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기억만으로는 아쉬웠던 발자취를 복원한 책추천! 「편지」 (정국영 글 / 보민출판사 펴냄)
국민학교(초등학교) 高學年이 되었을 때 누나는 이미 고등학생이었다. 내내 시행되던 중학 입시가 우리 때부터 폐지된다는 발표가 있었고 입시에서 해방된 우리는 일찍 歸家할 수 있었다. 골목에서 친구들과 노는 게 일이었지만 어쩌다 집에 있게 되면 혼자 놀아야 해서 소일거리를 찾던 어느 날 책꽂이에 꽂힌 누나의 교과서에 눈길이 갔고 제일 만만한 게 국어책이어서 꺼내어 읽기 시작했는데 황순원의 소나기를 읽고 충격을 받았다. 계집애가 왜 허망하게 죽어야 했는지 너무 슬펐기 때문이다. 소설을 읽었지만 나는 소나기가 문학작품이 아닌 事實 현실에서 있었던 사건으로 받아들였고 훗날 내 교과서로 읽을 때까지도 그 감정을 간직하고 있었다.
오학년 때 차분한 모습의 육학년 선배를 바라보던 일 우연은 아니었나 보다. 누나의 교과서를 다 읽은 다음 집에 있던 모든 문학작품을 읽게 된다. 이해하지 못하는 게 당연했지만 그래도 다 읽었다. 그때 읽은 김형석 교수의 수필집에서 발췌한 몇 문장 지금도 인용한다. 고등학교 1학년이 끝나가던 2월 봄방학 전 국어 선생님이 서울대 국어시험 문제라며 尹東柱 詩人의 “별 헤는 밤”을 칠판에 무작위로 쓰시며 맞추어 보라고 하셨다. 쉽게 맞추었지만 또 한 번 놀라야 했다. 詩人의 마음을 헤아리며 마음 아팠고 별을 사용한 여러 문장은 밤하늘의 별을 다시 바라보게 하였다. 당장 東柱의 詩集을 사서 읽기 시작하였고 우리 近代文學 시인들의 시집을 찾아 읽었다. 靑馬 柳致環의 詩에서도 많은 감명을 받았다.
글에 누군가의 영향이 끼쳐 있다면 靑馬의 詩일 것이다. 그중 마음에 드는 詩들을 골라 별도의 노트에 옮겨 적었다. 방학 때마다 한두 권씩 직접 쓰니 저절로 외워졌고 외워지니 이해도 쉬웠다. 몇 권은 누군가에게 선물했는데 이젠 기억나지 않는다. 고1 때부터 詩를 쓰려 했다. 보내지 못할 편지 대신 詩라는 형식으로 심정을 표현하고 싶었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여기 저기에 흔적이 남아 있다. 그 당시에 쓰여진 글들은 스스로에게도 마음에 들지 않아 감추었고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못했다. 대신 편지는 많이 썼다. 보내지 못하고 아직 간직하고 있는 편지는 이제 다시 읽어보며 무슨 생각이었는지 위로하고 싶다. 좋아하는 사람에게도 말해보고 싶은 사람에게도 열심히 썼다. 대부분 긴 편지였지만 언젠가부터 문장을 줄이려는 노력도 했다. 편지 대신 엽서도 이용했기 때문이다. 어쩌다 싯귀절이 떠오르면 여기 저기 메모를 해두었고 편지를 쓰는 과정에서 마음에 드는 문장이 나오기도 했다.
편지라는 제목을 쓰기로 한 것은 대부분의 글이 편지 쓰는 과정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생각하며 편지를 썼지만 간혹 자신이 주체할 수 없는 상태에서 평소에 써지지 않는 표현이 등장하기도 했다. 편지지에 옮겨 적는 과정에 그 글을 따로 정리해두었다. 결혼을 하고 아이가 태어나고 다시는 써질 것 같지 않아 후에 아이들에게 남겨줄 요량으로 시집을 꾸민 적이 있다. 거짓말처럼 글이 써지지 않았고 2001년을 마지막으로 잊고 살았다. 쓰던 물건을 잘 버리지 않는 성격이라 많은 것들을 지니고 있었다. 육십 나이를 바라보며 자료들이 걱정되었다. 나에겐 소중하지만 다른 이에겐 필요 없는 물건 내가 떠나고 나면 누가 아껴줄 것인가.
사진과 필름, 편지, 일기장과 다이어리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많았지만 세월을 투자하니 끝이 보였고 확인하며 파일로 만들었다. 압도적으로 편지가 많다. 편지를 쓰기 위해 草稿를 썼기에 보낸 편지 대부분을 확인할 수 있었고 그러면서 갑자기 글도 쓰여졌다. 기억이 되살아나며 그 공간을 다녀올 수 있었고 그러면서 단절된 기억을 이었다. 일기장과 초고를 적은 노트를 비교하며 기억하지 못한 날들을 기억 속에 편입시켰다. 기억만으로는 아쉬웠던 발자취를 복원하며 스스로 위로를 받았다. 흩어진 기억들을 모아보니 치열하게 살고 있었고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해 안타까워하면서도 불행이라 여기지 않았다. 자신의 행동에 결코 후회하지 않겠노라 다짐했기에 세상 살기 쉽지 않았지만 나와 因緣이 닿았던 모든 이에게 後悔와 未練 그리고 悔恨이 있었음을 전하며 感謝와 慰勞의 말씀 전한다.
<글쓴이 소개>
글 정국영
鄭國榮(筆名 : 雲影)
1957년 11월 大田出生
1976년 01월 忠南高等學校 卒業
1980년 02월 忠南大學校 工科大學 精密機械工學科 卒業
1981~1998년 (株)韓國光電子硏究所 勤務
2000~2024년 (株)탑일렉트론 勤務
<본문 詩 ‘알 수 없어요’ 전문>
알 수 없어요. 그 마음을
해 지고 달 떠서 별이 빛나도
알 수 없어요. 그 마음을
달 지고 해 떠서 별이 흐려져도
시간이 흘렀나요. 마음이 흘렀나요.
정답던 그 마음 어느 봄날 꿈인가요.
뛸 듯이 기쁘게 한 그 편지
한없이 슬프게 하는 그 마음
일곱 빛깔 무지개처럼 알 수 없어요.
알 수 없어요. 그 마음을
해 지고 달 떠서 별이 빛나도
알 수 없어요. 그 마음을
달 지고 해 떠서 별이 흐려져도
이 책 「편지」는 글쓴이가 그동안 살아오면서 썼던 일기와 편지, 그리고 시(詩짧)들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엮은 것이다. 글쓴이는 지난 시절 이러한 글을 지금까지 보관하며 추억을 소중히 여기고 있다. 어쩌면 글쓴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들 또한 지난날 이와 같은 추억 하나쯤은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그 울림이 결코 얕지 않은 다양한, 바로 우리네 사랑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는 이 책에서 그저 덤덤한 이야기를 모았을 뿐이라고 말하는 글쓴이이지만, 그가 풀어내는 이야기의 필력이 예사롭지 않음을 금방 느낄 수 있게 될 것이다.
(정국영 글 / 보민출판사 펴냄 / 492쪽 / 국판형(148*210mm) / 값 15,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