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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가을학기 개강예배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말씀 / 요한복음 21:1-17
요절 / 요한복음 21:15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오늘 본문은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을 기록하고 난 후, 꼭 덧붙이고 싶어 한 에필로그 격의 내용입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우리는 예수님이 체포당하시고 대제사장 앞에서 심문받으실 때,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벌벌 떨며 세 번이나 부인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나머지 제자들 또한 뿔뿔이 다 흩어져 버렸습니다. 가장 가까운 제자들의 배반을 겪고 있는 예수님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고독하고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일은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에게도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실패요, 평생 잊지 못할 마음의 상처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상처 난 그들의 마음을 치료하시고 사랑의 관계성을 맺어주시고 다시금 사명을 맡겨주십니다. 사도 요한에게는 이 일이 깊은 인상으로 남았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동안의 신앙생활과 사회 경험 속에서 받은 크고 작은 상처들이 있고 실패의식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나주시고 회복시켜 주십니다. 이 시간 우리의 허물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을 깊이 만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과 제자들의 사랑 나눔의 현장인 디베랴 호수로 가보겠습니다. 디베랴 호수 현장에는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었습니다. 남자들 일곱만 덩그러니 앉아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에도 만나긴 했지만, 예수님을 통해 이스라엘 왕국을 이루어보려 했던 그들의 꿈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착잡하고 그들은 백성들에게 죄인의 제자들로 인식되어 있을 것이기에 그들의 앞으로의 삶 또한 막막했을 것입니다. 이런 그들에게도 먹고사는 현실 문제는 여전히 그들 앞에 놓여 있습니다.
베드로가 침묵을 깨고 말합니다.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갈라네.” 그러자 다른 여섯 제자도 “우리도 함께 가세”하며 따라 나섭니다. 오랜만에 제자들은 갈릴리 호수에 그물을 던집니다. 그런데 그날 밤 고기잡이 성적표는 참담합니다.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새벽녘, 해가 밝아 오고 그물을 정리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때 한 사람이 바닷가에 서 있습니다. 그는 사랑의 눈빛으로 제자들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아직은 어두워서인지 멀어서인지 아무도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분이 100m 남짓 떨어진 곳에서 외치며 물어봅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헬라어 원문을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얘들아, 고기를 하나도 못 잡았구나. 그렇지?” 제자들은 “예, 못 잡았어요. 고기가 없어요” 대답합니다. 그 사람이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져봐. 그러면 잡을 수 있을 꺼야” 외쳐 말합니다. 제자들이 시키는 대로 순종해서 해 보았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습니까?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고기가 잡힙니다. 11절에 보면, 어른 손바닥만 한 큰 물고기가 153마리나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이 장면을 보면, 무엇이 떠오르십니까? 3년 전, 누가복음 5장 사건입니다. 갈릴리 호수는 베드로에게 아름다운 추억이 있는 곳입니다. 제자로 부름받은 장소입니다. 그때도 베드로는 밤새 수고했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예수님이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해 주셨을 때 그 말씀대로 순종해서 해봤더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물고기들을 잡게 되었습니다. 이 기적을 통해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어렴풋이 깨달은 베드로는 예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 말씀하시며 제자 삼아 주셨고, 그에게 ‘사람 낚는 어부’ 즉 영혼들을 섬기는 목자의 삶을 살아가도록 사명을 주셨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베드로를 처음 부르실 때의 그 장면을 재현하신 것 같아 보입니다.
사도 요한은 3년 전, 예수님이 행하신 똑같은 일을 떠올렸고 지금 말씀하고 계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너무도 반갑고 놀라워 베드로에게 소리쳤습니다. “주님이시다.” 이 말을 듣자마자, 베드로는 바다로 뛰어들어 헤엄칩니다. 뛰어들기 전, 벗고 있던 겉옷을 입습니다. 예수님 앞에 예의를 갖추기 위해서입니다. 베드로가 얼마나 예수님을 사랑하고 존경하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다른 제자들도 작은 배를 타고 물고기 든 그물을 끌고 옵니다. 그들이 육지에 올라와 보니 숯불이 빨갛게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방금 잡은 생선을 가지고 오게 해서 즉석 생선구이를 만들어주십니다. 코끝을 자극하는 떡 굽는 냄새, 생선구이 냄새에 제자들은 침을 꼴깍꼴깍 삼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와서 조반을 먹으라.” 예수님이 제자들을 다독거리면서 더 바짝 다가와 식사를 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선뜻 식사 자리에 다가가지 못했습니다. 배는 고팠지만 서로 눈치만 보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심문받으실 때 대제사장 집에서 숯불을 쬐면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것이 생각나 도저히 먼저 손을 내밀 수 없었습니다. 베드로의 마음속에는 죄의식과 함께, 또 제자로서의 삶을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요즘 많은 청년들이 몇 번 취업에 실패하고 나면 자존감이 현저히 떨어집니다. 나중에는 누가 어떤 자리를 소개해 준다고 해도 거부하기도 합니다. 대학 입시에 여러 번 실패하거나, 교회에서 제자 양성에 반복하여 실패한 경우도 대부분 비슷합니다. 또 하나님의 품을 떠나 죄 가운데 방황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의식과 실패의식, 낮은 자존감으로 인해 선뜻 나서지 못하고, 주님 앞에도 나아가지 못합니다. 실패를 많이 경험한 사람들은 상황을 바라보는 자세가 부정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나는 무엇을 해도 실패할 것이라는 생각이 자리 잡습니다. 이런 실패의식 때문에 숨게 됩니다. 현실을 도피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트라우마’라는 말을 씁니다. ‘상처’라는 의미의 헬라어에서 나온 용어입니다. 과거의 어떤 경험이 시각적으로 이미지화되어 기억 속에 저장되어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상처는 우리 일상생활을 지배하게 됩니다. 베드로 역시 수제자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엄청난 사건을 경험했기 때문에 큰 트라우마가 생길 법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예수님을 끝까지 지켜주지 못하고 함께 하지 못하고 두려워 세 번씩이나 부인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버리겠노라고 호언장담했었지만, 자신의 제자로서의 삶은 완전히 실패한 것입니다. 자기 내면에 큰 타격과 트라우마가 되었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이들 또한 베드로와 동일합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제자로서의 삶을 실패하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패의 그 지점, 원점처럼 보이는 그 지점에 주님이 함께하고 계십니다.
이런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이런 못난 놈들!” 책망하십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가가 못자국 난 손으로 떡과 생선을 떼어 친히 나누어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예수님 앞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예수님의 사랑에 말없이 눈물을 흘리며 예수님이 건네준 떡과 고기를 받아먹었습니다.
여러분! 이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없는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그들을 처음 부르실 때나, 그들이 예수님을 제자로서 따르는 데 실패한 지금이나, 예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13:8).”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신실하시고, 그분의 사랑 또한 언제나 변함없으십니다. 제자들은 제자의 삶을 실패한 것을 크게 생각하고 주님께 나아가지 못했지만, 그것은 예수님과 제자들과의 관계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그들의 모든 연약함과 부족함을 아셨고 그들의 실패와 실수도 다 알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을 위해 친히 십자가를 감당하시고 십자가에서 피흘려 주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사랑하시고 부르셨으며 그 부르심을 결코 후회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이 사랑의 예수님이 우리 신앙생활의 시작과 끝이며,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반석이 되십니다. 신앙생활에 있어 무언가를 이루고 무언가를 하는 것보다도, 예수님의 사랑을 깊이 경험하고 사랑의 관계성을 깊이 맺어가는 것이 훨씬 중요합니다.
지난 시간들을 돌아볼 때 우리도 제자들과 같이 사명에서 실패하고, 삶의 현장에서도 빈 그물만 건져 올릴 때도 많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우리 교회는 제자양성을 중점으로 여기는 모임으로 제자양성에 계속해서 실패할 때, 우리는 낙심하고 때로는 자포자기 생각으로 지내며 적당히 사명과 거리감을 두고 현실적인 생활만을 바라볼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현실 생활에서도 잘 풀리지 않을 때는 정말 막막하고 답답한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런저런 삶과 신앙에서의 실패로 인해 트라우마가 생기고, 우리는 예수님과 서먹서먹한 관계로 지낼 때가 많이 있습니다. 정말 내가 예수님을 사랑하는지, 예수님이 진짜 나를 사랑하시는지, 그저 그런 관계 속에 막연히 지낼 때가 많습니다. 이럴 때 우리 신앙은 형식적이 됩니다. 사무적이 되고, 해야 하니까 하는 피동적인 신앙생활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우리에게도 찾아오셔서 변함없는 사랑으로 영접해 주십니다. 우리를 위해 따뜻한 식사를 준비하시고 못자국 난 손으로 떡과 생선구이를 떼어주십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예수님과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성을 맺기를 원하십니다. 이 시간 예수님은 우리 각 사람을 초청하십니다. “와서 조반을 먹으라.” 이 같은 주님과의 사랑의 비취 파티는 우리의 기도 속에서 이루어질 수도 있고, 예배 속에서 이루어질 수도 있고, 우리 삶의 현장 속에서 이루어질 수도 있습니다. 주님과의 새로운 만남의 현장이 바로 본문의 비취 파티입니다.
우리는 살다 보면 실수할 수도 있고, 허물과 연약함을 보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존재가 못됩니다. 그것에 대해 예수님은 정죄하지 않으시고 넓은 어머니의 마음 품으로 안아주시고 섬겨주십니다. 우리 주님은 힘들어하는 자녀를 측은히 여기고, 정성 들여 따뜻한 밥 한 끼를 차려주시는 어머니처럼, 어루만져 주시고 힘을 주시고 일으켜 세워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변함없는 사랑이요, 끝없는 사랑이요,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그리고 먼저 찾아와 주시는 사랑입니다. 우리 삶에서 이 예수님과의 깊은 만남과 사귐이 있고, 지속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이제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 질문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사랑하느냐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예수님이 베드로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당신, 나 사랑해요?” 이렇게 묻는 것은 내가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묻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누구보다도 큰소리쳤던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제자로서의 처절한 실패를 경험했습니다. 지금 베드로에게 필요한 것은 회복입니다. 그 회복의 힘이 무엇일까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확인할 때, 그 주님을 신뢰하고 따라갈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돌아온 탕자의 비유’가 있습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인생의 밑바닥을 경험한 둘째 아들이 아버지 집으로 돌아올 때 어떤 생각을 하게 됩니까?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라 품꾼 중 하나로 여겨 달라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일컬음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들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것을 거부하고 집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어떻게 그를 맞아줍니까? 아들을 보자마자,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춥니다. 가장 좋은 옷을 입히고 손가락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깁니다. 그것만 한 것이 아닙니다. 살찐 송아지를 잡아다 최고급 스테이크로 잔치를 벌입니다. 낮은 자존감으로 두려워 벌벌 떨고 있는 그 아들에게 사랑을 아낌없이 보여줍니다. 이 모습을 보고 팀 켈러 목사님은 이 아버지를 ‘탕부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아버지가 탕자를 위해 아낌없이 낭비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만약 아버지가 소극적으로 대했다면, 탕자는 다시 떠났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를 다니면서 중요한 것 하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충분히 경험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을 충분히 경험하도록 돕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 베드로는 주님으로부터 그 사랑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각기 제 갈 길로 같던 탕자와도 같은 자들이었습니다. 지금도 연약하고 허물투성이입니다. 여전히 죄를 짓고 살아갑니다. 여전히 실수와 실패를 하며 살아갑니다. 때로는 두려움과 낮은 자존감과 실패의식으로 살아갑니다. 이런 우리를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입니다. 여러분! 이런 하나님의 사랑에 빠져본 적이 있습니까? 가장 중요한 경험은 다름 아닌,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지식이나 이론이 아닙니다. 실제적인 경험입니다. 우리는 때로는 실패해도 괜찮습니다. 주님의 제자로서, 또는 우리 현실의 삶 속에서 실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실패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를 더 귀한 하나님의 자녀들로 빚으시고 들어쓰시는 전환점이 되게 하십니다. 우리는 결코 실패로 끝날 존재들이 아닙니다. 낮은 자존감과 상처들을 안고만 살아갈 존재들이 아닙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실패를 기가 막히게 회복시키시고 여전히 사랑하시는 주님, 우리를 다시금 주의 제자로, 사명인으로 살게 하시는 주님을 만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잭 캔필드의 『따뜻한 영혼을 위한 101가지 이야기』에 ‘No Charge’가 있습니다.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는 엄마에게 어린 아들이 다가와 엄마에게 청구서를 내밀었습니다. 거기에는 잔디 깎은 값 5달러, 침대 정리 1달러, 심부름 값 50센트, 동생 돌본 것 20센트 등등, 총 4달러 75센트를 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를 읽어본 본 엄마는 펜을 들고 청구서 뒷면에 이렇게 적어 내려갔습니다. “엄마 뱃속에서 10달 동안 키워준 값 무료, 네가 아플 때마다 잠 못 자고 간호해 주고 기도해 준 값 무료, 수년간 너를 위해 투자하고 눈물 흘린 것 무료, 네 걱정으로 밤을 새운 것과 너의 장래를 위한 염려도 무료, 교육비 장난감 옷 등등 무료 ... 너를 위한 나의 모든 사랑의 값은 무료란다. 사랑하는 아들아.” 예수님은 우리를 예수님의 생명보다 더 사랑하셔서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려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원하실 수 있고, 사랑을 받으시는 것은 당연합니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왜 다른 제자들보다 더 주님을 사랑하는지 물으신 것일까요? 베드로는 예수님을 누구보다 더 사랑한다는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밤, 만찬장에서도 모두가 주님을 버릴지라도 자기만큼은 버리지 않겠다고 맹세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자부심이 처참히 무너지고 짓밟힌 상태입니다. 그는 전처럼 호언장담할 수 없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베드로가 앞으로도 제자로서의 삶을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베드로는 실패를 통해 더 이상 자신을 신뢰할 수 없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또 여기 ‘이 사람들’은, 헬라어 원어 성경으로 보면, ‘이것들’로도 해석될 수 있습니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특별히 구분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은 사람뿐만 아니라 돈, 명예, 권력, 쾌락일 수도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이 세상 그 무엇보다 주님을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물론 주님을 사랑하는 베드로의 마음 또한 진심입니다.
예수님은 두 번째 질문에서는 아무 비교의 대상도 정하지 않고 그냥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십니다. 세 번째도 같은 질문을 하십니다. 이에 베드로는 근심합니다. 예수님이 믿지 않으신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사랑을 의심한 것이 아니라, 베드로의 상처인 세 번 부인의 트라우마를 세 번의 사랑 고백으로 치유하시고 회복시켜 주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을 고백하는 베드로에게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이렇게 세 번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향한 사랑은 예수님의 양들을 향한 사랑으로 표현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어찌하든 예수님의 양들을 돕고자 합니다.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지속적으로 양들을 먹이고 돌보고 섬기는 일들에 헌신하게 하는 동력이 됩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에서 ‘어린 양’과 ‘양’으로만 구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헬라어 원어 성경을 보면, 이 양이라는 단어가 모두 다른 단어로 나옵니다. 처음에 사용한 어린 양은 ‘갓 태어난 양’을 말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말하는 양은 ‘성장기에 있는 양’을 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사용된 ‘양’은 ‘성장이 다 끝난 성인 양’을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양들을 사랑할 때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이나, 내 기호에 맞는 사람들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상황의 사람들일지라도 모두 예수님의 양으로 생각하고 사랑하고 섬기고 돌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의 크신 십자가의 사랑을 경험했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합니까? 그러면 그 사랑에 기초해서 우리가 주님의 양무리를 사랑으로 돌보고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에스겔서 34장 2절은 이스라엘의 목자들에게 말씀합니다. “자기만 먹는 이스라엘 목자들은 화 있을진저. 목자들이 양떼를 먹이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우리가 주님 주신 사명을 섬기는 것의 바로미터는 곧 예수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진정한 주의 제자로서의 회복은 사명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경험했다면, 그리도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이 맡겨주신 주님의 양들을 돌보고 먹이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 주님의 사랑이 느껴지십니까? 여러분은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우리가 주님을 향한 사랑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저는 왜 연약하고 능력 없는 저를 목자로 부르셨을까 종종 생각합니다. 솔직히 모르겠지만 제가 확실히 아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저의 수많은 허물과 연약함에도 주님이 저를 여전히 사랑하신다는 것과 저 또한 주님을 사랑한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흘려주신 보배 피로 나의 무지와 정욕과 부모님에게 받았던 상처와 운명주의로부터 해방시켜 주시고 참된 자유함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지금까지의 저의 삶을 섬세하게 인도해주셨고 풍성한 은혜들로 함께 해주셨습니다. 저는 연약하고 부족하고 때로는 주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살아갈 때도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다시금 먼저 말씀으로 다가와 주시고 저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들에 기초해 주님의 마지막 지상 명령을 따라 일생 주님의 영혼들을 섬기는 목자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또한 여전히 주님을 사랑합니다. 우리가 오직 주의 사랑에 매여 주님이 부탁하신 양 무리를 먹이고 돌보는 삶을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