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은행설립의 역사를 돌아보면, 개항 전에 최한기가 유럽의 은행, 보험회사 등을 소개한 적이 있다. 또 1882년 9월 22일 유학(幼學) 고영문이 상회소와 국립은행을 설립핮자고 건의했다. 이후 고종은 은행을 설립하고 새로운 화폐를 발행하려고 수차례 시도했다.
1894년 은본위제의 새로운 화폐제도를 제정하면서 은행을 설립하려고 하였으나 결실을 보지 못했다. 1878년부터 일본의 국립제일은행이 개항장마다 지점이나 출장소를 설립하였는데, 이것이 한국인들의 은행 설립을 자극했다.
갑오개혁 이후 왕실과 고위관료가 회사, 은행, 공장의 설립에 참여함으로써 그것을 지원하는 가운데, 한국인 은행이 생겼다. 1896년 개화관료가 주도하고 상인이 참여하여 설립한 대조선은행소(大朝鮮銀行所)가 그것이다.
이 은행은 정부자금의 활용에 주력하다가 정치적 요인으로 영업이 부진해져 1901년 1월 폐점했다. 1897년 개화 관료와 신흥기업가에 의해 설립된 한성은행은 각지에 설치한 지점을 통해 조세자금을 받기도 하였으나, 특권이 소멸되고 영업이 부진한 상태에서 1903년 공립한성은행으로 개칭되었다.
대한천일은행
은행설립 청원서
개항기에 가장 활발히 영업한 은행은 김두승 김기영 백완혁 조진태 등 상인들이 발기하고 황실이 지원한 대한천일은행이다. 1899년 1월 은행설립청원서에는 ‘화폐융통은 상무(商務)흥왕(興旺)에 근본’이라는 창립이념이 제시되어 있다.
주식을 1120주 발행하여 자본금 5만 6000원(元)을 모집할 계획이었는데, 1903년 불입자본금이 5만원을 넘어섰다. 황실예금과 조세자금을 주요 원천으로 하여 조선상인에 대한 어음할인 등 단기 대출을 위주로 하고 상업, 금융업 종사자에 주로 대출하며, 순이익의 90%를 배당했다.
1903년 대출 잔고가 70만원을 넘었고, 그것은 일본계 은행 총대출금의 8%에 해당했다. 대한 천일은행은 1905년 경제위기와 화폐개혁으로 휴업하였다가 1년 뒤인 1906년 자본금을 15만원으로 늘리고 경영진을 쇄신하여 민간은행의 면모를 갖추었다.
대한천일은행 창립기의 문서가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는데, 그 중 사개치부법에 의해 작성된 장책(粧冊) 등이 연구자들의 주목을 끌어왔다. 개항 전 조선에서 개성상인을 중심으로 고유의 복식부기법이 사용되었기에, 민족은행들은 서양식 장부정리방법을 도입하기 전에도 은행의 운영을 원활히 할 수 있었다.
1908년 10월 10일자 황성신문은 안국선이 중앙학회에서 행한 ‘우리 경제의 전도’라는 연설을 실었다. 그는 “국가의 전도가 경제에 의하여 유지될 것이다”고 하면서 “우리나라 은행으로 말하면 신용대부는 약간밖에 없고 모두 담보품을 전당잡아 대부하는 때문에 전당포와 다를 바 없으며 이 또한 전국 상업지에 모두 있는 것이 아니라 서울 및 주변 3, 4처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민족계 은행이 이런 한계를 가졌으나, 근대 금융의 출발을 이루었다는 역사적 의의도 무시할 수 없다.
대한천일은행은 1911년 조선상업은행, 1950년 한국상업은행이 되었다가 1999년 한일은행과 합쳐 한빛은행이 되고 2002년부터 우리은행으로 개칭하였다.
[이헌창 고려대교수ㆍ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