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1.23 입보리행론-9>
2023년 가을 학기를 오늘 끝마칩니다. 우리가 보는 대로 세상이 우리에게 보여집니다. 그래서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싶은 사람에겐 자신의 삶과 세계를 보는 안목이 중요합니다. 여기에서 관점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일반적으로 불교에서는 세계와 자신을 보는 바른 관점으로 세 가지를 말합니다. 그것은 곧 삼법인으로서 제행무상, 제법무아, 일체개고입니다. 이것이 대승불교에서도 그대로 전승되어 확장됩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금강경의 끝부분에 나오는 소위 6관입니다.
6觀: 一切有爲法, 應作如是觀. 일체유위법, 응작여시관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인연 따라 생겨난 모든 것은 이와 같이 보아라,
꿈 같고 물거품 같고 환영과 같고
아침이슬과 같고 번갯불 같으니
1. 환영과 같다는 말을 영어로 몽환성 dreamlike-ness이라고 합니다. 꿈속에서는 그렇게 생생한 현실 같드니만 깨고 나면 흔적도 없는 허무함으로 남습니다. 꿈이란 경험-이것을 경험하기는 했지만, 깨고 나면 실제로 경험하긴 했을까, 경험한 게 맞을까, 라는 의심이 듭니다. 그래서 흔히들 ‘꿈과 같다, 꿈결에서, 꿈처럼’이런 표현을 합니다. 우리가 인생과 세상이 꿈과 같다고 할 때 현실에서 물러나와 소극적으로 은둔적으로 살란 말은 아닐 터이며, 그렇다고 세상의 욕망에 깊이 빠져 허우적거릴 일도 아니겠지요. 삶이란 꿈과 현실이 중첩된, 그 안개 낀 사이를 헤매면서 길을 찾아가는 게 아닐까? 이런 맥락에서 나온 소설이 있으니, 조선시대 숙종 때 서포 김만중(1637~1692)의 소설 <구운몽>입니다.
<구운몽의 줄거리와 교훈>
중국 당나라 때 인도에서 온 육관 대사가 형산 연화봉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고 있었다. 하루는 육관 대사가 여러 번 찾아와 설법을 들었던 동정호의 용왕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고자 대사가 아끼는 제자인 성진에게 심부름을 보냈다. 성진이 절을 떠난 뒤에 남악에 사는 위부인이 팔선녀를 보내 육관 대사에게 선물을 전했다.
성진은 용왕이 하도 권하는 바람에 귀한 술을 한 잔 마시고 돌아오는 길에 다리위에서 마침 위부인의 심부름을 마치고 돌아가기 전 잠시 봄경치를 즐기던 팔선녀와 마주쳤다. 피차 춘정에 설레는 마음에 몇 마디 수작을 걸다가 성진은 해가 기울어서야 절로 돌아갔다. 그리고 성진은 아무 일 없는 듯 절 생활을 했지만 속세의 부귀영화를 그리워하는 번뇌에 휩싸였다. 이를 간파한 스승 육관 대사는 성진을 꾸짖으며 깊은 깨우침을 얻게 하기 위한 특단의 조치로 짐짓 저승으로 유배를 보내게 하였고, 동시에 팔선녀도 똑 같은 처지가 되었다. 그 뒤에 성진과 팔선녀는 인간 세상에 환생하였는데, 성진은 양 처사의 아들로 태어나 양소유라는 미남청년이 되었고, 팔선녀는 각기 영양 공주, 난양 공주, 진채봉, 가춘운, 계섬월, 적경홍, 심요연, 백능파로 태어났다가, 결국 양소유의 여섯 명 부인과 두 명의 첩이 되는 인연을 맺게 되어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
어느덧 수십 년의 세월이 흘러 양소유는 황제의 총애와 백성의 존경을 한 몸에 받으며 누구나 부러워하는 부귀영화를 누린다. 여덟 부인과 함께 황제가 내려 준 궁에서 잔치를 벌이며 즐기던 어느 가을날, 양소유는 부인들에게 부귀영화의 덧없음을 이야기하며 불도를 닦아 불생불멸하는 도를 얻어 인간의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스승을 찾아 떠나겠다고 하면서, 집을 뒤로 하고 산길을 올라가는 데 과거 어느 때 와본 적이 있는 듯한 너럭바위 위에 앉아 잠깐 명상에 잠기는데, 홀연히 한 노승이 나타나 주장자를 들어 돌난간을 “탕!” 두드렸고 이에 깜작 놀란 양소유는 자신이 원래 남악 형산에서 도를 닦던 성진 스님이라는 것을 번쩍 깨달았다. 속세에서 처자식을 거느리며 영화를 누리던 자신이 실은 수행 중에 있는 젊은 스님이 꾸는 꿈속이었던 것이다. 아, 일장춘몽이었구나! 성진스님, 정신 차리세요! 성진이 춘풍에 잠시 들떠 번뇌에 휩싸였던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스승의 가르침을 듣고 있을 때에 팔선녀가 우루루 들어와 대사께 제자로 받아 주기를 청하였고, 이에 죄를 뉘우친 팔선녀는 모두 비구니가 되어 부처의 가르침을 받아들인다. 그러자 육관대사 이르시되
“모든 현상은 꿈이며 허깨비이고 물거품과 그림자에 불과하며, 이슬이나 번개와 같으니, 마땅히 세상을 이처럼 보아야 할 것이라”하셨다.
그러자 성진과 여덟 명의 비구니는 부처님의 말씀을 완전히 깨닫고 열반을 얻었다. 육관 대사는 성진에게 의발을 전하고 인도로 돌아갔고, 성진은 육관 대사의 뒤를 이어 연화봉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부처의 가르침을 전하다가, 여덟 비구니는 함께 극락세계로 돌아갔다.
2. 꿈이 꾸어지는 원리는 우리가 세상의 보는 방식과 연관이 있습니다. 변화하는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불변의 진실을 찾던 사람들은 바깥 사물은 변해도 자신의 내면에 있는 ‘세상을 보는 눈’은 변하지 않는 게 아닐까 라는 추측을 하면서, 인간 내면에 있음직한 ‘보는 자, 혹은 관찰자 the Observer within’을 상상했습니다. 내면의 보는 자를 흔히 환등기 (幻燈機, Magic lantern)나, 영사기(projecter)에 비유합니다.
힌두 명상가들은 흔히 silent spectator말없이 지켜보는 자나 the third eye 제 3의 눈을 이야기 합니다. 이것은 주관 즉 보는 작용이나 기능을 실체화, 개념화하여 (인간의 수준에 맞는 이해 방식으로, 마치 라디오 안에 작은 사람이 들어있는지 어린애들이 자꾸 라디오 속을 들여다보고, TV안에 사람이 들어있는 게 아닌가 싶어 TV속을 들여다 보려고 하듯이) 아트만, 영혼이나, 호문쿨루스homunculus(난쟁이, 인체모형, 태아)라 이름짓고 그 실재함을 믿었는데, 이는 부처님이 말씀하신 존재에 대한 무명이자 자아에 대한 집착입니다. 인간이 언어생활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주어+술어>라는 관습적인 개념에 대응되는 실체, 즉 주어에 대응하는 실체가 머리나 가슴 아니면 몸 안쪽 어딘가에 ‘나’라든지 ‘자아’가 있다고 자연스레 믿게 됩니다. 이것이 세상에 사는데 편리하고 자신에게도 유리하게 작용하기 때문에 더욱더 집착하게 됩니다. 한마디로 ‘나’와 ‘자아’라는 관념은 욕계중생이 생존하는 데 유리하게끔 지어낸 (날조한) 생존의 도구입니다(이를 생존을 위한 방편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3. 그러면 불교에서는 보는 작용, 보는 활동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6근과 6경의 연기로 설명합니다. 시각기능(眼根)과 시각대상(色境)이 접촉하는 순간 시각의식(眼識)이 생겨납니다. 보이는 것(나무, 사람, 등등)이 보는 기능(눈)을 자극하면 봤다는 앎이 생기고, 보이는 것이 없어지면 보는 기능은 멈춥니다. 보려는 욕구가 일어나면 보는 기능이 발동하여 대상이 보여 집니다. 그래서 보는 것과 보이는 것, 이 한 쌍은 서로 의지하여 생성과 소멸을 반복합니다. 그래서 주관과 객관이 (두 손바닥이 마주 치면 박수소리가 나듯이)동시 생성, 동시 소멸합니다.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이 실체가 있는 게 아니라 마주 치는 순간 ‘봄’이라는 사건(혹은 현상)이 번갯불처럼 번쩍 일어났다 사라집니다. 그래서 찰나 생, 찰나 멸이라 합니다. 따라서 주관과 객관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의존적인 관계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주관도 실체화할 수 없고 객관도 실체화할 수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불교적 관점은 절대관념론이나 유물론에 빠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주관을 실체화하여 아트만이나 영혼, 내면의 자아, 신적인 자아(神我), 참된 자아(眞我)를 만들어 내지도 않고, 객관을 실체화하여 정신과 마음을 물질의 반영이라고 믿는 유물론에도 빠지지도 않습니다. 정신과 물질, 마음과 몸은 앞발과 뒷발처럼 서로 의지하여 나아갑니다. 정신과 물질, 몸과 마음이 상호의존으로 활동하는 과정을 五蘊오온이라 합니다. 오온은 고정된 실체는 없는데(無自性무자성) 찰나 찰나 생생하게 움직입니다(緣生緣滅연생연멸).
Psycho-physical process 정신-육체적 과정
mind-body process 마음과 몸의 과정
flow of mind-matter dependent origination 마음과 물질의 의존적 발생
4. 그래서 결론이 무엇이냐? 세상에서 말하는 ‘나’와 ‘자아’란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이 흘러가는 흐름이며 과정(이걸 불교적으로는 오온이라 합니다)입니다. 그러니까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견고하여 변화하지 않는 ‘나’라든지 ‘자아’라는 건 본래부터 없습니다. ‘나’가 없어서 불안한 게 아니고 오히려 불안해야 할 ‘나’가 없으니 얼마나 편안하겠어요? 고통을 당할 ‘자아’가 없으면 얼마나 자유롭겠습니까? 더군다나 태어난 '나'도 없고, 죽을 '나'도 없다니 삶과 죽음으로부터 자유(생사해탈)라는 게 이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5. 꿈과 같다는 것을 철저히 깨달으면 꿈에서 벗어납니다. 나와 세계가 꿈같다는 것은 그것이 연기적 현상이기 때문에 그렇게 경험됩니다. 생생하게 경험하되 그 무슨 실체가 있는 건 아닙니다. 말하자면 어린애가 놀이동산에서 즐겁게 노는 것과 비슷합니다. 아이에게는 놀이동산이 그렇게 생생한 실재이지만 나이 많은 어른에겐 그렇게 즐거워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 ‘쓸데없는 기계설비나 늙은 이를 귀찮게 만드는 장난감’으로 보일 뿐이잖아요. 놀이동산에서 잘 놀았거나 못 놀았거나 간에 그것 때문에 괴로워하고 슬퍼하지는 안잖아요? 놀이동산에서 보낸 시간에 성공과 실패라든지, 손익거래를 따지지 안잖아요? 모든 게 꿈이라면 꿈에서 완전히 깨어나 ‘꿈이 하나도 없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꿈을 깨라는 말은 “악몽에서 깨어나 아름다운 꿈을 꾸라”는 것입니다. 최고로 아름다운 꿈은 보리심을 발해서 보살의 길을 가는 원대한 꿈입니다. 하루 속히 탐진치 삼독에 휘둘리는 악몽에서 깨어나 보살의 꿈을 꾸도록 합시다. 우리에겐 꿈을 꿀 수도 있고 꿈에서 깨어날 수도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것은 마음이 가진 놀라운 능력입니다. 여기에 인류의 희망이 있고 미래가 있습니다.
첫댓글 강의를 녹화한 동영상의 용량이 4기가 바이트 이상이라( 4GB이상은 다움카페에 올려지지 않는다) 부득이 글로 풀어서 올립니다. 강의 뒷부분은 교과서를 읽어가면서 진행했기에 교과서를 참조하세요. 동안거 결제 끝나고 내년 봄에 만나요.
🙏🪷🙏
스님 예전 '행복수업' 강의영상은 아직 못봤는데요.
요즘 강의하시는 '입보리행론'과 다른건가요?
샨티데바의 입보리행론 원제가 행복수업(happiness lessons)라는것을 어제 알게됐어요.
샨티데바의 행복수업(김영로 옮김, 불광출판부 간행)이라는 책이 몇 년전에 출간되어 인기가 있었는데, 이건 산스끄리뜨 본이 영어로 옮겨진 것을 영문학자 김영로가 한글로 번역하여 책으로 낸 것이다. 여기에 힌트를 얻어 원담스님이 강의하는 수업을 <행복수업> 으로 정했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샨티데바의 저서: 입보리행론(Bodhicariyavatar)이 원래 제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