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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감동시킨 믿음(마 8:5-13)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미국 인디아나주의 작은 마을에 뇌종양으로 고통받고 있는 15세의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계속된 방사선 치료와 화학요법으로 머리카락이 모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런 모습으로 부끄러워 학교를 다니기가 어려웠습니다. 이때 그 사실을 알게 된 그 반의 학생들은 그를 돕기 위해 모두 삭발을 하였습니다.
뇌종양을 앓고 있는 브라이언만이 유일하게 머리카락이 없는 학생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 반의 아이들 모두가 머리를 삭발한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읽으면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오늘 우리 시대를 가리켜 감동이 메마른 시대, 감동결핍증에 걸려 정서가 메마른 시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 성령님은 우리의 심령에 감동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깨닫고 나면 가슴이 따뜻해지고 가슴이 뜨거워지는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저는 우리 교회 성도들이 주위 사람들에게도 크고 작은 감동을 주는 아름다운 믿음의 삶을 살 뿐 아니라 예수님께 감동을 안겨드리고 스스로도 감동이 되는 영적으로 확실한 믿음을 가진 성도로 굳게 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이 예배에 참석하신 여러분 모두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믿음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가셨을 때 일어난 사건입니다. 로마의 한 백부장이 예수님께 나와 엎드려 간구하였습니다.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에 걸려 누워지내는데 몹시 괴로와합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선뜻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백부장은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으니 다만 말씀으로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습니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놀랍게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10절,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백부장에게는 "가라.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하인이 그 즉시로 나았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놀라게 한 믿음을 소유한 백부장이 부럽지 않습니까?
도대체 로마군인인 이 백부장이 어떻게 예수님을 감동하게 한 것입니까? 왜 예수님께서 '야, 이 사람의 믿음이 훌륭하다.' 하시지 않고 "난 이렇게 대단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처음 본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까?
1. 사랑이 담긴 믿음(5,6절)
(5,6절)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6] 이르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이 백부장은 로마군인이었습니다. 당시 가버나움은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라 로마군대가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로마제국의 식민지에서 군대 백부장의 위치는 대단히 높았습니다. 100명의 로마군을 지휘하는 장교였습니다.
그런 백부장에게 많은 하인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중에 한 사람이 중풍병에 걸렸습니다. 당시 하인은 말이 하인이지 실제로는 천한 노예였습니다. 그런데 로마인인 백부장이 자기 집에서 일하는 천한 노예의 병을 고쳐달라고 직접 예수님을 찾아와 간청한다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노예가 중풍병이라는 불치의 병에 걸리면 아무 쓸모도 없게 되었다고 오히려 주인이 화를 내며 내쫓아 버리는 것이 일상이었습니다.
사무엘상 30장에 보면 다윗이 가족들과 재물을 약탈자들에게 빼앗기고 그들을 추격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길에 쓰러져 죽어가는 사람을 하나 만납니다. 물을 마시우고 먹을 것을 먹인 후 물어보니 자신은 아말렉 사람의 종으로 지내던 애굽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병들었다고 3일 전에 주인이 죽도록 버리고 갔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아말렉사람이 병들었다고 죽도록 버려둔 종을 살려서 그의 도움을 받아 전쟁에 크게 승리하고 잃었던 것을 모두 찾아왔습니다.
또한 아무리 너그러운 주인이라 할지라도 일반적으로는 다른 하인을 보내 치료방법을 찾아주도록 지시하는 정도였을 것입니다. 아니면 그 밑에 병사가 백 명이나 되니 부하를 보내어 청원을 하는 정도의 아량을 베푸는데 만족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백부장은 종이 병들어 쓸모가 없어졌다고 버리지 않았습니다. 버리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하인을 살리려고 애를 썼을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의 의료기술로는 고칠 수 없는 불치의 병이었습니다.
그런데 백부장은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듣고 그 하인을 살리려고 직접 예수님께 찾아와서 간청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인의 병을 고치기 위하여 높은 위치에 있는 군대장교가 직접 주님께 간청하는 경우는 아주 드문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백부장의 그런 행동을 보시며 그 안에 참된 사랑이 넘치고 있음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감탄하셨습니다. 진실한 사랑이 예수님을 감동시키십니다. 여러분, 믿음의 실제는 사랑입니다. 겉은 믿음이라는 옷을 입었지만 실제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사랑이 없는 믿음은 울리는 쾡과리와 같다고 비유했습니다. 소리만 시끄럽지 안에 내용물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13:34,35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서로 사랑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아는 증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다면 반드시 그 사람은 사랑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 주신 새 계명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바로 이것입니다. 믿음은 좋은데 그 안에 사랑이 없다면 그 믿음은 가짜입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가까이에 있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교회안에 있는 이웃도 사랑하지 못하면서 어찌 저 밖에 이웃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은 언제나 5가지 속성이 있습니다.
1)관심 2)이해 3)존중 4)희생(주는 것) 5)용서. 그러므로 오늘도 오늘도 우리안에 사랑이 충만하면 예수님을 감동시킬 수 있습니다. 가족간에 서로 사랑하고, 교회안에서 서로 사랑하고 사회에 나가서 직장안에서 서로 진실한 사랑으로 배려해 줄 때 감동이 솟아날 것입니다. 사랑은 다른 말로 섬김입니다. 자기를 희생하면 이웃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봉사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안에는 각종 사역팀이 있습니다. 진정으로 사역을 통해 이웃을 섬기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바로 사랑의 실천입니다. 이렇게 사랑이 충만할 때 율법이 완성되고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원천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사람, 사랑하지 않아도 될 천한 노예였습니다. 사랑한다고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는 하인입니다. 그런데 백부장은 그 병든 하인을 조건없이 사랑합니다. 그의 고통을 느끼며 함께 아파합니다. 예수님처럼 조건없이 사랑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너무 조건어 너무 많습니다. 내 마음에 들지 않으니까 사랑할 수없다는 것입니다. 내게 유익하지 않으니까 사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먼저 주님의 넘치는 사랑을 받았습니다. 조건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죄인되었을 때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시며 우리의 죄값을 지불하셨습니다. 사랑은 이론이 아닙니다. 실제입니다. 그 사랑이 지금 우리 속에 부어져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속에 그 사랑이 부어졌습니다.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오늘 백부장이 그랬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와 하인의 고통을 이야기하면서 간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인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이런 사랑이 있습니까? 이 사랑이 예수님을 감동시킵니다. 이 사랑이 여러분가운데 충만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겸손한 믿음(8-9절).
백부장의 간구를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친히 '내가 가서 고쳐주마'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백부장이 말합니다. (8-9절)“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9]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주여라는 말은 진정으로 주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한 신앙고백입니다.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주님, 우리를 죄에서 구속하신 주님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저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주님을 주님으로 인정하고 주님앞에 자기를 내어 맡기는 것이 겸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누가 주님이십니까? 여러분 자신은 아닙니까? 주님이 주인이십니다. 이제는 내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찾고 그 뜻대로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으니 다만 말씀으로만 해주십시오.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습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이 자기 집에 오시는 것을 감당치 못하겠다고 말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그의 집은 아마 가버나움에서 가장 크고 좋은 집이었을 것입니다. 많은 종들이 있어 지시만 하면 힘 안들이고 잘 접대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이방인인 자신의 집에 예수님이 오실 때 자신은 영광이고 좋지만 예수님께 혹 누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시기심많은 바리새인들이 유대인이 이방인의 집에 가서 함께 교제하였다고 비난하고 공격하면 예수님께서 곤경에 처하실 수도 있으리라는 것을 예견하고 사양한 것입니다. 백부장은 자신의 신분과 지위와 부를 생각하였다면 누구에게도 빠질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크게 교만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그 앞에 한없이 낮아지고 겸손하였습니다.
세상적으로 높은 위치에 오른 백부장이 예수님앞에서 낮은 모습으로 겸손한 자세로 서 있는 것을 보며 예수님은 크게 놀라며 감탄하셨습니다. 어려움이 닥칠 때 좌절하고 낙심하는 사람은 그것으로 인생이 끝납니다. 그러나 겸손한 자세로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사람은 명품 인생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고난의 폭풍우를 견뎌온 사람들이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냅니다. 역경 앞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겸손입니다. 낙타는 짐을 실을 때 주인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낙타는 짐을 내릴 때도 주인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과 기도의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부활의 기쁨이 우리의 삶 속에서 활짝 꽃피게 될 것입니다.
필리핀의 유명한 부자 사업가의 아들 카풍카우라는 청년이 신학교에 들어갔습니다. 학교에 가보니 화장실과 욕실이 너무나 더럽고 불결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학장에게 직접 찾아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학장님, 이렇게 더러운 곳에서 어떻게 공부를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 좀 치워주시고 깨끗하게 해주십시요.", "알았네. 내가 다 알아서 조치할 테니 가 있게.“
학장님의 대답을 듣고 잠시 후 그 학생이 다시 화장실로 가 보았을 때 요란한 소리와 함께 씻는 소리, 닦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놀랍게도 학장님이 기쁘게 청소를 하고 있었습니다. "조금 있다가 들어오게. 이제 깨끗해질 테니 염려하지 말게." "학장님, 청소부를 데려다가 시키면 될 텐데 왜 직접 화장실 청소를 하십니까?" 놀란 학생이 학장님에게 말을 건네자 학장님은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천국은 그런 곳이 아니라네. 교회나 신학교는 먼저 보는 사람이 먼저 하는 걸세. 돈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란 말이네. 힘으로 하는 것도 아니지. 불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쓰레기를 보고 그냥 지나치지 않고 주어서 정리하고 청소할 때 우리 주변은 깨끗해질 수 있는 걸세. 자네가 부잣집 아들로 여기에 와서 보니 좀 불결하게 보인걸세.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별로 그렇게 느끼지 못한다네. 그러니 먼저 느끼는 사람이 일을 하면 이 학교는 깨끗해질 수 있는 거라네."
예수님은 백부장이 많은 부하를 거느린 것에 놀라지 않았습니다. 백부장의 지휘솜씨에 놀라지 않았습니다. 그의 겸손함에 놀라셨습니다. 그리고 감동하셨습니다. 믿음은 겸손을 통해 나타납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인정하고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주인되면 결코 믿음의 삶을 살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내 삶의 이미 모셔들인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자기가 주인처럼 행세하고 큰 소리치고 화를 낸다는 것은 여전히 예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불신앙의 사람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진정한 겸손은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주를 섬기며 언제나 주를 바라보고 주를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백부장의 믿음은 바로 겸손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겸손한 믿음으로 하나님앞에 서서 섬김의 삶을 살 때 주님께서 감동하실 것입니다.
3. 확신에 찬 믿음(8,9절)
일반 상식으로는 의사가 가서 진찰을 하여 질병의 원인과 상태를 확인을 하고 처방을 주어야 맞습니다. 능력많은 종교지도자라도 직접 가서 보고 안수기도를 해야 나을 수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백부장은 어떤 믿음을 가졌습니까? (8-9절)“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9]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집에까지 가시지 않고 여기서 말씀만 하셔도 병이 떠나가고 깨끗이 치료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도 아래사람이 있어서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고 이것을 하라 하면 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명령이면 모든 만물이 순종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믿는 믿음을 표현합니다. 백부장에게는 거리를 초월하는 믿음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실제 백부장이 중풍에 걸린 하인을 예수님께 데려올 수도 있었습니다. 데려오려면 그까짓거 쉽습니다. 집에 하인이 많이 있고 부하들도 많습니다. 한 마디 지시만 하면 하인들이 떠메고 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멀리에서도 예수님이 말씀만 한 마디 하시면 반드시 낫겠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직접 예수님께 나아와 말씀해 주실 것을 간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백부장에게는 한계를 초월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인의 병명이 무엇입니까? 중풍병입니다. 그것도 상태가 중하여 집에 누워지내고 있습니다. 중풍병은 뇌혈관이 막히거나 터져서 신체의 전부 또는 일부가 마비되는 병입니다. 당시 의학으로는 치료가 불가능한 병입니다. 누워서 죽음을 기다려야 하는 병입니다. 이런 불치의 병이지만 예수님께서 고치실 수 있다고 믿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못할 것이 없으리라는 확신에 찬 믿음이 있어서 이렇게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말씀만 해 주십시오 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확신으로 가득찬 믿음을 드러내는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놀라며 내가 이만한 믿음을 처음 보았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어설픈 믿음으로는 예수님을 놀라게 해 드릴 수 없습니다. 오락가락하는 믿음으로는 예수님께 감동을 드릴 수 없습니다. 남들 눈치보면서 적당히 흉내내는 믿음으로도 주님을 감동하게 만들 수 없습니다. 확신으로 가득찬 믿음을 표현하며 나아가야 예수님께서 놀라십니다. 그리고 칭찬하십니다.
로마가 온 세상을 지배할 때의 일입니다. 스코트란드 설교자였던 존 웰치 목사님이 로마의 신이 아닌 예수를 전하다가 붙잡혀 투옥되었습니다. 지하 감옥의 습기와 불결함에 웰치 목사님은 병들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의 아내 메리 부인은 남편의 석방을 왕께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번번히 거절당했습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어둠속에서 로마왕이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메리부인은 왕앞에 엎드려 다시 남편의 석방을 요청했습니다. 그때 왕은 "만일 너의 남편이 다시는 예수를 전하지 않게 하겠다고 한 마디만 약속하면 석방하마."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메리부인은 왕앞으로 다가가 치마를 두손으로 들어올리며 "왕이시여 그와 같은 약속을 하느니 차라리 이 앞치마에 남편의 머리를 바치겠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왕은 그렇게 확신에 찬 모습을 보며 감동을 받고 웰치목사님을 석방했습니다. 우리 주님도 이처럼 확신에 찬 성도가 없는가 찾으십니다. 우리에게서 확신으로 가득찬 믿음을 보기를 원하십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어 십자가에서 그 크고 놀라운 사랑을 표현함으로 우리를 감동시키십니다. 이러한 하나님 사랑을 체험하고 감동받은 사람들은 아름답게 변화됩니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을 감동시켜 드려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있는 길은 오직 믿음뿐입니다.
백부장은 믿음은 병든 하인을 사랑하였기에 예수님께 나아와 간구하였습니다. 그의 믿음은 사랑이 담긴 믿음, 겸손한 믿음, 확신에 찬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믿음을 보시고 감동하셨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믿음의 사람입니다. 우리도 사랑이 담긴 믿음, 겸손한 믿음, 확신에 찬 믿음으로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