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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비사 神誌秘史
환단고기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 519쪽
신지비사의 기원 : 제사의 참 뜻
神誌秘史는 (6세) 달문단군 때 사람인 신지神誌 발리發理가 지은 것이다.
이것은 본래 옛적에 삼신께 제사 지낼 때 서원하던 글이다.
무릇 상고시대에 하늘에 제사 지낸 근본 뜻은 백성을 위해
복을 빌고 나라가 잘 되도록 신에게 축원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일을 벌이기 좋아하는 자들이 신지비사가
도참圖讖 성점星占과 서로 같은 곳도 있고 다른 곳도 있음을 가지고,
사리를 추측하고 설명을 덧붙여서 진단구변도 震檀九變圖라 하고,
또 鑑訣과 예언의 처음이라 하는데 모두 잘못된 것이다.
삼한의 자세 : 삼한의 수도 이름과 위치
신지비사에서 저울대 부소량扶蘇樑이라 한 것은 진한의 옛 수도를 말한다.
그곳은 바로 단군조선이 도읍한 아사달이며, 지금의 송화강 하얼빈이다.
저울추 오덕지 五德地라 한 것은 변한의 옛 수도를 말한다.
그곳은 지금의 개평부 동북쪽 70리에 있는 탕지보이다.
저울판 白牙岡이라 한 것은 마한의 옛 수도를 말한다.
지금의 대동강으로, 마한의 웅백다가 하늘에 제사 지내면
마한산이 바로 그곳이다.
가만히 삼한의 자세를 저울에 비유해 보면 부소량은
‘나라의 저울대’와 같고, 오덕지는 ‘나라의 저울추’와 같고
백아강은 ‘나라의 저울판’과 같다.
이 셋 가운데 하나라도 없으면, 저울이 물건을 달 수 없듯이
나라가 백성을 보호할 수 없다.
제사는 오직 참되고 올바르게
옛날 삼신상제님께 제사 지낼 때 서원한 것은
오직 삼한으로 나눈 영토를 잘 다스리는 것과 백성을 진실로 기쁘게 하는 것이었다.
신지비사가 전하는 바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나라를 위하는 일념으로 충忠과 의義를 함께 장려하고,
제사를 지내 신을 기쁘게 하고 복을 내려 주기를 기원하면,
신은 반드시 참된 마음(衷)을 내려 주시고
복은 반드시 나라를 흥하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제사를 올바르고 참되게 행해야 한다.
만일 삼신상제님을 섬기되 진실되게 행하지 아니하고
실천하되 바른 길을 구하지 않는다면
행동하고 구하는 바가 무엇을 좇아 공덕을 이룰 수 있겠는가?
도참圖讖 성점星占 : 도참은 천문과 지리를 통하여 인사의 흥망과 땅의 길흉등을 예언하는 것이고,
성점은 천체의 운행을 보고 인생가 사회 현상을 예언하는 점성술이다.
개평부 : 지금의 하북성 당산시唐山市 지역인데 시행정구역에 개평구開平區가 있어 그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신지비사神誌秘詞는 신라말부터 고려와 조선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예언서의 원본이 되는 근본적인 경전
입니다.
그리고 한국,배달국,고조선에 이르는 역사가 이어져 설명되는 귀중한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또
한 민간신앙에서 매우 중요시되는 해원解怨이 직접적으로 명문화되어 나타나는 희귀한 경전입니다.
이 경전은 고조선의 6세단군 달문님 재위시 신지 발리에 의하여 작성되었습니다.
그후 이 경전은 신지비사라는 이름으로 고려와 조선에 알려지며 권근의 응제시주와 묘청의 평양천도론,
정감록에서부터 격암유록에 이르는 모든 예언서의 골격을 제공합니다.
또한 이 경전은 그 자체로서 진단구변震檀九變을 설명하는 묘가 있습니다.
이 경전은 천부경, 삼일신고, 366사, 단군팔조교등의 경전의 구조원리가 그대로 응용되어있고, 특히
고구려의 고주몽께서 지은 경전 개물교화경과는 바둑판에서 명확하게 음양관계를 이루는 신묘함을 볼
때 이 경전을 단군조선이후 후대에 얼마나 진중하게 다루었나를 알 수 있습니다.
이 경전을 설명함에는 그야말로 책한권으로 부족합니다.
또 실제로 이 경전은 정감록에서 격암유록에 이르는 모든 예언서를 운영자가 직접 해설한 해설서인
천부경의 예언론 1권,혼돈과 파천황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며 많은 예를 들어 구체적으로 설명
되어있습니다.
신지비사는 총 180글자로 이루어져 있고, 이는 다시 삼신장 80자와 삼한장 100자로 구분된다.
삼신장三神章 80자
朝光先受地三神赫世臨 조광선수지삼신혁세림
桓因出象先樹德宏且深 환인출상선수덕굉차심
諸神議遣雄承詔始開天 제신의견웅승조시개천
蚩尤起靑邱萬古振武聲 치우기청구만고진무성
淮岱皆歸王天下莫能侵 회대개귀왕천하막능친
王儉受大命환聲動九桓 왕검수대명환성동구환
魚水民其蘇草風德化新 어수민기소초풍덕화신
怨者先解怨病者先去病 원자선해원병자선거병
아침에 햇빛을 먼저 받는 땅에 삼신께서 밝게 세상에 강림하셨도다.
환인께서 먼저 그 모습을 나타내시고 덕을 깊게 심으시도다.
모든 신들과 의논하여 환웅님을 보내시니
환웅님께서는 환인님을 승계하시고
그 명령을 받아 처음으로 개천을 하셨도다
치우님께서는 청구에서 일어나사 무武로서 만고에 그 명성을 떨치시어
회대지방이 치우님에게 복속하니
천하는 감히 침범할 생각을 못하였도다.
왕검님께서 대명을 받으사 그 기꺼운 소리가 구한을 움직이도다.
어수의 백성이 소생하여 바람결에 덕화가 새로워지도다.
원한이 있는자에게 먼저 그 원한을
병든자에게 먼저 병을 제거해주시도다
삼한장(三韓章) 100자
一心存仁孝四海盡光明 일심존인효사해진광명
眞韓鎭國中治道咸維新 진한진국중치도함유신
慕韓保其左番韓控其南 모한보기좌번한공기남
峻岩圍四壁聖主幸新京 준암위사벽성주행신경
如枰錘極器極器白牙岡 여평추극기극기백아강
枰盤蘇密浪錘者安德鄕 평반소밀랑추자안덕향
首尾均平位賴德護神精 수미균평위뢰덕호신정
興邦保太平朝降七十國 흥방보태평조항칠십국
永保三韓義王業유興隆 영보삼한의왕업유흥륭
興廢莫爲說誠在事天神 흥폐막위설성재사천신
한마음으로 어짐과 효도를 생각하시니 천하가 광명으로 가득차도다.
진한은 나라안을 안정시키고 유일중일의 도로서 다스리니
만국이 함녕(咸寧)하여 유신(維新)이 이루어지고
모한(마한)은 왼쪽을 보좌하고 번한(변한)은 남쪽을 견제하니
험난한 바위산이 사방의 벽을 에워쌈과 같도다.
성스러운 주(主)께서 신경에 나아가심은
마치 저울대,저울추,저울그릇과같아
백아강은 저울그릇이요 ,소밀랑은 저울대요 ,안덕향은 저울추이니
머리와 꼬리가 평형을 이루어 나란히있고
덕은 신정(神精)을 지키어 나라를 일으켜 태평을 이루게하시니
조정에 칠십개국이 항복을 시키시어 영원히 삼한의 뜻을 보전케하시도다.
왕업은 일어나고 또 망하는법 함부로 흥폐를 입에 담지 말지니
오직 하나님을 정성스럽게 섬기는일에 있느니라.
개물교화경開物敎化經
개물교화경開物敎化經은 고구려의 시조 고주몽성제께서 칙서형태로 전해주신 경전이다.
이 경전은 天帝之子라는 내용이 명문화되어 이 경전이 광개토대왕비에 나온 내용을 구체적으로 설명합
니다.
이 경전은 한단고기 고구려국 본기에서 발견된 경전으로 발견당시 이름이 없어 운영자가 개물교화경
으로 이름지었습니다.
이 경전은 모두 144개의 글자로 이루어져있다.
이는 운영자가 해설한 '천부경' 그리고 운영자의 예언해설서인 '천부경의 예언론 제1권(예언의 열쇠)'과
'혼돈과 파천황'에서 광범위하개 설명한 의미심장한 숫자입니다.
144는 역경의 곤지책의 숫자이며 ,요한계시록의 숫자이며 격암유록의 숫자이다.
이 개물교화경은 전체 글자 144글자로 이 모든 자료가 말하려는 것을 한번에 설명합니다.
놀라운 것은 이 경전은 신지비사神地秘詞의 내용 및 글자수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신지비사神地秘詞 역시 한단고기 단군세기에 서효사誓效詞로 기록된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경전이 우리나라의 모든 예언서의 원본이 되는 전설적인 경전 신지비사神地秘詞 임을
'천부경의 예언론 제 1 권(예언의 열쇠)'에서 밝힌 바있습니다.
바둑판에서 이 두경전을 배치하면 신지비사는 180글자로 바둑판의 외곽을 차지하고 ,개물교화경은
144자로 바둑판의 내부를 차지합니다.
이 모든 내용들은 경전을 만들 때 미리 천부경의 원리로 빈틈없이 설계한 것입니다.
개물교화경開物敎化經
天神造萬人一像均賦三眞於
是人其代天而能立於世也況
我國之先出自北夫餘爲天帝
之子乎哲人虛靜戒律永絶邪
氣其心安泰自與衆人事事得
宜用兵所以緩侵伐行刑所以
期無罪惡故虛極靜生靜極之
滿知極德隆也故虛以聽敎靜
以筐矩知以理物德以濟人此
乃神市之開物敎化爲天神通
性爲衆生立法爲先王完功爲
天下萬世成智生雙修之化也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모습을 본 떠 균등하게 삼진(三眞)을 주셨다.
이로서 인간은 하늘을 대신하여 능히 세상에 존립하게 되었다.
하물며 우리나라의 선조가 북부여로부터 나와 천제의 아들로
불리우는 경우에 있어서야 말할나위가 없는 것이다.
"다스리는 사람(哲)"이 스스로를 비우고 온화한 것은
계율에 뿌리를 두는 것으로서
영원히 어긋난 기운(邪氣)을 끊어
그 마음이 안락하고 태평하여
'따르는 사람'의 일이 일마다 마땅함을 얻게된다.
병력(兵力)을 사용하는 까닭은
침벌(侵伐)하는 것을 부드럽게하기 위함이요
형벌을 사용하는 까닭은
죄악(罪惡)을 없애기로 약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스스로를 비움이 지극하면 온화해지며 (靜)
온화함이 지극하면 지혜(知)가 가득하며
지혜가 지극하면 덕(德)이 융성하게된다.
따라서 스스로를 비워서 가르침을 듣고
온화함으로서 스스로의 마음을 미루어 남의 마음을 헤아리고
지혜로서 천지간의 모든 것을 다스리며
덕(德)으로서 사람들을 구제한다.
이것이 배달국의 개물교화(開物敎化)이니
하나님을 위하여 본 바탕을 통하고 (性通)
중생(衆生)을 위하여서는 법(法)을 세우며
선왕(先王)을 위하여서는 공완(功完)을 이루고
천하만세(天下萬世)를 위하여서는
지생(知生)을 나란히 닦는 교화를 이루는 것이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신지비사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는 <신지비사神誌秘詞> 서문이 인용되어 있습니다.
'고구려 정벌에 실패한 수양제의 신하 양명이 고구려에 복수하려고 다음 생生에 고구려의 막리지 개금
으로 환생했다는 전설'을 담은 기사에 <신지비사> 서문을 인용한 것입니다.
又按《神誌秘詞 序》云: 『蘇文<大英弘>序幷注.』 則蘇文乃職名, 有文證, 而《傳》云『文人<蘇英弘>序』, 未詳孰是.)
<신지비사神誌秘詞>의 서문에는 “소문(蘇文) 대영홍(大英弘)이 서문과 아울러 주석하다”고 했으니,
즉, 소문이 곧 직명인 것은 문헌으로 증명
고려사에서 전하는 신지비사
고려 숙종때(1095년~1105년) 김위제(金謂磾)가 남경 천도를 건의하는 상소를 올리면서 신지비사(神誌
秘詞)를 인용한 것입니다.
* 김위제[ 金謂磾 ] 는 숙종 원년(1096)에 위위승동정(衛尉丞同正)이 되었다.
신라 말에 도선(道詵)이라는 승려가 당나라에 들어가 일행(一行)의 지리법(地理法)을 배우고 돌아와
비기(秘記)를 지어 전한 일이 있다.
김위제가 도선의 술법을 공부한 다음, 남경(南京)으로 천도(遷都)하자는 건의를 올렸다.
“「도선기(道詵記)」에, ‘고려 땅에 3경(三京)이 있으니 송악(松嶽)은 중경(中京)이고 목멱양(木覓壤 :
지금 서울의 남산 근방)은 남경(南京)이며 평양(平壤)은 서경(西京)이다.
11·12·1·2월은 중경에, 3·4·5·6월은 남경에, 7·8·9·10월은 서경에 각각 머무르면 서른여섯 나라가
조공을 바칠 것이다.’라 하였고 ‘개국한 지 160여 년 후에 목멱양에 도읍을 정할 것이다.’라는 말도 있습
니다.
저는 지금이 바로 새 수도를 돌아보시고 거기에 머무실 때라고 생각하나이다.
제가 도선이 지은 「답산가(踏山歌)」를 보니 이러했습니다.
‘송성(松城)이 쇠락한 뒤에 어느 곳으로 갈 것인가?
삼동(三冬)의 해 뜨는 곳에 넓은 들판이 있도다.
후대의 어진 이가 대정(大井)을 여니
한강(漢江)의 어룡(魚龍)이 사해(四海)에 통하도다.’
여기서 삼동에 해 뜬다는 것은 음력 11월에 해가 동남쪽에서 뜬다는 말로, 목멱산이 송경의 동남쪽에
있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또 이렇게 적었습니다.
‘송악산은 진한과 마한의 주산이지만
오호라! 그 시작과 끝이 언제인지 뉘 알리오?
꽃 뿌리가 가늘고 약하면 가지와 잎사귀도 그러하리니
겨우 백년 기한에 어찌 시들지 않으리요?
뒤에야 새로운 꽃 피울 지세를 찾고자
양강(陽江)을 건넜다가 헛되이 돌아왔다네.
사해의 신어(神魚)가 한강에 조회하나니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이 편안하여 태평성태를 이루리라.’
이러하므로 한강의 북쪽에 도읍하면 왕업이 장구할 것이며 온 천하가 조회하러 모여들어 왕족이 창성
할 것이니 실로 큰 명당의 땅이라 할 것입니다.
또 이런 구절도 있습니다
‘후대의 어진 이가 사람의 수명을 깨달아
한강을 넘지 않으면 만세의 위풍 이루리라.
만약 그 강을 건너 도읍을 정하면
한 나라가 찢어져 한강을 경계로 삼으리라.’
또 「삼각산명당기(三角山明堂記)」에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눈을 들고 머리를 돌려 산 형상을 살펴보니
북쪽을 등지고 남쪽을 향했으니 이곳이 삼신산이로다.
산 남쪽과 북쪽에 꽃들은 서너겹으로 피었으매
몸소 옷을 걷어 부치고 뒤로 산을 의지해 수호(守護)에 나섰도다.
맞은편에서 대여섯 산이 조회하고
고모산·숙부산·부친산·모친산이 높이 높이 솟았구나.
안팎의 대문에 세 마리씩 개가 있어
항상 충성 다해 임금을 모신다네.
청룡과 백호가 다투지 않고 같이 오르니
안팎의 장사치들이 저마다 보배를 바치리.
이웃의 객이 자기 이름 알리러 아들같이 달려와
모두 한마음으로 나라를 돕고 임금을 바르게 한다네.
임자(壬子)년에 도읍의 기초를 닦기 시작하면
정사(丁巳)년에 성스러운 왕자를 얻으리라.
삼각산에 의지하여 도읍을 정하면
아홉 해 만에 천하가 경배하러 오리라.’
그러므로 그 곳이 바로 현명한 임금께서 성대한 덕정을 펼칠 땅입니다.
또 『신지비사(神誌秘詞)』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저울에 비유하자면 저울대는 부소(扶踈)요, 저울추는 오덕(五德)을 갖춘 땅이며 극기(極器)는 백아강
(百牙岡)이다.
위 세 곳에 도읍하면 70국이 항복해서 조공하여 올 것이고 그 지덕(地德)에 힘입어 신기(神氣)를 보존
할 수 있을 것이다.
저울의 머리와 꼬리를 정밀히 하여 수평을 잘 잡으면 나라가 흥하고 태평성대를 보장받을 것이요,
가르쳐 준 세 곳에 도읍하지 않는다면 왕업이 쇠퇴하리라.’
이는 저울로써 3경(三京)을 비유한 것으로 극기는 머리, 저울추는 꼬리, 저울대는 저울의 균형을 잡는
곳입니다.
송악은 부소(扶踈)로서 저울대에 비유했으며, 서경은 백아강으로 저울머리에 비유했으며, 삼각산의
남쪽은 오덕을 갖춘 곳으로 저울추에 비유했습니다.
오덕(五德)이란, 가운데 있는 면악(面嶽)이 둥근 형태로 토덕(土德), 북쪽에 있는 감악(紺嶽)은 굽은
형태로 수덕(水德), 남쪽에 있는 관악(冠嶽)은 뾰족뾰족한 형태로 화덕(火德), 동쪽에 있는 양주(楊州)
남행산(南行山)은 곧은 형태로 목덕(木德), 서쪽에 있는 수주(樹州) 북악(北嶽)은 네모진 형태로 금덕
(金德)을 나타내니, 이 역시 도선이 말한 3경(三京)의 뜻에 부합합니다.
현재 우리나라에 중경과 서경은 있으나 남경이 빠져 있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삼각산(三角山) 남쪽 목멱산(木覓山) 북쪽의 편편한 땅에 도성(都城)을 건립하여
수시로 순행하고 머물도록 하소서.
이는 실로 사직의 흥망성쇠에 관련되는 것으로 신은 감히 배척받을 것을 무릅쓰고 삼가 기록하여 아뢰
나이다.”
당시 일자(日者) 문상(文象)이 그 말에 찬성했으며, 예종(睿宗) 때에 은원중(殷元中)도 역시 도선의 설
을 인용해 글을 올려 같은 주장을 폈다.
又神誌秘詞曰,
‘如秤錘·極器, 秤幹·扶疎, 樑錘者五德地, 極器百牙岡. 朝降七十國, 賴德護神. 精首尾, 均平位, 興邦保
太平, 若廢三諭地, 王業有衰傾.’
此以秤諭三京也. 極器者首也, 錘者尾也, 秤幹者提綱之處也. 松嶽爲扶疎, 以諭秤幹, 西京爲白牙岡, 以諭秤首, 三角山南爲五德丘, 以諭秤錘. 五德者, 中有面嶽爲圓形, 土德也, 北有紺嶽爲曲形, 水德也, 南有冠嶽尖銳, 火德也, 東有楊州南行山直形, 木德也, 西有樹州北嶽方形, 金德也. 此亦合於道詵三京之意也. 今國家有中京·西京, 而南京闕焉. 伏望, 於三角山南木覓北平, 建立都城, 以時巡駐. 此實關社稷興衰, 臣干冒忌諱, 謹錄申奏.”
於是, 日者文象, 從而和之. 睿宗時, 殷元中亦以道詵說, 上書言之.
또 『신지비사(神誌秘詞)』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저울에 비유하자면 저울대는 부소(扶踈)요, 저울추는 오덕(五德)을 갖춘 땅이며 극기(極器)는 백아강
(百牙岡)이다. 위 세 곳에 도읍하면 70국이 항복해서 조공하여 올 것이고 그 지덕(地德)에 힘입어 신기
(神氣)를 보존할 수 있을 것이다. 저울의 머리와 꼬리를 정밀히 하여 수평을 잘 잡으면 나라가 흥하고
태평성대를 보장받을 것이요, 가르쳐 준 세 곳에 도읍하지 않는다면 왕업이 쇠퇴하리라.’
이는 저울로써 3경(三京)을 비유한 것으로 극기는 머리, 저울추는 꼬리, 저울대는 저울의 균형을 잡는 곳
입니다.
송악은 부소(扶踈)로서 저울대에 비유했으며, 서경은 백아강으로 저울머리에 비유했으며, 삼각산의 남쪽
은 오덕을 갖춘 곳으로 저울추에 비유했습니다.
오덕(五德)이란, 가운데 있는 면악(面嶽)이 둥근 형태로 토덕(土德), 북쪽에 있는 감악(紺嶽)은 굽은 형태
로 수덕(水德), 남쪽에 있는 관악(冠嶽)은 뾰족뾰족한 형태로 화덕(火德), 동쪽에 있는 양주(楊州) 남행산
(南行山)은 곧은 형태로 목덕(木德), 서쪽에 있는 수주(樹州) 북악(北嶽)은 네모진 형태로 금덕(金德)을
나타내니, 이 역시 도선이 말한 3경(三京)의 뜻에 부합합니다.
현재 우리나라에 중경과 서경은 있으나 남경이 빠져 있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삼각산(三角山) 남쪽 목멱산(木覓山) 북쪽의 편편한 땅에 도성(都城)을 건립하여
수시로 순행하고 머물도록 하소서.
이는 실로 사직의 흥망성쇠에 관련되는 것으로 신은 감히 배척받을 것을 무릅쓰고 삼가 기록하여 아뢰
나이다.”
단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
신채호 선생도 <조선상고사>에 신지비사에 대한 설명을 써놓았습니다.
신지(神誌)는 이름이 아니라 단군때의 사관史官 호칭이란 것입니다.
상고시대 이래로 우리말과 역사는 이두문으로 기록되었다가 한문으로 번역하는 과정을 거쳤으므로
‘이두문’을 제대로 읽지 못하면 원래의 우리말을 바르게 알기 어렵다.
옛 역사서에서 단군 때에 ‘신지(神誌)’라는 사관이 있다고 했는데, 신지는 ‘신치, 신크치’를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다.
신크치는 ‘신가’의 별칭이며 오가(다섯 장관)의 수석대신으로서, ‘신수두’의 제삿날에 우주창조의 신화와
영웅이야기, 예언과 경고를 노래했다. 후세의 문사들이 그 노래를 한권의 책으로 만든 것이 ‘신지(神誌)’
이다.
<고려사> 김위제전(金謂磾傳)에 고조선의 중심축인 삼경(三京)을 설명하는 <신지> ‘비사’의 일부가
한시 1구(句) 5글자씩 10줄이 적혀 있는데, 원래는 ‘이두문’으로 기록되어 전해오던 것을 한학이 흥성
하던 삼국말엽에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다.
신지가 고조선때의 사관이었다는 것은 조선시대 기록에도 남아있습니다.
“신지는 단군 때의 사람으로 세상에서 부르는 신지선인이다” - <용비어천가>
"신지비사는 누가 지은 것인지 분명하지 않으나, 우리나라 조선의 문명지치(文明之治)를 거슬러 볼 수
있으니 기이하다” - 이익 <성호사설>
“세상에 전하기를 신지는 단군 때의 사람이다” - 안정복의 『동사강목(東史綱目)』
이것을 통해서 볼때 신지神誌는 단군조선때의 사람이고 실제로는 단군조선때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의
직책명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록할 지誌)
신지비사는 언제 사라졌을까?
<삼국유사>나 <고려사>에 <신지비사>가 인용된 것을 보면, 적어도 고려때까지는 남아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조선으로 넘어가면서 <신지비사>를 직접 인용한 기록이 안보입니다. 신지비사는 도대체 언제,
어떻게 사라지게 된 것일까요?
그 해답은 놀랍게도 <조선왕조실록>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바로 태종때의 기록입니다.
사관(史官) 김상직(金尙直)에게 명하여 충주(忠州) 사고(史庫)의 서적을 가져다 바치게 하였는데..
《신당서(新唐書)》·《신비집(神祕集)》·《책부원귀(冊府元龜)》 등의 책이었다.
- 태종실록 태종12년
태종이 충주 사고에 보관된 서적을 바치게 하는데 목록에 <신비집>이 보입니다.
<신지비사>로 보이는데요. 태종은 이렇게 명합니다.
"《신비집(神祕集)》은 펴보지 못하게하고 따로 봉하여 올리라" 임금이 그 책을 보고 말하기를, "이 책에
실린 것은 모두 괴탄(怪誕)하고 불경(不經)한 설(說)들이다." 하고, 대언(代言) 유사눌(柳思訥)에게 명하
여 이를 불사르게 하고, 그 나머지는 춘추관(春秋館)에 내려 간직하게 하였다.
- 태종실록 태종12년
"<신비집神祕集>은 펴보지 못하게 하고 따로 봉하여 올리라"는 대목에서 <신지비사>를 없앨 목적으로
충주사고의 책들을 옮겨오게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태종은 <신지비사>를 없앤 것일까요? 아래 대목 때문이 아닐까 추측됩니다.
"70개의 나라에서 조공을 바쳤다" 기자가 조선으로 오셔서 마침내 문명국이 되었다는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그것도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을 찬탈한 상황에서, 정도전의 요동정벌을 무력으로 막아낸
태종의 입장에서, 명明에게 전쟁의 빌미가 될 수 있는 (위대한) 고조선의 역사는 "허황되다"고 여길 수
밖에 없었고 이로인해 최초의 역사서 <신지비사>는 깊은 어둠 속으로 빠질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단고기에 남아있는 신지비사
그러면, 신지비사는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까요?
조선시대때 사라진 신지비사는 다행스럽게도 그 전문全文이 『환단고기』 단군세기에 남아있습니다.
『환단고기』 단군세기를 보면, 단군조선 6세 달문단군때 역사와 왕명을 기록하는 신지 발리發理가
왕명을 받들어서 삼신상제님께 올리는 제천문으로 <서효사誓効詞>라 이름하여 썼습니다.
戊寅元年 壬子 三十五年 會諸汗于常春 祭三神于九月山 使神誌發理 作誓效詞 其詞 曰
재위 35년 임자(BCE 2049)년에 여러 왕(諸汗)을 상춘常春에 모아 구월산에서 삼신께 제사지내실 때,
신지神誌 발리發理로 하여금 <서효사誓効詞>를 짓게 하시니 그 가사는 이러하다.
朝光先受地 三神赫世臨 아침 햇빛 먼저 받는 이땅에 삼신께서 빛게 세상에 임하셨고
桓因出象先 樹德宏且深 환인천제 먼저 법을 내셔서 덕을 심음에 크고도 깊사옵니다.
諸神議遣雄 承詔始開天 모든 신이 의논하여 환웅을 보내셔서 환인천제 조칙 받들어 처음으로 나라 여
셨사옵니다.
蚩尤起靑丘 萬古振武聲 치우천황 청구에서 일어나 만고에 무용을 떨치셔서
淮岱皆歸王 天下莫能侵 모두 천황께 귀순하니 천하의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었사옵니다.
王儉受大命 歡聲動九桓 단군왕검 하늘의 명을 받으시니 기쁨의 소리 구환에 울려 퍼졌사옵니다.
서효사가 전하는 단군조선의 국가경영제도
고려사를 보면, 김위제가 상소한 내용은 '도선(道詵記)이 전한 고려 삼경설과 신지비사에서 전한
(옛조선의) 삼한관경제를 본따서 고려도 삼경三京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저울로 3경(三京)을 비유하면
머리인 저울접시는 서경(평양)이고,
균형을 잡는 저울대는 중경(송악)인데,
꼬리가 되는 저울추 남경이 없으니
목멱으로 남경을 정해서 천도해야한다는 것입니다.
김위제가 인용한 <신지비사>를 보면 옛조선은 삼한관경제로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저울판 마한(머리-서경-백아강 평양)
저울대 진한(몸통-중경-하얼빈 소밀랑)
저울추 번한(꼬리-남경-안덕향 당산)
대단군이 다스리는 진한이 균형을 잡고, 부단군이 다스리는 서쪽 마한과 남쪽 번한이 머리와 꼬리로
균형을 이루게하는 삼한관경제가 옛조선의 국가경영제도였던 것입니다.
삼한관경제의 뜻
옛조선이 삼한으로 나라를 다스린 이유는 무엇일까요?
<서효사>의 첫 머리와 말미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朝光先受地 三神赫世臨 아침 햇빛 먼저 받는 이 땅에 삼신이 밝게 임하시도다.
興廢莫爲說 誠在事天神 나라의 흥망을 말하지 말지니 천신(삼신상제)님 섬기는데 정성을 다하겠사옵니다.
삼신상제님을 모시고 나라를 세워서 그 뜻을 이루는 것이 옛조선의 국가이념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늘의 삼신三神(조화-교화-치화)을 본받아 땅에 삼한三韓(마한-진한-번한)을 세우고, 사람에
게 있는 삼진三眞(성-명-정)을 닦아서 천지와 하나된 광명인간, 태일太一 인간이 되는 것이 우리 상고
시대에 국가와 사람의 존재이유이자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신지비사(神誌秘詞), 조선 건국의 불씨였는가?
3천여 년 후를 예언하고 기다려 한 나라 수립의 정당성과 기틀을 마련해 주었다는 신기의 비기(秘記),
찬란한 문화를 간직했던 단군시대의 수많은 유물 중 한 권의 서책이 천추(千秋)의 세월을 기다려 신생
조선 건국의 꿈을 이루고 초석을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했다.
이 예언서가 절대자의 비명(碑銘)에 새겨지고 또한 입을 모아 이를 칭송하고 노래(謳歌)하여 용비어천
가(龍飛御天歌)를 지었다 했으니, 이 뜻이 참 역사와 부합되었다면 한민족은 세세토록 영광을 받아
마땅하리라.
BC 2049년 기록된 비기 신지비사(神誌秘詞), 이를 인용한 비명(碑銘)과 용비어천가를 짓게 된 미로
(迷路)의 근원은 무엇인가?. 그 개연성을 살펴보자.
“서운관(書雲觀)에 예전부터 비장하여 오는 비기(秘記)의 구변진단지도(九變震檀之圖)에 ‘나무를 세워
아들을 얻는다.[建木得子]’라는 말이 있다.
조선을 진단(震檀)이라고 하는 설이 수천 년 동안 떠돌았는데 이제야 특별히 증험되었으니, 하늘이 덕
있는 이를 돌보아 돕는다는 것이 진실로 징험이 있는 것이다.”라 하여 권근(權近)은 건원능 신도비(建
元陵神道碑銘)에 기록했다.
“이는 사람의 지혜로 구할 수 없는 것이요, 사람의 힘으로 이룰 수 없는 것이다.”라 하고, “구변도 십
(열)팔자(九變圖十八子)의 전설이 단군(檀君) 때부터 있어 수천 년을 지났는데, 지금에 와서 징험할 수
있다.”고 병서(幷序)에 썼다.
이는 서운관(書雲觀)의 비기(秘記)와 지리산(智異山) 석굴로부터 이승(異僧)이 전한 것이 단군 시대에
나왔다는 것과 서로 부합된다고 했으니, 미어(謎語) 같은 기막힌 산술적 배합이 이제 풀리게 되었다.
비기(秘記)가 전하는 구변진단지도란 무엇인가.
6세 단군 달문(達門)께서 천제(天祭) 후에 신지 발리(神誌 發理)로 하여금 서효사(誓效詞)를 짓게 했다.
이 비기가 신지비사였으니, 조선 개국 3,441년 전의 일이다.
3천여 년 전 신지 발리가 지은 글을 사실적(史實的) 예언 기록인 것으로 비명에 기록한 것이 아닌가.
구변진단은 고조선, 삼조선, 북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를 거치고 통일신라, 발해, 고려까지 국명이 9번
변했다는 뜻이다.
진단(震檀)은 진방(震方) 즉 진역(震域)의 단군조선을 일컫고 동방(東方)으로 목(木)을 상징한다.
여기서 비명(碑銘)에서 적시한 ‘建木得子’와 합을 이뤘다.
“진단(震檀)이라고 하는 설(朝鮮卽震檀之 說)...”의 ‘說’은 혀(舌)가 어원이다.
말(言), 말씀(語), 이야기(話)도 있다. 言은 그냥 입에서 나온 ‘말’이고, 說은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을
전제한 ‘말’이다.
설(說, 舌)과 살(殺)은 한 치 차이로 항상 동행한다. 설은 얼마든지 살(殺)로 돌변할 수 있는 법이다.
‘說’에 대해 논어(論語) 구절에 사불급설(駟不及舌)이 있다. “네 마리 말이 끄는 마차가 아무리 빨라도
혀에서 나온 말을 이길 수 없다”라 했다.
‘說’을 빙자하여 여론의 만세(萬歲) 파급 효과를 꾀한 것으로 보인다.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2, 3장 두 구절에서 윗글을 다시 살펴보자.
“불휘 기픈 남 매 아니 뮐... (뿌리가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아니하므로...)”라 하여 나무
(木)를 대입하고 진방인 동방과 이(李)의 木을 절묘하게 이음질했으니, 비명의 구절과 닮았다.
“周國大王(주국 대왕)이 豳谷(빈곡)애 사샤 帝業(제업)을 여르시니... (주나라 대왕이신 고공단보께서
빈곡에 사시면서 제업의 기초를 닦으...)”라 하여 사대(事大)의 예를 다함을 밝혀 대국에 대한 종속 계념
을 심어 놓았다.
BC 3,895년 배달국의 진서(眞書)인 녹도문(鹿圖文)과 3세 단군 가륵(嘉勒)께서 BC 2,181년 삼랑(三郞)
을보륵(乙普勒)에 명하여 지은 가림토(加臨土, 正音 38字)가 훈민정음으로 재 창제되었으나, 고의적
또는 의도적으로 고조선과의 관계 설정은 배제했다.
용비어천가는 비사(秘史)를 매개로 하여 역성혁명(易姓革命)의 당위성 설정과 훈민정음의 실용성 여부를
실험했다.
조선건국이 하늘의 뜻임을 알려 민심(民心)을 조정에 귀의(歸依)시키고자 한 합리화(合理化) 작업의
일환이었다.
이 과정에서 역사를 배경으로 하고 설화를 소재로 단군세기(檀君世紀)의 신지비사(神誌秘詞)를 절묘
하게 인용하여 대입하는 치밀함을 보인 것이 아닌가 싶다.
이 신화적 배경이 용비어천가를 떠받드는 모태가 되었음이다.
또한 훈민정음을 표기 수단으로 하여 그 존엄성을 확보하고 이를 널리 알리기 위해 아악곡(雅樂曲)를
삽입했다. 이 곡이 곧 여민락(與民樂)이며 그 안에 위민(爲民)과 여민(與民)의 뜻을 담았다.
무릇 노래와 춤은 심중에 파고드는 감흥의 최대치이다.
시(詩)에 곡(曲)을 붙여 노래를 부르고 춤추게 하여 인간의 원초적 감흥 즉 마음을 움직여 동질성을
이루게 한다. 소리와 몸짓이 상호 교감하므로써 신명나는 세상을 만들어 간다.
바로 서효사(誓效詞)의 서사적 시를 은유적으로 차용, 가미한 이유가 아닌가?
그 감화가 백성에게 까지 미쳐 함께 즐기게 될 것을 예상했음이다.
신지비사를 인용, 기록한 권근(權近 1352-1409). 권제(權踶 1387-1445), 권람(權擥1416-1465) 3
대에 걸친 문헌이 보인다.
권근이 응제시(應製詩), 건원능 신도비명 병서에, 권제가 용비어천가에, 권람이 응제시주(應製詩註)에
인용하여 다른 이름 9변도국(九變圖局)으로 썼다.
수 천 년 단군역사를 빌어 조선 건국의 역량을 증명하고, 당위성을 깨우치려 했다.
권근이 9변도국으로 고쳐 부른 역사인식의 근원은 무엇인가
행촌 이암(李嵒 1297-1364)의 단군세기에서 영향을 받았으며, 한종유(韓宗愈 1287-1354)의 영향이
미쳤을 것으로 추측된다.
권근은 이암의 아들 이강(李岡)의 사위로 처조부라는 인과 관계에 있으며 양촌집(陽村集)에 이암에
관련된 시를 남겼다.
고려조 좌정승 한종유는 외조부로서 많은 문헌을 남겨 가풍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보이나, 선대의 역사
관과는 거리를 둔 것으로 보인다.
1412년 태종은 충주 사고(忠州史庫) 소장 서적 중 신비집(神祕集)은 “펴보지 못하게 하고 따로 봉하여
올리라.”하고, “이 책에 실린 것은 모두 괴탄(怪誕)하고 불경(不經)한 설(說)들이다.”하여 이를 불사르게
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의 한 구절을 대비해 보자.
“열어 보면 두 사람이 죽고 열어 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는다 [開見二人死 不開一人死]” "두 사람이라
한 것은 서민(庶民)을 말한 것이요, 한 사람이란 바로 왕을 말한 것입니다."라고 일관(日官)이 아뢰었다.
변계량(卞季良 1369-1430)은 친시 문무과 합행본명 초년 예통행 청사(親試文武科合行本命醮年例通行
靑詞)에서 “선가(仙家)의 비기(秘記)를 상고하고 깨끗한 기도의 글을 구하여, 본명(本命)의 때를 당할
때마다 그것으로 오래 사시는 축원을 간절히 드리옵니다.” 라 하여 비기의 존재 사실을 밝혔다.
그러면 신지비사는 왜 불태워 졌을까?
9변도국에서 보듯 고조선의 위치가 대륙 깊숙이 존재해 있었고, 이러한 근거가 명나라로서는 눈에 가시
처럼 여겼을 것으로 보인다. 명의 속국 입장에서 상국(上國)에 대한 거슬림을 사전 예방하여 그 어떤
억압이 올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목적이 있었을 것으로 풀이된다.
앞서 설명한 내용처럼 이를 뒷받침하는 증언 기록을 보자.
1485년(성종 16) 서거정(徐居正)은“(상략) 고려(高麗)가 삼경(三京)·삼소(三蘇)라는 말에 현혹되어
백성을 수고롭게 하고 대중을 동원한 것이 거의 쉬는 해가 없었으나, 화란과 패망을 구원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 그런 글을 얻는다면 오히려 불살라야 마땅할 것인데, 하물며 하나하나 존숭하고 장황하게 하는 것이
겠습니까?” 라 하는 등 육조 대신들의 격론이 벌어진다.
태종에 의해 불태워진 신비집 즉 신지비사의 연장선상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서거정이 “불살라야 마땅
할 것인데”라는 말은 이미 불태워 버린 책인데, 시시비비(是是非非)논할 가치도 없다는 뜻을 담고 있음
이다.
신지비사가 구변(九變)을 거치는 동안 정서적, 정신적으로 민중(民衆)에게 미친 영향이 더없이 컸음을
알 수 있다. 구변 이후 태평성대를 암시하고 있다.
73년이 지난 성종조에 신지비사는 참위서라는 이름으로 다시 낙인찍히고, 불태워졌음이 서거정의 증언
으로 재확인 되었다.
예전부터 비장하여 오는 비기(秘記)는 단군 시대부터 내려왔다는 뜻이고, 유구변진단지도(有九變震檀
之圖)는 신지비사를 변용한 다른 이름이었다. 비사의 비결처럼 조선이 수립되었다는 위증(僞證)이 공개
될까 두려워 참서(讖書)라는 이름을 붙여 금서(禁書)가 되고 불태워 고대사(古代史)의 고리를 절단했을
개연성이다.
신도비명에서 용비어천가로 이어지는 비사 설정은 진정 조선 건국의 불씨가 되었는가?. 상고(詳考)하
고자 하나 고통만 가중될 뿐, 모양세가 처연하고 가슴 메이게 한다.
신지와 신지비사(神誌秘詞)
이암이 편찬한 ‘단군세기’에 고조선 3대 단군에 관하여 “가륵단군 3년에 명을 내려 신지 고결에게 배달
유기를 편수토록 하였다”고 기록됐다.
배달유기는 배달의나라 역사서를 말한다.
옛 사서에서는 단군 때에 신지(神誌)란 사람이 있어서 사관이 되었다고 했는데, 신지는 관직명이고 곧
‘신치’의 한역(漢譯)이다. 신치는 ‘신크치’의 약자이고, 신크치는 ‘신가’의 별칭이며, 신가는 정부를
구성하는 ‘다섯 가(加 또는 家)의 수석대신이다.
신치 곧 신가는 언제나 ‘신수두’의 제삿날에 우주창조의 신화와 영웅, 용사들의 이야기와 예언 류의
경계담(警戒談)을 노래하여 그것이 후대에도 계속 따라 하는 관례로 되었다.
후세의 문사들이 그 노래를 모아서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 그의 관직명인 ‘신치’를 책 이름으로 했으니,
이른바 <신지>와 신지비사(神誌秘詞)가 그것이다.
지금은 <신지>와 신지비사가 멸절하여 그것의 가치 여하는 알 수 없으나, 그 책 이름이 이두문으로
지어진 것인 만큼 그 내용의 기사도 이두문으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고려사에 나타난 <신지비사>
<고려사> 김위제전에 <신지비사>의 한 부분 10구절을 번역하면, “(조선의 삼경은) 마치 저울대, 저울추,
저울판과 같은데, 저울대는 부소량, 저울추는 오덕지, 저울판은 백아강에 해당한다. 찾아오고 항복해온
나라가 70개국이니, 그 덕에 의지하여 단군의 정신을 지켜나갔다.
우두머리와 말미가 같은 위치에서 균형을 이루니, 나라가 흥성하여 태평을 누렸다.
그러나 만약 이들 삼경(三京)중 하나라도 폐한다면 왕업은 쇠하여 기울어 질 것이다.” 라고 기재해 놓고,
부소량은 지금의 송도, 오덕지는 지금의 한양, 백아강은 지금의 평양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송도, 한양, 평양은 고려의 삼경이지 대단군의 삼경이 아니다.
조선 대단군(大檀君)의 삼경은, 그 하나는 지금의 하얼빈이니, 옛 역사책에 부소갑, 비서갑, 또는 아사달
로 기록된 곳이며, 그 둘은 지금의 해성, 개평이니, 오덕지, 오비지, 안지홀 또는 안시성으로 기록된 곳
이며, 그 셋은 지금의 평양이니, 백아강, 낙랑, 평원 또는 평양으로 기록되어 있는 곳이다.
삼경의 위치로 미루어 대단군이 다스린 삼한관경의 강역이 드러난다.
소개된 신지비사 10구(句)는 이두문의 <신지>를 한시로 번역한 것인데, 대개 삼국 말엽에 한학(漢學)이
흥성하여 한학자들이 이두문으로 기록되어 전해오던 시문(詩文)을 한문으로 번역하려고 시도했는데,
<신지>의 한역시도 한 예이다.
그렇다면 무슨 이유로 비사(秘詞)라 했는가?
고대에는 역사 종류를 성서(聖書)라 하여 왕궁에 비장하고 민간에 유행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
이다.
<신지>와 신지비사 같은 중요한 서적이 어찌하여 하나도 후세에 전해지지 못했는가?
이는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할 때에 왕궁의 비장 서적이 병화에 불타고, 신라의 것이 겨우 전하여 고려조
까지도 왕궁에 한 벌이 있었으며, 이조에 와서는 이를 서운관(書雲觀)에 깊이 감추어 두었는데, 이것마저
또한 임진왜란의 병화에 불타 버렸기 때문이다.
행촌 이암과 일십당 이맥
행촌 이암은 고려 공민왕 때 수문하시중 벼슬을 마치고 1363년 ‘단군세기’를 편찬했다.
단군세기는 단군조선과 대부여 47단군 치세 2096년 간을 서술하고 있다.
일십당 이맥은 1520년 조선 중종 조에 찬수관으로 임명되어 내각의 비장 서적을 접하고 ‘태백일사’를
편찬했다.
태백일사는 삼신오제본기, 환국본기, 신시본기, 삼한관경본기, 소도경전본훈, 고구려국본기, 대진국본기,
고려국본기 8권으로 구성됐으며, 태고와 상고사를 포함해 대진국과 고려국에 이르기까지 한민족의
역사와 정신문화를 정리한 방대한 역사서이다.
이맥이 편찬한 <태백일사> 고려국 본기에 “행촌선생께서 일찍이 천보산에 유람할 때 태소암에 묵었는데
한 거사가 있어 ‘저희 절 서고에 기이한 옛 서적이 많습니다’하고 말하기에 이암은 이명, 범장과 함께
신서(神書)를 얻게 되었는데, 모두 환단(桓檀) 시대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진결(眞訣)이었다.(중략)
행촌선생은 시중 벼슬을 하시다가 강화도 홍행촌으로 퇴거하신 후 스스로 홍행촌의 늙은이라 부르시며
마침내 행촌삼서를 써서 가문에 간직하셨다.”고 기록했다.
행촌삼서는 단군세기와 태백진훈, 농상집요를 말하는데, ‘환단 시대의 진결’이라 함은 배달의나라와 단군
조선의 고서로서 ‘배달유기’나 ‘신지비사’와 같은 역사책을 포함했을 가능성이 있다.
50년 관직에 있었던 행촌 이암은 당대의 대학자로서 환단의 진결을 해독해 ‘단군세기’와 ‘태백진훈’을
편찬한 것으로 보인다. 이암과 천보산 유람에 동행했던 범장은 '북부여기'와 '가섭원부여기'를 편찬했다.
또한 일십당 이맥은 이암 선생의 고손자로서 조선 중종 조에 찬수관이 되어 서운관의 고서, 진결을 두루
접하고 방대한 ‘태백일사’를 편찬했던 것이다. 오랜 세월 병화 속에 불타버린 배달유기, 신지비사, 고기
(古記) 등의 옛 역사책을 직접 볼 수 없으나, 이암과 이맥이 편찬한 역사서에서 그 자취를 만날 수 있다면
고마운 일이다.
단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서 발췌
고려사에 기록된 것처럼 김위제는 신지비사에 나온 부소량과 오덕지와 백아강을 삼경(三京)으로 해석
하였지만 나는 이것이 삼경(三京)에 관한 것이 아니라 부족국가가 주변 작은나라들을 복속시키고 고대
국가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을때 갖추어야만 할 정치구조를 말하고 있다고 본다.
지금까지 연재한 조선사독단(朝鮮史獨斷)을 찬찬히 읽어본 분이라면 아시겠지만 단군왕검이 세운
나라는 부족국가에 지나지 않았던 단족(壇族) 또는 탁리국(橐離國)이 주변부족들을 통합한 후 이국
(夷國)을 남침하여 멸망시키고 세운 센단「震檀(진단)」이며 일반에서는 단군조선(檀君朝鮮)이라고
흔히들 말한다.
대부분의 고대국가들이 그러하듯이 고구려는 흘승골성 졸본부여에서 시작하였고 백제도 마한의 작은
나라에서 시작하였으며 신라도 사로국이라는 작은 나라에서 시작하여 주변 국가를 통합하면서 고대
국가로 발전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 필요한 정치제도가 바로 '부소량 ∙ 오덕지 ∙ 백아강의 정치제도'이다.
부소량 ∙ 오덕지 ∙ 백아강에 대한 개략
모든 고대국가가 그렇듯이 이들 모두 작은 부족국가에서 시작하여 주변 작은나라들을 복속시키고 점차
그 세력을 키워나가게 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점점커지는 나라를 다스리기 위하여 부족국가 시절에 있던 도읍에서 통합한 주변
작은나라들을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한 전초기지로서 도읍을 따로 세워야만 한다.
그리고 통합된 주변 작은나라들을 한 나라의 군현 또는 제후국으로 두어야만한다.
이때 '부소량 ∙ 오덕지 ∙ 백아강의 정치제도'를 사용하게 된다.
우선 왕검(王儉)이 이국(夷國)을 남침하여 복속시킨 경우를 살펴보자.
왕검은 부족국가 탁리국(橐離國) 시기에 그 도읍이 부소량이었다.
그리고 주변 작은나라들을 복속시키고 이제 그보다 더 큰나라 이국(夷國)가운데 백이(白夷) 현이(玄夷)
적이(赤夷) 람이(藍夷) 도이(島夷) 등 5개의 이국(夷國) 멸망시켰다.
이때 이들 이국(夷國)들을 효과적으로 다시리기 위해서는 탁리국의 도읍이었던 부소량에서 이국(夷國)
의 도읍이었던 곳으로 그 수도를 옮겨야만 하는데 이때 복속시킨 이국(夷國) 가운데 가장 강력했던
이국(夷國)인 백이(白夷)의 도읍인 백산(白山)의 평양(平壤)으로 도읍을 옮기니 이것이 고려사 김위제전
에서 말하는 백아강(白牙岡)이다. 또한 멸망시킨 5개의 이국(夷國)을 왕검이 직접 다스리지 아니하고
그 지방 호족들에게 정권을 주어 다스리게 하니 이것이 바로 오덕지(五德地)이지만 꼭 5개일 필요는
없으며 왕검이 5개의 이국(夷國)을 멸망시키고 전국을 5개로 나누어 다스렸던 까닭에 오덕지라고 이름
이 붙이어진 것이다.
이때 부소량을 절대권위에 두는 것이 절대적으로 중요함은 모든 왕권이 부족국가 시절의 토착세력에서
나와야지 그 나라가 중심을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질적인 정치는 백아강에서 해야함은 부족국가 탁리국이 그들보다 더 강성했던 이국(夷國)을
멸망시켰던 까닭이며 백아강과 오덕지가 균현을 잡아야 함은 왕권과 지방호족의 세력이 서로 균현을
이루어야 나라가 안정되기때문이다.
그래서 이를 신지비사에서는 '부소량 ∙ 오덕지 ∙ 백아강의 정치제도'를 위 그림과 같이 손저울에 비교
하였다.
고대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곳은 왕권의 중심이 되는 부소량 즉 부족국가 시절의 도읍으로 저울대에
비유되고,
현재 실직적인 도읍인 백아강은 저울판에 있는 물건의 질량을 재는 저울추를 매다는 기준이 되는 곳
으로서 나라를 다스리는데 기준이 되어야만 하며,
지방행정구역 또는 지방호족들을 나타내는 오덕지는 커졌다 작아졌다하는 질량을 재고자 하는 물건을
담는 저울판에 비유되는데 지방제후와 왕권이 균형을 이루어야 함은 나라의 흥함과 태평을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다(賴德, 護神精, 首尾均平位, 興邦, 保大平)
백아강과 오덕지가 균형을 이루어 나라가 태평하여 흥하였을지라도 부소량이 중심이 되지 못한 나라가
바로 청(淸)인데 이들은 부소량 즉 만주에 중심을 두는 것을 잊어버렸기에 청(淸)이 멸망하고 난 이
시점에 만주족은 없고 청(淸)은 화족(華族)의 역사가 되어버렸으며 만주족이 화족을 점령하여 청(淸)을
세웠을지라도 만주를 중심으로 하지 않았기에 청(淸)이 망하고 난 이 시점에 화족(華族)들은 만주어를
사용하지 않고 그들의 언어를 아직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부소량 오덕지 백아강은 많은 재야사학자들이 말한 것처럼 삼경(三京)이 아니며 부소량은 태경(太京)
이고 백아강은 행정수도이며 오덕지는 지방군현을 말한다.
부소량이란 무엇이며 그 역사는 어떠한가?
1) 말뜻
부소량(扶踈樑)이란 우리 옛말로서 '소나무땅' 또는 '소나무나라'라는 뜻이다.
원래 松木을 뜻하던 옛말은 '부소나무'였는데[1] 이것이 도치되어 '소부나무'가 되고 습관상 주격조사
'이'를 붙여 '소부이나무'가 되었고 '이'는 '나'의 영향을 받아 '소부리나무'가 되었다.
그리고 'ㅂ'이 'ㅸ'이 되고 더욱더 'ㅇ'로 변하니 '소우리나무'가 되었다.
부소나무 > 소부나무 > 소부이나무 > 소이나무 > 소리나무 > 소우리나무
아직도 우리는 소나무를 '소오리나무'라고 하기도 하는데 소나무의 옛말이 '부소나무'이기때문이다.
그리고 '나라'를 뜻하는 말을 굳이 樑(량)으로 음을 빌어씀은 신지비사에서 이 부소량을 나라의 대들보가
되는 秤幹(칭간)으로 보았기때문이며 이는 그냥 음만 빌었씀이 아니라 음과 뜻을 같이 빌어썼음이다.
2) 부소량의 역사
단군왕검이 주변 부족을 통합하여 탁리국(橐離國)을 세우고 부소량(扶踈樑)에 도읍하였는데 대개 시라무
렌강(西拉木淪河) 상류 북쪽땅에 해당하며 요국(遼國)에서 평지송림(平地松林)이라 하였던 곳이다.
탁리국의 세력이 강력해지자 군사를 이끌고 남으로 내려와 이국(夷國)을 침략하여 장악하고 고대국가를
건설하여 백이(白夷)의 수도였던 평양(平壤)에 도읍하고 국호를 센단「震檀(진단)」이라 고쳤으니 이것
이 사서에 말하는 단군조선 또는 고조선이다. 국호를 '센단'이라 한 이유는 평양이 백산(白山)의 줄기에
있었기때문에 白의 뜻을 따라 '센'이라 하였고 '단'은 고대어로 '땅' 또는 '나라'를 뜻하는 말이었다.
[2] 즉, '센단'이란 오늘날말로 말하면 백국(白國)이란 말이다.
이같이 단군왕검이 도읍을 옮긴 이유는 이국(夷國)을 정복하고나서는 더이상 북쪽땅 부소량에 도읍을
할 필요가 없기때문이었다.
왜냐하면 옛날 탁리국의 땅보다 현재 장악한 이국(夷國)의 땅이 더 중요하기때문이며 이는 탁리국의
주변 부족은 같은말을 쓰던 흩어진 종족이었지만 이국(夷國)은 다른말과 문화를 갖는 완전히 다른 종족
이었기때문이다.
그래서 단군왕검이 이국(夷國)을 점령한지 몇십년이 지난뒤 도읍을 이국(夷國)의 수도였던 백산(白山)
의 평양(平壤)으로 옮겼으며 이때부터 부소량은 성지(聖地)가 되어 이족(夷族)들은 들어갈수가 없었다.
건국한지 약 1000년이 지난뒤 단군왕검이 세운 나라가 망하였을때에 마지막 단군은 부소량의 봉금된
지역으로 숨어들어갔으므로 이곳을 또한 당장경(唐臧京)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우리말 '도장골'의 훈음
병차이다.
우리나라 지명 중에 "도장골"이 많이 존재하는데 "도장골"이란 "사방이 산으로 둘러쌓여 안방처럼 아늑
한 고을"을 말하는 것이며 '도장'이란 안방의 옛말이다.
[3] 이렇게 주변이 모두 숲으로 둘러쌓였다면 나라가 망한 이후에 숨어들기에는 아주 좋은 곳이라 생각
된다.
더불어말한다면 흔히들 말하는 아사달이란 아침땅이란 말도 아니고 첫땅이란 말도 아니요 朝鮮이란
말이 아사달에 해당되는 말도 아니니, 아사달이란 정확히 말하면 "부소량에 딸린 땅"이란 뜻이다.
언제인지 알 수는 없지만 단군왕검이 부소량을 봉금지역으로 선포한 후에 도읍한 곳이다.
고려사에 아사달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였는데
고려사
有僧據讖云自扶踈山分爲左蘇曰阿思達
도참서에 의거하여 말하기를 부소산으로부터 나뉘어 좌소를 이룬 곳이 바로 아사달이다
중세국어에서 아우(弟)를 일컬어 아라고 하였는바 부소량에 있던 큰 산이었던 부소산의 아우산(小山)
에 해당하는 곳이 아달이요 이를 阿斯達(아사달)로 음차함이다.
아마도 부소량을 봉금지역으로 선포하자 더이상 이곳에 도읍을 알 수 없었기에 평양으로 도읍을 옮기기
전에 부소량의 딸린 땅에 임시적으로 도읍하였을 수도 있을 것이다.
3) 부소량의 위치
부소량은 대개 요국(遼國)의 평지송림에 해당되는데 통설에서 말하는 위치보다는 약간 북쪽으로 잡았다.
오른쪽림에서 회색으로 표시된 지역이 단족(壇族)이 아직 이국(夷國)을 침략하기 전에 점거하던 곳이며
그곳의 도읍이 바로 부소량이다.
그리고 부소량의 큰산 즉 부소산의 왼쪽으로 아사달이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곳도 역시 언젠가 도읍을
했던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부소량의 남쪽으로 이국(夷國)의 중심이 되는 백이(白夷), 적이(赤夷), 현이(玄夷), 람이(藍夷)가
있었고 한반도는 도이(島夷)의 땅이었다.
4) 부소량의 역할
부소량은 부족국가가 주변 나라를 통합하고 고대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고대사회에서는 정권을 잡은 임금과 지방호족들이 서로 견제하며 나라를 꾸려가는데 만약 임금의 힘이
약하고 지방호족들의 세력이 강하게 되면 그 나라는 갈기갈기 찢어지게 되며 그 반대로 임금의 힘이
강하고 지방호족의 세력이 약하면 항상 독재자가 나오기마련이다.
임금의 입장에서는 항상 자신의 힘을 키워가야하는데 이때 중요한 곳이 자신이 원래 힘을 키웠던 부소
량이다. 부소량은 만약 지방호족의 세력이 너무 강하여져서 지방호족 가운데 하나가 왕권을 강탈한
경우에 도피처가 되는 곳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부소량은 夷族(이족)과 같이 정복당한 부족에게는 출입이 금지되어 있으며 또한 아직도 부소
량에는 임금을 따르던 자들이 살고 있기때문이다.
역사상 부소량을 둔 국가는 몇개 있었는데
고구려의 부소량은 졸본으로 추모왕이 졸본에서 시작하여 주변 여러나라를 통합하고 고대국가로 발전
하였으며 이후에 도읍 즉 백아강을 환도성과 평양성에 두었었다.
하지만 졸본을 신성시하여 사당을 두었다.
백제는 그 근본이 고구려에 있었고 남의나라에 부소량을 둘 수 없는 까닭에 부소량이 없었으며, 신라는
건국초기에 정복사업을 크게 벌이지 못한 까닭에 금성에서 멀찍이 따로 도읍을 둘 필요가 없어서 부소
량이 따로 없다.
고려는 개경이 부소량인데 서경(西京)인 평양을 백아강으로 삼지 못하여 부소량과 백아강이 같은 곳에
위치하는 비정상적인 정치제도를 갖게 되었다.
청나라의 부소량은 만주가 되고 백아강은 북평 지금의 북경이 될 것이다.
오덕지와 백마강
고려사에 인용된 신지비사의 구절을 다시한번 되새겨보자
又神誌祕詞曰,
如秤錘極器,
秤幹扶踈樑,
錘者五德地,
極器百牙岡,
朝降七十國.
賴德護神精,
首尾均平位,
興邦保大平.
若廢三諭地,
王業有衰傾.
또한 신지비사에 '(나라를 다스림은)
저울과 저울추와 저울판과 같으니,
저울대를 부소량으로 삼고
저울추를 오덕지로 하며
저울판을 백아강으로 삼으면
70나라가 항복하여 조공하러 올것이요,
德(덕)에 힘입어 神精(신정)을 보호하고
머리와 꼬리 즉 저울추와 저울판의 균현을 이루면
나라가 흥하여 태평을 보전할 것이다.
만약 3가지 깨달음의 땅을 폐하면 왕업이 쇄하리라'고 하였다
고려사 신지비사를 인용한 김위제도 위 부소량 오덕지 백아강을 삼경(三京)이라 하였으며 신채호선생
님도 이에 동의하였지만 위 3가지는 삼경이 아니다.
부소량은 지난번 이야기한바와 같으며 이제 오덕지와 백아강에 대해서 살펴보기로하자.
1) 오덕지란 지방행정구역을 말한다
단군왕검이 부소량에서 주변 부족을 통합하여 나라를 일으켜 이국(夷國)을 정복하였는데 모두 정복한
것이 아니라 구이(九夷)가운데 오직 백이(白夷), 현이(玄夷), 적이(赤夷), 도이(島夷), 람이(藍夷)들만
통합하여 나랏니름을 센단(震檀)이라 하였다.
그리고 이 5개의 작은 이국(夷國)을 지방행정구역으로 삼아 이들의 이름을 덕(德)이라 하였으니 오덕지
(五德地)란 다름아닌 정복한 다섯 이족(夷族)의 땅을 말한다.
공교롭게도 오덕(五德)이란 것이 중국 철학과 맞아 떨어져 김위제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토덕(土德)이니
수덕(水德)이니 말하고 있지만 신지비사의 오덕지(五德地)란 이런것들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그렇다면 왜 오덕지(五德地)라 이름붙여졌을까?
우리옛말에 땅을 뜻하는 말들이 몇개 있는데 잘 알려진것이 '불'과 '라'이다.
그리고 내가 항상 주장하는바 '단'도 지명어미로 많이 사용되었는데 잘 알려지지 않은 지명어미가 바로
'덕'이며 여기 오덕지의 '덕'이 우리민족 단족(壇族)의 지명어미에 해당된다.
하지만 지명어미 '덕'이란 말을 德으로 음차하고나니 정복당한 이족(夷族)들은 이 말이 무슨말인지
모르는 까닭에 그 뒤에 같은말 地(지)를 붙여 그 뜻을 명확히 하였다.
이는 마치 처갓집(妻家집)이나 역전앞(驛前앞)과 같은 겹문자에 해당되지만 한자어가 앞에 놓이고 순
우리말에 뒤에 놓인 것과 같지 않고 순우리말에 앞에 놓이고 한자어가 뒤에 놓임은 피지배층 이족(夷族)
의 말이 한자어(漢字語)인 까닭이요 한자(漢字)가 앞에 놓인 처갓집(妻家집)과 같은 말을 쓰던 중세조선
시대에는 하층민이 한자(漢字)를 잘 몰랐던 까닭이기때문이다.
'덕'을 지명어미로 갖는 땅이름을 삼국사기에서만 찾아보면 아래와 같으며 세종실록지리지나 신증동국
여지승람을 찾아보면 더많이 나오지만 지면 관계상 생략한다.
麟德(린덕)
歸德(귀덕)
封德(봉덕)
懷德(회덕)
盈德(영덕)
安德(안덕)
이 '덕'이란 말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언덕'이니 '둔덕'이니 하는 말의 '덕'과 그 어원이 같으며 '덕'의
뜻은 높은곳을 대개 이름이다.
금강경삼가해(1482)에 "棚 더기라"이라고 함은 '덕'이 곧 높은 곳을 말함을 뜻하는 것이다.[1]
그 많은 지명어미 가운데 '덕'이라 한 까닭은 대개 고대에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성읍을
작은 산위에 만들었기 때문이며 이에따라 5개의 지방행정구역을 그 모양에 맞도록 '덕'이란 말을 붙인것
이다.
2) 백아강이란 행정수도를 말한다
단군왕검이 이국(夷國)을 복속시킨뒤에 원래의 도읍 부소량에서 점령한 백이(白夷)의 수도로 도읍을
옮겼는데 여기가 곧 평양(平壤)이며 평양은 백악(白岳)의 줄기에 있었다.
즉, 백악(白岳)을 다른말로 표현하면 白岡(백강)인데 여기에 牙가 붙은 이유에 대해서는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아마도 후대에 중국문화가 우리나라에 침범하면서 신지비사를 필사하는 사람이 마음대로
白岡을 白牙岡으로 고친것으로 보인다.
대개 전쟁에서 임금이나 대장기는 상아로 장식을 하는 까닭에 牙旗(아기)라고 하였는데 중국문화의
영향으로 임금이 살던 白岡(백강)을 다른 지방행정구역 德地(덕지)과 구별하기 위하여 牙을 붙여 白牙
岡이라고 한 것이다.
<신지비사>는 단군 달문때의 사람 신지 발리가 지은 것이다. 본래 삼신께 올리는 옛제사에서 서원의
글이다.
저 상고 제천으 참 뜻은 백성을 위하여 복을 기원하고 신을 축복하여 나라를 일느킴에 있다.
지금 호사가는 <신지비사>를 가지고 도참성점과 서로 혼돈시키고 수를 추리하여 부연해서 말하기를
그것은 <진단구변도>라고 하며, 또 어떤 사람은 구결로 예언하는 것의 본보기라고 하는데 잘못된 말
이다.
말하기를 [저울대는 부고량이다]라고 했으니 곧 진하늬 옛서울을 말한다. 역시 곧 단군조선이 도읍한
곳으로서 아사달이 그곳이니, 즉 지금의 송화강의 하르빈이다.
[또 저울의 추는 오덕지]라 함은 번한의 옛서울을 말함이니 지금 개평부 동북 70리에 있는 탕지보가
그곳이다.
또 고려사에 말하기를 [저울그릇은 백아강이라]고 했으니 이는 마한의 옛 도읍지를 말하며 지금의
대동강이다.
곧 마한의 웅백다가 하늘을 마한산에서 제사했다 함은 곧 이것이다.
삼가 삼한의 지세로써 여러가지 형석에 비교해보면 부소량은 나라의 저울대와 같고, 오덕지는 나라의
추와 같고, 백아강은 나라의 저울그릇과 같으니, 세가지 가운데 하나를 빼면 저울은 물건을 달 수 없고
나라는 백성을 보존치 못하리니, 삼신고제의 서원은 다만 삼한의 관경에 있는 백성을 기쁘게 하는데
뜻이 있다.
<신지비사>의 전하는 바도 역시 이에 벗어나는 말은 아닐 것이다.
즉 나라를 위하여 뜻을 하나로 하고 아울러 충성과 옳음을 아울러 장려하고, 제사하여 신을 기쁘게
하여 보이 내리기를 빈다면, 신은 반드시 가득히 내리고 복은 반드시 나라를 행하게 할 것이다.
진실로써 행한다면 일을 함에 있어서, 실행하여 이루지 못하였다고 추궁할 수가 없을 것이니 이것이
바로 추궁함과 아루는 것이라, 어느 것을 공이라 할 것인가?
우리나라의 문자는 옛부터 있었나니 지금 남해현 낭하리의 암벽에 신시의 옛조각이 있다.
부여사람 왕문이 쓴바의 법류부의전과 자부선생의 내문과 태자 부루의 오행은 모두 한단시대에 나옴
것이다.
그렇다면 은학과 한문은 아마도 왕문의 유범일진저!
유기에 [신획 일찌기 태백산의 푸른 바위의 벽에 있었거늘] 이라는 글이 있다.
그 모양은 ㄱ 과 같으니 세상에서는 신지선인이 전한 것이라고 말한다.
혹자는 말하기를 [이를 글자를 만든 것의 시작]이라고 한다. 곶 그 획은 직일과 곡이라 하는 모양이다.
그 뜻은 관제의 모양도 있다. 그 형과 소리는 계획된 바가 없지 않은 듯하니 생각컨재 그럴듯하게 여겨
진다.
고로 신인의 덕애로써 사람 세상을 고르게 하니 이에 담된 가릋딤이 행해지고 결국 세상의 일이 모두
바로 된다. 현능한 사람은 벼슬에 있고 노유는 공개적으로 봉양 양육하며 장년은 의에 복종한다.
많은 사람이 감화되니 간사한 자는 소송을 그치고 창칼은 음모의 문을 닫는다.
이것 역시 이화의 한 길이다.
대변설의 주에 말하기를 남해현 낭하리의 계곡의 바위위에 신시의 고각이 있다.
그 글에, <한웅이 사냥 나왔다가 제를 삼신께 드리다>라고 있다]고 했다.
또 가로대 [대시에 옛것을 전함에 있어 다만 전해오는 이야기만 의지한지 오래이다.
나중에 형상을 그림으로 그렸고 또다시 그림이 변하여 문자가 되었다.
대저 문자의 근원은 나라의 풍습에 믿음을 존중하는 것에서 나오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하나의 기로부터 셋으로 갈려진 기는 곧 극이다. 극은 즉 무다.
저 하늘의 근원은 곧 삼극을 꿰뚫어 허가 되고 빈 것이다.
안과 밖도 역시 그런 것이다. 하늘의 궁을 곧 빛이 모이는 곳, 만 가지 변화가 나오는 곳이라 한다.
하늘의 일신은 능히 그 허를 체로 할 뿐 아니라 곧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했다.
고로 말한다. 일기는 즉 천이며 곧 빈 것이다. 그렇다면 스스로 중일의 신이 있어 능히 삼이 된다.
삼신은 곧 천일 지일 태일의 신이다.
일기는 그가 스스로 능히 동작하여 이루고, 가르치고, 다스리는 삼화의 신이 된다.
신은 죽 기이고 기는 곧 허이며, 허는 즉 일이다. 고로 사람에 삼진이 있다.
성명 정의 삼수의 진이라 한다. 진은 즉 충이고, 충은 곧 업이고, 업은 곧 속이며, 속은 즉 일이다.
그리하여 일에서 시작하여 일에 끝난다는 것은 돌아서 진으로 되오는 것을 말한다.
곧 일은 즉 삼이라고 하는 것은 선에 대합하는 것이다.
미립의 작은 알갱이를 쌓아서 일로 되돌아 오는 미이다.
곧 성의 선이라 하는 것이고 곧 명의 청이라 하는 것이며, 곧 정의 후라고 하는 이유다.
다시금 또 무엇이 있어서 있다고 하고 없다고 하는 것일까? 진은 이를 <물들지 않음>이라고 한다.
이 물듦을 망이라 하고 선을 불식이라 한다.
그 식을 악이라 하고 청을 불산이라 한다.
산을 탁이라 한다. 후를 불축이라 한다. 축을 박이라 한다.
하나를 잡아 삼을 머금은 이유는 곧 그 기를
하나로 하며 그 신을 셋으로 하기 때문이라, 셋을 모아 하나로 돌아간다 하는 이유는 곧 그 기를 하나로
하며 그 신을 셋으로 하기 때문이라, 셋을 모아 하나로 돌아간다.하는 이유는 역시 신을 셋으로 하고
기를 하나로 하기 때문이다.
저 삶을 사는 자의 체는 일기이다.
일기란 안에 삼신이 있고 지의 근원도 역시 삼신에 있다.
삼신은 밖으로 일기를 포함한다.
그것은 밖에 있는 것은 일이고 내용도 일이며 그 통제도 일이다.
역시 포함되어 있을 뿐 놓을 수 없다. 그것이 글자가 이루어진 근원이 된다.
회를 포함하고 잡고 돌아온다.는 뜻은 여기에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