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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 운주당•박효자•잡영10절•벽방산•삼천진> 고영화(高永和)
1. <통제영(統制營)의 통영(統營)>
통제영이란 충청·전라·경상도의 삼도수군을 통할하는 통제사가 있는 본진을 말하는 것으로, 삼도수군통제영을 줄여서 표현한 것이다. 선조 26년(1593)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의 한산진영이 최초의 통제영이다. 통영(統營)은 경상우수영 겸 삼도통제영(慶尙右水營 兼 三道統制營)이 설치된 곳이다. 지금의 통영시 시내에 해당한다. 경상우수영은 원래 거제도의 오아포(烏兒浦)에 있었는데 임진왜란이 발발한 후 1593년(선조 26)에 이순신을 통제사(統制使)로 하여 경상·전라·충청 3도의 수군을 모두 관장하게 하였다. 이후 1602년(선조 35)에 고성의 춘원포(春元浦)로, 1603년에 두룡포(頭龍浦)로 옮긴 후 통영(統營)이라 지칭하게 되었다. 이곳에는 종2품의 통제사가 경상우수사를 겸하였으며, 그 아래에 정4품의 수군우후(水軍虞侯)가 파견되었다. 석축(石築)의 성곽이 있었으며, ≪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36척의 전선(戰船)이 배치되었다고 한다. 이순신을 배향하여 1663년(현종 4)에 사액 받은 충렬사(忠烈祠)가 있고, 충렬사 서쪽으로 굴량교(堀梁橋)가 설치된 곳은 썰물 때면 섬과 연결되는 지역이다. 한 때 흙으로 메워 사람이 건널 수 있게 만들었지만 다시 파내어 배가 다닐 수 있게 만들고 다리를 설치한 곳이다. 통영 북쪽으로는 우수영과 외부와의 육로 차단 구실을 했던 외성(外城)과 원문(轅門)도 있다.
1) 통영(統營) / 하달홍(河達弘 1809~1877)
월촌(月村) 하달홍(河達弘,1809년~1877년)선생은 경남 하동군 출신 유학자로써 풍모와 도량이 엄정하고 글을 짓는 솜씨가 넉넉하며 행의(行誼)가 순박하고 독실했다. 병인양요(丙寅洋擾 1866년)로 나라가 어수선하여지자 강한 위정척사(爲政斥邪) 의지를 앞세우고 방문한 통제영의 평온한 모습을 읊었다.
金爲城堡鐵爲關 성루는 금으로, 관문은 철로 만들고
城下滄溟城上山 성 아래는 큰 바다, 성 위는 산으로 둘렀네.
嫩柳家家春欲晩 집집마다 버들 새싹 돋고 봄날 저무는데
將壇高處角聲閒 높은 지휘대에는 피리소리만 한가하네.
2) 입 통영(入統營) / 강수환(姜璲桓 1876~1929)
설악집(雪嶽集)에 실려 전하는 구한말 유학자 강수환(姜璲桓,1876년~1929년)의 '입통영(入統營)'은 일제강점기에, 유람 차 둘러본 통영에서 쇠퇴한 국가의 미래를 걱정하며 지은 한시이다.
地是保障七十州 바다의 칠십 고을을 보호했던 이곳 통영에서
遊人筇屐際淸秋 나그네의 지팡이와 신발, 맑은 가을과 만났네.
悠悠千載元戎恨 아득한 천년동안 원융(元戎)의 한(恨)이
城上歸雲結不流 성위에 휘감는 구름 되어 흩어지지 않구나.
[주] 원융(元戎) : 병거(兵車, 전차戰車)의 이름. 큰 것을 元戎, 작은 것을 소융(小戎)이라 함. 또는 군사의 우두머리 장군을 일컬음.
3) 통영(統營) / 오횡묵(吳宖默) 1886년 영남향별사, 고성부사(1893~1894).
祖落艅艎大局成 선조들은 큰 배를 만들어 뛰어난 성능을 갖추니
斗南元氣此中傾 온 천하 가운데 타고난 기세를 다투었다.
天開保障通三道 하늘이 열려 보장하니 삼도에 두루 미치고
地盡滄溟起一營 땅은 바다에 가까워, 온 진영을 일으키네.
生齒漸繁無片隙 백성이 점점 번성하여 한가할 틈이 없으며
妖氣凈掃限高城 요사한 기운을 제거하니 높은 성이 정돈된다.
遠遊書釰登樓壯 먼 유람에 둔한 글이지만 올라간 누각 웅장하고,
人物鮮華照眼明 인물은 선명하고 화려해 눈부시게 밝구나.
4) 세병관에서 정은경(鄭殷卿)을 보내며[送鄭殷卿洗兵舘] 1806년(丙寅) / 조병현(趙秉鉉 1791∼1849) 조선후기 문신.
江南晩氣帶踈衿 강남의 저녁 기운에 성긴 옷깃이 풀어지려하고
遠渡行裝月欲沉 멀리서 건너온 행장(行裝)에 달조차 지려하네.
一觶淸醪斟好意 한 잔의 맑은 술을 베푼 호의를 헤아리며
數篇佳句寄知音 몇 편의 아름다운 글귀를 지음(知音)에게 보낸다.
歸禽拍拍投林藪 새도 숲속 둥지로 돌아와 서로 어울리니
征馬蕭蕭繫樹陰 쓸쓸하게 타고 온 말을 나무그늘에 매었다.
出巷問君千里路 거리에서 나와 천리 길 안부를 그대에게 당부하는데
洗兵高舘對前岑 세병관의 높은 관사가 산봉우리 앞에 서있네.
5) 통영, 차운[次統營韻] / 장만(張晩 1566∼1629) 경상도관찰사.
廟堂籌畫設經營 묘당(廟堂)에서 계획하여 변경에 영(營)을 설치했지만
辛苦誰知海上情 심한 어려움 속에 이뤄낸 해상의 정(情)을 뉘가 알랴.
客鬢曉添千丈雪 나그네의 귀밑머리는 새벽까지 천 길 눈처럼 날리고
夜潮風送五更聲 밤중의 바닷물소리는 바람타고 오경까지 들리누나.
何時日域誅驕虜 거만한 오랑캐 일본을 어느 때에 치려하고
幾處幽關憶遠征 국경 요새 몇 곳이나 원정을 기억하는지.
賴有將軍英略在 다행이도 장군의 뛰어난 계략 있으니
胸中十萬捴神兵 마음속 십만의 신(神)의 군사 모두 앞세우리.
6) 통영으로 돌아가는 선박에서[題統營歸舫] / 동암선생문집 (東巖先生文集)
誰欲憑渠解野圍 누가 자연에 빠져 의지하고자 하리오.
朝家此計晚知非 조정의 이 계획을 늦게야 잘못됨을 알았네.
間關來處如山重 가는 곳마다 무거운 산처럼 험하였는데
快順回時似葉飛 돌아올 때에는 낙엽이 날리듯 상쾌하고 순조로웠다.
颿影重過臥龍宅 와룡(臥龍)의 집에 달리는 말 그림자가 거듭 지나가니
櫓聲還入釣魚磯 낚시하던 물가에서 노 저어 다시 돌아드네.
傀人莫笑空南下 쓸데없이 남쪽으로 왔다고 허수아비야 비웃지 말라.
剩載江都風月歸 물가의 도읍으로 바람에 달을 싣고 돌아가리라.
2. <통영 세병관 운주당(運籌堂)>
◯ 본디 운주당(運籌堂)은 통제사 이순신 장군이 처음 통제사로 근무하던 한산도에서 사색하고 공부하며, 회의를 열고 집무를 보는 곳이었다. ‘운주(運籌)’란 '운주유악지(運籌唯幄之)'에서 나온 말로 "장막 안에서 계책을 세워 운용한다.“는 뜻이니 통제사 혼자만이 아니라, 여러 장수, 군관들과 함께 군사와 전투에 좋은 지혜를 꾀하며 작전회의를 했던 곳이다. 난중일기에 운주당을 설명하길, “운주당에서 모든 일을 같이 의논하고 계획을 세우고 온갖 방책을 의논하며 밤낮으로 토의하고 약속했다.(同論畫計 百爾籌策 日夜謀約)”라고 적고 있다. 이순신이 백의종군하던 시절인 1597년 원균이 칠천량에서 대패하니 한산도도 적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고 이때 운주당도 왜적에 의해 불타 버렸다. 이후 1739년 운주당 옛터에다 조경 통제사가 중건(重建)하여, ‘제승당’으로 명명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의 운주당(運籌堂)은 통영시 세병관 內에 위치하고 있는데, 1645년(인조23년) 제21대 이완(李浣) 통제사가 세병관內 경무당과 함께 창건한 것이다.
7) 통영 운주당[題統營運籌堂] / 경와(敬窩) 이헌영(李헌永,1837∼1907) 1892년 경상도관찰사.
千里嶠之右 천 리 경상우도에
大開元帥堂 원사(元帥)의 관아를 크게 열었다.
皇恩羅八賜 황제의 은혜인 팔사품(八賜品)을 늘어놓고
도독인 1개, 독전기 1쌍, 남소령기 1쌍, 홍소령기 1쌍, 호두령패 1쌍, 귀도 1쌍, 참도 1쌍, 곡나팔 1쌍(印一督戰旗一雙 靑(藍)令旗一雙 紅令旗一雙 虎頭令牌一雙 鬼刀一雙 斬刀一雙 曲喇叭一雙)
軍務統三方 삼남의 군사직무를 통솔했다.
地盡依山峻 험준한 산에 의지한 땅이 끝나는 지점에서
天低望海洋 하늘 아래 해양을 바라보니
當年忠武績 그 해의 충무공 공적인데
誰復運籌長 누가 다시 계책을 꾀하랴.
8) 운주당[運籌堂] / 오횡묵(吳宖默) 1886년 영남향별사, 고성부사(固城府使, 1893~1894년).
大海南頭一閣軒 대해(大海)의 남녘 모퉁이 한 관서(官署)집에서
元戎統制起居尊 대장이 살림과 군대 모두를 통제한다.
弓嗚黑月聞高雁 달이 이지러지듯 활이 울리니 기러기 소리 들리고
馬向長風駕化鯤 말이 바람을 헤쳐 나가니 수레가 곤어(鯤魚)로 화했다네.
帷幄子房傳勝策 장막 안의 장자방(張子房)이 승리의 계책을 세우고
金城忠國奏嘉言 금성(金城)에서 나라에 충성하려고 아름다운 말로 아뢰었다.
明時頗牧材恒足 평화로운 세상에서 가축을 치고 재목도 항시 넉넉하니
汛掃妖氛靖塞垣 전란의 기운을 말끔히 씻어내, 요새의 담장이 편안하도다.
[주] 자방(子房) : 장자방(張子房), 중국 한나라의 건국공신(?~BC168)으로 이름은 장량(張良)이다. 진승(陳勝) 오광(吳廣)의 난이 일어났을 때 유방의 진영에 속하였으며, 고조 유방을 도와 한나라 창업에 힘썼다. 선견지명이 있는 책사(策士)로서 소하, 한신과 함께 한나라 창업의 삼걸(三傑)로 불린다.
3. <통영 박효자[朴孝子] 이야기> 저자 추재(秋齋) 조수삼(趙秀三 1762∼1849)은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여항시인(閭巷詩人)이다. 기이한 인물 이야기를 모아 담은 「추재기이(秋齋紀異)」는, 당시의 도시하층민들의 생기발랄한 모습을 산문으로 쓰고 칠언절구의 시를 덧붙인 형식으로 되어 있다. 도시 뒷골목 71명의 이야기를 71편의 한시로 응축시켜 표현했다. 다음 시편도 그 중에 하나이다.
9) 효자의 이름은 박지순(朴志順)이고 통제영의 장교였다. 부모를 잘 봉양했으나, 병이 나자 얼음 속의 잉어와 눈 속의 죽순을 구해드렸다. 이후 상을 당하자 산속에서 여막살이를 했는데 호랑이가 와서 보호해 주었다. 동네 아낙네와 아이들이 그 사실을 알지 못해, 그가 문을 나서는 것을 보면, “호공(虎公)이 온다!! 호공이 온다!!”고 외쳤다. (孝子名志順 統營將校也 善養親 病則有氷鯉雪笋之異 喪而廬墓有虎來護 故婦人孺子不知其事 見其出門 走輒呼曰虎公來虎公來)
雪笋氷魚...事信哉 눈 속 죽순과 얼음 속 잉어의 효력을 믿노니 思親八十尙含哀 팔순의 어버이 잃고 오히려 슬퍼했다네.廬傍有虎馴如犬 여막살이에 호랑이를 개처럼 길들여上塚晨昏護往來 밤새워 무덤 위를 오가며 지켜주었네.
◯ 효도의 상징, ‘고빙득리(叩氷得鯉)’ ‘설리구순(雪裏求筍)’효자 왕상(王祥 184~268)은 중국 삼국시대, 서진 시대의 관료로, 자는 휴징(休徵)이며 서주 낭야국 임기현 사람이다. 얼음을 깨서 잉어를 얻음은 ‘고빙득리(叩氷得鯉)’, 왕상의 효도를 ‘왕상지효(王祥之孝)‘라고 한다. 병석에 누운 왕상의 어머니가 아들에게 잉어가 먹고 싶다고 하셨는데 때가 한겨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왕상은 얼음을 깨고 잉어를 잡아 어머니에게 바쳤다 한다. 중국 오나라 효자 맹종(孟宗)의 어머니가 어느 겨울날 죽순(竹筍)이 먹고 싶다고 말하니 어머니의 병을 낫게 하려고 겨울인데도 정성(精誠)을 다하니 갑자기 죽순(竹筍)이 솟아올라 병을 낳게 했다는 ‘설리구순(雪裏求筍)’ ‘맹종지효(孟宗之孝)’라 일컫는다. 이로부터 왕상(王祥)과 맹종(孟宗)의 잉어와 죽순의 이야기는 효자의 상징이 되었다.
◯ 왕상(王祥)과 맹종(孟宗)의 효(孝) / 박인로(朴仁老, 1561~1642)왕상(王祥)의 잉어 잡고 맹종(孟宗)의 죽순 꺽어 검던 머리 희도록 노래자(老來者)의 옷을 입고 일생에 양지성효(養志誠孝)를 증자(曾子)같이 하리라[주] 양지성효(養志誠孝) : 어버이를 잘 봉양하여 그 뜻을 기리는 정성스러운 효성. 공자(孔子)의 수제자인 증자(曾子)는 효자로서 유명하다.
4. <통영 잡영 10절(統營雜詠十截)> 『고성총쇄록(固城叢鎖錄)』 통영잡영10절(統營雜詠十截)을 지은 오횡묵(吳宖默,1834~?)은 1886년 영남향별사, 1893~1894년 고성부사(固城府使)를 역임한 지방 관료로서,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성규(聖圭), 호는 채원(茝園), 19세기 말 정선군수·자인현감·함안군수·고성부사·공상소감동(工桑所監董)·지도군수(智島郡守)·여수군수 등을 두루 거쳤다. 그는 부임한 지방의 수령으로서 요직에 있을 당시, 자신의 많은 시문(詩文)은 물론, 관청에서 중요하게 집행되었던 일과 내외에서 일어났던 중대한 일 등을 일기체로 엮어 놓았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귀중한 자료로 남겨져 전해지고 있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로는 학문과 저술활동에만 전념하였으며, 평민출신 시인들과의 모임인 칠송정시사(七松亭詩社)를 조직하였던 것으로도 널리 알려지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채원집(茝園集)』·『정선총쇄록(旌善叢鎖錄)』·『자인총쇄록(慈仁叢...鎖錄)』·『함안총쇄록(咸安叢鎖錄)』·『고성총쇄록(固城叢鎖錄)』·『지도총쇄록(智島叢鎖錄)』·『여재촬요(輿載撮要)』 등이 있다. 1894년(고종 31) 저술한 『여재촬요』는 지리에 관한 저서로 유명한데, 서구식 지리서의 영향을 받기는 하였으나, 학교 교육의 필요에서 편찬된 지리교과서의 과도기적 산물로서 주목된다. / 1893년 늦봄, 고성부사 오횡묵이 통영의 대표적인 10군데 명승지를 둘러보고 지은 작품이 ‘통영10절’이다.
10) 통영 잡영 10절(統營雜詠十截)
(1) 착량묘(鑿梁廟)神鴉昏集樹南枝 신령스런 까마귀 떼 저물녘 남쪽 나뭇가지에 모이니 古廟荒凉不記時 황량한 옛 사당은 그때를 기억하지 못하구나.桑海浪淘當日事 상전벽해, 당시의 일은 물결에 씻기었고 居人說是鑿梁祠 주민들은 이곳을 착량사라 말하네.
(2) 착량교(鑿梁橋)通津南望鑿梁橋 나루를 통해 착량교가 남쪽에 보이는데 未霽何虹半出腰 비 갠 것도 아닌데 웬 반쪽 무지개가 기슭에 나타났는가? 烈士有靈忠憤激 열사의 영령이 있으니 충의의 분한마음 격하여 空敎白馬齧寒潮 속절없이 백마만 찬 물결을 되씹네.
(3) 서제(書齊) 東堂峰下水彎弓 산 아래 관사는 바다가 굽어 돌아 흐르고 野樹陰陰壇杏紅 그늘진 들판의 나무 터에는 살구가 붉네. 莫道此營徒用武 이 진영의 군사들 무예가 쓸 만하다 말할 필요 없고數間猶有讀書宮 두서너 칸 집은 오히려 글을 읽기에 대궐이로다.
(4) 용화사(龍華寺)山上峰臺臺下寺 산 위 봉우리 평평한 돈대 아래 절은 當年創自義信居 그해에 도리와 신의의 거처로써 비롯되었다.方便亦以慈悲勝 중생을 구제하고 또한 자비로써 分送甘泉疾祟除 감천(甘泉)을 나눠 보내니 질병과 재앙이 사라졌다네.
(5) 당포삼천(唐浦三千)唐津西去又三千 당포 나루 서쪽으로 다시 삼천이 있는데 野曠天晴二百年 넓은 들판에 하늘 맑은지 이백년, 一自洗兵烽火晏 이후로 병기를 씻고 봉화는 편안하니 空餘戍卒枕戈眼 헛되이 남는 군졸 창을 베고 누웠네.
(6) 천척루(千尺樓)海上羣峰繞膝平 해상엔 뭇 봉우리가 가까이 둘러싸고 秋毫百里見分明 추호 같은 백리가 분명히 보인다.當時謾自名千尺 당시에는 천척이라 불러 겸연쩍었는데 不着兵家候望情 적을 살피던 형편을 병법이라 아니한다네.
(7) 수강루(受降樓) 숙종3년(1677년)세운 누각. 擊鼓其鏜踴義徒 북을 둥둥 치고 춤추며 의(義)를 주창하는데 千軍面縛出城隅 많은 군사가 면박당해 성 모퉁이로 나간다. 鴈高月黑登樓夜 기러기 높이 날고 달은 침침한 밤 누각에 올라 到此何人胆不麤 여기에 이르니 누가 기백이 거칠지 않다 하리오?
(8) 전선귀선(戰船龜船)靑雀黃龍得美名 청작황룡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얻어 龜船創制最奇形 거북선을 창제했는데 정말로 기이한 모양이다. 莫道至今多朽敗 지금은 많이 썩어 뒤처졌다 말하지 말라. 由來神物老愈靈 원래부터 신물(거북선)은 오래될수록 신령하다네. [주] 청작황룡(靑雀黃龍) : 큰 배에 청작(靑雀)과 황룡(黃龍)으로 치장한다. 청작(靑雀 물새의 이름)에는 고운 빛깔의 해오라기를 그리고 黃龍에는 누런 용을 그리는데 큰 배가 나루에 어지러우니 무지개가 사라지고 비가 개니, 햇볕은 운구(雲衢하늘)에 통한다.
(9) 한산도(閑山島)嶺湖之蔽卽閑山 영호남을 총괄하는 한산도를 纔失閑山便受蠻 잃게 되면 오랑캐가 쉬이 들어온다. 臨戰勝籌先地理 전쟁에서 이길 방법은 지리를 선점하여 方知上將濟時艱 사방에서 상장군에게 알려 시국의 환란을 구제한다.
(10) 제승당(制勝堂)風雨壬辰事己空 폭풍우 친 임진년 변고는 간데없고 蘬然惟有魯靈宮 흘러간 세월에 오직 낡은 신전만 있구나.海田桑葉年年碧 갯벌 가 뽕나무 잎은 연연히 푸르고 採入村娥繡戰功 누에 실 뽑은 시골아낙은 싸우듯 애써 수를 놓네.
5. <통영고성 벽방산(碧方山)>산의 높이는 650m이며, 벽발산(碧鉢山)이라고도 부른다. 석가의 십대 제자 중 한 사람인 가섭존자(迦葉尊者)가 벽발(碧鉢:바리때)을 받쳐 들고 있는 모습처럼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다. 통영시와 고성군에 걸쳐있다. 부근의 천개산(524m)과 능선이 이어져 함께 오르는 등산 코스가 있다. 옛 《통여지(統營志)》는 '산세가 마치 거대한 뱀이 꿈틀거리는 위세를 하였으며, 그 중 한 산맥이 굳세게 옆으로 뻗치다가 곧장 바다 속으로 들어가 터전을 열었다'고 했다. 고찰과 비경이 골짜기 곳곳에 많이 있다. 고찰로는 654년(무열왕 1)에 원효대사가 창건한 안정사의 대웅전(경남유형문화재 80)이 있다. 산에 남아 있는 가섭암·의상암·은봉암·만리암·천개암 등이 안정사의 부속 암자였던 곳이다. 비경으로는 만리창벽·옥지응암·은봉석성·인암망월·가섭모종·의상선대·계족약수·한산무송 등이 있어, 안정사팔경(安靜寺八景)이라 불린다. 한편, 산 정...상 부근에는 진달래가 많아 4월 중순이면 절정을 이룬다. 정상은 상봉(上峰)·칠성봉(七星峰)이라고도 부른다. 벽방산은 예로부터 고성현에서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다.
◯ 심광세(沈光世 1577∼1624)는 1613년(광해군 5) 문학을 거쳐 교리로 있을 때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무고를 입고 고성(固城)으로 유배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인하여 다시 교리에 임명되고, 시무십이조(時務十二條) 및 안변십책(安邊十策) 등을 건의하였으며, 응교‧사인을 역임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성묘하러 고향에 갔다가 피난한 왕의 행재소로 가던 중 부여에서 병으로 죽었다.
11) 고을 수령(현령)이 벽방산에서 기우제를 올리려고(主倅祈雨于碧方山) 함께 동행하다가(邀與同往) 봉저사에 이르니(仍到峯底寺) 비가 내렸다(遭雨), 고성현령 윤삼락(固城縣令尹三樂) / 심광세(沈光世) 1613년 고성 유배인.捫蘿躡磴上危峯 덩굴 부여잡고 비탈길을 따라, 높고 험한 봉우리에 오르는데 歷盡崎嶇到梵宮 구불구불한 길을 다 지나 절간에 이르렀네. 天近星辰看可摘 하늘 가까운 별들이 손에 닿을 듯, 地連溟渤望難窮 대지에 연이은 큰 바다 조망이 그지없다. 旱乾喜得通宵雨 심한 가뭄에 밤비 내려 기쁘기 한량없고 炎熱偏宜萬里風 불볕더위에 만 리 바람 불어오니 그지없이 좋고 좋네. 半夜數聲淸磬發 한밤중 두세 번의 맑은 풍경소리 울리니 此心還與境俱空 이 마음이 도리어 경계(境界)와 더불어 다 공허하다.
12) '전서정'을 차운하여 보내다(次田西亭見寄) / 심광세(沈光世) 1613년 고성 유배인.休言白首滯周南 백발의 늙은이 남쪽지방에 버려져 할 말을 잃었는데 垂老投荒恨不堪 변방 귀양살이로 늙어가니 한탄한들 어이하랴. 同病心懷今絶似 이제 똑 같은 마음속의 병으로 함께 하는데 異鄕風俗久方諳 타향 땅 풍속 바야흐로 오래된 것임을 알겠네.天涯受玦流光八 먼 변방으로 축출되어 세월이 여덟 해, 月下含杯對影三 달빛 아래 잔 드니 달과 나 그림자가 셋이 되었네. 惟有丹衷縣魏闕 오직 생각건대, 뜨거운 정성이 대궐의 문에 걸려 夢中時或趁朝參 꿈속에라도 그때 혹시 조참(朝參)에 뒤따를까.
[주1] 수결(受玦) : 결은 한쪽이 트인 옥고리. 상고 때 조정에서 쫓겨난 신하가 국경에서 추후의 명을 기다리다가 환(環)이 내려오면 되돌아가고 결이 내려오면 관계를 완전히 끊는 것으로 이해했다. 곧 임금으로부터 축출된 것을 의미했다.
[주2] 대영삼(對影三) : 이백(李白)의 월하독작(月下獨酌) 시에 “잔 들어 밝은 달 맞으니 그림자를 대하매 세 사람이 되었네.[擧杯邀明月 對影成三人]" 하였는데 이는 잔속에 비치는 모습과 달에 비치는 그림자에 자신을 합하여 셋이 됨을 말한 것이다.
[주3] 위궐(魏闕) : 높고 큰 문이란 뜻으로 대궐의 정문(正門), 뜻이 바뀌어 조정(朝廷)을 이름.
[주4] 조참(朝參) : 왕이 정전(正殿)에 친림(親臨)한 앞에, 모든 조신(朝臣)이 나아가 뵈는 일. 한 달에 네 번씩 모여 할 말을 드렸음.
其二
碧山相對碧巉巖 벽방산 마주보니 험한 산이 푸르고
洞壑淸幽絶俗凡 맑고 깊은 골짜기 범속을 초월했네.
日暮層矼勞着屐 날 저물어 겹겹 징검다리 불편한 나막신 신고
天晴遠海見征帆 맑은 하늘 먼 바다에 항해하는 배 바라본다.
座中雲氣生巾舃 좌중의 구름 기운이 두건과 신발에 생겨나
臺下嵐光擁檜杉 정자 아래 아지랑이 전나무 삼나무를 가리네.
俯仰翩翩飛逸興 아래위로 훨훨 나부껴 아주 흥겨이 날아오르니
晩風容與颺輕衫 한가한 늦바람도 흥겨워 말쑥한 저고리 날리누나.
13) 벽방산(碧芳山) 기우제(祈雨祭) 축문(祝文) / 월봉(月峯) 구상덕(具尙德 1706~1761) 1730년.
“벽방산 철성(고성)의 동악이로다. 지리산에서 나온 산맥, 용수암 아울러 서있구나. 바다 눌러 보고 하늘 닿을 듯, 구름 일으켜 비 내리게 했다. 묵묵한 감응 어긋나지 않아 영험한 신령 예로부터 있었다. 벽방산 주변 뭇사람들 입은 은택 끝이 없어라. 여기에서 낳고 성장해서 이곳에 쌓아두고 보관했다. 지금 어찌하여 한번 가뭄이 여름부터 가을까지 지속되어 한발로 곡식이 타들어 가는데 단비가 흐르지 않아 사방이 거북이 등처럼 갈라져 만백성이 물고기처럼 입만 뻐금거린다. 애처롭다 우리 백성! 보전하기 어려운 건 목숨인데 아프면 반드시 부르기 마련이네. 분주히 달려와서 하소연하니 바퀴 자국 속의 아주 궁한 붕어 목숨, 은혜로운 파도 기대하네. 신령이 보우하사, 위로 푸른 하늘 열어 속히 큰비 내려주시어 우리 곤궁한 백성 살려주소서. 높디높지만 멀지 않으니 백성들을 보호하소서. 삼가 희생과 술 차려 놓고 정성스레 경건히 고합니다.” [碧芳之山 鐵城東岳 智異分脉 龍水並立 壓海摩天 興雲作雨 冥應不忒 靈異自古 環山有衆 被澤無涯 生於長於 積斯倉斯 今何一旱 自夏而秋 谷䕌其暵 甘霔不流 龜坼四野 魚喁萬姓 哀我斯民 難保大命 疾痛必呼 駿奔來訴 期涸鮒命 沾恩波浩 神其保佑 上啓蒼旻 速施大霈 活我窮民 高高不逈 元元可保 謹以牲酒 用伸虔告]
又
何年, “영령께서는 용맹을 떨쳐 자신을 돌보지 않고 큰 환란을 막아 내셨나니 일심으로 나라 위해 목숨 바쳐 죽을지언정 그 마음 변치 않았습니다. 왕께서는 그 충성을 가상히 여겨 책서를 내려 아경(亞卿)에 추증하였고 고을 사람들은 사당을 세워서 경건한 마음으로 제향을 올렸습니다. 뜻밖에 화재가 발생하여 불길이 치솟아 사당을 태우자 서둘러 신주를 옮겨 봉안하여 오래도록 정사(精舍)를 떠났습니다. 지금에서야 중수하여 길일을 가려 영령을 봉안하노니 신령께서는 굽어 살피시어 영원토록 이곳에 머무소서.” [惟靈 勇不謀身 能捍大患 一心殉國 之死不渝 王愍其忠 策書追秩 鄕人立祠 報事之虔 不虞濫焰 妄起延爇 蒼黃移奉 久離精廬 今乃重修 涓吉妥靈 神其降監 永奠厥居]
14) 벽방산(碧芳山) 제일봉(第一峯)에 올라. / 월봉(月峯) 구상덕(具尙德 1706~1761) 1730년.
化工新闢別區天 조물주 별천지를 처음 열어주어
占得還敎卓錫先 먼저 스님에게 점유하게 하였구나.
佛氏遙分山半面 부처가 멀리서 산 반쪽을 나눠주면
晴窓暇日學眞仙 맑은 창가 여가에 참 신선 배우리라.
6. <통영 미륵산(彌勒山)>통영시 미륵섬은 미륵하생을 위해 만들어진 섬이다. 섬은 미륵산을 가운데에 두고 차로 한 바퀴 일주하게 되어 있고 미륵산에는 용화사·관음사·미래사·도솔암이 지척에 흩뿌려져 있다. 미륵산 산봉우리에 옛날 통제영(統制營)의 봉수대 터가 있고, 산 아래 계곡에는 통영시 상수도의 제1수원지가 있으며 정상에서 한려수도일대 조망할 수 있다. 높이는 461m이다. 그 명칭은 미륵존불이 장차 강림할 곳이라고 하여 명명되었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현재는 육지와 연결된 미륵도 중앙에 있는 이 산에는 이름에 걸맞게 유명한 사찰이 여러 곳 있다.미륵산 봉수의 초기설치는 고려시대이며, 제2노선 간봉의 연변봉수로서 동쪽의 거제도 가라산 봉수에서 횃불을 받아 북쪽 도산면 우산봉수로 전달했다. 문헌에는 조선세조 13년(1467)3월 당포 미륵산의 봉군인 오중산이 해안에 왜선이 나타나자 신속히 진으로 알렸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매우 중요한 봉수...였다. 도기념물 제210호 미륵산봉수에 이어 통영 우산봉수대가 경남 도기념물로 지정으로 통영에는 봉수2대가 도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옛날 도솔선사가 미륵산의 암굴에서 수도하던 어느 날, 호랑이가 암굴 밖에 와서 입을 벌리고 앉아 눈물을 흘리므로 선사가 다가가 호랑이 입안을 열어보니 목구멍에 미녀가 가로 꽂혀 있었다. 가엽게 여겨 뽑아 주었더니 어느 날, 호랑이가 처녀를 업어와 선사에게 바쳤다. 선사는 호랑이를 꾸짖고 처녀를 고향으로 데려다주었는데 처녀의 어버지가 은혜를 갚기 위해 시주하니 그 돈으로 도솔암을 지었다고 한다.
15) 박성초 홍윤경(종주)와 함께 미륵산 꼭대기 봉수대에 올라(同朴性初洪允卿(鐘胄) 登彌勒山絶頂烽臺) / 강위(姜瑋,1820~1884) 조선 후기의 한학자, 개화사상가.
赤藤扶我上層巒 등 막대로 날 붙들어 겹겹의 산에 올라가니
兩腋天風陣陣寒 양 겨드랑이에 하늘 바람 불어 점점 추워지네.
雲山隱約強鄰近 구름 낀 산이 희미한데 강한 이웃이 가까이보이고
天海靑蒼大界寬 짙푸른 하늘과 바다, 큰 세계가 광활하다.
無數帆檣乘浩渺 수많은 돛대 배에 타는 모습 넓고도 아득하고
尋常爟火報平安 평범한 봉홧불이 편안함을 알린다.
南來始躡靈山頂 남쪽에 와서 비로소 오른 신령스런 산꼭대기,
慈氏奇緣締喜歡 자씨보살과 기이한 인연 기쁘게 맺으리라.
미륵은 자씨보살(미륵보살)을 번역한 말이다.(彌勒 譯語慈氏)
16) 미륵산을 지나는 도중에(彌勒山途中經過) / 오횡묵(吳宖默,1834~?) 고성부사(固城府使, 1893~1894년).
爲見黃茶種 누런 차나무 씨를 보기위해
故尋蘇氏居 소씨(蘇氏)가 사는 곳을 찾아갔다.
鍾聲知有寺 종소리가 절이 있음을 알리는데
竹韻更停車 대나무 소리에 수레를 멈춘다네.
谷鳥鳴相應 계곡의 새들은 서로 응하며 울고
林花笑欲舒 숲속의 꽃은 피우려고 웃는구나.
經來奇翫物 지나오다보니 경치가 기이한데
浮石已聞諸 물에 떠있는 돌 이야기 이미 들었다네.
7. <통영시 미륵도 삼천진(三千鎭)> ‘삼천진영(三千鎭營)’은 경남 사천시 삼천포에서 통영시 삼천포(당시는 고성군)로 옮겨왔던 역사적 사실로 인해, 그 시기에 따라 진영의 위치를 고려해야한다. 사천시 삼천포는 고려 성종 때 세곡을 모으는 통양창(通陽倉)이 있던 곳이다. 개성까지 뱃길로 3000리라고 해서 삼천포 지명이 생긴 것으로 전한다. 성종 19년(1488)에 성을 쌓고 권관(權管)을 두었는데 후에 고성으로 옮겼다. 고성으로 옮긴 삼천진은 현재 통영시 미륵도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광해군 11년(1619)에 사천현(泗川縣) 삼천포로부터 미륵산 아래로 옮기고 다시 삼천포라 명명했다. 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2천 50척이며, 권관(權管)이 한 사람이었다. 수군진영이 옮기면서 지역 이름까지 바뀌는 경우는 일반적인 예로써, 우리나라 수십 군데에서 그 예를 찾아 볼 수 있다. 통영 삼천진은, 진(鎭)의 둘레가 40리, 북쪽으로 통영과 20리, 서쪽으로 당...포진과 10리, 동쪽으로 한산도와 수로(水路)로 30리, 남쪽으로 오소리도(吾所里島)는 수로로 40리, 연화도는 수로로 120리, 군사(將卒)는 148명, 군량미는 57섬 14말(軍餉米 五十七石 十四斗) 등이다. 진영 아래 오목한 곳에는 선박과 선소(船所)가 있었고, 진(鎭) 입구에는 문루(門樓)가, 그 뒤편으로 여러 건물들이 있었다. 객사(客舍), 장교청(將校廳), 아사(衙舍), 사부청(射夫廳), 화약고(火藥庫), 화포청(火砲廳), 포수청(砲手廳), 군기고(軍器庫), 사령방(使令房), 이청(吏廳), 육물고(六物庫), 창(倉) 등이다.
홍성민(洪聖民) 선생은 1581년(선조14년) 봄 음력 2월 남해안 순행 길에 오른다. 웅천 안골포에서 배를 타고 가덕도, 거제 여러 진영과 관청을 거쳐, 돌아오는 길에 당포 삼천진을 거쳐 고성으로 돌아갔다. 홍성민은 시를 지을 때 표현에 치중하지 않고 논리적으로 자기의 의견을 드러내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문장은 경서를 근거로 삼고 옛 사적을 해박하게 인용하는 것이 특징이다.다음 작품들 中, 홍성민(洪聖民)과 이정립(李廷立)은 임진왜란 직전, 경남 사천시 삼천포에 삼천진이 위치하고 있을 때 방문하여 쓴 글귀이고, 오횡묵(吳宖默)은 1893년 고성부사 시절에 통영시 미륵도 삼천진을 방문하여 남긴 시구이다.
17) <삼천진(三千鎭)> 홍성민(洪聖民,1536~1594) 조선의 문신, 이조판서.
扁舟來泊三千鎭 조각배가 삼천진에 머물러 오면서
一棹能輕萬頃天 만 이랑의 하늘 가벼이 한번 휘젓노라.
擊罷空明還獨立 맑은 물결치는 바다에 다시 홀로 서 있노라면
此身初訝便登仙 이 몸이 처음으로 문득 신선된 듯하네.
[주] 격파공명(擊罷空明) : ‘공명(空明)’과 ‘유광(流光)’은 소동파의 <전적벽부(前赤壁賦)>에 “계수나무 노와 목란 상앗대로 맑은 물결을 치며 달빛 흐르는 강물을 거슬러 오르도다.[桂棹兮蘭槳 擊空明兮泝流光]” 한 데서 온 말로 '밝은 달빛이 비친 강물'을 형용한 것이다.
18) <1583년 가을, 경상우도에 말을 점고하려고 파견되어 삼천진에서 숙박하게 되었다(癸未秋 差慶尙右道點馬 因宿三千鎭)> 이정립(李廷立,1556∼1595). 조선 중기의 문신.
曾讀夔州百韻詩 일찍이 두보가 기주에서 지은 백운시를 읽었는데
三千流落最堪悲 삼천리를 유랑함이 가장 감당하기 어렵구려.
誰知今日病司馬 오늘 내가 병이 들 줄 누가 알았으랴.
還似當年舊拾遺 돌아보니 올해는 예전의 태평성대 같구나.
十月亂洲爭吐出 10월(음)의 음란한 물가는 구토를 유발하고
九潮殘水亦多時 아홉 번의 밀물에 남은 물, 또한 때마다 많도다.
羈孤一卧違床枕 외로운 나그네 한번 누운 평상에서 떨어지도록
杜曲桑麻倍夢思 뽕과 삼이 있는 두릉(杜陵)이 더욱더 생각나네.
[주1] 병사마(病司馬) : 한나라 사마상여(司馬相如)는 일대의 문장가로 일찍이 소갈병(消渴病)이 있었다 한다. 병이 든 사마(벼슬이름)로 작가 자신으로 비유한다.
[주2] 노불습유(路不拾遺) : 백성이 길에 떨어진 물건을 줍지 않는다는 뜻으로, 나라가 평화롭고 모든 백성이 매우 정직한 모양을 이르는 말. [주3] 두릉(杜陵, 杜曲) : 당(唐)나라 때 시성(詩聖) 두보(杜甫)를 가리킨다. 두보에게 붙은 칭호는 상당히 많다. '두릉의 벼슬하지 않은 자(杜陵布衣)' 혹은 '두릉의 촌로(少陵野老)'라 스스로 소개한다. 두릉은 장안(長安)의 남쪽 근교에 있는 두릉 땅에 두보의 선조가 살았기 때문이다. 두보가 벼슬길을 그만두고 낙향하면서 뽕과 삼이 있는 밭을 일구는 고향에서의 살겠다고 했다.
19) <당포삼천(唐浦三千)> 오횡묵(吳宖默,1834~?) 1886년 영남향별사, 고성부사(固城府使, 1893~1894).
唐津西去又三千 당포 나루 서쪽으로 다시 삼천이 있는데
野曠天晴二百年 넓은 들판에 하늘 맑은지 이백년,
一自洗兵烽火晏 이후로 병기를 씻고 봉화는 편안하니
空餘戍卒枕戈眼 헛되이 남은 군졸 창을 베고 누웠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