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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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4:4, 세 가지 깨닫게 하기 20200807
장마가 끝나고, 8월이 벌써 중반이지만 무더위가 기승을 부르고 있습니다. 연일 37도를 육박한 날씨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날씨에 습도도 높고 더워서 자꾸만 짜증이 나는 것을 참기가 버거워합니다. 그래서 아주 사소한 문제가지고도 참지 못하고 버럭 화를 내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런 날씨에 즐겁게 떠난 휴가철 피서지에서 아주 작은 일로 말다툼 끝에 칼부림이 나고 살인까지 저질러지는 일도 발생하고 있습니다.
국가적으로도 미국의 하원의장이 중국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대만을 방문한 것이 화근이 되어서 중국이 대만을 향해서 연 이틀 미사일을 발사하고 비행기를 띄워서 위험을 가하고 있습니다.
온 세계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하여 에너지 문제로 고통당하고 경제적 위기 가운데 있는데, 이런 문제들은 또 다른 국제적 정세를 위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원수되기로 하고, 악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그들은 결국 하나님의 심판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3:18–19, “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이런 문제를 놓고 사도 바울은 여러 번 빌립보 교회에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도 눈물까지 흘리면서 말했습니다. 교회에 여러 사람들이 그것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은 결국 멸망당할 것이고, 그들의 지금의 모든 영광은 부끄럽게 되고 말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들과 교회는 어떻게 행해야 합니까?세 가지로 정리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신자의 깨닫기;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기쁨.
여러분, 빌립보 교회에 편지를 쓰고 있는 사도 바울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그는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사도 바울은 지금 현실적으로는 감옥 안에 갇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느 누구도 사도 바울을 감옥 안에 가둬 놀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은 감옥 안에 갇혀 있지만, 그는 주님 안에 [갇혀] 있다고 고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주님 안에 있습니다. 이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1:13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더군다나 사도 바울이 감옥 안에서조차도 복음을 전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게 된 틈을 타서 사도 바울의 경쟁자들이 사도 바울을 시기하여 더욱 열심히 복음을 전파하니까, 도리어 이 일이 사도 바울을 더 기쁘게 했습니다. 자신이 감옥에 갇혀 있을지라도, 그 일로 인하여 다른 경쟁자 신자들이 복음을 더 열심히 전했기 때문에 기뻐할 수가 있었습니다.
1:18,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사도 바울은 감옥 안에서도 기뻐하고 또한 기뻐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자는 주 안에서 기뻐하고 기뻐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게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계속해서 같은 말을 합니다.
3:1,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여러분은 현실이라는 감옥 속에서 갇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는 누구든지 그 현실이라는 감옥을 띄어 넘어 예수 그리스도 안에 갇혀 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4: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사도 바울은 감옥 안에 갇혀 있다고 알려지는 것이 조금도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주님 안에 갇혀 있기 때문에 기뻤습니다. 뿐만 아니라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을 향해, 지금 여러분을 향해서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다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주 안에 있기 때문에, 주님으로 말미암아 항상 기뻐하면서 살 수 있기를 축원드립니다.
둘째, 모든 사람에게 꺠닫게 하기; 신자의 관용-용서
주 안에서 기뻐하는 것이 신자들 자신을 향한 깨달아야 할 지식이라면, 두 번째는 모든 사람에게 깨닫게 하기입니다. 신자들이 모든 사람들에게 깨닫게 하도록, 알도록 해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신자의 관용’입니다.
4: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관용’(에피에이케스)은 ‘순한, 친절한, 관대한’이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어로는 ‘살라흐’입니다. 이 말은 ‘기꺼이 사죄하는’이란 뜻을 갖고 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신자들은 ‘도덕적으로나 법적 올바름에서 조금 빗겨나간 것에 대해서는 자비로움이나 관대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도덕적으로나 법적으로 잘못을 범했습니다. 그럴 때,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여러분이 십자가의 피로 용서받은 것처럼, 여러분도 여러분에게 죄 지은 사람들을 기꺼이 용서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용서가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해야 한다. 여러분이 ‘용서하는 사람이구나라고 모든 사람들에게 깨닫게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왜 관용을 베풀어서, 그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깨닫게 해야 하는 지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는 것입니다. 곧 심판주가 오실 텐데, 그 때에 어떤 심판과 상급을 바라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관용하지 못하는 신자는 심판을 받게 되고, 관용을 베푸는 신자는 영생과 상급을 받게 되니, 마땅히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려, 그 사람들이 기독교인은 관용하는 사람이구나, 용서하는 사람이구나 깨닫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세상 모든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이 관용하는 사람인 줄 깨닫게 되면, 그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용서를 배우고, 신자들의 관용을 깨닫게 됨으로 그들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게 되는 기회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오직 관용과 용서만이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셋째, 하나님께 깨닫게 하기; 신자의 요청-기도
마지막으로 이제는 하나님께 깨닫게 하기입니다. 여러분이 기도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자들이 기도도 하지 않으면서 염려나 해 되는 것을 불신앙으로 보십니다. 하나님은 신자가 기도하지 않으실 때에, 그들에게 모른 체 하십니다. 기도하지 않는 신자들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평강으로 지켜주지 않습니다.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신자는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 것에나 관심을 가져서도 안 됩니다. 내가 어떻게 해 보겠다고 해서도 안 됩니다. 내가 안곡교회를, 저 사람을 어떻게 해 봐야지 하면서, 그래서 염려가 생기고 근심이 생기는 그런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도리어’ 정반대로 행해야 합니다. 교회를 위해서, 누군가를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 보려고 하기 전에, 정 반대로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간구’(데에시스)는 ‘(하나님을 향한) 간절하고 긴급한 요청’입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평강으로 여러분을 지켜 주십니다.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지키시리라’(프로우레세이)는 ‘안전하도록 감시하다’. ‘계속 살펴 보호하다’, ‘군대가 주둔하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보다 더 뛰어나십니다. 더 잘하십니다. 하늘 군대로 더 지켜주십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