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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미술 산책] 마르크 샤갈 <에덴의 동산>
세계대전 비극 속에 택한 환상주의
- 마르크 샤갈 <에덴의 동산>, 1978년, 스테인드글라스, 마인츠 성 슈테판 성당, 독일
“나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하늘과 땅 사이에 태어났고, 이 세상은 거대한 사막이고 그 안에서 내 영혼은 횃불처럼 떠다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오래전부터 간직한 꿈을 실현한다는 의미에서 이 그림들을 그렸다. 나는 사람들이 이 그림들을 보면서 마음의 평화를 얻고 영적인 깨달음과 종교적인 감정,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이 그림들을 이 미술관에 걸어두고 싶다.”
1973년 프랑스 니스 국립 샤갈 미술관 개관 당시 마르크 샤갈(Marc Chagall, 1887~1985)이 전한 인사말입니다.
러시아의 붉은 혁명, 1·2차 세계대전 등 비극적인 참상을 겪으며 잔혹한 인간성에 대한 깊은 회의와 절망감을 느낀 유럽 예술가들은 크게 두 가지 상반된 태도를 취하게 됩니다. 우선 사회에 대한 비판적 관점의 ‘표현주의(expressionism)’, 그리고 직면한 아픈 현실을 외면하고 비현실적이고 아름다운 세상에서 도피처를 찾는 ‘환상적인’ 작품을 들 수 있습니다.
유대계 러시아 출신인 샤갈은 ‘환상주의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중력의 법칙을 초월한 행복한 꿈속의 공간에서 그가 꿈꾸는 파라다이스를 펼쳐냅니다.
이는 스테인드글라스로 표현한 <에덴의 동산>입니다. 중세 고딕시대 성당 내부를 가득 채운 스테인드글라스, 색유리 조각들을 납선으로 용접하여 연출한 색과 빛의 향연. 이는 ‘빛’ 그 자체인 하느님의 속성을 직접적이고 효율적으로 담고 있습니다.
유대인으로 깊은 신앙심을 가진 그에게 성경은 작품 세계의 주축을 이뤘습니다. 프랑스 메츠, 샤르트르, 랭스 그리고 독일의 마인츠, 예루살렘 의학센터 내 유대인 예배당 등 여러 곳에서 유리화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가 염원한 천상의 영원성과 신비를 나타내기에 절묘한 스테인드글라스.
그가 즐겨 사용한 짙푸른 배경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천상계로 들어갑니다. 독일의 마인츠 슈테판성당 내부는 온통 환상적인 푸른 스테인드글라스로 가득 차 있는데, 이는 구약의 ‘에덴의 동산’을 나타냅니다. 에덴의 평화로운 지상낙원은 풍요롭게 무성한 지상의 녹색 나무와 천상의 푸르름으로 하나가 되고, 눈부신 태양 아래에는 천사가, 그 아래에는 나체의 아담과 이브가 서로 사랑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며 사랑을 속삭입니다. 이들 주위에는 수탉, 염소, 뱀 등의 야수들이 대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평화롭습니다.
샤갈의 놀라운 사랑 메시지를 마음에 새깁니다. “인생과 마찬가지로 예술에서도 사랑이 바탕이 되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
[리길재 기자의 공소를 가다] (27) 안동교구 점촌동본당 동로공소
전쟁 상처 위에 세운 ‘화해의 집’
- 동로공소 제단. 소박하게 꾸며진 제단이 어떤 화려함보다 뛰어넘는 아름다움을 준다.
- 동로공소는 적성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다.
안동교구 점촌동본당 동로공소는 경북 문경시 동로면 여우목로 2797-6(적성리 571번지)에 자리하고 있다.
동로(東魯)는 ‘동쪽 노나라’라는 뜻이다. 노나라는 공자가 태어나고 활동한 곳이다. 따라서 동로를 ‘동쪽 유교의 본고장’으로 풀이할 수 있겠다. 동로는 삼국시대 때부터 영남 동북부권으로 가는 가장 지름길이었다. 소백산맥 줄기인 하늘재를 넘어 꼭두바위 고개를 곧장 오르면 해발 620m의 여우목이 나온다. 여기서부터 동로면 적성리까지는 내리막길이다.
‘여우목’은 말 그대로 여우가 다니는 고갯길이다. 여우가 다닐 정도면 상당히 깊은 오지다. 이 깊은 산속 험하고 가파른 골짜기에 조선 왕조의 박해를 피해 교우촌을 이루고 숨어 살던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다. 여우목 교우촌을 처음 일군 이가 성 이윤일(요한)이다. 그는 가족과 함께 1839년 기해박해를 피해 충청도 홍주에서 상주 상골을 거쳐 문경 최동북단에 위치한 여우목으로 숨어들었다. 곧이어 서치보(요셉) 가족도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충청도 청원에서 이곳으로 피신했다. 또 순교자 박경화(바오로)와 그의 아들 박사의(안드레아) 가족이 여러 곳을 전전하다 여우목에 정착했다.
- 동로공소는 6·25전쟁 당시 적성리 전투로 무너진 성의 돌들로 지었다. 동로공소 전경.
동족상잔의 비극 서린 돌들로 지어
병인박해가 한창이던 1866년 11월 18일 문경 관아 포졸들이 여우목 교우촌을 습격했다. 교우촌 회장 이윤일을 비롯한 많은 교우가 체포됐다. 이들은 문경 관아에서 3일간 뭇매를 맞은 뒤 상주로 이송됐다. 상주에서 한 달여 옥살이하면서 이윤일은 9차례 혹독한 형벌을 받았다. 이윤일은 1867년 1월 경상 감영이 있는 대구로 압송됐고, 1월 21일 관덕정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서치보는 여우목에 들어온 이듬해 선종했다. 그리고 그의 아들인 서인순(시몬)과 서익순(요한), 서태순(베드로)은 1860년께 경산 모개골 교우촌으로 이주했다가 병인박해 때 체포돼 1868년 대구 감영에서 옥사했다.
동로공소가 자리한 적성리는 6·25전쟁 격전지였다. 1951년 1·4 후퇴 며칠 뒤인 12일부터 15일까지 나흘간 국군 300여 명이 북한군 3000여 명을 상대로 1대 10의 치열한 전투를 벌여 기적같이 승리했다. 국군이 전사자 3명, 부상자 4명뿐인 것에 비해 북한군은 전사자 1057명, 부상자 900여 명에 달했다. 마을 주민 100여 명이 죽창과 곡괭이를 들고 합세해 국군을 도왔다. 군과 주민들이 함께 이룬 승리였다.
제6대 점촌동본당 주임으로 1956년 7월부터 1969년 12월까지 사목한 아르놀도 렌하르트(Arnold Lenhard, 한국명 노도주, 1905~2003) 신부가 적성리 격전지 1653㎡(500평)를 사들여 그 위에 건평 132㎡(40평) 건물을 지어 1960년 11월 27일에 동로공소를 설립했다.
동로공소는 적성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풍광 좋은 언덕에 자리한다. 북서쪽으로는 소백산맥이, 그 반대편으로 태백산맥이 우뚝 솟아 있다. 공소 뒤편으로는 백두대간 황장산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고, 앞으로는 천주(天柱)봉이 하늘을 받치고 있다. 풍수를 모르는 이가 봐도 명당 중의 명당이다.
렌하르트 신부는 적성리 전투 당시 북한군의 공격으로 무너진 방공호 축대의 돌들로 동로공소 외벽을 장식했고, 창문과 양철 지붕은 공평성당 자재를 옮겨와 사용했다. 어떤 이들은 방공호 축대 돌들이 아니라 적성리 전투 때 북한군이 미군의 포격을 막기 위해 쌓아놓은 돌들이라고 했다. 그 돌의 쓰임새가 어떠했든 동로공소는 동족상잔 비극의 상처를 온전히 간직하고 있다. 이름 모를 많은 젊은이가 그 돌 위로 비참히 쓰러져 세상을 마감했고, 그들의 피가 공소가 서 있는 대지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 비극을 고스란히 목격하고 받아들인 침묵의 증거물들로 하느님의 집을 지어 그 집 안에서 지금까지 ‘화해’와 ‘평화’,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하고 있다.
화해와 평화는 동전의 양면처럼 필연적인 상호 작용을 한다. 둘은 결코 나뉠 수 없다. 단 먼저 화해해야 한다는 순차적인 실천이 요구된다. 아마도 중국 간도 연길수도원 선교사로 활동하다 공산 당국에 체포돼 2년 넘게 강제노동수용소 생활을 했던 렌하르트 신부는 같은 민족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비극을 치유하기 위해선 먼저 기도 안에서 화해해야 한다는 것을 가장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 비극의 현장 위에 그 목격 증거물인 돌들로 공소를 지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단순하지만 아름다움 간직
지금의 동로공소는 2010년 12월 수리비 1000만 원을 들여 개축했다. 2011년 7월 동로공소 공원화 추진 사업에 의해 잘 조성된 돌계단을 따라 언덕 꼭대기로 올라가면 제일 먼저 성모상이 반겨준다. 그 뒤로 돌집 동로공소가 소박하게 자리하고 있다.
한국 가톨릭 성당 건축사에 있어 6·25전쟁 휴전 직후인 1953년 7월 이후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 외형을 화강석과 같은 단단한 돌로 치장하고 종탑을 정면 중앙에 배치하는 성당 건축 양식이 두드려졌다. 전쟁을 겪은 이들에게 든든한 성채처럼 성당에서 하느님의 견고한 보호를 받을 수 있다는 정서적 안정감을 시각적으로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또 성당 내부도 공간을 나누는 기둥들을 없애버리고 강당 형태의 밋밋한 구조로 마감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성당 기능을 우선해 형태미를 생략해버린 것이다. 이 시기 지어진 대표적 성당이 춘천 죽림동주교좌·원주 원동주교좌·서울 돈암동·김포성당 등이다.
동로공소 또한 당시 유행하던 이 건축 양식을 따르고 있다. 단단한 돌로 외벽을 장식했고, 종탑을 입구 정면에 뒀다. 내부도 강당식으로 기둥 하나 없이 단순하게 지어졌다.
때때로 화려함보다 단순함이 아름다움에 대한 감수성을 더 자극한다. 비움으로써 투명해지듯 전례에 꼭 필요한 것만 채워져 있을 때 정말 아름다운 성당으로 감동을 준다. 동로공소가 그렇다. 단순하지만 아름답고, 소박하지만 화려하다.
예수 성심상을 지나 공소 안으로 들어서면 사물이 비칠 만큼 윤이 나는 나무 바닥에서 공소 교우들의 정성을 느낀다. 제대 위에 펼쳐진 성경이 교우들의 열성을 웅변한다. 제대와 십자가, 예수 성심상, 성모상으로 꾸며진 소박한 제단이 아름답다. 그 옆에 자리하고 있는 아담한 풍금이 파이프 오르간의 웅장한 음향을 채워주고도 남는 듯하다.
동로공소는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 4,16)는 말씀처럼 화해와 평화를 위해 기도하는 하느님의 집임을 느끼게 해준다.
[신앙의 눈으로 보는 순례] 용문 성당
쉼과 기도가 있는 순례지
용문면 초입에 들어서면 두 개의 황금돔을 머리에 이고 서 있는 이국적인 모습의 용문 성당이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마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아 용문 마을을 내려다보는 성당의 웅장한 자태는 그 자체로 용문면을 대표하는 상징이 되어 줍니다. 용문 성당은 1908년에 설립되어 110년이 넘는 오랜 역사를 간직한 유서 깊은 순례 사적지입니다.
성당 뒤편으로 돌아가면 성당 한구석을 묵묵히 지키고 있는 투박한 옹기담과 마주하게 됩니다. 이 옹기담에는 1900년대부터 용문 본당이 관할하던 수많은 공소의 이름이 쓰여 있습니다. 옹기는 박해시절 용문산 깊은 골짜기로 숨어든 신앙선조들이 옹기를 구워 팔아 생계를 이어가면서도 절대로 놓지 않았던 굳건한 믿음을 상징합니다.
옹기담 앞쪽에는 정성스레 가꾸어진 성모 동산이 있으며, 이와 연결된 뒤편에는 선조들의 옹기 가마터를 재현해 만든 성모굴이 있습니다. 이곳에는 순례자들이 조용히 묵상할 수 있는 아늑한 기도방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작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따스한 햇살이 성모님을 비추면 순례자들이 전구를 청하는 신비롭고 거룩한 기도 공간이 되어줍니다.
옹기담을 따라 이어지는 뒷산에는 아름다운 십자가의 길이 있습니다. 길 입구에서부터 제법 가파른 경사가 시작되는데, 언덕 끝 대형 십자고상을 바라보면 골고타 언덕의 고난이 떠오릅니다. 이 언덕길의 중간쯤에서 제1처가 시작되는 십자가의 길 산등성 한 바퀴를 돌면 기도가 끝납니다. 십자가의 길에 들어서면 울창한 숲으로 이어지는 오솔길 덕분에 여름날 내리쬐는 뙤약볕 속에서도 휴식처 같은 위로의 공간이 되어줍니다. 특히 이 고즈넉한 오솔길 옆으로는 투박하면서도 멋스러운 고기와들이 나란히 놓여 길의 아름다움을 더해줍니다. 이 기와들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한 신자가 오랫동안 수집한 것으로, 그의 가족이 기증한 것입니다. 누군가의 슬픔과 그리움이 배어 있는 기와길이 사랑과 신앙을 품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도의 길이 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용문 성당 곳곳에는 신자들의 애틋하고 아름다운 이야기와 신앙선조들의 숭고한 정신이 깃들어 있습니다. 이곳을 찾는 순례자들은 자연이 주는 평온한 삶과 깊은 기도 속에서, 지나온 삶을 잔잔히 반추하며 자신의 신앙을 따뜻하게 돌아보게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