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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에서 말씀을 품고
본문: 마태복음서 25장 14-30절
설교자: 안 규 식 목사
[시간]
선하고 진실하신 말씀으로 우리를 이끄시는 영원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들에게 함께하길 빕니다. 오늘은 우리 교단이 정한 설주일입니다. 한국과 중국 등 동아시아와 베트남과 같은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대체로 음력 1월 1일인 구정을 가장 큰 명절로 여깁니다. 이렇게 우리는 기념일, 공휴일, 명절처럼 달력에 연, 월, 일의 특정한 날짜를 숫자로 기록하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인류는 태양과 달의 주기 그리고 계절의 변화를 기준으로 달력을 만들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알려진 달력으로는 1582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가 정한 달력으로 지금도 전 세계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그레고리력이 있습니다. 달력이 있기 전에 아주 오래전부터 인류는 천체를 바라보며 태양과 달과 별의 움직임을 통해, 그리고 봄, 여름, 가을, 겨울과 같은 계절의 변화를 통해 어떤 규칙성을 발견했습니다. 그런 규칙적인 변화를 연과 월과 일의 달력이라는 체계로 만들어 언제 씨를 뿌리고 거둘지, 언제 신에게 제사를 드릴지, 언제 축제를 열어야 할지를 정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달력에 기록된 특정한 시기와 날들에는 거기에 따라 예로부터 전해 내려온 그리고 앞으로 전해야 할 어떤 이야기와 의미가 부여되었을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달력에 따른 인간의 모든 활동은 이 세계가 끊임없이 변한다는 것, 그 변화에는 어떤 규칙성이 있다는 것, 그리고 인간은 그 변화의 규칙성 안에서 살아간다는 인류가 공통으로 가진 개념에 다다릅니다. 이 개념을 가리켜서 우리는 시간이라 합니다.
[시간은 인간의 정신 안에서 존재한다]
인간은 시간을 생각하면서 시작과 끝을 생각합니다. 그 시작과 끝을 과거와 미래로 구분하고 그 중간을 현재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그렇다면 시간이란 무엇일까요? 과거는 무엇이고, 현재는 무엇이며, 미래는 무엇일까요?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시간의 실체가 존재하지 않다고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과거라는 것은 이미 지나갔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으며, 현재라는 것도 붙잡거나 정지시킬 수 없이 과거로 사라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시간이란 인간 바깥에서 존재하는 그 무엇이 아니라 인간의 정신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제11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정신이여, 그대 안에서 나는 시간의 간격을 측정한다. 나를 정신 없게 만들지 말라.” 이처럼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시간은 지금 여기 현재의 인간 정신 안에서 존재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과거란 지금 여기에서 떠올리는 인간 정신의 기억입니다. ‘아, 내가 작년 이맘때쯤에 누구랑 이걸 했었지’ 하고 떠올리는 기억이 바로 과거입니다. 미래란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가진 기대 혹은 예상입니다. ‘내일에는 혹은 다음 달에는 혹은 내년에는 이런 일들이 일어났으면 좋겠다’ 하고 기대하는 것이 바로 미래입니다. 현재는 무엇일까요? 현재는 붙잡을 수 없는 것으로서 우리의 정신 안에서 그냥 현재가 있다는 인상으로 남을 뿐 그것은 기억이라는 과거로, 기대라는 미래로 흩어져 버립니다. 인간은 이처럼 정신 안에서 기억의 과거, 기대의 미래, 그리고 그 둘 사이에서 흩어지는 현재라는 시간의 흐름을 갖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런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두 가지를 고백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영원하시다는 것이고, 둘째는 하나님이 아신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변하고 결국에는 사라집니다. 우리의 기억도 흩어지고, 기대도 스러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영원하신 하나님은 변치 않으시고 사라지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과거의 기억과 미래의 기대 모든 것을 아십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님은 변함없이 영원하시며, 이는 정신들의 참으로 영원하신 창조주이시옵나이다. 주님은 주님의 인식에 아무 변화를 일으키심이 없이 처음부터 하늘과 땅을 아셨듯이, 주님이 태초에 하늘과 땅을 지으셨을 때, 당신의 행동에 어떤 변화가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이를 깨닫는 자로 주님께 고백하게 하소서. 주님은 높이 계시오나, 마음이 겸손한 자는 주님의 거처가 되옵나이다.”
[과거와 미래는 바꿀 수 있다]
이렇게 시간이 인간의 정신 안에서 기억의 과거와 기대의 미래, 그리고 지금 여기의 현재만으로 존재한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생각은 우리의 시간이란 바꿀 수 없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과거가 이미 지나간 일이기 때문에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과거는 바뀔 수 있습니다. 아주 오래전 영화지만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백 투더 퓨쳐>처럼, 과거를 바꾼다는 것은 무슨 타임머신이 있어서 과거로 돌아가 어떤 선택이나 행동을 바꿀 수 있어서가 아닙니다. 다만, 우리의 과거는 어떤 일에 대한 기억이기 때문에 그 기억의 의미를 새롭게 부여할 때, 과거가 바뀌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지나간 시기의 행동이나 결정에 대해 후회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내가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때 내가 이렇게 결정했었어야 했는데 하고’ 거기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과거에 대한 후회나 원망 혹은 아쉬움을 가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억은 지금의 나의 삶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주는 과거로 존재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계기를 통해서 그 기억에 대한 의미가 변하기도 합니다. ‘그래, 그때 그 일 때문에 원망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오히려 그게 은혜였어’하고 깨달음이 있을 때, 내가 어떤 의미를 부여했던 기억에 또 다른 의미가 부여되어 바뀌고, 그렇게 나의 기억이 새로운 의미의 차원으로 바뀌어서 지금의 나에게 새로운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미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미래는 우리의 정신 안에서 기대하는 것으로 존재합니다. 앞으로의 기대나 바라는 것이 없는 사람은 말 그대로 미래가 없는 사람입니다. 혹은 앞으로의 기대가 거짓과 허구 그리고 증오로 이루어진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기대로 만든 미래를 가지고 이미 현재 안에서 그런 미래를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미래도 바꿀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계기를 통해 기대와 소망을 갖게 되어 우리의 미래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그 미래를 바꿀 수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여기에서 나 자신 곧 현재입니다. 현재라는 시간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어떤 기억을 가지고 있는가, 어떤 기대를 가지고 있는가. 결국 지금 여기에서의 기억과 기대가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을 결정합니다.
[달란트 받은 종들의 이야기]
저는 오늘 본문에서 읽은 달란트를 받은 종들에 대한 이야기가 이러한 사실을 잘 말해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달란트를 받은 종들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이야기입니다. 내용이 이렇습니다. 어떤 주인이 여행을 떠나면서 자기 종들에게 재산을 맡깁니다. 그 주인은 종들의 능력에 따라 어떤 사람에게는 다섯달란트를, 어떤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어떤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여행을 떠납니다. 그런데 다섯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받은 종과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의 반응은 이러했습니다. 다섯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받은 종은 본문의 표현대로 “곧 가서, 그것으로 장사를 하여” 정확히 받은 만큼의 이익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은 “가서, 땅을 파고, 주인의 돈을 숨겼”습니다. 아무 이익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이제 이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합니다. 떠났던 주인이 돌아온 것입니다. 본문 19절을 보면 “오랜 뒤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왔다고 합니다. 여기서 “오랜 뒤에”라는 말은 긴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6개월인지, 1년인지, 아니면 5년인지 혹은 그 이상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 시간이 종들에게는 매우 길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이 이야기의 전체적인 내용상 다섯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받은 종들은 주인이 어서 와서 그들이 일군 성과를 인정해 주길 기대하는 마음 때문에 주인이 돌아오기까지의 시간이 매우 길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은 다른 의미에서 그 시간이 매우 길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저는 그 이유가 불안함과 지루함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주인이 준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둔 종의 마음은 본문 24절과 25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는 주인을 무서워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한 달란트를 준 주인이 돈에만 집착하여 종들을 쥐어짜는 무자비한 사람이라 여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돈을 고스란히 지키고자 묻어두었던 것입니다. 돈을 묻어두었기에 걱정은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깊은 곳에서 불안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돈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주인에 대한 종의 두려움은 주인이 없는 그 시간을 불안함으로 채웠습니다. 또한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권태와 무료함 그리고 무의미함으로 그 시간을 흘려보냈습니다.
이제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주인이 종들과 셈을 합니다. 장사를 하여 두 배의 이익을 남긴 다섯 달란트를 받은 종과 두 달란트를 받은 종은 주인의 칭찬을 듣습니다. 두 종 모두에게 주어진 칭찬의 말은 같습니다. “잘했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신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많은 일을 네게 맡기겠다. 와서, 주인과 함께 기쁨을 누려라.” 반대로 주인의 돈을 땅에 묻어둔 종은 주인의 꾸지람과 책망을 듣습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 그리고 주인은 그 종이 묻어둔 돈을 빼앗아 열달란트 가진 사람에게 줍니다. 그리고 그 종을 내쫓습니다. 주인은 이렇게 다시 말합니다. “이 쓸모없는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아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일이 있을 것이다.”
[그들이 품은 말씀]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슨 의미를 전하고 있을까요? 우선 예수님은 이 달란트 받은 종들의 이야기가 하나님 나라에 관한 비유라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서 이 달란트 받은 종들 이야기의 앞에는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 비유가 있고 뒤의 이야기는 양과 염소의 최후 심판 이야기가 있습니다. 전체 흐름을 보면 달란트를 받은 종들의 이야기는 다시 이 세상에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기대와 오랜 기다림 그리고 그 시간 사이 교회의 반응과 그리스도의 심판에 관한 내용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이 이야기는 주인이 여행을 떠나 오랜 시간 부재한 것처럼 재림이 지연된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교회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특히 이 이야기는 시간에 대해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자 그리스도의 종들인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 곧 과거와 미래 그리고 현재가 어떻게 바뀔 수 있으며, 또 그 시간이 우리 자신과 이 세계를 어떻게 바꿀 수 있을지를 말해줍니다.
이 이야기는 다섯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받은 종들과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을 선명하게 대조합니다. 앞서 두 종들은 긍정적으로 평가됩니다. 이들은 주인에게 받은 달란트를 가지고 장사를 하여 두 배의 이익을 남겼고, 주인에게 칭찬을 듣습니다. 하지만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에게 받은 달란트를 땅에 묻고 아무 일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주인의 책망을 받고 추방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 둘의 차이를 가져왔을까요? 쉽게 떠올릴 수 있는 한 가지 이유는 이것입니다. 바로 받은 달란트의 차이입니다.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은 다른 종들에 비해 적은 돈을 받았기에 그 차이로 인한 상대적 박탈감 때문에 주인에게 받은 돈을 땅에 묻었다는 것입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 한 달란트는 6,000데나리온에 해당하는 돈으로 한 데나리온은 농촌 일꾼이 받는 하루 품삯이었습니다. 한 달란트는 노동자가 안식일을 제외하고 20여 년을 일해야 벌 수 있는 큰 금액이었던 것입니다. 다섯달란트나 두 달란트보다는 적지만 한 달란트 역시 큰돈이었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에서 세 명의 종들이 받은 달란트에 집중하기보다 그들이 들은 주인의 칭찬과 꾸지람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주인이 돌아와서 셈을 할 때, 주인에게서 들은 말씀이 달랐습니다. 저는 이들이 주인에게서 들은 말씀이 그들의 결정과 행동에 차이를 가져온 중요한 이유라 생각합니다. 앞서 저는 시간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과거는 기억된 과거이고, 미래는 기대하는 미래이며, 현재는 끊임없이 과거와 현재로 늘어납니다. 지금 이들이 주인에게 들은 말씀 곧 ‘잘했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라고 한 말과 ‘악하고 게으른 종아.’라고 한 말은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주인에게서 들은 말이기도 하지만, 이 말은 주인이 돌아오기 전 과거에 종들이 품고 있었던 말이고, 현재 속에서 끊임없이 품고 있는 말이며, 주인이 돌아올 미래에 듣게 될 말이었던 것입니다. 이 종들이 들은 주인의 말은 과거의 기억이자 지금 여기에서 들고 있는 말이며 성취된 미래의 말이 되었던 것입니다.
무엇보다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은 주인이 여행에서 돌아오기 전에도 자기 자신을 향해 ‘너는 악하고 게으른 종이다.’하는 말을 품고 살았을 것입니다. 자신을 향해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 했던 이 말은 주인에 대한 그의 기억된 과거를 지배했고, 현재의 행동과 결과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며, 기대되는 미래를 그렇게 성취하도록 만들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가 품은 말씀은 주인이 돌아와 ‘악하고 게으른 종아’라는 말로 성취되었습니다. 반대로 다섯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받은 종들은 ‘잘했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라는 말을 늘 지니고 있었을 것입니다. 비록 주인이 없더라도 그 말을 가지고 주어진 삶을 적극적으로 일구어왔을 것입니다. 이 말 때문에 이들의 기억된 과거와 현재 그리고 기대된 미래 안에서 그들은 정말 착하고 신실한 종이 되었던 것입니다.
[기억의 치유와 미래의 형성]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을 생각하면 참 안타깝습니다. 어쩌면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바로 이 한 달란트를 받은 종입니다. 자신에게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 말해왔던 이 종의 모습은 자신에 대한 절망과 고통 그리고 저주의 이야기로 자신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땅에 묻어두고 사는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철학자 폴 리쾨르는 인간의 정체성이 시간적이고 역사적인 지평에 놓여있고, 이런 맥락에서 인간의 정체성이란 서사적 정체성 곧 이야기의 정체성이라 말합니다. 우리는 과거로부터 이어받은 어떤 이야기 혹은 누군가에게서 들은 어떤 이야기를 통해 우리의 정체성을 형성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듣느냐에 따라 우리의 기억이 달라지고 기대가 달라져서 결국 우리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라는 시간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다섯달란트나 두 달란트를 받은 종처럼 자신이 듣는 이야기가 ‘잘했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라는 말보다 스스로 듣는 이야기가 ‘악하고 게으른 종아. 너는 어두운 데서 슬피 울고 이를 갈며 살아라.’라는 말인 경우가 더 많아 보입니다. 이런 경우, 우리는 어느 때에 생명이 아닌 죽음의 이야기, 사랑이 아닌 적대와 분노의 이야기, 진실이 아닌 왜곡과 거짓의 이야기로 인해 자신의 이야기를 온전하게 형성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어떤 이야기로 인해 더 이상 자신의 이야기를 제대로 형성할 수 없을 만큼 자신의 정체성이 훼손되고 파괴된 경험을 가리켜서 폴 리쾨르는 트라우마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언젠가 어느 땐가 생긴 트라우마로 인해 우리의 서사적 정체성이 훼손, 왜곡, 파괴되어 자기 삶의 이야기를 쓸 수 없고 의미조차 부여하지 못한 채 ‘어두운 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며’ 사는 경우가 있습니다. 마치 한 달란트 받은 종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트라우마를 치유할 방법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다시 우리의 서사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이야기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시간을 통해서 형성됩니다. 내가 과거에 대해 어떤 기억을 가졌는지, 미래에 대해 어떤 기대를 갖는지는 지금 내가 가진 이야기에 의해 결정됩니다. 따라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형성하는 것은 바로 언어입니다. 어떤 언어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우리의 기억이 바뀌고, 우리의 기대가 바뀌며, 현재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의 시간을 바꾸기 위해서는 우리의 언어를 바꾸어야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리쾨르는 인간의 언어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도받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안타깝게도 오늘 우리 사회는 분열의 언어, 거짓의 언어, 폭력의 언어, 증오의 언어, 선동의 언어가 난무합니다. 모두 죽음의 언어입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형성할 평화의 언어, 진실의 언어, 사랑의 언어, 용서의 언어인 하나님의 말씀에서는 점점 더 멀어져 간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삽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과거의 트라우마에서 치유합니다. 죽음과 죄의 언어로 기록된 우리의 과거 이야기는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의 언어 곧 용서와 치유와 섭리를 통해서 다시 쓰여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기억이 바뀐다면 우리의 과거가 바뀝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은 미래에 대해 우리가 가진 불안과 허무를 올바른 기대와 희망으로 바꿀 것입니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현대 사회를 사는 인간 현존재가 가진 역설적인 두 가지 특징으로 불안과 권태를 지적합니다. 역설적입니다. 우리는 미래를 불안해합니다. 기후 위기, 민주주의의 위기, 경제적 위기, 사회시스템 붕괴의 위기, 신앙의 위기, 인간 실존이 가진 근본적인 불안 등으로 인해 많은 사림은 미래를 불안해합니다. 이런 미래의 불안함 속에서 인간은 동시에 권태를 경험합니다. 우리의 역사를 올바르게 말해줄 이야기를 상실한 인간에게 역사는 의미가 없고 목적도 없습니다. 생명의 아름다움을 경험할 여유도 없고, 그러기에 생명이 가진 아름다움에 대한 감수성도 없습니다. 생명의 아름다움에 대한 감수성을 잃어버린 사람이 타자나 가장 연약한 존재에 대한 감수성을 가질 리 없습니다. 이렇게 해서 생명의 아름다움을 경험하지 못하고 역사의 의미와 목적을 상실한 인간에게 남는 것은 권태입니다. 마치 한 달란트를 땅에 묻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 삶을 무의미와 권태라는 땅에 묻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희망을 줍니다. 그런데 희망은 근거가 있을 때 희망이 됩니다. 그 근거가 바로 사랑의 섭리입니다. 무용한 것으로 여겨지는 공중에 나는 새 한 마리와 풀 한 포기조차 돌보시는 섭리, 모든 피조물을 낳으시고 다시 불러들이시는 섭리, 우리의 모든 삶이 선하고 지혜로우신 아버지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있는 섭리. 이 사랑의 섭리가 우리에게 미래에 대한 기대를 불어넣는 것입니다. 이 사랑의 섭리는 지금 여기에서 사랑의 섭리를 따라 미래를 열어가려는 우리의 결정과 행동에 희망과 용기를 줍니다. 신학자 폴 틸리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른 결정이란 없다. 그저 시도와 패배 그리고 성공만 존재할 뿐이다. 하지만 사랑에서 출발한 결정들이 있다. ... 어떤 결정도 폐기될 수 없다. 어떤 행위도 완성되지 않는다. 하지만 사랑은 실패로 입증된 결정과 행위에게조차도 의미를 부여한다.” 이처럼 우리의 과거를 치유하고 미래를 새롭게 여는 길은 다른 것에 있지 않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 외에는 없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들어야 할 말씀]
이제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말씀을 품어야 합니다. 그 말씀은 우리에게 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잘했다. 너는 참 착한 종이다. 신실한 사람이다.’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나는 나쁜 사람인데, 나는 어리석은 자인데, 나는 실패한 사람인데, 난 그렇게 좋은 사람이 아닌데. 하지만 이 말씀의 조건은 우리에게 있지 않고 죄인을 의롭다 부르시는 그분의 자비와 선하심에 있습니다. 그러니 이 말씀을 품으십시오. 지금 여기에서 이 말씀을 들을 때, 과거에도 이렇게 말씀하셨고, 미래에도 이렇게 말씀하실 그분의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잘했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자비하신 하나님.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기억을 치유하소서. 우리에게 희망을 주소서. ‘잘했다. 착하고 신실한 종’이라 하신 그 말씀을 지금 여기에서 품고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거짓과 분열과 폭력의 언어가 난무하는 이 시대에 우리의 언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도하셔서, 그 선하신 말씀을 삶으로 살아내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사회를 치유해 주시고, 우리의 삶을 통해 복음의 이야기가 울려 퍼지게 하소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생명과 사랑의 이야기를 들려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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