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9권 속오군(束伍保)과 보갑(保甲)을 논의함
【문】: 속오군은 어떻게 처리하여야 되겠는가.
【답】: 진관(鎭官)의 제도를 잘 정비하고 속오군은 수령(守令)에게 소속시켜 보갑(保甲) 제도를 병행한다면 부정을
없애고 외적을 막는 데 아울러 실효를 거둘 것이다.
【문】: 그 제도를 듣고 싶다.
【답】: 의당 호구법(戶口法) 중의 편향(編鄕)ㆍ편리(編里)의 법을 가지고 보갑의 제도까지 행하여야 할 것이다.
10가(家)를 갑으로 묶어 그 장(長)을 세우고 10갑을 보로 묶어 그 정(正)을 세우되 보정(保正) 이상은 속오군의 장관(將官)이 거느리게 해야 된다. 그리고 그 군사는 마땅히 오늘날의 잡색군(雜色軍)과 본래의 속오군 가운데서 잘 훈련되고 건장한 사람을 뽑아 보충하되, 역시 본인으로 하여금 자손이나 제질(弟姪) 가운데 여정(餘丁) 한 명씩을 선정하게 하면 될 것이다.
속오군의 장관은 본래 군사 가운데 오래 근무하고 공로가 있으며 훈련 성적이 으뜸가는 자를 서열에 따라 승급시키는 것이지만 각 고을에 순포 정교위(巡捕正校尉)ㆍ순포 부교위(巡捕副校尉)의 자리 몇 개씩을 설치하여 장관(將官)으로 겸직하게 하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밑에 또 순포 소교(巡捕小校) 몇 명을 두고 순포 소교 밑에는 순포 군사 몇 명씩을 두되, 군사는 속오군의 모집으로 충당하면 될 것이다.
장관의 성적 점검은 수신(帥臣 병사(兵使)ㆍ수사(水使))과 어사(御史)가 한자리에 모여 심사하되, 훈련을 할 적에 대오가
분명하고 좌작 진퇴(坐作進退)가 익숙한 휘하 군사의 활쏘는 솜씨를 상ㆍ중ㆍ하로 점수를 매겨 심사의 기준을 정하고 또
순포(巡捕)의 상벌 제도를 마련하여 진범(眞犯)인 도둑 몇 명을 잡았는가에 따라 점수를 매겨 심사의 기준을 정하되, 군무(軍務)는 잘 처리했어도 본읍에서 잡지 못한 도둑이 있으면 고과(考課)를 전(殿 하등(下等))으로 매기고 도둑을 잘 잡았더라도 군무를 잘 처리하지 못하였으면 또 고과를 전으로 매겨서 반드시 두 가지가 다 그 기준에 이른 뒤에 도내(道內)의 장관
(將官)이 성적을 고사(考査)하고 종합하여 그 점수의 순위로 승강(陞降)하는 기준을 삼으면 될 것이다.
장관은 성적의 순위에 따라 경영(京營)의 집사(執事), 이를테면 기고관(旗鼓官) 따위의 소교(小校)는 공적의 순위로 본읍의 순포 부교위에 올려주고 군사는 공적의 순위대로 소교에 올려주되 두 갈래로 나누어서 하나는 활 쏘는 솜씨로, 하나는 포획한 도둑의 수로 기준을 삼아 함께 등용하면 될 것이다.
【문】: 그 사이에는 반드시 성적을 속이고 채점을 불공정히 하는 폐단이 있을 것이다.
【답】: 그것을 방지할 제도를 아울러 마련하고 또 훈련을 시험하고 도둑을 잡은 영문과 아문에 문책(文冊)을 두어서 시행하되, 서울의 경우 병조(兵曹)와 포도청(捕盜廳)에 상공벌죄사(賞功罰罪司)를 두어 점검 심사하고 비위(非違)를 다스리는 것은 겸장(兼掌)하는 대관(臺官)이 문서에 의하여 규명한다면, 어찌 속이는 폐단이 있겠는가.
보갑(保甲)의 제도도 마땅히 보갑의 격식을 만들어 각 보갑에 펴 주고 농한기마다 해당 보정(保正)ㆍ갑수(甲首)로 하여금
우선 한데 모여서 훈련을 하게 하되 한 위공(韓魏公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진 송 나라 한기(韓琦)를 말함)이 이른바 의용
(義勇)스런 하삭(河朔) 사람처럼, 혼자서 스스로 무예를 익힌 자를 오늘날 민간과 짝을 지어 활쏘기를 익히게 한다면 형편
대로 잘 인도되어 기예(技藝)가 저절로 정예될 것이고 훈련의 상격(賞格)은 역시 활 등의 병기를 쓰는 솜씨를 참작하여 장려하면 될 것이다.
보오(保伍)를 상사(相司)하는 방도에 있어서는, 이전에 도둑으로 잡혀 사실을 진술하고 범죄를 승복하였으나 판결을 받을 적에 정상 참작으로 풀려난 자를 처벌한 아문 및 본현에서 별도로 장부를 만들어 그 이름을 기재하고 이를 경적인(警跡人)
이라 하여, 본리ㆍ본촌의 도덕 유무를 기찰(譏察)케 한다. 만약 본리에서 도둑맞은 일이 있으면 이들 경적인으로 하여금
잡아들이게 하는데, 5일마다 매를 때려 재촉하되 한 달이 지나면 잡아들이는 기한을 조금 늦추어 주도록 한다.
경적인이 도둑질한 사람의 진술에 드러나는 일이 세 차례나 되고 이를 승인하여 이의가 없다면 우마(牛馬)의 도를 논할 것 없이 모두 변방 수자리로 옮겨 보낸다. 그리고 이 밖에 일정한 직업이 없이 게으르게 놀기만 하고 밤에 나가 새벽에 들어오거나 행적이 수상하고 안면이 없는 의심스러운 사람이 있으면 곧장 엄밀히 심문을 하여 지체없이 집에서는 보(保)로, 보에서는 갑(甲)으로, 갑에서는 정(正)으로, 정에서는 순포(巡捕)로, 순포에서는 관서로 보고하여 정상(情狀)을 추궁하여 율에 따라 처단하되 행여 숨긴 일이 발각되거든 일체 연좌를 시킨다면 간악한 도둑들이 뿔뿔이 흩어져 용납할 곳이 없게 될 것이다.
이것이 실로 관자(管子) 오가우병(五家寓兵)의 본뜻이다.
【문】: 수군(水軍)은 어떻게 처리하겠는가.
【답】: 이제 서북 지방을 제외하면 수군이 불과 1만 5천뿐이다. 이것도 역시 오위군(五衛軍)의 제도에 의거하여 연해(沿海)의 군호(軍戶)로 수군에 입대시켜 번을 서서 항구에 방수(防戍)하러 갈 때 소속 관아에서 전량(錢糧)을 지급하면 될 것이다.
[주D-001]오가우병(五家寓兵) : 《관자(管子)》 소광(小匡)에 “오가(五家)를 제(制)하여 궤(軌)로 삼되, 궤에는 장(長)을
둔다.” 하였다. 오가는 오가지병(五家之兵)을 말한다.
제9권 기군(騎軍)과 마정(馬政)을 논의함
【문】: 군사들이 탈 말은 어떻게 조달하여 주는가.
【답】: 모든 상품을 포백(布帛)으로 대체하고 말은 오로지 군사에게만 주면 될 것이다.
마정(馬政)이 닦아지지 않아서 목자(牧子)들이 날로 망아지를 잡아먹고 있으니 오늘날 만약 마정을 엄격히
펴서 일체 율문에 의하여 암말 1백 필로 새끼말 1백 필을 낳는 제도를 쓴다면 씨말이 번식되지 않는 걱정은
없을 것이다.
【문】: 모든 상품을 포백으로 한다면 그 물량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는가.
【답】: 우리나라의 시상(施賞) 규정은 본래부터 절제가 없어서 은사(恩賜)의 물품이 극도로 고갈되었으니, 어떻게 정치를 할 수 있겠는가. 잘못된 규정을 모두 삭제하고 백에 한둘만 두어 격례(格例)를 정하여 더 이상 가감(加減)을 못하게 한다면, 계속하지 못할 염려가 어디 있겠는가. 아, 상벌의 법이 없이 어떻게 나라가 될 수 있겠는가.
우리나라 마첩(馬帖 말을 상품으로 준다는 문권)의 상은 유명무실하여 마첩을 주고 안 주는 것이 오로지 사복시 첨정(司僕
寺僉正)에 달려 있으므로 사람들이 상전의 은혜는 감사할 줄 모르고 한갓 사복시 첨정의 사사로운 혜택만 느끼니 극히 개탄스러운 일이다. 더군다나 마정은 국가의 중대한 일인데 해마다 씨말이 오로지 대수롭지 않은 상급으로 돌아가고 있으니,
마정의 무실함이 이와 같다면 군정의 해이와 국위의 손상이 무어 괴이쩍겠는가. 반드시 이러한 폐단을 개혁한 뒤에야 나라를 지키고 외적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문】: 병기는 어떻게 마련한다는 말인가.
【답】: 이것은 해마다 줄 수 있는 물건이 아니므로 몇 해의 기한을 정하여 두고 그 기한의 해가 될 적마다 병기를 수리할
돈 몇만 관을 각도에 나누어 주어서 정비를 시킨다면 별비(別備) 등의 잘못된 규정은 일체 제거하여도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군사가 대개 갑옷이 없으니, 한신(韓信)ㆍ백기(白起) 같은 장수와 차비(佽飛 춘추 시대 검사(劍士))
같은 검객(劍客)이 있다 한들 어찌 사력(死力)을 다할 수 있겠는가.
중국에는 기르는 소[牛]가 아주 흔하지만, 모든 말다래[障泥]ㆍ상롱(箱籠)ㆍ이혜(履鞋)붙이들은 중국의 법령에 의한다면 다만 고라니와 노루 같은 들짐승의 가죽이나 면백(綿帛) 같은 물건으로 만들고 삼베로 신바닥을 붙이게 하며 갑옷을 만드는 두꺼운 가죽을 쓰지 못하게 하고, 가죽 투구 및 엄심갑(掩心甲)ㆍ수마단피갑(水磨短皮甲)을 잘 만들어 전사(戰士)의 머리ㆍ얼굴ㆍ등ㆍ배ㆍ가슴 등의 요해처를 보호하여 준다면, 병기와 갑옷이 훌륭하므로 군사의 사기가 진작되어 변방을 지키고
나라를 보호하는 데 저절로 아무 염려가 없을 것이다.
제9권 외관(外官)을 영접하고 송별하는 비용을 논의함
【문】: 곤궁한 백성이 견디기 어려운 폐단으로는 외관을 맞고 보내는 것 같은 것이 없으나 구제할 대책이 없다.
【답】: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마필(馬匹)을 정급(定給)하게 되어 있는데 이것은 전고에 없었던 규정이다.
때문에 그 폐단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일체 주지 말아야 된다.
【문】: 그렇다면 외관이 어떻게 왕래하겠는가.
【답】: 고을마다 관원이 탈 말을 한두 필씩 마련하여 두고 부임할 적에 한 명의 아전과 한두 명의 구종(驅從)으로 기한
을 정하여 맞아오게 하되 규정 외에 더 요구하는 사람은 법령을 어긴 율로 논죄하는 것이 옳겠다.
【문】: 그러면 가족은 어떻게 데리고 간다는 말인가.
【답】: 녹봉이 작정되었다면 어찌 한두 달의 녹봉으로 데려가지 못하겠는가.
【문】: 그렇다면 저절로 말이 몰리게 된다. 말이 서울에 몰리는 폐단은 어떻게 막겠는가.
【답】: 상업이 제대로 이루어진다면 길가에 거마를 세놓는 무리가 저절로 있게 될 것이니,
이들에게 삯을 주어서 돌려보낸다면 서울에 몰리는 폐단은 자연 없어질 것이다.
【문】: 그렇다면 아전ㆍ노비ㆍ인부 따위를 별도로 세워서는 안 되는가.
【답】: 다만 월봉(月俸)만 주고 쇄마(刷馬)의 값이 없으니 자연 인부를 고용할 형편이 못 될 것이다. 따라서 구종에 있어서는 한두 명만 정하여 호솔(護率)해 오게 하면 될 것이다. 어찌 한정없이 많은 사람을 임의로 징발케 할 것이 있겠는가.
이러한 일에는 모두 법제가 없는데, 만약 법제를 정하고 정원을 두어서 이를 위반하는 사람은 처벌한 뒤에 다시 복직하지
못하게 한다면 폐단이 근절되어 거듭 위반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문】: 중국은 관원을 맞고 보낼 적에 인부와 말을 주지 않는가.
【답】: 그렇다. 예나 지금이나 이러한 규정은 전혀 없다.
관원은 다만 문빙(文憑)만 받아가지고 부임하면 관리와 유생 및 노인과 백성들이 성 밖에 나와 맞이할 뿐이다.
【문】: 무슨 증거라도 있는가.
【답】: 예부터 이러하였는데 증거는 대서 무엇하겠는가. 그리고 송(宋) 나라의 한억(韓億)과 이약곡(李若谷)으로 말하더라도 급제를 하기 전에 모두 가난하여 함께 서울에 나와 과거를 보고 돌아가서는 종 노릇을 하곤 하였다.
이약곡이 먼저 급제하여 장사현 주부(長社縣主簿)가 되었는데 임지로 떠날 적에 자신은 아내의 나귀를 몰고 한억은 상자
하나를 지고 나섰다. 임지를 30리 앞두고 이약곡이 한억에게 ‘본 고을의 아전들이 나올 것 같은데, 상자 속에는 돈이 6백 전(錢)뿐이네.’ 하고 그 반을 나누어 주며 서로 부둥켜안고 울다가 헤어졌는데, 뒤에 한억도 급제하여 두 사람이 다 벼슬이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올랐다고 한다. 이로 본다면 어찌 이른바 새 관원을 맞이하는 인부와 말이 별도로 있었겠는가.
【문】: 이는 아마 작은 고을의 주부여서 그랬을 것이며 또 작은 고을일지라도 현령(縣令)이었다면 아마 인부와 말이 있었
을 것이다.
【답】: 주부와 현령은 한 고을의 정관(正官)ㆍ좌관(佐官)인데 어찌 현령에게만 후대할 이치가 있겠는가.
【문】: 아마도 장사현이 작은 고을이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답】: 아무리 작은 고을이라 하여도 우리나라의 금천(衿川)이나 과천(果川)에야 미치지 못했겠는가.
【문】: 폐단을 더는 것은 좋다. 하지만 쌍가마를 타고 구종의 호위를 받는 것은 풍속을 이룬 지가 오래다.
더군다나 남녀와 내외의 구분이 매우 엄격하므로, 그 의절을 일체 삭감한다면 인정이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답】: 당(唐) 나라의 두황상(杜黃裳)은 승상부(丞相府)에 있었지만 부인이 죽도자(竹兜子)를 탔다. 어찌 반드시 쌍가마를 타고 구종들이 줄을 서야만 혐의를 멀리하는 도리가 되겠는가. 우리나라가 중고 이전에는 재상의 부인이라도 말을 타고
너울[羃羅]을 썼으나 오늘날은 풍속의 사치함이 날로 더하고 달로 심하여 인부와 말을 요구하는 것이 한도가 없다.
하나의 쌍가마 행차에 좌우의 구종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으며 심하게는 많은 인부를 징발하여 1천 리를 가마 타고 가는
자도 있다. 대저 쌍가마란 임금이 타는 것이지만, 어깨에 둘러메는 쌍가마는 임금도 타지 않는 것이니, 그 참람함이 어떠하겠는가. 과거에는 감사(監司)도 독교(獨轎)를 탔으나 오늘날은 시정(市井)의 미천한 계집들도 그의 가장이 현감(縣監)이라 하여 쌍가마를 타니 그 참람됨이 또 어떠하겠는가.
벼슬자리를 만들어서 수령(守令)을 둔 것은 백성을 위하는 것인데 백성을 돌보아줄 실상은 백에 하나도 없고 한갓 죄 없는 백성으로 하여금 도리어 침해를 입어 가산을 탕진케 하니, 수령을 실어오는 허다한 비복(婢僕)들이 어찌 원통하지 않겠는가. 이제 쌍가마를 금지하고 구종을 줄인다 하더라도 인부와 말을 징발할 때는 반드시 그 수를 늘려서 끝내 법대로 이행할 이치가 없을 것이다. 만약 쇄마가(刷馬價)를 주지 않는다면 비록 많이 거느리고 싶어도 거느릴 수 없을 것이고 또 아전과 종들의 정원(定員)을 줄여 정한다면 많이 대동하고 싶어도 대동할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한 뒤에야 폐단의 뿌리를 뽑을 수 있을 것이니 이러한 일들은 마땅히 칙례(則例)를 논정하여 책을 펴내서 이행할 자료로 삼는 것이 좋겠다.
제9권 참포(站鋪)의 전달에 대해서 논의함
【문】: 외방의 민폐로 공문의 전달보다 더한 것이 없다. 별봉(別俸)의 전미(錢米)로 관서를 설치하고 사람을 고용하여 전달하므로 간휼한 아전들이 간계를 부려서 훔쳐내고 긁어들이는 것이 더욱 심하고, 지방이 넓은데 토호(土豪)들이 모두 요역을 피하므로 소민(小民)들만 담당을 하게 되고 고을이 작고 백성이 적으므로 집 수대로 뽑아내어 줄을 서게 된다.
장차 어떻게 바로잡는다는 말인가.
【답】: 외방의 공문 전달은 그 도(道)의 상부 관아 및 이웃 고을 간의 공무로 왕복하는 데 지나지 않는데, 서울의 상사(上司)에까지 왕복하는 것은 체통을 따르지 않는 데서 나온 것이다. 과연 서울 상사에 직접 관문(關文)을 보내는 폐단을 없애고 주현(州縣)의 공무를 모두 관찰사(觀察使) 아문을 거쳐 서울 관서에 전달하게 한다면, 외읍(外邑)에서 서울로 왕복시킬 공무가 저절로 없어질 뿐 아니라, 경저리(京邸吏)가 돈을 뜯어내는 폐단도 저절로 일소될 것이고 아울러 경저리의 역가(役價)도 덜 나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본도 아문 및 이웃 고을 간의 공문 왕복은 마땅히 포병(鋪兵)을 두어 전달해야 될 것이다.
【문】: 그 제도란 어떻게 하는 것인가.
【답】: 각 고을은 관할 경계의 동서남북 사면관(四面官)으로 가는 길에다가 그 지역의 번화 여부를 감안하여 참포를 설치하되, 만약 서쪽 길의 파발 막[撥幕]이 20리나 15리라면 그 거리를 감안하여 몇 명의 포병(鋪兵)을 두고 매 포병에게 월급으로 전문(錢文) 몇 관씩을 주되 윤달까지 합계하여 주는 격례를 만들며, 모든 참포에 포장(鋪長)을 두어 공문 전달을 주관케 하면 될 것이다. 또 공문으로 말한다면 월말 또는 기말에 보고하는 평범한 문서는 군현(郡縣)이 함께 부근의 도호부(都護府)나 목(牧)에 울려서 부와 목이 이를 총괄하여 관찰사 아문에 올리게 하고 오직 긴요한 공문만 ‘비보관방(飛報關防)’의 도장을 찍어 상부 관서에 직접 전달케 하면 될 것이다.
【문】: 그 비용은 어디에서 조달하는가.
【답】: 이것은 바로 차출(差出)하던 역(役)이었으므로, 매년 정전(丁錢)을 징수할 때에 원액(元額)에다 몇 전을 덧붙여 차출하던 실정(實丁)에게서 징수하여 포졸(鋪卒)에게 나누어 주면 될 것이다.
【문】: 관리들이 중간에서 사리(私利)를 취하는 폐단은 없겠는가.
【답】: 정(丁)에는 징수할 정액이 있고 포(鋪)에는 설치한 정원이 있다. 어떻게 중간에서 사리를 취할 수 있겠는가.
이를테면 각 고을에서 차역전서(差役全書)를 만들어 지급한 전량(錢糧)을 열기하여 둔다면, 본읍의 참포 가운데 아무 참포는 포졸이 몇 명으로, 월 지출이 몇 관이며 세계(歲計)가 얼마라는 것이 하나하나 기록될 것이다.
그리고 이를 한 부는 호조(戶曹)에, 또 한 부는 감영(監營)에, 다른 한 부는 본현(本縣)에 둔다면 모든 참포의 공비(公費)
수효를 털끝만큼도 속일 수가 없어서 가감(加減)할 수 없을 것이다.
참포뿐만이 아니라 모든 공용을 다 이와 같이 한 뒤에야 경비가 조절되고 민역(民役)이 균형을 이루어 바야흐로 구차스러운 정책과 속이는 폐단이 없어질 것이고, 전량이 허비되는 폐단도 크게 줄어들 수 있을 것이다.
제10권 훈예(勳裔)에 대하여 논의함
【문】: 우리나라에서는 옛날부터 훈귀(勳貴 공훈을 세운 귀족)와 척완(戚畹 임금의 외척)들이 당대의 조정 권력을 독단
하여 왔는데, 그 까닭은 무엇인가.
【답】: 척완에 대해서는 이미 의논한 바 있으므로 다시 번거롭게 말할 필요가 없겠다. 그런데 훈귀가 권력을 잡은 데에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으니, 대저 천명(天命)을 받아 무한한 국운(國運)을 열었다고는 해도 인익(鱗翼 용 비늘과 봉황 날개로 임금을 뜻함)을 의지하여 개국(開國)의 공업을 이룩함에 있어서는 정도전(鄭道傳)ㆍ조준(趙浚)ㆍ남은(南誾) 등의 공이 참으로 적지 않았다.
이 때문에 건국 초기에 공신들을 대우하는 도리가 매우 특별하여, 이들에게 장수(將帥)나 정승(政丞)을 제수하여 국사를
맡겼던 것이니, 이는 진실로 역대 왕조가 다 그랬던 것이어서 이상할 것이 없다.
다만 유감스러운 것은 그 사이의 처치(處置)에 있어 너무 지나친 것들이 많아서 그 폐단이 오늘날에 이르러 더욱 심하고
있는 것이니 참으로 한탄스러운 일이다.
우리나라는 후복(侯服)의 나라여서 하늘에게 제고(祭告)할 수 없는 처지인데, 대려(帶厲)를 거듭 맹세하는 일이 사체(事體)가 중하다고는 해도 어찌 이 때문에 하늘에게 고유해서야 되겠는가. 그런데도 옛 관습을 좇아 이를 준례로 삼고서 그것이
잘못된 것인 줄을 모르고 있으니, 이것이 너무나 지나친 것의 하나이다.
봉호(封號)를 내리고 분모(分茅)를 하는 데는 그 등급이 극히 엄한 것이다.
예를 들어 옛날 공(公)ㆍ후(侯)ㆍ백(伯)의 3등급을 보더라도 각 등급에는 다시 3등급이 있었다.
현재 중국에서 이른바 1등공ㆍ2등공ㆍ3등공이라고 하는 것만을 보아도 그 등급이 칼로 자른 듯이 분명하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아서 원훈공신(元勳功臣)일지라도 직위가 낮으면 군(君)이라고만 칭하고, 삼등공신(三等功臣)일지라도 품계가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이면 부원군(府院君)이라 칭하고 있다. 이는 공훈의 차등을 정하는 제도에서부터 이미 9등급으로 봉작(封爵)하던 옛날 법을 상실한 것이니, 이것이 두 번째 잘못이다.
비록 녹훈(錄勳)된 공신이라 하더라도 마땅히 세습(世襲)과 유작(流爵 음직(蔭職))의 분별이 있어야 하는데 이를 전혀 모르고서 일률적으로 음직(蔭職)을 물려주고 있으니, 이것이 세 번째 잘못이다.
훈작(勳爵 공훈으로 내린 관작)이 한번 지나치게 내려지면 그 폐단이 끝이 없기 때문에 송(宋) 나라에서는 당(唐) 나라 말엽의 폐단을 징계(懲戒)삼아 비록 적청(狄靑)이 곤륜(崑崙)에서 거둔 대첩(大捷)과 문언박(文彦博)이 패주(貝州)에서 세운 공에 대해서도 봉배(封拜 작호(爵號)를 봉하고 관직(官職)을 제수함)하는 은전(恩典)을 베풀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봉작(封爵)하는 은전이 너무나 지나치니 호성훈(扈聖勳)의 경우를 보아도 내관(內官)ㆍ의관(醫官)ㆍ역관(譯官)에서부터 액례(掖隷 액정서(掖庭署)에 소속된 하리(下吏))나 말을 끄는 무리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정훈(正勳 정공신(正功臣))에 끼어 있다. 이는 공령(功令)의 제도가 엄밀하지 못하고 법제가 소홀한 데서 비롯된 것이 아닌 것이 없으니, 이것이 네 번째 잘못이다.
원종공신(原從功臣)이라는 일건(一件)은 더더욱 옛날부터 없었던 법규이다.
공신(功臣)이란 두 글자가 얼마나 소중한 것이고, 영원한 세대까지 죄를 용서하여 주는 은전(恩典)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 그런데 한번 훈적(勳籍)이 작성되면 원종공신들이 적어도 수천 명은 되어서 사령(使令)이나 공장(工匠)들까지도
모두 공신으로 부르고 그들의 수많은 자손들도 모두 의공(議功)을 얻게 되니, 참람하고 해괴하기가 이보다 더한 것이 없다. 이것이 다섯 번째 잘못이다.
훈예(勳裔 훈공대신의 후예)가 음직(蔭職)을 받는 것을 보더라도, 정훈(正勳)의 수많은 자손들이 모두 음직을 받되 구전(口傳)으로 되기를 도모하여 한낱 납세(納稅)를 도피하는 백성이 되고 있다.
적장자손(嫡長子孫)이 음직을 받는 것은 사리(事理)에 참으로 당연한 일이지만, 이들 수많은 자손들이 모두 음직을 받는 것은 과연 무슨 의의인가.
또한 적장자손으로 말하더라도 대대로 약간의 직품을 주어 녹봉(祿俸)을 상실하지 않도록 하면 되겠다.
그리고 혹 문관(文官)이나 무관(武官)의 정직(正職)으로서 벼슬이 아경(亞卿 육조(六曹)의 참판(參判) 등을 말함)에 이르게 되면 그로 말미암아 그 선조에게 군호(君號)를 내려주는 것도 괜찮다고 하겠다.
그러나 어찌 도적(盜賊)을 체포하여 가선대부(嘉善大夫)에 가자(加資)된 사람을 버젓이 군(君)에 봉하여 함부로 명기(名器 작위(爵位)와 거복(車服)을 말함)를 더럽힐 수야 있겠는가.
지금 동지사(同知事)를 재상(宰相)의 반열로 일컬으면서도 멍청하게 동지사를 음직으로 승습(承襲)하고 있다.
그러니 백도(白徒 과거(科擧)를 거치지 않고 벼슬아치가 된 사람)로 동지사가 된 사람이 어찌 실직(實職)을 역임 하였다고 할 수 있어서 봉군(封君)의 칭호를 외람되게 받을 수 있겠는가. 이것이 여섯 번째 잘못이다.
이제 이들 모두를 바로잡고 옛날 제도를 준행해서 훈예도 적장자손을 제외하고는 모두에게 정전(丁錢)을 징수하는 것이
마땅하다.
【문】: 임금의 종친(宗親)으로서 친진(親盡)한 사람도 도총부(都摠府) 소속의 해당 위(衛)에 예속되어 있는데, 이제 만약
훈예로써 충의위(忠義衛)에 예속된 사람들과 함께 모두 정전을 징수한다면, 어찌 원망하고 비방하지 않겠는가.
【답】: 정전을 징수하는 것이 어찌 임금의 종친으로서 친진한 사람들뿐이겠는가. 이른바 족친위(族親衛)나 충순위(忠順衛)에 소속된 사람들은 모두 부마(駙馬)의 내외(內外) 후손 및 사대부의 후손들이다. 친진한 후에는 바로 외인(外人)이 되는데, 어떻게 대대로 음직을 이어받아 끝나는 날이 없을 수 있는가. 전(傳 여기서는 《중용(中庸)》을 말함)에 ‘친족들을 친애함이 감쇄(減殺)되는 데서 예절이 생긴다.’ 하였다.
임금의 종친 후손으로도 친진한 사람은 음직을 받을 수가 없는데, 더구나 부마의 내외 증손(曾孫)들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으며, 사대부의 자손들이야 더더욱 영원토록 음직을 이어받을 의리가 어디 있는가. 이미 그같은 의리가 없는 이상, 정전을 마련하여 바치지 않을 수 없는 것인데,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원망하고 비방할 이치가 있겠는가.
그리고, 국가에 공훈이 있는 귀족들이 조정의 의논을 독단적으로 장악한 폐단은 건국 초기에 처음 이루어졌고, 권남(權擥)ㆍ홍윤성(洪允成) 등에게서 다시 가중되었으며, 정국 삼장(靖國三將)에게서 세 번째로 가중되었고, 계해 제훈(癸亥諸勳)에게서 네 번째로 가중되어 왔다. 이런 것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쌓여오는 동안에 이를 보고 들어도 심상하게 여기게 되어, 한번 바로잡으려는 사람이 있으면 그때마다 죄화(罪禍)를 당하고 말았으니, 기묘사화(己卯士禍) 등이 모두 이런 데서 기인된 것이다. 대개 당(唐) 나라와 송(宋) 나라 이래로는 훈신(勳臣)들이 부귀는 누렸을지언정, 조정 권력에 대해서는 독단적으로
장악한 사람이 드물었다. 이는 조정의 정치 규모가 엄밀하고 관직을 지키는 것도 일정한 규칙이 있을뿐더러 방범(防範)하는 것도 주밀하였기 때문에 국가에 공훈이 있는 귀족이나 척완(戚畹)들이 점차 조정의 의논에 간섭하거나 권력을 장악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선비들은 애당초 이러한 도리를 몰라서 한번도 실정(實政)을 가지고 임금에게 권하여 정책을 수립하고 폐단을 제거하는 근본을 삼아보지 못하였다. 다만 구구하게 너저분한 말로 국가에 공훈이 있는 귀족들의 과실이나 낱낱이 들추어내는 것을 스스로 깨끗하고 옳은 사론(士論)으로 삼았으니, 그것이 어떻게 한창 성한 권세가의 기세를 대적할 수 있겠는가. 참으로 관제(官制)를 수명(修明)하고 실정(實政)을 역행(力行)한다면, 이 따위 오랜 폐단이 저절로 없어지지 않을까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주D-001]대려(帶厲) : 대려지서(帶厲之誓)의 준말. 황하(黃河)가 띠처럼 되고 태산(泰山)이 숫돌처럼 되도록 공신(功臣)의 집안은 영원히 작록(爵祿)을 보장하겠다는 맹세를 말한다. 《史記 高祖功臣年表》
[주D-002]분모(分茅) : 본시 모토(茅土)를 나누어 주어 제후(諸侯)로 봉하는 뜻인데, 여기서는 공신에게 사패지지(賜牌之地)를 내려 주는 것을 뜻한다.
[주D-003]적청(狄靑)이 …… 대첩(大捷) : 송 인종(宋仁宗) 때 광원주(廣原州) 야만족 농지고(儂智高)가 반란을 일으키자, 적청이 표(表)를 올려 토벌하러 가겠다고 자청하니, 인종이 그를 선휘남원사(宣徽南院使)로 임명하여 형주(荊州)ㆍ호주
(湖州) 등지를 선무(宣撫)하도록 하였다. 적청은 군기(軍騎)를 정돈하여 하룻밤 사이에 곤륜관(崑崙關)을 차단하고 그 이튿날 새벽녘에 군사를 이끌고 입성(入城)하였다. 《宋史 卷290 狄靑傳》
[주D-004]문언박(文彦博)이 …… 세운 공 : 송 인종(宋仁宗) 때 패주에서 왕칙(王則)이 반란을 일으키자, 문언박이 토벌하러 가겠다고 자청하니, 인종이 그를 선무사(宣撫使)로 임명하였다. 그는 10여 일 만에 반란을 진압하고 왕칙을 함거(檻車)에
수감하여 경사(京師)로 압송하였다. 《宋史 卷313 文彦博傳》
[주D-005]호성훈(扈聖勳) : 조선(朝鮮) 임진왜란 때 선조(宣祖)를 호종(扈從)하여 의주(義州)까지 간 신하들에게 내린
공훈 칭호로서, 호성공신(扈聖功臣)이라고도 한다.
[주D-006]원종공신(原從功臣) : 조선(朝鮮) 시대에 정공신(正功臣)의 자제 및 사위 또는 그 수종자(隨從者)에게 준 공신
칭호이다.
[주D-007]의공(議功) : 나라에 큰 공훈이 있는 사람이나 그 자손으로서 처벌을 받게 될 때에, 그 형량(刑量)을 가볍게
의정(議定)하는 것을 말한다.
[주D-008]구전(口傳) : 이조 판서(吏曹判書) 또는 병조 판서(兵曹判書)가 삼망(三望)을 올려서 임금의 낙점(落點)을 받아
관원(官員)에 임용되지 않고, 임금의 구두 명령(口頭命令)으로 직접 관원(官員)에 임용되는 것을 말한다.
[주D-009]도총부(都摠府) : 조선 시대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의 약칭으로, 의흥위(義興衛)ㆍ용양위(龍驤衛)ㆍ호분위
(虎賁衛)ㆍ충좌위(忠佐衛)ㆍ충무위(忠武衛) 등 오위의 군무(軍務)를 관장한 정2품 관아이다.
[주D-010]충의위(忠義衛) : 조선 시대 오위(五衛)의 하나인 충좌위(忠佐衛)에 소속된 부대의 하나.
공신들의 적실(嫡室) 자손과 첩(妾)의 자손으로서 승중(承重)한 사람들로 조직하였다.
[주D-011]족친위(族親衛) : 조선 전기 오위(五衛) 중 하나인 호분위(虎賁衛)에 속한 부대의 하나로, 왕실과 혈연관계가
있는 사람으로 구성되었다.
[주D-012]충순위(忠順衛) : 조선 시대 오위(五衛)의 하나인 충무위(忠武衛)에 소속된 부대의 하나. 임금의 이성(異性)
시마(緦麻)와 외육촌(外六寸) 이상의 친족, 왕비ㆍ선왕ㆍ선후의 시마와 외오촌(外五寸) 이상의 친족, 동반(東班) 6품 이상 및 서반(西班) 4품 이상으로 실직(實職)을 지낸 사람, 문무과(文武科) 출신, 생원(生員)ㆍ진사(進士)ㆍ유음 자제(有蔭子弟) 등으로 편성하였다.
[주D-013]정국 삼장(靖國三將) : 조선 시대 중종 반정(中宗反正)에 가장 큰 공을 세운 박원종(朴元宗)ㆍ성희안(成希顔)
유순정(柳順汀) 등을 말한다. 이 3인을 병춘분의결책익운정국공신(秉忠奮義決策翊運靖國功臣)으로 봉하였다.
[주D-014]계해 제훈(癸亥諸勳) : 계해년에 일어난 인조 반정(仁祖反正)에서 광해군(光海君)을 몰아내고 인조를 옹립한
이귀(李貴)ㆍ김자점(金自點)ㆍ김류(金瑬) 등 여러 공신들을 말한다.
제10권 진상(進上)하는 물품들에 대하여 논의함
【문】: 대동법(大同法)을 설시한 것은 바로 공안(貢案)의 폐단을 없애고자 한 것이다.
당초에 이 사무를 맡은 사람들은 대동법을 시행하면 오랜 폐단을 모조리 제거하여 털끝만큼도 공물 종류를 백성들에게 다시는 징수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대동법을 비록 설시하기는 하였어도 임금에게 진상하는 물종들을 오히려 백성에게서 많이 징수하고 있으니, 이 일은 어찌된 것인가.
【답】: 임금에게 진상하는 물품은 사체(事體)가 지극히 중하다. 그 지방의 토산물을 바치는 것 또한 없을 수 없으니, 비록
대동법을 시행하였더라도 어찌 진상하는 법이 없을 수 있겠는가. 다만 그 가운데는 역시 긴요하지 않은 물종이 많이 있는 셈이다. 임금의 복어(服御 의복과 거마(車馬))ㆍ선수(膳羞 수라(水刺) 반찬(飯饌))의 범절과 신하들에게 내리는 데 쓰일 물품 등에 매우 필요한 것이 아닌데도, 대동법을 창설할 당시에 이런 것들을 진언하여 감축시키지 못한 탓으로 지금까지도 백성의 폐단이 되고 있으니, 이는 참으로 당시에 사무를 맡은 사람들의 잘못이다. 이제라도 모든 도(道)에 대동법을 다 시행하고, 진상하는 물종도 구별하여 감축시켜서 백성들이 입고 있는 폐해를 제거하는 것이 옳겠다.
우리나라 지방에는 불편하게도 점포[廛肆] 따위가 없어서 진상물을 무역(貿易)하는 것이 더욱 백성들의 폐해가 되고 있다. 이제 마땅히 물건마다 정가(定價)를 매겨주되 공물 값처럼 넉넉하게 값을 정한 뒤, 각 읍(邑)에 명하여 점포를 튼튼하게 만들어 영구히 값을 받고 공물을 바치게 하는데 서울의 공인(貢人)들이 하는 것과 똑같이 한다면, 진상하는 물품에 빠지는 것이 없고 국가나 개인적으로도 모두 편리하여 시골의 잔약한 백성들이 되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 당(唐) 나라 때 토산 공물을
이처럼 바쳤을 뿐이 아니라, 지금도 중국에서는 온갖 토산 공물들을 모두 시장 점포에서 구입하여 진상하고 있다.
【문】: 예컨대 생선(生鮮)과 같은 날것으로 말한다면, 반드시 조빙궤(照氷櫃)에 깊이 봉한 다음에 빨리 전달하여 진상하여 야만 부패하는 폐단을 면할 수 있을 터이니, 이 때문에 비용이 많이 드는 것이다.
【답】: 날것 가운데 가장 빠뜨릴 수 없는 것 이외에는 소금에 절여서 대신 봉진(封進)하는 것도 어찌 안될 것이 있겠는가.
삼대(三代) 시대에 의복과 음식을 검소하게 하였던 것은 너무나 분명한 일이어서 논의할 것도 없지만, 한(漢) 나라 때 용려(龍荔 과실이름)의 진상을 금지한 것이나 당(唐) 나라 때 합리(蛤蜊 참조개)의 진상을 혁파한 것, 그리고 송(宋) 나라 인종
(仁宗)이 불에 구운 양고기를 먹지 않은 것이나 명(明) 나라 헌종(憲宗)이 당나귀의 창자를 구하지 않았던 것만을 보아도,
나라를 잘 다스리고자 하는 임금은 참으로 맛있는 물건 따위 때문에 백성들을 거듭 괴롭히지 아니하였다.
그리고, 명(明) 나라로 말하면 연경(燕京)에 도읍한 뒤로는 남쪽 지방에서 철따라 생산되는 새로운 생선 따위를 모두 소금에 절여 마쾌(馬快 관서(官署)의 역졸(役卒))나 선부(船夫)를 이용하여 수송하였다. 중국의 국력으로는 역체(驛遞)를 이용하여 밤낮으로 수송해서 진상한다 하더라도 무엇이 어렵겠는가마는 그런데도 저처럼 소금에 절여 진상하였던 것은 정말 백성들의 폐단을 염려하여 그러하였던 것이다.
【문】: 내국(內局 궁중의 의약을 맡은 내의원(內醫院))에 바치는 청죽(靑竹)으로 말한다면, 백성들을 징발하여 운반하게
하고 인부와 말을 준비하게 하여 그에 드는 노력과 비용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그러나, 임금의 의약품에 사용하는 것인데 누가 감히 감축하자고 청하겠는가.
【답】: 중국의 태의원(太醫院)에서 해마다 의약품 재료들을 징수한 것을 보아도 본래 청죽을 징수한 적이 없었으니 경태
(景泰 명 경제(明景帝)의 연호) 연간에 우겸(于謙)이 병을 앓자 경제가 몸소 만세산(萬歲山)에 거둥하여 대나무를 베어 죽력(竹瀝)을 내어서 하사했다고 한다. 이제 죽간(竹竿)을 적당히 감축시켜 백성들이 입고 있는 폐해를 덜어준다 해도 불가할 것이 무엇인가. 이상 두 가지 사실로 미루어서 다른 일에까지 하나하나 적절히 감축하여, 위로는 검소한 덕을 밝히고 아래로는 묵은 폐단을 제거하여야만 바야흐로 백성들을 보호하는 정치를 할 수 있는 것이다. 밝은 임금이 어찌 인색한 점이 있겠는가만, 다만 유사(有司)들이 달갑게 정성을 다하여 말씀드리지 않는 것이 걱정스러울 뿐이다.
【문】: 진상하는 물품을 시장 점포에서 수매하여 바치는 것은 아무래도 불경스럽지 아니한가.
【답】: 대동법(大同法)을 처음 시행할 당시에 의논한 사람들이 ‘능묘(陵廟)에 바칠 물건들을 어찌 시민(市民 시전의 상인)
에게 사서 사용할 수 있겠는가.’ 하자, 당시 정승이었던 김육(金堉)이 그 말이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을 힘써 깨친 뒤에야 대동법이 비로소 시행되었었다. 지금 그대가 한 말이 어찌 그리 비슷한가.
【문】: 지방의 시민들이 진상 물종을 마련하여 바치게 되면, 반드시 경외(京外)의 관리(官吏)들이 마음대로 조종(操縱)하여 사건이 발생할 염려가 있을 것이다.
【답】: 예컨대 관동(關東)의 인삼(人蔘) 상인의 경우로 보면 그러한 폐단은 없을 것이다. 오직 법을 세울 당초에 그에 대한 사세(事勢)나 물리(物理)를 세세히 검토한 다음, 조목을 주밀하게 만들고 금방(禁防)도 분명하게 하여 토산(土産) 공물에
대한 격식을 작성하고, 이를 책으로 간행해서 군읍(郡邑)에 반포하여 그대로 준행하도록 한다면, 자연히 오래도록 시행할
수 있어서 영구히 고정된 준례가 될 터인데, 어찌 사건이 발생할 염려가 있겠는가.
[주D-001]조빙궤(照氷櫃) : 생선과 같은 날것의 변질을 방지하기 위하여 얼음으로 속을 채워서 만든 궤.
[주D-002]우겸(于謙) : 명 나라 전당(錢塘) 사람. 선종(宣宗) 때 크게 공을 세워 벼슬이 병부 상서(兵部尙書)에 올랐다가
영종(英宗) 때 참소를 입어 죽음을 당했다.
제10권 내탕(內帑)에 대하여 논의함
【문】: 그대는 지방의 여러 폐단에 대해서는 대략 논의하면서도, 유독 내탕(內帑)에 대해서는 한 마디 말도 없는데 무슨
까닭인가.
【답】: 내탕은 혁파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문】: 임금은 개인적인 재산이 없어야 하는 것이니, 내탕을 혁파하여야 하는 것은 의리에 너무나 분명한 일이다.
그리고, 전부터 내려온 유현(儒賢) 선배들의 의논으로 보더라도 모두 내탕을 혁파하여야 한다는 것을 제일 시급한 일로
여기고 있는데, 그대가 유독 혁파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답】: 선배들을 존경하는 도리로 말한다면 말이 모름지기 공손하여야 하겠지만 내탕을 혁파하여야 한다는 의논에 있어서는 결국 선배(先輩)들이 깊이 생각하지 못한 말이 되겠다. 전부터 논의하는 사람들이 걸핏하면 주(周) 나라 제도를 인증하여 ‘상고(上古) 시대에는 임금이 개인적인 창고가 없어 모든 재물이나 선수(膳羞) 등이 다 유사(有司)에 의해 관리되었기 때문에 궁중(宮中)과 부중(府中)이 일체가 되고 정치 규모도 정대하였다.’고 하면서 이것을 가지고 내탕을 혁파하여야 한다는
증거로 삼고 있으나, 이는 대개 주 나라 제도에 대하여 일찍이 자세하게 고찰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다.
태부(太府)ㆍ옥부(玉府)ㆍ내부(內府) 등이 모두 잔여(殘餘) 부세(賦稅)를 가지고 임금이 하사하는 물건들을 마련하여 드렸고, 외부(外府)가 회동(會同 제후가 천자(天子)에게 조회함)이나 군려(軍旅) 등에 소요되는 모든 재용(財用)의 행정을 관장하였는데, 어찌 주 나라 제도에 내탕이 없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한(漢) 나라의 대사농(大司農)ㆍ소부(小府)ㆍ수형(水衡)과, 당(唐) 나라의 좌장(左藏)ㆍ대영고(大盈庫)와, 송(宋) 나라의 삼사사(三司使)ㆍ봉용고(封樁庫) 등도 모두들 내외의 재물을 구분하여 밖으로는 군국(軍國)의 비용을 조달하고 안으로는 궁궐의 비용도 조달 하였다. 이로 본다면 대개 주 나라나 한 나라 이래로 내탕을 전적으로 혁파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주자(朱子)가 전후에 걸쳐 올린 상소문이나 일생 동안에 전개한 의논으로 보더라도 ‘꼭 봉용고의 어전전(御前錢)을 혁파하여야만 정치를 할 수 있다.’고는 한 번도 말하지 않았다.
대체 부반(匪頒 반사(頒賜))이나 연호(燕好)의 비용과 완호(玩好)나 선복(膳服)의 비용 등은 본시 주(周) 나라도 면치 못한 것으로 옛날이나 오늘날이 똑같은 것이다. 내탕(內帑)은 이미 임금의 개인적인 창고에 해당해서, 그에 대한 세입(稅入)에
액수가 있고 사용하는 것에도 규례(規例)가 있는 까닭에, 임금도 짐작하여 사용하다가 반드시 크게 부족한 것이 있은 뒤에야 간혹 유사(有司)에게 자신의 의사를 말하고 가져다 사용한다. 그러면 유사가 격식을 끌어다 간하고 전례를 인증하여 방지하는 까닭에 임금도 꺼리는 바가 있어 자주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 만약 갑자기 내탕을 혁파하여 다시는 손을 댈 곳이 없게 해버려, 아침 저녁마다 외부(外府)의 물건들을 가져가 사용하도록 한다면, 이것이 관습적으로 전례가 되어
방지하기가 참으로 더 어려울 것이다. 그렇게 되면 유사(有司)들이 앞으로 어떻게 국가의 재정을 지탱하여 나갈는지 모르
겠다.
이것뿐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환시(宦侍)들은 옛날처럼 지나치게 정치에 간섭하여 권력을 장악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못들었다. 이것은 여러 임금의 가법(家法)이 올바른 것에 말미암은 것이겠지만, 나는 내탕이 역시 환시들을 미끼로 견제한 공이 없지 않다고 여긴다. 어째서 그렇게 말하는가 하면, 이들의 소망하는 것은 많아보았자 내탕을 차지(次知 담당)하는 명색
따위에 불과하여, 이것으로 의복ㆍ음식ㆍ식기(食器) 등도 마련하고 이것으로 큰 부귀(富貴)도 누리어, 내탕 안에 자리잡고 앉아 좀먹어가면서 자신을 살찌운다. 그런데 갑자기 내탕을 없애버린다면 이들이 단지 약간의 늠료(廩料)만을 쳐다보고서, 졸렬함을 지키며 분수를 편안히 여기고 앉아서 밖의 일에 간섭할 마음을 먹지 않을는지 모르겠다. 만약, 이런 일이 있게 된다면 그들이 국가의 걱정거리가 되는 것이 어찌 내탕을 좀먹는 데에 비교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그 중에서 너무 심한 폐단은 불가불 시정하여야 하므로 절수(折受 토지나 결세(結稅)를 떼어줌)의 법규와 관차
(官差 관아에서 파견하는 아전)의 폐단을 개혁하고, 노비(奴婢)들의 신공(身貢 신역(身役)을 면제받은 대가로 바치는 포목(布木)이나 화폐)에 대해서도 역시 균일하게 감축하여 정하는 한편 돈으로 징수하도록 하여야 하며, 호조(戶曹)에서는
《주례(周禮)》의 내부(內府)에서 잔여(殘餘) 부세(賦稅)를 이용하였던 제도에 따라서 서울의 성문(城門) 등에서 수입되는 세금을 내수사(內需司)로 할당하여 보내되, 해마다의 액수를 정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주D-001]태부(太府)ㆍ옥부(玉府)ㆍ내부(內府) : 주(周) 나라의 벼슬 이름으로 태부는 임금의 창고를 관장하였고, 옥부는 임금의 금옥(金玉)ㆍ완호(玩好)ㆍ병기(兵器) 등을 관장하였으며, 내부는 구공(九貢)ㆍ구부(九賦)ㆍ구공(九功) 등의 재물을 관장하였다고 한다.
[주D-002]외부(外府) : 주 나라의 벼슬 이름으로 국가의 화폐(貨幣)를 관장하였다.
[주D-003]대사농(大司農)ㆍ소부(小府)ㆍ수형(水衡) : 한(漢) 나라의 벼슬 이름으로 대사농은 전곡(錢穀)을 관장하였고,
소부는 산해(山海)ㆍ지택(池澤)의 세금을 관장하여 천자(天子)를 봉양하였으며, 수형은 상림원(上林苑)을 관장하였다.
[주D-004]좌장(左藏)ㆍ대영고(大盈庫) : 좌장은 당(唐) 나라 때 전백(錢帛)과 잡채(雜綵) 등을 쌓아둔 창고, 대영고는 온갖 보화를 쌓아두고 천자(天子)의 연사(燕私)에 공급한 창고이다.
[주D-005]삼사사(三司使)ㆍ봉용고(封樁庫) : 삼사사는 송(宋) 나라의 염철사(鹽鐵使)ㆍ탁지사(度支使)ㆍ호부사(戶部使)
등을 가리키고, 봉용고는 재보(財寶)를 저장한 창고를 말한다.
제10권 서원(書院)을 논의함
【문】: 서원은 갖가지 해만 있고 한 가지도 이익되는 것이 없는데,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는가.
【답】: 만약 이 글에서 논의한 대로 시행된다면, 서원의 학생으로 응모하여 들어온 사람들이 저절로 앞장서서 서원을 나갈 것이며, 어(魚)ㆍ염(鹽) 등 물건은 모두 국가에 귀속될 것이다. 이렇게 된 뒤에는 서원이 있고 없는 것에 대하여 조정에서
아는 체할 바가 아닌데, 어찌 서원을 혁파하여야 한다고 할 필요가 있으며, 또 적당히 감축시켜야 한다고도 할 필요가 있겠는가. 내버려 두고 따지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제10권 공장(工匠)에 대하여 논의함
【문】: 공장들은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는가.
【답】: 공장들도 어찌 상인(商人)들과 다르겠는가. 백성들은 유사(有司)에, 군사들은 병조(兵曹)에, 공장들은 공조(工曹)에, 상인들은 호조(戶曹)에 예속시켜서 험첩(驗帖)으로 세금을 징수하되 상인들에게 시행하는 법과 똑같이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문】: 그렇다면 서울이나 지방의 공장들은 일제히 모두 공조에 이름을 등록하여 험첩을 교부받고 세금을 납부해야 하는가.
【답】: 그렇다.
【문】: 상인들은 그런 대로 팔고 사는 이익이 있으므로 그에 대한 세금을 징수할 수 있겠지만, 공장들은 수공업(手工業) 하는 무리에 불과한데 어떻게 세금을 징수할 수 있겠는가.
【답】: 공장들이 기왕에 수공업을 하는 이상, 당연히 그 기술을 가지고 국가의 부역(賦役)에 돌아가면서 응하여야 되는데, 어떻게 납부하는 세금이 하나도 없을 수 있는가. 서울이나 지방의 공장들을 물론하고 마땅히 그들로 하여금 반(班)을 돌려가면서 입역(立役)하도록 하여야 한다. 그러나 온 나라의 공장들이 오랫동안 와서 부역에 응하려고 대기하기는 어려우므로, 어떤 공장이든지간에 모두 몇 달씩 입역하는 기한을 정하여 주고, 달마다 날짜를 계산하여 매일 1전(錢) 몇 푼씩을 징수하되 2~3개월의 공장 세금을 총합 징수하여 공조(工曹)의 공공 비용에 충당하는 것이 마땅하겠다. 그리고 일체 국가의 공역(工役)에 관계되는 것은 공조에서 모두 주관하여 낭료(郎僚)들이 각각 본사(本司)의 부서(部署)를 설치하여 공역에 대한 돈이나 식량 등을 관리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문】: 그렇다면 그것은 지금 공조(工曹)에 예속된 공장들이 가포(價布 신역(身役)의 대가로 바치는 베)를 바치는 법과 비슷한 것인가.
【답】: 그렇지 않다. 지금은 공장들마다 이름 밑에 꼭 봉족(奉足)으로 정하여 재물을 독촉하여 징수하기 때문에 명목이 번잡하고 제도도 고르지 못하지만 이것은 그렇지 아니하다. 공조에서 서울에 있는 공장들이 몇천 몇백 몇십 명인가를 헤아려서 공조의 문안(文案)에 등록하고 일정한 액수를 설정하여, 보통 때에는 지방 공장들의 준례에 의하여 공장세를 징수하고, 국가에 공역이 있게 되면 서울에 있는 공장들로 하여금 입역(立役)하도록 하되, 날짜를 계산해서 공장들의 식비와 품삯 등을 나누어주고, 공역이 끝난 뒤에는 즉시 정지한다. 그러면, 명목이 번거롭지도 않으며 제도도 균일하고 간편 정밀해서 영원토록 시행하여도 폐단이 없을 것이다.
【문】: 서울이나 지방을 물론하고 공장들이 세금을 꺼려 애초부터 이름을 신고하여 문안에 등록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답】: 이름을 등록하지 않으면 험첩(驗帖)을 받아 낼 수 없도록 하고, 험첩이 없으면 공장 노릇을 못하도록 하여야 한다. 가령 사사로이 수업하는 공장이 있으면, 한 고을에 사는 공장들로 하여금 그의 이름을 지적하여 고발하게 하고, 고발한 것이 사실로 드러나면 즉시 이름이 누락된 공장들을 잡아들여 익세원배(匿稅遠配)의 율(律 세금을 은닉하면 먼 지방으로 귀양보내는 형벌)로 처리하는 한편, 겸하여 속전(贖錢)을 징수(徵收)하여 고발한 사람에게 주도록 한다. 그리고 범법자(犯法者)에게는 공장의 직업을 행할 수 없게 하면, 누가 매년 세금 몇 푼을 아껴 스스로 이러한 범죄에 빠져들려고 하겠는가.
【문】: 지방에는 대개 공장들이 적고 산골 같은 곳에는 더욱 공장들이 없는 형편인데, 어찌 한 고을에 사는 공장들이 고발할 이치가 있겠는가.
【답】: 사민(四民 사(士)ㆍ농(農)ㆍ공(工)ㆍ상(商))이 일단 나뉘어지면, 어느 곳이나 큰 상인(商人)이 없지 않고, 큰 상인이 있으면 점포가 있으며, 점포에는 자연히 공장들이 있기 마련이다. 이는 다 서로를 필요로 하고 의뢰하여 하나라도 없으면 생활해 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법제가 일단 이루어지면 공장들이나 상인들이 이름이 누락된 사상(私商)이나 사공(私工)들을 미워하여 그들의 이름을 지적 고발할 것이 분명한데 저들이 어찌 속여서 이름을 누락시키겠는가.
【문】: 지금 각 고을에서는 사사로이 공장들을 지정하여 돈이나 베를 징수 사용하고 있는데 곳곳이 모두 그렇게 하고 있다. 수령(守令)들이 만약 사실대로 책을 만들어 공조(工曹)에 보고하지 않고, 공장을 남겨 사사로이 돈을 징수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답】: 공장들의 험첩(驗帖)을 공조에서 인출(印出)하여 지방의 공장들이 신고한 문적(文籍)에 준하여 몇천 몇백 몇십 장의 험첩을 발급하여 주면, 수령들은 그 사람 수에 의하여 험첩을 교부하여 주고 세금을 징수해서 공조에 납부할 뿐이다. 그들이 아무리 사사로이 징수하고 싶어도 험첩에 액수가 있는데 어떻게 할 것인가.
제10권 사찰과 승려를 논의함
【문】: 우리나라는 불교(佛敎)가 너무 성하므로 불가불 적절히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답】: 저들 법문(法門)의 쇠퇴함이 오늘날보다 더한 적이 없다. 치의(緇衣 중옷)를 입은 승려가 많기는 하지만, 모두 부역(賦役)을 도피한 무리이므로 백성들의 부역이 크게 균등하여지면, 머리를 깎았던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환속(還俗)할 것이 분명하다. 비록 이러하기는 해도 법제가 없어서는 안 되므로, 마땅히 역대(歷代)의 제도들을 본받아 주(州)ㆍ읍(邑)마다 사찰 암원(菴院) 몇 군데를 적당하게 정하여 보존하고, 사찰마다 승려 몇 명씩을 적당하게 정하며 중국은 큰 사찰도 승려수가 30명에 불과하다. 출가(出家)하는 데도 연령의 제한을 두고 도첩(度牒)과 첩전(牒錢)도 두어서 마음대로 승려가 될 수 없도록 하며, 사찰에 시주(施主)한 토지는 색출해 내서 관청의 토지로 귀속시키는 것이 좋을 것이다.
제10권 규제를 변통하는 이해(利害)에 대하여 논의함
【문】: 천하의 국가들은 각각 그들의 풍속이 있다. 우리나라가 비록 문교(文敎)를 숭상하여 소중화(小中華)라고 불리지만, 본래부터 나라의 습속이나 시골의 풍속들이 중국과 끊은 듯이 같지 않은 것이 많다. 그런데 지금 그대가 의논한 것을 보면, 거의 중국의 제도만을 취택하여 사용하려고 하면서, 사세(事勢)와 풍습이 막혀 서로 먹혀들지 않는 점을 고려하지 않고 있으니, 나는 이것을 매우 의심스럽게 여긴다.
【답】: 천하의 나라들은 과연 제각기 풍속이 있다. 남만(南蠻)이나 북적(北狄)들이 비록 짐승에 가깝지만, 그들은 예부터 지금까지 제각기 본래의 풍속들을 지켜 왔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질박하고 일도 간편하여 천백년이 지나도록 서로가 편안하여 이른바 새로운 폐단이나 지속하기 어려운 애로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외국의 조그마한 나라로서 중국의 풍속만을 순전히 숭상한 나라는 온 천하에서 우리나라뿐이다. 그러나 이른바 숭상한다고 한 것이 다만 외면적인 형식일 뿐, 나라를 경영하고 정치를 도모하는 중요한 도구에 있어서는 어떤 것은 그 명목만을 답습하기도 하고, 어떤 것은 그 껍데기만을 모방할 뿐이어서, 한 가지도 그 정신이나 골자(骨子)가 있는 곳을 터득하지 못하여 왔다.
까닭에, 그 폐단은 마침내 나라를 부허(浮虛)하고 무실(無實)하게 만들었고, 무실 2자(字)는 무한한 병폐들을 발생시켜 그것을 바로잡을 수 없는 처지에 이르고야 말았다. 이것이 내가 그 병든 곳의 소재(所在)를 깊이 논구한 까닭이며, 이러한 폐단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오직 실사(實事)와 실정(實政)을 가지고 이름만 흠모하고 실질을 버리는 풍속에다가 시행하여야만, 세도(世道)를 바로잡을 수 있을 것으로 여긴 것이다. 이것이 어찌 중국의 풍속만을 숭상하고 우리나라의 토속(土俗)은 얕잡아서, 온갖 일들을 물론하고 모두 중국의 것만을 우러러 답습하고 억지로 시행하려고 한 것이겠는가.
대저 음식으로 말한다면, 중국 사람들은 육식(肉食)이나 감미로운 것을 즐기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물(魚物)이나 짠 것을 즐기니, 참으로 각기의 토속을 따를 것이지, 구태여 똑같이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의복으로 말하더라도, 중국 사람들은 방건(方巾)에 난삼(襴衫)을 입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칠립(漆笠)에 도포(道袍)를 입으니, 이것도 구태여 똑같이 할 필요가 없는 것이며, 어음(語音)으로 말하더라도, 중국 사람들은 말이 모두 문자(文字)이지만 우리나라 방언(方言)은 모두 상스러운 소리여서 참으로 중국에 따를 수 없는 것이나, 우리가 국음(國音)으로 서로 통하고 문자로 마음을 표현할 수 있으니, 이것 역시 무방하므로 구태여 똑같이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혼례(婚禮)로 말하더라도 중국 사람들은 오랫동안 오랑캐 풍속에 물든 까닭에 최복(衰服)을 벗어놓고 시집가고 장가들어도 그것을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기복(朞服)도 장사를 지내기 전에는 감히 아내를 맞아들이지 아니하며, 상제(喪制)로 말하더라도 단상(短喪)을 한 후로는 중국 사람들은 복제(服制)를 잘 지키는 이가 적은 반면에 우리나라에서는 일반 백성들도 모두 부모 상복(喪服)을 3년 동안 입으며, 오호(五胡) 이후로 중국의 풍속(風俗)은 장사(葬事)를 치르지 않는 사람이 많은데 우리나라에서는 더러는 장사를 3개월을 넘기기도 한다. 이런 것들은 바로 중국에서도 우리나라를 따르지 못하는 점들이다.
이러한 일들은 한두 가지에 그치지 않는다. 강역(疆域)이 이미 구별되어 있고 풍속이 또한 다르니, 제각기 그 요속(謠俗)에 따르고 토풍(土風)에 순응하는 것이 어찌 해롭겠는가. 이것이 참으로 정자(程子)가 이른바 ‘일이 의리에 해롭지 않은 것은 시속(時俗)에 따르는 것이 옳다.’는 뜻인데, 내가 언제 우리나라 풍속이 일마다 중국의 것을 모방하지 못했다고 개탄했는가.
아, 언어(言語)ㆍ요속(謠俗)ㆍ의복ㆍ음식 따위는 바로 토속(土俗)이며 향풍(鄕風)인데, 이런 것들까지 어찌 꼭 중국의 풍속을 답습할 것이 있겠는가. 중국의 경우를 보더라도, 남방과 북방의 풍속이 본래부터 끊은 듯이 같지 않은 것이 매우 많다. 그러나 정사(政事)에 있어서는 그렇지 아니하여 사(士)ㆍ농(農)ㆍ공(工)ㆍ상(商)과 예(禮)ㆍ악(樂)ㆍ병(兵)ㆍ형(刑), 선거(選擧)ㆍ관제(官制)와 세렴(稅斂)ㆍ공부(貢賦) 등이 모두 성인(聖人)에게서 근원하였고 그 일들이 오직 중국에서만 시행되고 있는데, 온 천하에서 이 제도들을 흠모하여 시행하려는 나라는 오직 우리나라뿐이다. 이 제도들을 흠모하여 답습하지 않는다면 그만이겠지만, 기왕에 이 제도들을 답습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그 정밀한 의의를 관통하여 깊이 체험하고 힘써 시행하여야 비로소 폐단이 없게 될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처음에 털끝만큼 틀린 것이 나중에는 천리(千里)나 틀리게 되어 그 마지막 폐단에 이르러서는 도리어 애초부터 중국의 제도들을 숭상하지 아니하였던 것만 못하게 될 것이다.
아, 오늘날 사대부들은 지나치게 자만하고 자부하면서 스스로 ‘지식은 고금(古今)을 관통하고 학문은 정미한 경지에 이르렀으며, 제도가 모두 이루어졌고 의문(儀文)도 모두 갖추어졌으며, 정치하는 기구도 이미 장만되었고 할 수 있는 일도 이미 끝마쳤으므로, 그대로 가져다가 실시하기만 하면 삼대(三代)가 사대(四代)로 될 수도 있다.’고 호언장담하며 조금도 부끄러워할 줄을 모른다. 부랑(浮浪)과 허위(虛僞)가 날로 더하고 달마다 심해지는 것은 그 묘맥(苗脈)이 있으니, 그대가 시험삼아 들어보겠는가.
우리나라에 문자(文字)가 있게 된 것은 불가(佛家)로부터 시작되었다, 신라(新羅) 말엽에서 고려(高麗) 초엽에는 문자를 배우려는 사람들이 대부분 책을 끼고 절로 올라가서 노승(老僧)에게 수학하였으니, 처음 문맹(文盲)을 계몽하는 일이 전적으로 불가에서 나왔던 것이다. 곳곳의 산 이름으로 말하더라도, 대체로 모두 불가의 말로 이름을 지었고, 이름이 없는 것은 방언(方言)이나 이언(俚言)으로 이름이 지어져 있으니, 이는 아마 당초에 문자를 아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서 이름이 지어진 때문일 것이다.
송(宋) 나라 때에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거란(契丹)을 섬기는 한편 간혹 바다를 건너 중국과 통하였지만, 문헌(文獻)이 우리나라로 들어 온 것이 극히 적었다. 그러다가 원(元) 나라 중엽에 이르러 충선왕(忠宣王)이 비로소 중국의 문사(文士)들과 서로 왕래하게 되자, 국내의 총명하고 재주 있는 사람들이 조금씩 학문에 뜻을 두어, 재주가 높은 사람들은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학문을 익혔고, 재주가 낮은 사람들은 문장(文章)을 배웠다. 이를테면, 정포은(鄭圃隱 포은은 정몽주(鄭夢周)의 호)은 대개 정학(正學)에 뜻을 두었으나,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호)이나 권근(權近) 등은 문장을 하면서 이학(理學)을 논의하기도 하여, 유파(流派)가 조금씩 나누어져 갔다. 그러면서 불가(佛家)의 학문은 이때에 이르러서 자못 침체되었던 것이다.
고려 말엽에서 본조(本朝 조선조(朝鮮朝)를 가리킴) 초엽에는 정도전(鄭道傳) 등이 또다시 이학(理學)을 한다고 자칭하여 한차례 떠들썩했었다. 그러나, 대체로 구이(口耳)의 담설(談說)이고 하나의 앵무선(鸚鵡禪 말만 흉내내는 중)이었기 때문에 그 폐해로 세도(世道)가 문란하여지고 문학도 너저분하게 되었다. 세종대왕(世宗大王)이 이런 점들을 매우 걱정한 나머지 바로잡으려고 하였지만, 당시에 대유(大儒)로서 그를 보좌해준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정자와 주자의 정맥(正脈)을 가지고 학자를 개도(開導)하는 데는 미치지 못하고, 다만 서당(書堂)을 설치하여 월과(月課)를 권장하는 따위의 일만을 주로 하여, 그 효과가 문교(文敎)를 진흥시키기에는 부족하였고, 지금에 와서는 폐단적으로 형식이 되고 말았다. 대개 함부로 폐단만을 바로잡으려고 전에 없었던 일들을 새로 만들어낸다면, 그 일들은 결국 실속이 없는 데에 이르고야 마는 것이다. 전경(專經)ㆍ월과ㆍ삭서(朔書)ㆍ시사(試射)ㆍ정중(庭重)ㆍ발영(拔英) 등의 시험들도 이미 선발하고 출신(出身)한 뒤에 행하는 사람들이니,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는 형식적으로도 도움이 없을 뿐만 아니라, 화려하기만 하고 실속이 없는 풍습을 개도해주는 셈이 되니 그 모두가 당초에 경사(經史)의 올바른 학문으로 당세를 개도하지 못하고, 문화(文華)만을 큰 일로 여긴 소치인 것이다.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의 호)ㆍ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의 호)ㆍ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의 호)들이 계승 탄생하여 주자(朱子)의 전주(傳注)를 존중하고 《근사록(近思錄)》을 표장(表章)한 뒤에야 우리나라 사람들이 비로소 학문의 길을 알게 되었고,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의 호)ㆍ퇴계(退溪 이황(李滉)의 호)가 뒤이어 탄생하여 저술함으로써 유풍(儒風)이 조금씩 진흥되어 노망스러운 풍습을 점차 벗어나게 되었다. 그 뒤로 학자들이 어떤 사람은 경서(經書)와 《심경(心經)》ㆍ《근사록》 등을 연구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예서(禮書)의 변의처(變疑處)를 연구하기도 하며, 어떤 사람은 주자(朱子)의 책을 널리 읽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어록(語錄)》을 많이 보기도 하여 점점 학문가의 수가 이루어져 가고 논설(論說)도 차츰 이해하게 되었다. 그들이 실제로 터득한 것이 과연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어도 학문하는 길만은 자못 뚜렷하게 되었던 것이다.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의 호)ㆍ남명(南冥 조식(曺植)의 호)ㆍ대곡(大谷 성운(成運)의 호)ㆍ송당(松堂 박영(朴英)의 호) 등의 경우를 본다면, 이들이 당초에 지나치게 유명했던 것도 우리나라 풍속이 무무한 데서 말미암은 것이었다. 유학(儒學)의 규모와 문로(門路)가 퇴계(退溪) 이후로부터 또한 명백하여지자, 후인들도 그들에게 노자(老子)나 장자(莊子)의 기미(氣味)가 스며 있는 것을 알고는 다시는 전처럼 숭상하지 않게 된 것이다.
선학(禪學)으로 말한다면, 고려(高麗)에서 이른바 선학이라는 것은 사대부(士大夫)들이 염불(念佛)ㆍ재공(齋供)이나 소문(疏文)ㆍ시게(詩揭) 등을 짓는 데 불과하였다. 이는 대개 죄를 받거나 복을 받는다는 말에 빠져든 데 지나지 않았지만 실제로는 불교의 거친 점을 배운 셈이었다. 그런데 근세(近世)에 노과회(盧寡悔 과회는 노수신(盧守愼)의 자(字))와 장지국(張持國 지국은 장유(張維)의 자) 등이 육상산(陸象山 상산은 송(宋) 나라 육구연(陸九淵)의 호)과 왕양명(王陽明 양명은 왕수인(王守仁)의 호) 등의 기미에 꽤나 물들었지만, 이들은 역시 문자(文字) 생활로 인하여 조금 별다른 견해가 생긴 탓이었지, 양자호(楊慈湖 자호는 양간지(楊簡之)의 호)와 장횡포(張橫浦 횡포는 장구성(張九成)의 호)들처럼 선학의 공부가 정밀한 것에 비한다면, 몇 층의 차이가 있을 뿐이 아니었다.
사한(詞翰)으로 말한다면, 고려 말엽에서 국조(國朝 조선조(朝鮮朝)를 가리킴) 초엽에까지 문장이 훌륭한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적으로 안목(眼目)의 견해가 끝끝내 거친 편이었다. 그 후 명종(明宗)과 선조(宣祖) 두 시기에 이르러서 해평군(海平君) 윤근수(尹根壽) 같은 사람들이 중국을 내왕하면서 사원(詞苑)에 대한 서론(緖論)을 제법 얻어들었고, 문헌(文獻)이 되는 서적도 많이 가져왔으며, 임진왜란(壬辰倭亂) 때는 총명하고 재변(才辯) 있는 선비들이 많이 중국 사람들과 지내면서 배우고 닦아 점차 깨닫고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배운 것은 왕국동(王國棟)과 이여송(李如松) 등의 부화한 문장과 떠들썩한 시격(詩格)일 뿐이었다. 이런 것을 가지고 이야기도 하고 저술도 하여 다소나마 비루한 점을 면하기는 했지만, 뿌리가 참으로 쌓여서 박실하고 오래갈 수 있는 맛은 도리어 고려 말엽이나 국초(國初)보다 못한 점이 있었다.
그리고 효종(孝宗) 이후로는 산림(山林)의 선비들이 요로(要路)에 오르자 세상 풍습도 또한 변하여 집집마다 주자의 책을 장만해 놓고 성리(性理)를 이야기하며, 사대부들이 조금만 글을 쓸 줄 알면 바로 도학(道學)을 논하는 말을 구사하여, 외면적으로 보면 훌륭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몸과 마음속에서 체험하여 나온 것이 아니라, 껍데기만 주워모아 형식만 꾸며 놓고서 스스로 기뻐한 것이니, 명성이 아무리 높을지언정 실제에는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아, 학문으로 말한다면 이야기할 줄을 대략 알 뿐이며, 사장(詞章)으로 말한다면 지름길을 대략 알 뿐이며, 예악(禮樂)으로 말한다면 기복(器服)을 대략 알 뿐이며, 필한(筆翰)으로 말한다면 붓대 잡는 법을 대략 알 뿐이며, 도화(圖畫)로 말한다면 점염(點染)을 대략 알 뿐인데, 이런 것들을 가지고서 어떻게 높이 보고 자부할 수 있는가. 그런데 사대부들이 이런 것들로 한 가지 큰 사업을 이룬 것으로 알고, 스스로 ‘경술(經術)이나 문장(文章)이 송(宋) 나라 선비들을 따를 수 있고, 제도(制度)나 의문(儀文)도 중국을 충분히 앞지를 수 있다.’고 자랑스럽게 자임(自任) 자부(自負)하며 이른바 학문이라는 것을 너무나 모르고들 있다. 몸을 닦고 경전(經傳)을 연구하여 자신을 다스리고 남도 다스리는 대법(大法)을 강구하는 사람을 아직껏 보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사학(史學)에 있어서도 한갓 기(紀)와 전(傳)만을 숭상하고 지(志)나 표(表)는 일체 폐기하여 버렸으니, 사학도 망한 지가 오래된 셈이며, 이른바 사장(詞章)이라는 것도 일찍이 경전(經傳)이나 사기(史記)에 근본하여 법칙이 있는 문장을 이루지 못하여, 재주가 높은 사람이라야 겨우 팔대가(八大家)나 전겸익(錢謙益 청(淸) 나라 상숙(常熟) 사람. 자(字)는 수지(受之), 호(號)는 목재(牧齋))의 《열조시집(列朝詩集)》 등을 열람하였고, 재주가 낮은 사람은 겨우 《고문진보(古文眞寶)》나 《동래박의(東萊博議)》등을 익혔으니, 그들의 성취한 바를 따져보면 대체로 시골 학구(學究)인 셈이다. 이른바 예학(禮學)이라는 것도 당초에 삼례(三禮 《의례(儀禮)》ㆍ《주례(周禮)》ㆍ《예기(禮記)》)가 일관(一貫)하여 선왕(先王)이 세상을 다스린 큰 법전인 줄을 모르고서, 다만 폭척(幅尺)ㆍ도수(度數)의 사이에만 자잘하게 신경을 써 예학을 다룬다는 이름만 넓혔으니, 그들이 쭉정이만을 표절한 폐단은 또 숙손생(叔孫生 숙손통(叔孫通)을 말함)의 면절(綿蕝 야외(野外)에서 의절을 연습하는 것을 말함)에 다를 것이 없는 셈이며, 이른바 필한(筆翰)이라는 것도 윤해평(尹海平 해평은 윤근수(尹根壽)의 봉호)이 처음으로 진(晉) 나라의 글씨를 숭상한 이후로 비로소 순화각법첩(淳化閣法帖)과 태청루첩(太淸樓帖) 등이 필진도(筆陣圖)나 칠월편(七月篇) 등보다 낫다는 것을 알고, 곧바로 행초(行草)를 익혀 법도가 정연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모양이 고운 것만을 좋아하여 급작스럽게 문징명(文徵明)과 축윤명(祝允明)의 서풍(書風)으로 쏠려 완력(腕力) 공부가 날로 엉성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도화(圖畫)라는 것도 족사(族史)와 선염(渲染) 따위에 불과한 것인데, 이징(李澄)ㆍ이정(李楨) 등이 중국 사람의 막하(幕下)에 출입하면서부터 화랑(畫廊)을 많이 구경하여 사생(寫生)하는 법을 어느 정도는 터득하였지만, 필학(筆學)이 풍부하지 못하고 재능도 격식대로 채우지 못하였는데 그나마 그 뒤로는 또다시 그 법을 전한 이가 없어, 오늘의 그림이라는 것은 전혀 생기(生氣)가 없고 다만 원본을 본뜨는 작품만을 그릴 뿐이다.
【문】: 문장이나 서화(書畫)를 잘하느니 못하느니 하는 점에 대해서는 정말 말할 것이 없지만, 학문에 있어서는 우리나라 선비들이 전적으로 주자(朱子)를 스승으로 삼았으니, 만약 그들로 하여금 국가의 정치를 맡도록 한다면, 어찌 정치의 효험이 없겠는가.
【답】: 주자의 학문은 통달하지 않은 곳이 없고 세상을 다스리는 지식도 더욱 정밀하고 심수하였다. 그가 평소에 논의한 것들을 보면, 고원(高遠)한 데에 집착하지도 않고 반면에 비근(卑近)한 데에 빠지지도 않아서 자상 주밀하고 명백 간절하니, 참으로 정치를 아는 훌륭한 인재이며 세상을 구제할 수 있는 큰 계책이었다고 하겠다. 그런데 우리나라 선비들에게 과연 이러한 본령(本領)이나 식견(識見)이 있었는가. 주자가 임금에게 여쭐 적마다 정심(正心)ㆍ성의(誠意)로 말한 것은 임금의 마음이 바르지 못할까 염려스러워서였을 뿐이다. 임금의 마음이 일단 바르게 되면, 평소에 배우고 쌓았던 것을 가지고 정치에 베풀 것이 풍부하지 못할까 염려할 것이 없고 정밀하지 못할까 걱정할 것이 없으며, 임금을 높이고 백성들을 사랑하는 효험이 참으로 손을 뒤집는 것보다 쉬울 뿐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선비들은 이러한 지식이나 수단도 없이, 다만 정심 성의(正心誠意) 네 글자만을 주워모아 임금에게 아뢰는 것을 힘쓰면서 스스로 주자를 배웠다고 말하지만 한번 그들로 하여금 국사(國事)를 맡도록 하면 망연하게 조처하는 것이 없어서 일반 재상(宰相)으로서 정무(政務)에 숙달한 사람보다 못하고 있고, 조금이라도 시행하는 일이 있으면 그때마다 꼭 삼대(三代) 때의 일을 이끌어 시의(時宜)에 맞지 않고 있다. 오직 소학계(小學稧)ㆍ현량과(賢良科)ㆍ향약(鄕約) 등의 일만을 급선무로 삼으니, 위로는 선왕(先王)들이 나라를 다스리는 법도를 제정하였던 유의(遺意)를 충분히 터득하지 못하고, 아래로는 노련한 간신들의 교활하고 허위적인 작태를 다스리지도 못하여, 유속(流俗)의 무리로 하여금 유자(儒者)가 실용이 없다고 항상 비방하게 하고 있다. 슬프다! 이들이 과연 주자를 잘 배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아, 오늘날 사대부들이 중국의 제도를 숭상한다고 하는 것은 그 어느 것이나 지엽적인 말절(末節)이고 허명적인 문구(文具)들이다. 가장 심한 한두 가지 일을 말하여보면, 밀과(蜜果)가 간혹 불공(佛供)에 쓰이기는 하지만 맛좋은 식품이고 또 면이(麵餌)의 음식이어서 제사에 사용해도 무슨 혐의가 있겠는가만, 부처에게 공양하는 것이라고 꺼리어 사용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런데 요사이 학자들은 초상(初喪)이나 장사에 지전(紙錢)을 사용하려고 한다. 이것은 윤회(輪回)하므로 천복(薦福 명복(冥福)을 기원함)하여야 한다는 불교의 말에서 나온 것인데도 중국의 선현(先賢)들이 사용하였다는 이유로 꼭 따르려고 하는 것이다. 선현들도 습속을 탈피하지 못해서 그랬던 것인 줄을 모르기 때문이니, 어찌 그리도 밀과를 사용하지 않는 뜻과는 상반(相反)되는가.
심의(深衣)는 강절(康節 소옹(邵雍)의 시호)이 입지 않았던 것인데도 꼭 입으려고 하고, 명기(明器)는 주자가 사용하지 않던 것인데도 도리어 사용하려고 하며, 삼대(三代)의 옛 예절로서 후세에 시행되지 않고 있는 것은 모두 시행하려고 하고, 길흉(吉凶) 간에 겉치레하는 것으로서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모두 갖추려고 한다. 오직 모방하고 자랑하는 것만을 주로 하고, 근본을 버리고 말단만을 좇아서 부위(浮僞)가 풍속을 이루어 서로가 이러한 겉치레 속에 빠져 다시는 천하에 실사(實事)가 있는 줄을 모르니, 어찌 매우 개탄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문】: 그렇다면 어떤 것이 과연 실사인가.
【답】: 정사(政事)가 바로 실사이니, 내가 이미 대략적으로 논의한 바 있다. 다시 말하여 보면 학제(學制)가 이루어지게 되면 유생(儒生)들이 스스로 경전(經傳)이나 사기(史記)에 노력하여 후일에 써먹을 수 있는 인재가 될 것이며, 관제(官制)가 밝게 되면 관리들이 모두 직책에 봉사하여 일을 않고 녹봉만 타먹는 염려가 없을 것이며, 고적(考績)이 엄하게 되면 파면하거나 승진시키는 것이 지극히 공정하여 훌륭한 사람과 모자라는 사람이 모두 제 분수에 만족할 것이다. 그리고 정치의 대체가 주밀하고 서정(庶政)의 규칙도 구비되어 오직 실사(實事)에 힘쓰고 형식적인 의논을 숭상하지 않는다면, 국가의 체모가 존엄하여지고 세상의 도의도 밝아져서 족당(族黨)에 치우쳐 서로 반목할 염려도 필연코 없게 될 것이다.
사민(四民 사(士)ㆍ농(農)ㆍ공(工)ㆍ상(商))을 분별하는 것은 곧 백성들의 재산을 마련해주는 것이고, 정역(征役)을 고르게 하는 것은 곧 농사철을 빼앗지 아니하는 것이며, 재화(財貨)의 생산에 방도를 세우고 재물을 취하는 데 법도를 두는 것은, 곧 백성들의 힘을 펴 주고 생활을 튼튼하게 해주는 것이다.
백성들의 생활을 튼튼하게 하는 데는 경작(耕作)과 방직(紡織)에 법도를 세우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경작이나 방직은 너무나 거칠고 서툴러서, 불가불 중국의 제도를 본받아 백성들을 계도(啓導)하여 그들로 하여금 그 이익을 알게 해서 일에 부지런할 수 있는 터전을 삼아야 할 것이다. 이제 이를 대략 논의하여 본다면 다음과 같다.
전제(田制)로 말한다면, 중국에는 이른바 구전(區田)이라는 것이 있다. 1묘(畝)의 땅에 수백 개의 구(區)를 파고 구를 격(隔)하여 종자를 뿌리되, 구의 깊이를 1척(尺)으로 하고 퇴비 1승(升)을 사용하면 구마다 곡식 1두(斗)씩을 수확하니, 그 소출을 합치면 보통 밭에 비하여 몇 배가 될 뿐이 아니라 전묘(田畝) 면적이 많지 않기 때문에 노력이 많이 들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지금 채소를 우선적으로 심어서 백성들로 하여금 그에 대한 이익을 차츰 알도록 하여야 하겠다.
포전(圃田)은 채소를 심는 땅이다. 주위를 울타리로 두르고 밖에는 뽕나무나 산뽕나무를 심어 법대로 호미질하여 가꾸면, 보통 밭에 비하여 1년의 이익이 몇 배가 될 것이다.
위전(圍田)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물가의 땅에 흙을 쌓아서 제방(堤防)을 만들어 침몰되는 것을 방지한 것이므로, 한발(旱魃)이나 홍수를 물론하고 다 풍성하게 수확할 수 있다. 그리고 궤전(櫃田)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모양과 제도가 위전(圍田)과 대략 같으나 노력이 덜 들어 경작하는 데 더욱 편리하다.
또 도전(塗田)이라는 것이 있다. 조수(潮水)가 넘쳐흐르는 땅에는 함초(醎草)가 많이 자라므로, 진흙 위에 수패(水稗)를 먼저 심어 척로(斥鹵 염분(鹽分))가 다 발산되면 바로 좋은 전답이 된다. 벽(壁)을 쌓거나 토막나무를 세워서 조수가 침범하는 것을 방지하고, 또 전답 가에 도랑을 파서 빗물을 저수하였다가 가뭄에는 관개수(灌漑水)로 이용하니 이것을 첨수(甛水)라고 하는데, 보통 전답에 비교해서 이익이 10배나 된다. 그리고 물에 잠긴 땅은 물이 빠지고 진흙이 쌓이기를 기다려 가을에 진흙이 말라 땅이 갈라지면 그 안에다 보리 씨앗을 뿌리는데 수확이 또한 도전에 못지 않다.
수리(水利)로 말한다면 수갑(水閘)이라는 것이 있다. 지형(地形)이 높고 낮아서 수로(水路)가 고르지 못한 곳에는, 요진(要津)에다 가로 제방(堤防)을 쌓고 그 앞에 두문(斗門 수문(水門))을 설치하여 나무를 겹겹이 포개 막이를 만들어서 열었다 닫았다 하는 것이 바로 수갑인 것이다.
파당(陂塘 방죽)이라는 것이 있는데 지금 우리나라에도 곳곳에 있으나, 해당 관할 향리(鄕里)로 하여금 흙을 쳐내고 나무를 심어 물의 근원을 도와야 할 것이다.
음구(陰溝 땅 속으로 낸 도랑)라는 것도 있는데 다음과 같다. 수륙(水陸)의 땅에 높은 언덕이 있거나 혹은 성시(城市)나 마을이 막히게 되면, 물굽이에 적당하게 수로(水路) 구멍을 판 다음에, 단단한 벽돌을 놓아 물이 통하게 만들고 그 위는 박석(磗石)을 덮어 그 사이로 물을 보내 관개(灌漑)에 이용하는 것이다. 중국에는 북경(北京) 같은 곳일지라도 가로(街路) 위에 더러운 도랑이나 오물(汚物)이 보이지 않는 것은 전적으로 이런 제도를 사용하였기 때문이니, 이것이 이른바 행수 암거(行水暗渠)인 것이다.
수책(水柵)ㆍ가조(架槽)ㆍ길고(桔橰)ㆍ녹로(轆轤)ㆍ수배(水排)ㆍ번거(翻車)ㆍ통차(筒車)ㆍ우예 수차(牛曳水車)ㆍ나전 통차(騾轉筒車)ㆍ수전 고거(水轉高車)ㆍ괄수 윤거(刮水輪車)라는 것도 있는데 이들은 모두 원근간의 물길을 끌어대는 것이다. 지형이 평탄하거나 험한 것을 물론하고, 온갖 방법으로 물을 끌어들여 기계(機械)의 교묘함을 다하였으니, 양수(揚水)하거나 도수(導水)하는 데 있어 사람이나 가축이 기축(機軸)에 올라 밟아서 전답에 물을 끌어다 대고야 만다. 가뭄에 대비하는 노력과 전답을 다스리는 근면이 이와 같은 연후에야 비로소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다하였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다한다면, 아무리 한재(旱災)를 입는다 해도 어찌 손을 묶고 농사를 폐기하는 지경에야 이르겠는가.
농기구(農機具)의 종류로 말한다면, 뇌사(耒耜 극젱이)나 이화(犁鏵 쟁기)의 제도도 역시 우리나라 농기구와는 아주 달라서 제작하는 기술이 섬세하게 의의가 있으니 깊이 갈아 흙을 부수는 효력이 극히 좋다. 그 밖에도 앙마(秧馬 말처럼 타고서 모를 심는 도구)ㆍ독거(車 씨앗을 뿌리는 수레)ㆍ가래[錢]ㆍ호미[鎛]ㆍ쇠스랑[鈀]ㆍ보습[鑱]ㆍ운조(耘爪 김맬 때 손가락에 끼는 깍지)ㆍ비구(臂篝 팔뚝에 끼는 대오리로 만든 토시)ㆍ하택거(下澤車 전답에서 짐을 실어나르는 수레)ㆍ타거(拖車 농기구 및 꼴ㆍ씨앗 등을 싣는 수레), 곡식을 운반하는 기구 등과 디딜방아를 찧는 방도, 연자방아를 찧는 방법 등이 가지가지로 정묘하고 주밀하여 힘들이는 것은 적어도 거두는 이득은 지극히 많다. 이런 것들은 불가불 본받고 제조해서 농업을 발전시키는 보조책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잠직(蠶織)하는 종류로 말한다면, 대방거(大紡車 실을 자아내는 큰 물레)ㆍ소방거(小紡車 실을 자아내는 작은 물레)ㆍ승경거(繩經車)ㆍ인경거(紉經車)ㆍ남소거(南繅車 고치에서 명주실을 켜는 물레)ㆍ북소거(北繅車)ㆍ목면경상(木綿經床)ㆍ목면선가(木綿線架)ㆍ방거(紡車 실을 자아내는 물레)ㆍ낙거(絡車 실을 감는 얼레) 등이 있는데, 실을 자아내서 잘 솔질하여 신속하게 베를 짜내는 것이 우리나라의 방직술(紡織術)에 비교하면 신속할 뿐만이 아니다. 이제 만약 이런 제도들을 배워 익힌다면, 아낙네들의 방직술의 정교(精巧)하고 민첩함이 어찌 오늘날에 비하겠는가.
【문】: 중국에서 전답을 가꾸는 농기구와 잠직(蠶織)하는 일 등이 아무리 정교하고 신속하다 할지라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어떻게 그 제도들을 자세하게 알아서 본받아 익히겠는가.
【답】: 그 규구(規矩)와 제작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옛사람들의 글에 자세히 쓰여 있으니, 그 방법에 따라 도형(圖形)대로 본떠서 제작한다면 무엇이 어렵겠는가.
【문】: 아무리 문자와 도식(圖式)의 모양을 따라 제작하더라도, 어떻게 본래의 제도에 틀리지 않고 사용에 알맞을 수 있겠는가.
【답】: 참으로 솜씨가 좋은 장수(匠手 목수)를 얻어 방법대로 제작한다면, 어찌 사용하지 못할 이치가 있겠는가. 예를 들어 혼천의(渾天儀 천문을 관측하는 기구)ㆍ편종(編鐘)ㆍ편경(編磬)ㆍ방향(方響 악기이름)ㆍ불랑기(佛狼機 대포(大砲) 이름), 베틀로 짜낸 경단(卿緞 비단 이름), 흙에 새겨서 제조한 활자(活字), 유리와(琉璃瓦)ㆍ징니연(澄泥硯 수비(水飛)한 흙으로 구워서 만든 벼루) 등으로 말하더라도, 모두 중국의 제도를 본받아 제작한 것이지만, 조금도 틀린 점이 없는 것들이다. 그리고 풍토(風土)가 같지 않고 물성(物性)이 다르기는 해도 중국 산동성(山東省)의 배나무ㆍ대추나무ㆍ복숭아나무ㆍ석류나무 등 꽃이 피는 과실나무를 민성휘(閔聖徽)가 배로 운반하여 임천(林川) 지방에다 심었는데, 그 빛깔이나 맛이 중국에서 생산된 것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 현재 경기 지방에도 하남성(河南省)에서 새로 옮겨다 심은 향수리(香水梨 배나무 일종)가 열매를 맺은 것이 있고, 요동(遼東) 지방의 백송(白松)도 종자를 가져다가 심었는데 자라고 있다. 식물들도 옮겨다 키울 수 있는데, 하물며 일상 생활에 사용하는 도구들이야 제조하기 어려울 이치가 어디 있다고 사용하지 못할 염려가 있겠는가.
【문】: 농기구들은 본시 우리나라에서도 전하여 오는 것이 있는데, 하필이면 중국의 제도를 새삼 익힐 필요가 있겠는가.
【답】: 중국의 뇌사(耒耜) 따위의 물건들은 모두 성인(聖人)의 창안에서 나온 것이어서, 우리나라의 농기구들을 중국 것에다 비교하여 보면 결국 둔하고 모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공장이 그 일을 잘하려면 먼저 그 도구를 예리하게 만들어야만 할 것이다. 더구나 그 형식 제도가 간편하고 효능이 매우 신속한데, 그를 본받아 익혀서 전답을 가꾸더라도 안될 것이 어디 있는가.
【문】: 제작을 아무리 잘한다 해도 토양의 성질이 서로 같지 않아서 우리나라 땅에 사용하면 우리의 농기구보다 꼭 낫지도 않을 것이다.
【답】: 흙의 성질이 서로 같지 않다고 하더라도, 흙을 다루는 법은 오직 농기구가 정교한 데에 있을 뿐이다. 이제 남방과 북방의 농기구로서 강유(剛柔)의 제도가 다른 것들을 구비하여 우리나라 땅에다 사용한다면, 어찌 우리나라에 전해오는 둔한 농기구보다 낫지 않겠는가.
【문】: 수리(水利)가 전답 농사의 근본이라고는 하지만, 우리나라의 가난한 백성들이 어떻게 이런 기계와 재력(材力)을 구비하여 중국 사람들처럼 물을 끌어다가 관개(灌漑)할 수 있겠는가.
【답】: 중국의 농민들이라고 모두가 부자이겠는가. 사민(四民)이 한번 나누어져서 사람들이 자기의 직업을 소중하게 여기게 되면, 저절로 공비(工費)를 아끼지 않고서 황무지를 개간하여 물을 끌어대는 사람이 있게 될 것이며, 사람들이 이미 농사에 힘쓰게 되면 한 치의 땅이라도 황금처럼 여겨서 반드시 지력(地力)을 다 이용하고야 말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중국 강소성(江蘇省)과 절강성(浙江省)의 경우를 보면, 그곳 백성들은 떼[筏]를 만들어 웅덩이나 늪에 띄우고, 그 위를 줄풀과 진흙으로 바른 다음, 그 진흙 위에다 볍씨를 심고 있는데 그 벼가 아주 무성하게 자란다. 이것이 이른바 가전(架田)이라는 것이니, 이처럼 하여야만 비로소 농업에 노력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같이 되는 데에는 다른 방도가 없다. 백성들의 풍속이 일변(一變)하여 농사에 힘쓰면 모든 일들을 저절로 본받고 익히기 마련일 것이니, 이는 필연적인 이치인 것이다. 더구나 편향(編鄕 고을을 편성함)과 편리(編里 마을을 편성함)의 제도가 이루어지면, 백성들이 비(比)ㆍ여(閭)ㆍ족(族)ㆍ당(黨)의 의리가 있어서 반드시 마음과 힘을 합하여 이런 일들을 함께 꾸려가게 될 것이다. 중국에서는 정전(井田)이 폐지되기는 했어도 백성들의 풍속이 서로 돕고 구원하여, 이로운 것은 부흥시키고 해로운 것은 제거해 버리는 일들을 함께 꾸려가고 있으니, 지금까지도 정전에서 함께 생활하던 때와 다름이 없는 셈이다.
【문】: 백성들이 부지런히 뽕나무와 목화를 재배한다면, 명주와 무명이 자연히 갑절이나 풍성하게 될 것인데, 어째서 새삼 중국의 방직 기구들을 제조할 필요가 있는가.
【답】: 예를 들어 목화의 경우를 보면, 문익점(文益漸)이 목화씨를 얻어온 뒤에 그의 처제(妻弟)인 정(鄭)씨를 가진 사람이 스스로 지혜를 짜내어 목화씨를 빼내는 교거(攪車 씨아)와 탄궁(彈弓 솜을 타는 활) 등을 만든 다음에야, 비로소 베를 짜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기계들은 둔하고 졸렬하여 끝내 활용되기에 부족했다. 실을 다루는 방법의 경우, 중국 사람들은 날과 씨의 두 실을 먼저 다루고 목면선가(木綿線架)ㆍ목면경상(木綿經床)ㆍ직기(織機 베틀) 등을 사용하여, 실을 뽑아 회전시켜 감은 다음에 풀을 묻혀 잘 솔질한다. 그리고 다시 위거(緯車 물레)에 올려 가는 대통에다 실을 감고 이를 북[梭]에 넣어서 베를 짜내는데, 그 제도가 극히 신속하고 교묘하며 실 또한 선명하고 가늘면서도 질기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런 방법을 몰라서 손으로 실을 감아 흙덩이처럼 뭉쳐가지고 베를 짜내니, 노력이 매우 많이 들면서도 일이 더디고, 사용하는 풀이 묽고 미끄러운 탓으로 실이 허다히 끊겨서 베의 품질도 거칠고 얇게 되니, 어찌 애석하지 않는가.
【문】: 정사(政事)와 전장(典章) 등은 그런 대로 중국의 제도를 모방해도 되겠지만, 이런 따위의 일에 있어서는 본시 토속(土俗)이 있으니 새삼 새로운 제도를 익힌다는 것은 결국 일만 많아지게 할 것이다.
【답】: 이것 역시 비루한 풍속에 얽매인 의논이다. 우리나라의 생활 수단은 해양(海洋)의 여러 나라들처럼 상업을 하여 생활하는 것이 아니라, 농사를 짓고 베를 짜는 것이 곧 본업인 것이다. 그러므로 수고를 적게 들이고 이익을 많이 얻는 방법을 들었으면, 선비와 백성들을 개도하여 각기 본업에 힘쓰도록 하는 것이 왕정(王政)의 중요한 일이 아니겠는가.
아, 그대가 이 일에 난색을 표하는 뜻을 알 만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실사(實事)에는 전혀 마음을 두지 않는 까닭에 대체로 중국의 물화 가운데 장렴(粧奩 화장하는 제구)ㆍ완호(玩好 노리개) 등과 보화(寶貨)ㆍ진패(珍貝 진귀한 패물) 등은 꼭 구하고 맞추어서 욕심을 채우지만, 이런 일들에 있어서는 백성의 생활에 관계되는 것이어도 자기 한몸에는 대단히 긴요하지 않기 때문에 그를 오활하게 여기지 아니하면 반드시 일을 많이 저지른다고 한다. 이는 모두 전부터 내려온 우리나라 풍속의 고질적인 병통인 것이다.
【문】: 그대가 논의에서는 우리나라 풍속이 무무한 것을 많이 흠잡고 있는데, 중국의 제도는 대체로 정밀하다면 우리나라의 질박한 풍속을 가지고 어떻게 그와 흡사하게 익힐 수 있겠는가.
【답】: 우리나라 사람들이 중국의 제도를 본받고 익혀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모두 지엽적인 것이었다. 참으로 실사(實事)를 가지고서 개도한다면, 어찌 거부될 염려가 있겠는가. 대저 고려(高麗)의 제도를 신라(新羅)에다 비하면 문명한 편이고, 지금 사대부들의 풍기나 안목을 고려에다 비하면 또 조금 빈빈(彬彬)한 편이다. 다만, 걱정스러운 점은 근본적인 것은 버리고 지엽적인 것을 숭상하며, 허명(虛名)에만 치달리고 실사(實事)가 없는 점이다. 지금 만약 이런 풍속을 바꾸어 미혹했던 길을 깨우쳐 준다면, 형세에 따라 잘 개도되어 반드시 그 효험이 있을 것이니, 이것이 참으로 제(齊) 나라가 변하여 노(魯) 나라에 이르고, 노 나라가 변하여 도(道)에 이르는 형세이다.
[주D-001]오호(五胡) : 중국 한(漢)ㆍ진(晉) 시대에 북방에서 중국으로 이주해 온 5종의 이민족으로, 곧 흉노(匈奴)ㆍ갈(羯)ㆍ선비(鮮卑)ㆍ저(氐)ㆍ강(羌) 등을 말한다.
[주D-002]전경(專經) : 조선 시대의 전경 전강(專經殿講)의 준말. 1월ㆍ4월ㆍ7월ㆍ10월에 문관으로는 통정대부(通政大夫) 이하 37세 미만의 당하관(堂下官)과, 무관으로는 40세 미만으로 전에 동반(東班)ㆍ서반(西班)의 실직을 지냈던 사람 또는 현재 군무에 봉직하고 있는 사람 중에서 선발하여, 문신은 오경(五經), 무신은 무경칠서(武經七書) 등으로 시험을 보이던 것을 말한다.
[주D-003]삭서(朔書) : 조선 시대에 40세 이하의 당하(堂下) 문관을 승정원(承政院)에 초계(抄啓)하여, 매달 초하룻날에 해서(楷書)ㆍ전서(篆書) 등을 시험보이던 것을 말한다.
[주D-004]시사(試射) : 조선 시대에 매달 초하룻날에 당하(堂下)의 문관과 일반 무관들에게 궁술(弓術)을 시험보이던 일.
[주D-005]정중(庭重) : 정시(庭試)와 중시(重試)의 준말. 정시는 나라에 경사(慶事)가 있을 때에 대궐 안에서 보이던 과거(科擧)이며, 중시는 문과(文科) 당하관(堂下官)을 위하여 10년에 한 번씩 실시한 시험으로, 이에 합격하면 당상(堂上) 정3품의 품계로 승진시켰다.
[주D-006]발영(拔英) : 발영시(拔英試)의 준말로, 조선 시대에 문관 정2품 이상에게 보이던 시험.
[주D-007]이여송(李如松) : 명 나라 사람 성량(成樑)의 장자(長子)이며, 자(字)는 자무(子茂)로 용감선전(勇敢善戰)하였다. 우리나라 임진왜란 때에 구원병의 총지휘관으로 파견되어 와서 왜를 토평하는 데 공이 컸다.
[주D-008]순화각법첩(淳化閣法帖) : 송 태종(宋太宗) 순화(淳化) 3년에 삼관서(三館書) 및 한(漢) 나라의 장지(張芝)ㆍ최원(崔瑗), 위(魏)의 종요(鍾繇), 진(晉) 나라의 왕희지(王羲之)ㆍ왕헌지(王獻之)ㆍ유량(庾亮)ㆍ소자운(蕭子雲), 그리고 당 태종(唐太宗)ㆍ당 현종(唐玄宗)ㆍ안진경(顔眞卿)ㆍ구양순(歐陽詢)ㆍ유공권(柳公權)ㆍ회소(懷素)ㆍ회인(懷仁) 등의 필적(筆蹟)을 선발 간행하여 순화각(淳化閣)에 소장한 필첩을 말한다.
[주D-009]태청루첩(太淸樓帖) : 송(宋) 나라 철종(哲宗) 원우(元祐) 5년에 비성(祕省)에서 순화각법첩(淳化閣法帖)에 누락된 유묵(遺墨)들을 석각(石刻) 간행하자고 주청하여, 철종의 윤허로 시작해서 휘종(徽宗)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끝마쳐 태청루에 소장한 필첩을 말한다.
[주D-010]필진도(筆陣圖) : 글씨를 쓰는 법을 설명한 필첩으로서, 혹은 진(晉) 나라 위부인(衛夫人)의 작품이라고도 하고, 혹은 왕희지(王羲之)의 작품이라고도 한다.
[주D-011]칠월편(七月篇) : 원(元) 나라 조맹부(趙孟頫)가 쓴 필첩의 이름.
[주D-012]선염(渲染) : 미술(美術) 용어로서, 화면(畫面)에 물을 칠하고 채 마르기 전에 붓을 놀려서 몽롱(朦朧)하여 침중(沈重)한 묘미를 나타내는 화법(畫法)을 말한다.
[주D-013]사생(寫生) : 실물이나 실경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화법을 말한다.
[주D-014]소학계(小學稧) : 조선 연산군(燕山君) 때 강응정(姜應貞)이 주동이 되어 만든 계로서, 《소학》의 모든 범절을 몸가짐의 바탕으로 삼고자 한 모임이다. 그의 동지로는 안응세(安應世)ㆍ홍유손(洪裕孫)ㆍ김굉필(金宏弼)ㆍ이종윤(李宗允) 등인데, 대개 무오사화에 희생되었다.
[주D-015]현량과(賢良科) : 조선 중종(中宗) 14년에 조광조(趙光祖)에 의하여 실시된 과거(科擧)로서, 한(漢) 나라의 현량방정과(賢良方正科)를 본받아 경학(經學)에 밝고 덕행이 높은 사람을 관리에 등용하기 위하여 마련되었다. 그 후 조광조가 기묘사화(己卯士禍)에 화를 당하자 현량과도 폐지되었다.
[주D-016]윤회(輪回) : 불교의 말로서, 수레바퀴가 끊임없이 돌듯이 중생(衆生)의 생명도 죽어서 다시 태어나고 또다시 죽어 생사(生死)가 끝없이 반복된다는 것을 말한다.
[주D-017]수책(水柵) : 목책(木柵)으로 시냇물을 막아 관개수(灌漑水)로 이용한 물울타리.
[주D-018]가조(架槽) : 지상(地上)에 가설(架設)하여 물을 끌어오는 홈통.
[주D-019]길고(桔橰) : 돌을 매달아 그 무게를 이용하여 물을 긷는 두레박 틀.
[주D-020]녹로(轆轤) : 도르레로 물을 긷는 두레박 틀.
[주D-021]수배(水排) : 물의 힘을 이용하여 숯불을 일으키는 풀무.
[주D-022]번거(翻車)ㆍ통차(筒車) : 모두 양수(揚水)하는 무자위를 말한다.
[주D-023]우예 수차(牛曳水車) : 소의 힘으로 돌려서 양수하는 무자위.
[주D-024]나전 통차(騾轉筒車) : 노새의 힘으로 돌려서 양수하는 무자위.
[주D-025]수전 고거(水轉高車) : 물의 힘으로 돌려서 양수하는 무자위.
[주D-026]괄수 윤거(刮水輪車) : 사람의 힘으로 돌려서 양수하는 무자위.
제10권 법도를 시행할 수 있는지를 총론함
【문】: 만약, 그대에게 오늘날의 폐단을 구제하게 한다면, 그대가 논의한 법도대로 당장에 거행 조치하겠는가.
【답】: 그렇게는 시행할 수 없다.
【문】: 그 까닭은 무엇인가.
【답】: 의가(醫家)에는 본시 겉과 근본을 다스리는 이론이 있는데 진정 시기에 따라 적절히 조처하는 의리로 말한다면, 이것 또한 근본을 다스리는 논의가 되겠다. 그러나 목전의 폐단을 구제하는 데에는 아마도 별개의 의리가 있을 것이니, 이런 일들을 무리하게 시행해서는 안 될 것이다.
【문】: 그 의리를 듣고 싶다.
【답】: 국가를 다스리는 체제에는 본시 완급(緩急)과 선후(先後)의 차례가 있다. 오늘날의 일로 말한다면, 당연히 수십 년 동안 내려온 규모를 가지고 그대로 따라서 시행하되, 국가의 체제가 어느 정도 존중되고, 백성들의 뜻이 어느 정도 안정되고, 사대부들의 염치(廉恥)가 지나치게 전도된 처지에 이르지 않고, 장상(將相)이나 유사(有司)가 대체로 그 체통을 각기 지켜서, 모든 정치 체제가 너무 흔들리거나 전도된 처지에 이르지 아니하여야만, 비로소 말단을 다스릴 처방을 낼 수 있는데, 그 요체는 다음 조목에 불과하다. 노성(老成)한 사람에게 위임하고, 옛법을 준수하여 신기하고 듣기 좋은 의논에 동요되지 말며, 유명무실(有名無實)한 일도 저지르지 말아서, 조정의 체통으로 하여금 차츰 옛모습을 되찾도록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문】: 이것이 오래도록 태평을 이루고 영구히 안정할 수 있는 방법이겠는가.
【답】: 말단만을 다스리고 근본을 다스리지 않는다면, 옛날 그대로 침고(沈痼)해질 뿐인데 이것은 이른바 치표(治標)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