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에 묶인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자아는 소유하려는 욕망입니다.
자신이 소유했다고 믿은 것을 빼앗긴 것에 대해 분노하는 것이 시기입니다.
모차르트를 시기하였던 살리에리는 자신이 모차르트를 죽였다고 말했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아갔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질투는 무엇일까요? 질투는 사랑하는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주려는데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사랑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도 받을 그릇을 준비해야 줍니다.
분명히 내 사랑은 금잔에 받아야 하는데 소주잔을 들고 따르라고 한다면 어떨까요? 내 사랑은 나의 피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도 그에 합당한 잔을 준비해야 합니다.
혼인 잔치 때 쫓겨나는 종이 그런 사람입니다.
당시 혼인 잔치에 초대하면 의복까지도 챙겨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도 팔아먹고 온 것입니다.
이때 그 사람이 혼인 예복까지 팔아먹도록 정신이 팔리게 한 것에 대한 분노가 질투입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사악의 아내를 찾으라고 종을 보냈습니다.
온갖 장신구와 옷과 낙타도 보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받은 레베카는 하나도 다른 곳에 쓰지 않고 그것으로 자신을 장식하고 이사악 앞으로 나아왔습니다.
이사악은 그녀를 자신의 어머니 천막으로 데리고 들어갑니다.
어머니 천막이란 자궁을 의미합니다.
자신을 만든 어머니의 자궁에서 자신과 한 몸이 되는 아내를 만드는 것입니다.
만약 레베카가 받은 것들을 아버지에게도 주고 오빠에게도 주고 형제들에게도 주고 해서 천한 옷을 입고 왔다면 이사악은 그 모든 것들에 질투하였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가난한 과부의 헌금이 바로 레베카가 자신이 받은 모든 것을 오롯이 이사악을 위해 다시 봉헌하기 위해 가져온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이사악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뒤이어 나오는 성전파괴와 연관됩니다.
“몇몇 사람이 성전을 두고, 그것이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졌다고 이야기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루카 21,5-6)
그들은 성전을 자신들의 ‘자원 예물’로 지었다고 자랑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봉헌한 것은 쓰고 남은 것들입니다.
하느님을 모실 집을 쓸 거 다 쓰고 눈치 보며 낸 것으로 지은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하시기 때문에 당신이 주시는 사랑만큼 우리도 응답하기를 원하십니다.
성모 마리아만큼 응답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성모 마리아는 영원히 허물어지지 않는 성전이 되셨지만 그들의 성전은 로마 군인들에게 짓밟혔습니다.
더는 예수님께서 살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려면 나도 그에 합당한 응답을 하여야 합니다.
사랑은 질투하는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개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과 동등한 인격적 존재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니 그 사랑에 응답하려면 우리도 그분이 내어주시는 것처럼 내어드릴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다 쓰고 남는 시간이 기도드리는 것은 항상 우리를 향하고 계신 분께 질투를 일으키는 일입니다.
그 질투가 쌓아다 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느님께 질투를 일으키지 맙시다.
결국엔 자기 손해입니다.
가난한 과부를 닮아야 합니다.
조앤 롤링은 기차를 타고 가다 갑자기 해리포터의 이야기가 자신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느끼고 뛸 듯이 기뻐하였습니다.
그녀는 포르투갈의 포르토란 도시에서 영어교사를 하며 동시에 해리포터의 글도 쓰고 있었습니다.
이때 카페에서 만난 텔레비전 저널리스트인 조지 아란테스와 결혼합니다.
딸까지 낳았지만 아란테스는 폭력을 행사하고 놀면서 아내가 벌어오는 돈으로 생활하는 한량이었습니다.
롤링은 둘째 아이를 밴 상태여서 더는 그런 남자와 살 수 없어 다시 영국으로 도망치듯 돌아왔습니다.
그녀는 이미 해리포터 2권까지 집필이 끝난 상황이었습니다.
물론 영국으로 돌아와서도 내용이 너무 어둡다는 이유로 12군데 출판사에서 퇴짜를 맞았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10년 동안 7권의 시리즈를 내면서 현재 1조 원이 넘는 재산을 가지고 있고 수백억 원씩 기부하며 출판계와 영화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해나가고 있습니다.
아란테스는 굴러온 복을 차버린 것입니다. 아란테스와 헤어져서 해리포터를 쓴 것이 아니라 이미 그때 해리포터가 잉태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란테스는 아내와 아이들, 그리고 그녀의 꿈도 받아줄 그릇이 되지 못했습니다.
결국, 자신이 일하던 방송국을 살 수도 있는 재능이 있는 아내를 자신의 그릇, 혹은 자신의 집을 너무 허술하게 지어서 다 쫓아내고 만 것입니다.
지금의 조앤 롤링을 보며 얼마나 땅을 치며 후회하겠습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도 자리가 필요하고 공간이 필요하고 집이 필요합니다.
그 집을 지으려면 자원 예물이 필요합니다.
그분은 나에게 당신 자신을 주시는데 우리는 남는 것만 주어서야 어떻게 그분의 자리가 마련될 수 있겠습니까?
그분께서 질투하시는 것은 우리가 그분 아닌 사랑하는 모든 것들입니다.
그분 아닌 모든 것들 중 어떤 것에도 애정을 쏟는다면 그분은 질투하십니다.
가난한 과부처럼 주님만으로 충분하다는 마음으로 내 모든 것을 내어드릴 수 있을 때 우리는 질투하는 신을 신랑으로 맞아 하느님과 온전히 하나가 되는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하느님처럼 되고 싶다면 그분께서 들어오시기에 합당한 성전을 지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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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22. 성녀 체칠리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이승화 시몬 신부님.
*** 시몬신부님 그리스도 왕 대축일(11월 22일)을 끝으로
복음묵상 가이드를 종료하신다고 합니다. ***
당부 말씀은 읽고 모으기만 하며 만족하기보단 자기 기도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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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신부님의 묵상글 모아 게재하는 저 루도비꼬의 본래 취지는
본인 스타일에 맞는 글 1-2편 정독하시고 묵상과 기도를 ---
그 이외 분의 글은 당일 묵상글에 대한 다른 해석과 생각이
있을 경우 그 다른 점을 참고하시는 정도로 활용을 하시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하여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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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22. 성녀 체칠리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김 로마노 형제님.
연중 제34주간 월요일 제1독서 (다니1,1-6.8-20)
"부디 이 종들을 열흘 동안만 시험해 보십시오. 저희에게 채소를 주어 먹게 하시고 또 물만 마시게 해 주십시오. 그런 뒤에 궁중 음식을 먹는 젊은이들과 저희의 용모를 비교해 보시고, 이 종들을 좋으실 대로 하십시오."(12-13)
다니엘은 자신을 감독하는 자에게 진지하게 한 가지 제안을 한다.
그것은 특정한 기간을 정해서 임금의 진수성찬을 먹지 않는 자신과 이를 먹는 다른 친구들을 비교해 보라는 것이었다.
여기서 '열흘 동안'에 해당하는 '야밈 아사라'(yamim asarah)는 문자 그대로 10일을 의미한다.
다니엘서 1장 14절과 15절에 열흘 동안 시험했다는 사실이 부가적으로 진술되고 있다.
열흘은 동료들과 다른 음식을 먹고 얼굴빛을 통해 그 결과를 드러내기에 충분한 기간이다.
그러나 고기와 기름진 음식을 먹는 자들보다 채소와 물만을 먹으면서 얼굴빛이 더 좋아지기를 바란다는 것은 비상식적인 일이다.
하지만 다니엘은 그 결과에 대해 전적으로 주권자이신 주 하느님께 온전히 맡기고 그런 제안을 했을 것이다. 여기서 다니엘의 신앙이 얼마나 확고했는지가 드러난다.
'시험해'에 해당하는 '나쓰'(nas)는 '시험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나싸'(nasa ;test,prove)의 강조 능동 명령형이다.
여기서는 윗 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명령하는 뉘앙스가 아니라 뒤에 이어지는 불변사 '나'(na; please)와 더불어 문장을 구성하여 '시험해 보십시오', '시험하실 것을 부탁드립니다'라는 정중한 청원의 의미가 된다.
말하자면, 특정 기간동안 특정한 대상에게만 시범적으로 어떤 특별한 조치를 취하여 그 조치에 따른 결과를 조사해 본다는 의미를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다.
'채식을 주어 먹게 하시오'
'채식'에 해당하는 '핫제로임'(hazeroim)의 원형 '제로아으'(zeroah)는 씨를 뿌리는 행위를 나타내는 동사 '자라으'(zarah)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씨를 뿌려 싹을 내는 것, 또한 씨를 맺는 곡물 종류를 나타낸다.
따라서 이것은 야채(vegetable)만을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육식과 생선을 제외한 모든 종류의 곡식류 및 그 곡식으로 만들어진 빵과 과일류까지 다 포함한다.
이 단어가 여기서는 복수형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이것이 입증된다.
이어서 다니엘은 포도주 대신에 물을 줄 것을 청원한다.
다니엘서 1장 8절에서도 지적한 것처럼 술은 이교도의 제사와 관련되었을 수도 있으며, 방탕한 생활을 지양하고, 경건하고 거룩한 삶을 영위하게 위해 율법이 금하지 않은 술까지도 거부하며 오로지 물만을 마시기를 원했을 수도 있다.
'그런 뒤에 궁중 음식을 먹는 젊은이들과 저희의 용모를 비교해 보시고'(13)
다니엘은 자신이 시험을 요청한 사안에 대해 자신감있는 태도로 말한다.
다니엘은 하느님의 신비로운 역사하심을 통해 놀라운 일을 기대하고 있다.
그는 진수성찬과 포도주를 먹지 않고 채식과 곡식 위주의 식사를 하는 자신과 자기 친구들의 얼굴빛과 건강 상태가 다른 동료들의 그것보다 훨씬 더 좋을 것임을 확신한다.
여기서 '비교해 보시고'에 해당하는 '웨예라우'(weyerau)는 '마르예'(marye; '얼굴')의 어원이기도 한 동사 '라아'(raah; '보다')의 수동태 3인칭 복수로 '(젊은이들의 용모와 저희들의 용모가) 보일 것입니다'라는 의미이다.
즉 얼굴빛과 건강 상태는 감독관이 면밀히 살펴야만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확연하게 드러날 정도로 분명하다는 것이다.
다니엘서의 이러한 자신감은 주 하느님께 대한 확고한 믿음에서 나온 것이다.
'이 종들을 좋으실 대로 하십시오'
다니엘은 자신의 신앙적 신념대로 행한 후에 나타나는 결과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바빌론 감독관의 결정에 맡겼다.
여기서 '하십시오'에 해당하는 '아세'(aseh; deal,treat)는 번역 그대로 행하라는 의미인데, 문맥에서는 '처분하십시오'라는 뜻이 들어있다.
이러한 처분은 음식에 관한 결정권뿐 아니라 다니엘과 그 동료들에 대한 징계도 포함하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다니엘의 자신들에 대한 처분에 대한 의탁 역시 하느님께 대한 확신에 근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되지않아 죽임을 당한다고 하여도, 자신들의 신앙의 정절을 포기할 수 없다는 의지의 표명으로 볼 수도 있다.
오늘복음에서 자신을 깨닫고 보고 버리라 하신다.
(루카21,1-4)
1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헌금함에 예물을 넣는 부자들을 보고 계셨다. 2 그러다가 어떤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거기에 넣는 것을 보시고 3 이르셨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4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
= 궁핍한 과부가 생활비를 다 넣었다고 좋아하실 주님이실까? 肉의 부모도 가난한 자식이 생활비를 다 털어 용돈을 준다면 마음이 아파, 받을 부모 없다.
그렇듯 가난한 당신의 자녀가 생활비를 헌금으로 다 넣었다고 칭찬하시는 주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본문 1절을 다시보면,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헌금함에 예물을 넣는 부자들을 보고 계셨다.’ - 이 부분에서 ‘눈을 들어’~를 빼고 ‘예수님께서 헌금함에 예물을 넣는 부자들을 보고 계셨다.’-로 하셔도 어색하지 않다.
요점은 헌금을 하는 사람의 눈이 아닌, 주님의 눈으로, 하느님의 관점으로 보셨다는 것이다.
헌금은 내 죄를 대속하시고 죽으셔서 나를 살리신 그 예수님의 죽음, 그 사랑이 감사해서 내 목숨과 같은 돈을 드리는 것이 헌금이다. 죄의 나(목숨)는 죽었습니다, 버립니다. 라는 신앙 고백인 것이다.
과부의 생활비, 곧 자신의 목숨을 다 버린 것을 칭찬하신 것이다. 부지들은? 자신의 목숨, 돈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곧 감사의 헌금이 아닌 자신들의 의로움을 위한 예물로 드렸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대속, 십자가로 죄의 용서, 의로움을 위한 예물이 이제는 필요 없게 되었음을 모르기 때문이다.
(히브10,18) 18 이러한 것들이 용서된 곳에는 더 이상 죄 때문에 바치는 예물이 필요 없습니다.
= 그들은 제사와 윤리의 그 자기 의로움이 컸기에 그리스도의 대속, 그분의 의로움으로 받는 구원의 의미, 필요성, 간절함이 없기에 자신들의 의로움, 자신의 목숨을 버리지 못했던 것이다.
자신들의 그 빛이 어둠인 것을 모르기 때문에~ 헌금을 감사의 새 노래로 드릴줄 모르는 형식과 의무로만 했던 것이다.
그들의 예물이 그들 자신을 위한, 그 자신을 더 믿는, 그래서 버리지 못하는 그들의 속셈, 위선을 주님의 눈이 보신 것이다.
(루가9,23) 23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마태16,25) 5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아멘!!
연중 제34주간 월요일 복음 (루카21,1-4)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 (4)
예루살렘 성전은 이방인의 뜰, 여인의 뜰, 이스라엘의 뜰, 사제들의 뜰 이렇게 네 지역으로 나뉘어져 있다.
이방인의 뜰은 성전의 마당으로 예수님께서 성전 정화를 하실 때 장사치들과 환전상들을 몰아내셨던 곳으로 이방인들도 들어올 수 있었던 곳이고, 여인의 뜰은 성전에 들어가기 전의 홀에 해당하는 곳으로 성전 안에 들어갈 수 없는 여인들의 장소이며, 이스라엘의 뜰은 성전 안의 회중석에 해당하는 이스라엘의 남자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며, 사제들의 뜰은 성전 안의 제단에 해당하는 사제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이들 성전의 네 지역에서 헌금함은 바로 여인의 뜰에 있었고,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예물을 넣는 부자들을 보시다가 갑자기 헌금하는 가난한 과부가 당신의 시야에 들어와 보시게 되었던 것이다.
예수님 당시 성전에는 13개의 나팔 모양을 한 헌금함이 있었으며, 각각의 용도와 지향이 그 위에 기록되어 있다.
13개의 헌금함 중에 한 개는 자발적인 기부금을 모으는 헌금함이었다. 아마도 빈곤한 과부는 일반인들을 위한 자발적인 기부금을 모으는 헌금함에 렙톤 두 닢을 넣었다고 본다.
여기서 '빈곤한'으로 번역한 '페니크란'(penichran; poor)의 원형 '페니크로스'(penichros)는 극도로 가난한 상태를 나타내는 형용사이며, 당시 '과부'는 가부장적 사회에서 경제적 활동이 극히 제한을 받았던 가장 가난한 계층의 사람으로서 늘 구제의 대상이 된 신분이었다.
그리고 '두 렙톤'으로 번역된 '렙타 뒤오'(lepta dyo; two mites)에서 '렙톤'은 유대 화폐의 최소 단위로서 로마 화폐 과드란스의 2분의 1에 해당한다(마르12,42).
한 렙톤은 당시 노동자들의 하루 품삯이었던 데나리온의 128분의 1에 해당된다.
그리고 당시의 성전 규정상 한 렙톤을 헌금하는 것은 금지되었기에, 두 렙톤은 당시 헌금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액수의 헌금이었다.
이것은 여기에 등장하는 빈곤한 과부가 할 수 있는 최상의 것이었는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신적 통찰력으로 두 렙톤이 그 과부의 생활비 전부이며,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이었음을 아셨다.
예수님께서는 루카 복음 21장 4절에서 그 과부가 가장 많은 헌금을 했다고 판정하신 이유에 대해 설명을 해 주신다.
예수님께서 판정을 내리는 두 대상의 형편과 관련된 두 단어가 나온다.
하나는 '풍족한'으로 번역된 '페릿슈온토스'(perisseuontos; abundance; wealth)이고, 다른 하나는 '궁핍한'으로 번역된 '휘스테레마토스'(hysterematos; penuary; poverty)이다.
'페릿슈온토스'(perisseuntos)의 원형 '페릿슈오'(perisseuo)는 '양과 수를 초과하다'(exceed)는 뜻으로 어떤 것이 풍부하여 흘러 넘치는 상태를 가리키는 단어이다.
부자들의 경제적인 상태가 흘러 넘칠 정도로 풍부했다는 것을 표현하는 단어이다. 그들은 이렇게 흘러 넘치는 재물 중에 일부를 하느님께 바쳤다.
이것과 대조를 이루는 '궁핍한'으로 번역된 '휘스테레마토스'의 원형 '휘스테레마'(hysterema)는 '부족', '모자람'을 나타내는 단어로서 물질이 부족해 기본적인 필요조차 채우지 못하는 상태를 가리킨다.
과부의 철저하게 빈곤한 삶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단어이다. 모든 것이 부족한 과부는 너무나 빈곤한 가운데 헌금을 바쳤는데, 그것은 과부의 생활비 전부였다.
여기서 '생활비'로 번역된 '비온'(bion)의 원형 '비오스'(bios)는 '삶', '생명' 자체를 가리키거나, 또는 '생존을 위해 필요한 자원'을 뜻한다.
말하자면 이 과부는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물질마저 모두 바쳤고, 이것은 그녀의 생명을 바치는 것과 같음을 가리킨다.
이렇게 과부는 양적인 면에서 부자의 헌금에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적은 금액을 하느님께 바쳤지만, 그것의 가치는 절대적 양의 개념에 있어서 흘런 넘치는 부자의 헌금보다 더 귀한 것을 바치는 자들의 마음과 태도로 평가되어야 한다.
인간의 겉이 아니라 속 마음을 보시는 예수님께서는 부자한테는 있으나마나한 헌금과, 과부에게는 생명과도 같은 헌금의 가치를 절대적 양의 개념으로 평가하지 않으시고, 그 바치는 자의 마음을 기준으로 평가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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