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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즈피아니스트 정명수.©한국장애예술인협회
1985년 미숙아로 태어난 정명수는 세상 밖으로 나오자마자 인큐베이터로 들어갔다. 인큐베이터를 이용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큰 혜택이었지만 그것이 신생아의 눈에서 빛을 앗아갈 줄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신생아는 인큐베이터 안에서 세균 감염과 강한 빛의 노출로 시력이 점점 떨어졌다. 시력을 찾기 위해 수술도 하고 여러 가지 치료를 받았지만 다섯 살 무렵 시력이 완전히 상실되었다.
어린 명수는 시력 대신 소리에 의지해 세상보기를 해야 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꼭 소리가 나는 장난감만 갖고 놀았다. 소리로 재미를 찾았던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익힌 소리에 대한 감각은 그를 음악에 빠지게 했다.
작은 건반과의 만남
다섯 살의 어느 날 명수는 엄마와 외삼촌 댁에 갔다가 그곳에서 처음 건반 소리를 들었다. 소리에 이끌려 악기가 있는 곳으로 가서 오래도록 의자에서 내려오지 않고 놀았다. 명수가 너무 좋아하자 삼촌은 그것을 조카에게 선물했다. 그래서 그날 바로 그 악기를 집으로 가져왔는데, 그때부터 어린 명수는 하루 종일 작은 건반 악기를 치며 놀았다.
정식으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 것은 8세 무렵, 피아노학원에 다니면서부터이다. 악보를 볼 수 없었지만 피아노 선생님이 음을 들려주면 명수가 따라 치는 식으로 피아노를 배웠다.
다행히 소리에 대한 기억력이 좋아 얼마 지나지 않아 피아노를 익숙하게 칠 수 있었다.
“뭔가 집중해서 할 수 있다는 게 좋았어요. 재미도 있었고요. 청소년 시절 교회에 다녔는데, 교회에서 반주도 하고 행사 요청이 있으면 가서 연주도 했어요. 꾸준히 피아노를 연주할 기회가 있었어요. 제게는 정말 신나는 일이었지요.”
음원으로 그 당시는 테이프로 두세번 반복해서 음악을 들으면 악보를다 외울 정도로 음감이 좋았다. 급박하게 연주 요청이 들어오면 밤을 새워서 악보를 익히느라고 힘들었지만 그런 노력들이 쌓여 그를 음악인으로 만들었다.
재즈에 빠지다
명수는 한빛맹학교를 다니면서 안마를 필수 과정으로 배웠다.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 하니까 어쩔 수 없는 시각장애 학생의 필수 선택이었다.
한빛맹학교를 졸업하고 삼육대 작곡과에 입학했지만 그의 마음속 갈등은 점점 커져만 갔다. 틈틈이 하는 안마 일은 육체적으로도 힘들었지만, ‘이렇게 살다가 나란 존재가 그냥 잊혀지지는 않을까?’, ‘작곡이 내가 꼭 하고 싶은 것이 맞는 것일까?’ 스스로에게 묻고 답하기를 여러 차례, 고민 끝에 그는 일과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때부터 피아노만 쳤다. 연습실이 필요했는데, 누군가 실용음악학원에 가면 연습실이 있다고 하기에 물어물어 실용음악학원에 등록했는데 그곳에서 재즈를 처음 접하게 되었다.
“학원에서 재즈를 처음 들었는데 너무 좋았어요. 재미있게 배우고 있었는데 한 달 만에 학원 선생님이 그만두는 바람에 그때부터는 저 혼자 독학을 했어요. 밥 먹고 피아노 치고, 피아노 치고 밥 먹고 그렇게 하루 10시간 이상을 피아노만 붙잡고 있었죠.”
기타 연주. ©한국장애예술인협회
명수는 피아노는 물론이고, 기타를 비롯한 악기를 거의 독학으로 배웠다. 물론 처음 시작을 도와준 선생님들은 있었지만 익숙해질 무렵이면 유학을 가거나 학원을 옮겨가거나 하여 인연이 오래가지 못했다. 하나 하나 혼자 터득한 만큼 음악에 대한 애착이 크다.
슈퍼스타 정명수
음악을 체계적으로 배워 보고 싶어 2007년 서울예술대학교 실용음악과에 입학했다. 그것도 일반전형에 수석으로. 그는 그저 운이 좋았다고 겸손하게 말하지만 그의 실력은 이미 여러 방면에서 인정을 받고 있었다.
“대학에 와 보니 고마운 분이 너무 많더라고요. 악보를 보지 못하는 저를 위해 친구들이 악보를 들려주고, 시험 볼 때는 대필도 해 주고….”
그는 장애인 인터넷선교방송인 희망방송 소속 ‘희망새 중창단’의 앨범으로 데뷔했다. 시각장애인 3명과 지체장애인 한 명으로 구성된 희망새에서 2008년부터 2013년까지 부활절이나 크리스마스 때 교회와 선교단체, 보육원 졸업식, 대학 채플 시간에 축하공연을 하였고, 교도소에서도 반주를 했다. 그는 피아노뿐 아니라 드럼과 기타 연주 그리고 노래 솜씨도 수준급이다.
그러다 정명수는 난생처음 2010년 12월 10일 영등포아트홀에서 ‘정명수의 크리스마스 선물’ 이라는 개인 연주회를 가졌다.
“분위기 탓인지 저도 좀 흥분을 했었던 것 같아요. 오백여 명의 관객의 열기가 온몸으로 느껴졌거든요. 한 곡 한 곡연주할 때마다 박수를 아끼지 않고 보내 주셨어요. 무대 위에서 정말 행복했지요.”
TV프로그램 출연 당시 모습. ©한국장애예술인협회
정명수는 공연수익금을 가정 형편이 어려운 소아 안암환자 수술비로 사용될 수 있도록 기부를 했다. 스스로도 어려운 환경이지만 자신보다 더 힘든 사람들에게 기꺼이 자기가 가진 재능을 나누는 보람이 컸다.
그 공연이 계기가 되어 2011년 봄에는 SBS TV <스타킹>에 출연을 하여 한국의 스티비 원더라는 극찬을 받았고, 그해 가을에는 tvN <슈퍼스타K 3>에 출연하여 심사위원과 시청자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그 후 본격적으로 음악 활동을 하기 위해 2014년에 시각장애인계에서 음악의 신동으로 통했던 친구들과 ‘더블라인드’라는 4인조 밴드를 구성하여 연주와 노래 그리고 유연한 율동으로 아이돌 못지 않은 인기를 누렸다.
더 큰 꿈을 향하여
장애인으로 산다는 것은 불편은 기본이고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그래서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공연을 하기 위해 음향장비를 설치하다 전기에 감전될 뻔한 적도 여러 번, 지하철 역사에 발을 헛디뎌 떨어져서 위험천만한 상황을 겪기도 하고, 소리 신호 없는 횡단보도를 옆 사람 건너는 소리에 따라 걷다가 차에 치일 뻔한 아슬아슬한 순간들이 수없이 밀려왔다.
그럴 때마다 정명수는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넘겼다. 자기가 좋아하는 음악을 향한 꿈을 이루기 위해 좌절이나 포기는 사치였다. 음악을 통해 자신을 표현할 수 있게 되었고,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기쁨이 더 크기 때문이다.
음악 활동을 하느라고 2007년 입학한 대학을 2015년에 졸업했다. 그리고 4년제 경희사이버 대학교 실용음악과에 입학하여 2022년에 졸업을 하였다. 그리고 바로 세종대학교 융합예술 대학원에 입학하여 다시 공부를 시작하였다. 박사학위까지 취득하여 강단에 서고 싶다는 새로운 꿈이 생겼기 때문이다.
“피아노 전공이지만 실용음악을 더 연구해서 학생들을 잘 가르쳐 주고 싶어요. 저는 혼자서 독학으로 익혔기 때문에 시행착오도 많았고, 시간도 많이 걸렸지만 제도권 안에서 공부를 하면 앎에 대한 갈증이 쉽게 풀리지 않겠어요.”
8년 동안 연애 끝에 2022년 5월 28일에 결혼을 했고, 올 3월 중순이 예정일이어서 곧 아빠가 되기 때문에 태어날 딸아이에게 멋진 아빠의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서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자신을 한번 더 일으켜 세웠다.
아내를 처음 만난 것은 2011년 공연을 하러 간 교회에서였다. 그녀가 먼저 정명수에게 관심을 보였다. 물론 음악팬으로서… 그 후 그의 공연에 그녀가 찾아와 주어 만남이 이어졌다. 2014년까지 그렇게 팬으로 지내다가 정명수가 먼저 고백했다.
“우리 연애할까요?”
그렇게 두 사람은 사랑을 쌓아갔다. 비장애 여성에게 그리고 경제적으로 자립도 하지 못한 상태에서 결혼은 건널 수 없는 강이었지만 두 사람은 이미 결혼을 결심한 상태였다. 그래서 그는 결혼 준비를 착실히 하고 있었다. 대학원에 입학하고, 시각장애인 특화 종로인명자립생활센터에 취직도 했다. 시각장애 이용자 대상으로 음악교육도 실시한다. 피아노, 노래 그리고 여러 가지 악기를 가르친다.
공연도 계속 다닌다. ‘훈훈한 그 남자의 하루 이야기’로 유명한 김원식 아나운서가 운영하는 훈남하이엔터테인먼트 소속으로 장애인 인식개선 공연을 하고 있다.
KBS장애인 앵커 1호인 이창훈은 장애인 인식개선 교육 자격증을 획득하여 강의를 하고, 정명수는 중간중간 음악 공연을 하면서 진행을 하는데 유치원부터 대학교까지 인기가 좋다.
음악인 정명수
“재즈피아노는 한 달 동안 학원에서 레슨받은 게 전부예요. 하지만 밤낮으로 음악을 듣고 재즈피아노를 두드리다 보니 어느덧 음악인이 되었어요.”
그는 연습벌레다. 밤새 연습하다가 피아노 덮개에 엎드려서 쪽잠을 자기가 예사였다. 정명수의 감성은 꽤 독특한 구석이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절제와 세련된 감성이 사운드를 지배한다는 것이다. 동네 어린이들이 금방 뛰어놀 것처럼 경쾌하기도 하다.
“대중이 편히 즐길 수 있는 재즈를 만들려고 늘 고민합니다. 재즈피아노가 제게 위로가 됐던 것처럼 누군가에게 위로가 될 수 있는 음악을 만들어 연주하고 싶습니다.”
장애인음악 활동이 열악하기 때문에 앨범을 제작하기 위해 연주는 물론 작곡, 편곡, 녹음작업까지 하다 보니, CD 한 장을 만드는 모든 과정을 할 줄 알게 되었다고 그는 오히려 고마워한다. 음반 마무리 작업을 할 때 음역 그래프를 보면서 편집을 하면 편한데 일일이 소리를 다 들어야 해서 시간이 좀 많이 걸리는 것 뿐이다.
김국환, 이현학과 함께 결성한 '더블라인드' 공연 모습. ©한국장애예술인협회
그는 1985년생 늦깎이 대학원생이고, 아빠이지만 음악에 대한 생각만으로도 즐겁고 행복한 천생 음악인이다. 첫 콘서트를 계기로 우물 안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었듯이 음악인에게는 그무엇보다도 공연의 기회가 많아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정명수는 자신만의 CCM앨범을 만들고 싶고, 프로듀서로서의 역할도 하고 싶다는 꿈으로 생동감을 잃지 않는 만년 청년이다.
정명수
2022 세종대학교 융합예술대학원 입학
2022 경희사이버대학교 실용음악과 졸업
2015 서울예술대학교 실용음악과 졸업
수상
2017 장애인행복나눔페스티벌 행정안전부 장관상
2016 청춘마이크 영아티스트 어워즈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
2014 아시아나 드림페스티벌 오디션 우승
음반
2017 정명수 CCM 1집
2016 더블라인드 3집
2010 희망새 2집
공연
2019 뮤지컬 ‘기타리스트’ 특별 출연 2015 뮤지컬 ‘락앤롤’ 시즌 2
2014 일본 요나고현 제14회 전국장애인문화예술제 참여
2013 더블라인드 홍대 롤링홀 ‘라디오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