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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5월 22일 부활 제7주간 금요일
제1독서 : 사도 25,13ㄴ-21
복 음 : 요한 21,15-19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그들과 함께 아침을 드신 다음,
15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16 예수님께서 다시 두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17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므로 슬퍼하며 대답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젊었을 때에는 스스로 허리띠를 매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
그러나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19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어,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할 것인지 가리키신 것이다.
이렇게 이르신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오늘의 묵상
권 순호 알베르토 신부
오늘 복음에 나오는 당신을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경상도 남편을 둔 아내 이야기를 떠올립니다.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싶었던 아내가 평소에 사랑 표현에 인색한 남편에게 물었습니다.
“옛날 옛적에 ‘사랑해’와 ‘안 사랑해’가 살았대.
그런데 ‘안 사랑해’가 죽고 말았대. 그럼 누가 남았게?”
아내는 “사랑해.”라는 말을 기대하였지만, 남편은 이렇게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니 뭐 잘못 무긋나?”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지요.
사랑의 말은 상처를 낫게 하고, 죽어가는 사람도 살립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세 번 물으시며
베드로에게 사랑을 표현할 기회를 주십니다.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한 것을 세 번의 사랑 고백으로 덮어 주시며
사랑의 실패를 치유하시는 은총의 순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랑으로 상처를 치유하시는 것을 넘어,
사랑을 표현하시는 것을 넘어, 사랑을 확장시키는 데로 나아가십니다.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질문 뒤에
“내 양들을 돌보아라.”라는 사명이 따라옵니다(21,16-17 참조).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베드로 사이의 사랑이 그 안에만 갇히기를 바라시지 않습니다.
사랑은 나를 넘고, 나의 공동체를 넘어서 심지어 나의 원수에게도 이르러야 합니다.
오늘 내가 만나는 사람들,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지거나 나를 불편하게 하는 사람들도
예수님의 양들임을 발견하고 돌보는 것이 바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나를 사랑하느냐?”
지금 이 순간 예수님께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21,15)라고
고백합시다.
그리고 그 사랑을 표현하는 데만 머물지 말고,
주님께서 저마다에게 주신 사명을 실천합시다.
조 명연 마태오 신부
맞벌이가 증가하고, 사교육이 활발해지면서
가족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식사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오래간만에 함께하는 식탁에서도 대화보다 스마트폰, OTT 영상을 각자 보고 있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혼밥은 더 이상 이상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2023년 캐나다 공중보건학자 카렌 라르손 연구진은
가족과 함께하는 식사 빈도가 높으면 아동, 청소년의 식사 질이 올라가고,
우울이나 불안 등의 정신 문제도 25% 감소한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음주나 흡연과 같은 행동이 감소하는 등
함께 식사하는 것이 건강지표와 큰 연관이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에 스트레스 회복력도 높아진다고 합니다.
이렇게 함께하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편안한 ‘혼자’를 선호하면서 건강을 해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함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상대방의 말과 행동을 듣고 받아줄 수 있는 사랑이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즉, 사랑을 통해서만 함께할 수 있고, 사랑을 통해서 더 건강한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배신을 꾸짖거나 해명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베드로에게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 물으시면서,
베드로의 내면에 남아 있는 깊은 죄책감과 수치심을 씻어주시고,
그가 사도로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십니다.
무엇보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부르십니다.
예수님께서 불러주셨던 반석이라는 ‘베드로’가 아닌,
그의 옛 이름인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이는 교회의 수장이라는 직분이나 화려한 겉모습을 다 내려놓고,
가장 연약하고, 있는 그대로의 ‘인간 시몬’으로서
하느님 앞에 서게 하시는 것입니다.
자기 연약함을 인정하는 겸손에서 사랑의 마음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진실한 사랑 고백 위에 “내 양들을 돌보아라.”라는 사명을 주십니다.
여기서 특이한 것은 베드로의 양이 아니라 ‘예수님의 양’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본질은 의무감이나 개인의 능력이 아니라,
예수님을 향한 사랑에서 흘러나와야 함을 보여줍니다.
이 모든 대화의 마지막은 “나를 따라라.”(요한 21,19)입니다.
이는 베드로를 처음 부르셨을 때의 말씀과 같습니다.
아마 처음의 베드로는 자기 열정만 믿고 따랐습니다.
그러나 뼈아픈 실패를 겪고, 무조건적인 용서를 경험하고,
십자가의 참된 의미를 알게 된 후 진정한 따름이 어떤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바로 예수님을 향한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따름이 되어야 했습니다.
우리의 능력과 재주 때문에 주님의 부르심을 받지 않습니다.
또 실패하고 배신했다고 해서 당신의 부르심을 철회하시지도 않습니다.
철저히 사랑만을 이야기하시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계속해서 질문하십니다.
이 말씀을 기억하며, 우리도 예수님을 향한 사랑에만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랑을 통해 우리 모두 함께할 수 있는 커다란 힘을 얻게 됩니다.
건강한 삶을 살게 됩니다.
이 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예수님께서는 밤새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상을 차려 아침을 먹이신 다음, 베드로에게 당신의 일을 맡기시며 묻습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21,15.16.17)
뭔가 이상한 질문입니다.
보통 일을 맡길 때면, ‘이 일을 할 수 있겠느냐?’
‘어떻게 잘 할 수 있겠느냐?’ 하고 묻는데,
엉뚱하게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왜일까요?
이는 일을 ‘잘’ 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당신께서 맡기신 일은 ‘능력’으로 하는 일이 아니라,
‘사랑’으로 해야 하는 일임을 말해줍니다.
그것은 ‘일’을 사랑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무엇이 본질인지를 파악하는 일은 아주 중요합니다.
그래야만 ‘나의 양들’이 아니라, ‘주님의 양들’을 돌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요한 21,15.16.17 참조)
그렇습니다.
당신의 양들이 맡겨진 것입니다.
그것은 당신이 우리를 믿으시기에 맡기신 양들입니다.
그러니 이는 제자들에 대한 ‘당신의 믿음’을 나타냅니다.
능력을 보고 맡기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믿음’으로 맡기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양들을 돌보라 하심은
‘당신이 먼저 우리를 돌보신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우리를 믿고 사랑하십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이를 깨닫지 못한 채,
세 번의 동문서답으로 대화를 끝내고 맙니다.
그는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요한 21,15.16.17 참조)라고 고백할 뿐,
‘주님께서 저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라고 고백하지는 않습니다.
사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사실 이전에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아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의심하고 세 번이나 부정했지만,
주님은 그가 배신할 줄을 알면서도 그를 믿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비록 우리가 사랑하지 못하더라도 주님께서는 사랑하시기를
결코 멈추지 않으신다는 ‘하느님의 신실하심’(헤세드)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니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주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주님의 믿음’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끝내 이를 알아듣지 못한 베드로는
결국 양떼를 돌보지 않고 도망치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있어 본질적이고 우선적인 것은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느님의 일’에 앞서,
‘먼저’ ‘하느님’을 사랑해야 함을 요청받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유일한 일은 ‘하느님의 일’이 아니라,
모든 것을 통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나의 일을 따르라' 하지 않으시고,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또 '나의 일'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의 사랑을 깨우쳐주소서.
제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당신은 늘 저를 더 더 사랑하십니다.
저 역시 당신을 사랑하기에, 일을 사랑으로 하게 하소서.
당신에 대한 사랑으로 일하게 하소서.
당신 사랑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내 어린 양들을 잘 돌보아라.
조 욱현 토마 신부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베드로와 나누신 대화로,
교회 사목의 본질과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의 의미를 드러낸다.
예수님께서는 세 번 부인한 베드로에게 세 번 사랑을 고백하게 하신다.
이는 과거의 약함을 용서하시고, 새로운 사명을 주시는 회복의 순간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설명한다.
“세 번의 부인은 세 번의 사랑의 고백으로 씻겨졌다.
입은 죄를 지었지만, 같은 입이 다시 구원을 고백하였다.”
(In Ioannis Evangelium Tractatus 123, 요한 21,15-17 의역)
우리의 상처와 죄도 주님 앞에서 사랑의 고백으로 회복된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세 번 같은 말씀을 하신다.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내 양들을 돌보아라.”(15.17절)
이는 단순한 부탁이 아니라, 목자의 사명을 위임하는 것이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말한다.
“그분은 그에게 단순히 사랑을 고백하게 한 것이 아니라,
사랑의 증거로 양들을 맡기셨다.
사랑한다면, 사랑의 증거로 양 떼를 돌보아야 한다.”
(Homiliae in Ioannem 88, 요한 21,15-17 의역)
따라서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것은 단순히 감정적 고백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교회를 돌보는 봉사로 나타나야 한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끌려가리라.”(18절)라고 하시며
그의 죽음을 예고하신다. 이는 십자가의 길이다.
성 예로니모는 이를 해설하며 이렇게 말한다.
“베드로는 자신을 주님과 같이 십자가에 매달릴 자격이 없다 하여
거꾸로 십자가에 달리기를 원했다.
그는 이렇게 주님의 영광을 드러냈다.”
(Commentarius in Matthaeum 초기 베드로 순교에 대한 전승 의역)
순교는 단순한 비극이 아니라,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완전한 사랑의 표현이다.
교회 헌장은 이렇게 가르친다.
“주 예수님께서는 시몬 베드로만을 특별히 임명하시어,
가시적이고 항구적이며 눈에 보이는 일치의 원리와 기초로 삼으셨다.”(18항 요약)
또한 교리서는 이렇게 가르친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교회의 목자로서의 임무를 주셨다.
이 임무는 교회의 일치와 선익을 위한 봉사이다.”(881항 의역)
교회의 목자직은 권위가 아니라, 봉사와 사랑에 뿌리내린 사명이다.
주님은 베드로에게만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묻고 계신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우리가 진정 주님을 사랑한다면,
그 사랑은 구체적인 봉사와 희생으로 드러나야 한다.
우리에게 맡겨진 “작은 양들”,
곧 가정과 공동체, 교회 안의 형제자매들을 돌보는 삶이
바로 주님께 대한 사랑의 증거이다.
주님께 대한 사랑은 말로만 그칠 수 없다.
그것은 봉사로, 희생으로, 때로는 고난과 순교로까지 이어진다.
베드로가 십자가를 통해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한 것처럼,
우리도 삶의 자리에서 주님을 사랑함으로써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존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조 재형 가브리엘 신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물’ 이야기를 두 번 하셨습니다.
하나는 루가복음 5장,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라.” 하신 말씀이고,
다른 하나는 요한복음 21장, 부활하신 예수님이 티베리오 바다에서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 하신 장면입니다.
먼저 루가복음 5장에서, 베드로와 동료들은 밤새도록 수고했지만,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물은 이미 씻고 있었고, 마음은 지쳐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사실 이 말씀은 어부의 상식과는 맞지 않습니다.
밤새도록 해봤고, 자기 전문 분야인데, 지금은 낮이고, 상황도 안 맞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이런 순간이 있습니다.
“나는 이미 다 해봤다. 더 이상 할 게 없다. 소용없다.”
기도도, 섬김도, 관계 회복도, 이미 노력해 봤지만, 안 된다고 느끼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깊이’보다 ‘의지’입니다.
깊은 데로 가는 것은 방향의 변화이고, 말씀에 의지하는 것은 중심의 변화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얕은 곳에서 머뭇거리지 말고, 네 믿음의 깊은 데로 나아가라.
상식과 경험만 의지하지 말고, 내 말씀에 의지하여 다시 그물을 내려 보라.”
우리가 두려워해서 가지 않던 ‘깊은 곳’은
어쩌면 정직하게 회개하는 자리일 수 있고,
누군가를 진심으로 용서하는 자리일 수 있고,
말씀 앞에 내 생각과 계획을 내려놓는 자리일 수 있습니다.
그 깊은 곳으로 들어가야, 주님이 준비하신 풍성한 ‘어획’을 경험하게 됩니다.
요한복음 21장을 보겠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지만, 제자들은 여전히 혼란스러웠습니다.
베드로는 다시 옛 일상, 옛 직업인 고기잡이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상황은 예전과 똑같습니다.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나 아무것도 잡지 못한” 자리입니다.
그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물으십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먹을 것이 있느냐?” 그리고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져라.”
‘오른편’은 단순히 방향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리를 상징합니다.
같은 바다, 같은 배, 같은 그물, 같은 밤이었지만,
말씀 한마디에 순종하자,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들은 그물을 들 수 없을 만큼 많은 고기를 잡게 됩니다.
우리도 종종 이렇게 말할 때가 있습니다.
“환경이 바뀌어야 합니다. 사람들 태도가 달라져야 합니다.
직장, 가정, 교회 상황이 좋아져야 뭔가 달라집니다.”
하지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네가 서 있는 그 자리에서, 내가 말하는 ‘오른편’으로 그물을 옮겨 보지 않겠니?”
‘오른편’으로 옮긴다는 것은 조금 더 편한 쪽이 아니라,
주님이 기뻐하시는 방향으로 선택을 바꾸는 것입니다.
내 고집을 고집하는 쪽이 아니라, 말씀을 따라가는 쪽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같은 가정, 같은 직장, 같은 교회, 같은 일상이지만,
조금만 방향을 돌려 “오른편에” 그물을 던질 때,
그때부터 우리는 “내가 아는 바다, 내가 아는 인생”이 아니라
“주님이 마련하신 은총의 자리”를 경험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베드로.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예수님께 말씀드립니다.
‘예, 주님 사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
예수님께서는 같은 질문을 3번 하십니다.
베드로는 3번 대답하면서 마음이 슬퍼졌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마음을 충분히 아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3번 질문하신 이유를 묵상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베드로가 닭이 울기 전에
예수님을 3번 모른다고 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배반을 충분히 용서하셨다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
세례를 통해서 우리는 과거의 죄를 용서받고,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납니다.
과거에서 현재로 넘어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이라는 미래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그 길은 부귀, 명예, 권력에 있지 않습니다.
희로애락의 세상사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를 내신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때
우리는 영원한 생명이라는 미래의 문을 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령의 빛으로 저희에게 영원한 생명의 문을 열어 주셨으니
이 큰 선물을 받은 저희가 굳은 믿음으로 더욱 열심히 하느님을 섬기게 하소서.”
주님은 오늘 우리 각자에게 말씀하십니다.
“깊은 데로 가서,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져라.
너의 상식과 경험을 넘어, 내 말씀을 신뢰하며 순종해 보아라.”
우리의 기도가 이렇게 되면 좋겠습니다.
“주님, 제가 머뭇거리던 깊은 데로 나아가게 하시고,
제 중심의 방향을 ‘오른편’, 곧 주님의 뜻 쪽으로 돌리게 하소서.
같은 현실 속에서도,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다시 그물을 내리게 하시고,
그 안에서 주님이 주시는 열매와 기쁨을 보게 하소서.
저의 삶 전체가 주님의 말씀에 걸린 그물이 되게 하소서.”
발 씻김의 열매 : 착한 목자의 탄생
전삼용 요셉 신부
"세 번째로 예수님께서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므로
슬퍼하며 대답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아십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먹여라."(요한 21,17)
찬미 예수님! 부활 제7주간 금요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요한복음의 가장 마지막 장,
곧 예수님과 베드로의 지독했던 사랑과 배신의 서사시가
마침내 아름다운 해피엔딩으로 완성되는 가슴 벅찬 에필로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밤새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해 허탈해하는 제자들을
티베리아스 호숫가로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숯불을 피워 빵과 물고기를 구워놓고 그들을 기다리십니다.
식사를 마치신 후,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세 번을 연거푸 물으시며 "내 양들을 먹여라"라는 위대한 사명을 맡기십니다.
이 숯불 앞의 신비를 온전히 풀기 위해서는,
시간을 거슬러 예수님의 수난 전날 밤,
'최후의 만찬' 성목요일의 다락방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은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기 시작하셨습니다.
베드로는 기겁하며 거부했습니다.
"제 발은 절대로 씻지 못하십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아주 의미심장한 말씀을 남기십니다.
"내가 하는 일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지만 나중에는 깨닫게 될 것이다."(요한 13,7)
베드로가 그날 밤 깨닫지 못했던 '발 씻김의 진짜 의미'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단순히 "너희도 서로 겸손하게 봉사해라"라는 도덕적인 교훈이 아니었습니다.
이 발 씻김은 곧 십자가 위에서 이루어질 처절한 '파스카의 신비' 그 자체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냄새나는 발을 씻어주신 것은,
"내가 십자가에서 흘릴 나의 피로,
세상의 욕망과 교만에 찌든 너희의 그 얄팍한 '자아'를 완벽하게 죽이고 씻어내어,
이제부터 이 영혼의 주인이 '나 그리스도'임을 선포하겠다"라는
위대한 소유권 이전의 예식이었습니다.
이 기막힌 신비는 구약성경 탈출기 12장의
'파스카 어린양의 피' 규정에서 이미 완벽한 설계도로 주어졌습니다.
이집트를 탈출하기 전날 밤,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집의 '문설주와 상인방'에 바르라고 명령하십니다.
문설주는 집을 떠받치고 출입을 통제하는 집의 가장 아랫부분,
즉 신체로 치면 '발'에 해당합니다.
왜 굳이 피를 그곳에 발라야 했을까요?
죽음의 천사가 지나갈 때, 문설주에 발린 그 처절한 피는
이렇게 외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집의 첫째 아들,
즉 이 집을 지배하던 교만한 자아(이집트의 맏아들)는
이 피와 함께 이미 죽었다!
이 집의 소유권은 이제 하느님께로 넘어갔다!"
피가 발린 집은 죽음이 건너뛰고(Passover), 참 생명이 주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행위는
바로 그 파스카 어린양의 피를 제자들의 문설주(발)에 바르는 거룩한 행위였습니다.
"너를 지배하던 네 낡은 자아는 이제 내 피로 죽었다. 이제 네 인생의 주인은 나다."
이것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날 밤, 그 씻김을 끝까지 거부하며 자신의 낡은 자아를 펄펄 살려두었습니다.
"다른 이들이 다 주님을 버릴지라도 저는 주님을 위해 내 목숨을 내놓겠습니다!"라며,
자기 삶의 주인이 여전히 '자기 자신'이라고 뻗대며 호언장담했습니다.
그러나 그 가짜 자존심은 대사제의 뜰에 피워진
'첫 번째 숯불' 앞에서 여지없이 붕괴되었습니다.
닭이 울기 전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저주하며 도망쳤을 때,
베드로는 자신이 집을 지킬 능력도 없는 얼마나 쓰레기 같고
무력한 빚쟁이인지를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의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보며,
그리고 그런 비겁한 자신을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를 다 쏟아 집값을 지불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목격하며,
베드로의 그 질기디 질긴 이기적인 '자아'는
마침내 산산조각이 나고 완벽하게 씻겨 나갔습니다.
이제 영혼의 방이 비워진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예수님은 똑같은 '두 번째 숯불'을 호숫가에 피워놓으셨습니다.
과거 배신의 트라우마가 서린 그 숯불 앞에서,
이제 옛 주인이 쫓겨나고 자아가 완전히 죽어버린 베드로에게
새 주인이신 예수님은 첫 명령을 내리십니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베드로가 자신의 전문 지식과 고집(자아)을 완전히 버리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던졌을 때,
찢어질 듯이 무거운 물고기들이 올라왔습니다.
그 숫자가 무려 '153마리'였습니다.
성 예로니모를 비롯한 교부들은 이 153이라는 숫자를
당시 사람들이 알고 있던 온 세상 물고기의 종류,
즉 이 세상 모든 민족을 상징한다고 풀이했습니다.
즉, 자아가 죽어 하느님이 주인이 되신 베드로는
이제 하느님의 그물을 던져 '온 세상의 하느님 자녀들'을 빠짐없이 낚아 올리는
거룩한 어부로 완성된 것입니다.
이제 가장 소름 돋는 기막힌 반전이 시작됩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그 153마리의 물고기(하느님의 자녀들)를 끌고
예수님이 피워두신 숯불 앞의 식탁으로 모여듭니다.
예수님은 빵과 물고기를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십니다.
이 아침의 식탁이 구약성경의 어떤 장면과 완벽하게 겹쳐지는지 아십니까?
탈출기 24장을 보면,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백성들과 파스카 희생 제물의 피를 뿌려
하느님과 거룩한 계약을 맺는 장면이 나옵니다.
계약이 완수되자 하느님은 모세와 일흔 명의 원로들을 시나이산 꼭대기로 부르십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들은 그 거룩한 산정에서 하느님을 직접 뵈며
그분과 함께 먹고 마시는 엄청난 기쁨의 식탁을 누립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뵙고 나서 먹고 마셨다." (탈출 24,11).
오늘 티베리아스 호숫가의 숯불 식탁이 바로 그 새로운 시나이산의 정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피로 자아를 죽이는 새로운 세족례(계약)를 완수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아가 씻겨 진 베드로와 제자들은 이제 단순한 어부가 아니라,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한 식탁에 마주 앉아 밥을 먹는,
우주에서 가장 고귀하고 거룩한 하느님의 영적 동반자(원로)로
그 신분이 수직 상승한 것입니다.
이 거룩한 식탁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당신의 목숨을 다한 사랑을 확인하십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께서 굳이 세 번을 물으신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대사제의 뜰 숯불 앞에서 세 번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의 그 뼈아픈 과거를,
똑같은 숯불 앞에서 세 번의 "사랑합니다"라는 고백을 통해
완벽하게 치유하고 상계(Offset) 처리해 주신 것입니다.
이 회복의 고백이 끝나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우주에서 가장 위대한 사명을 주십니다.
"내 양들을 먹여라." (요한 21,17).
이 짧은 명령을 그리스어 원문으로 자세히 들여다보면,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어떤 역할을 이양하고 계신지 그 장엄한 무게가 드러납니다.
주님은 첫 번째와 세 번째에는 "내 어린 양들을 먹여라(Βόσκε, 보스케)"라고 하셨고,
두 번째에는 "내 양들을 돌보아라(Ποίμαινε, 포이마이네)"라고 하셨습니다.
'보스케(Βόσκε)'는 단순히 육신의 밥을 준다는 뜻을 넘어,
하느님의 말씀과 사랑으로 영혼을 온전히 양육하라는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반면 '포이마이네(Ποίμαινε)'는 목자가 되어 앞장서서 인도하고,
늑대로부터 보호하며, 목숨을 걸고 책임지는 '전인격적인 돌봄'을 뜻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예수님이 "이제부터 이 양들은 네 것이다"라고 하지 않으셨다는 점입니다.
철저하게 "내 양들(μου)"이라고 소유권을 명확히 하셨습니다.
양들은 베드로의 소유가 아닙니다.
양들의 진짜 주인은 피를 흘려 그들을 사신 예수님 한 분뿐이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양 떼를 이끄시던 당신의 그 '착한 목자'의 역할을
이제 베드로에게 고스란히 이양하고 계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인이 아니라, 주님의 양들을 내 양처럼 여기며
목숨 걸고 먹이고 보호해야 할 거룩한 '청지기'로 파견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목자로서 양들을 이끄셨던 것처럼,
이제 네가 하느님의 양 떼를 이끌라는 엄중한 명령입니다.
그렇다면 자아가 죽고 하느님과 한 몸이 된 청지기 베드로는
양 떼에게 도대체 무엇을 먹이고 돌보아야 할까요? 푸른 풀입니까?
아닙니다. 베드로가 세상 사람들에게 먹여야 할 진짜 양식은
바로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하느님의 양들을 맡기시며,
그들의 입에 영원한 빵인 '성체'를 먹이라고 하십니다.
성체는 단순히 배를 불리는 위로의 떡이 아닙니다.
파스카의 피로 우리의 문설주를 발라
自我를 쫓아내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 입니다.
베드로가 양 떼에게 성체를 먹인다는 것은, 그 양들을 향해 이렇게 외치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세상에 짓밟히는 한낱 짐승 같은 피조물이 아닙니다.
이 거룩한 빵을 먹는 여러분은,
예수님의 피로 낡은 자아가 죽고, 예수님의 피를 물려받아
결국 하느님과 똑같이 완전해질 수 있는 신적인 본성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가톨릭 신학의 정수인 '신화(Deification)',
즉 인간이 하느님이 되는 기적입니다.
양 떼가 늑대의 위협이나 세상의 유혹 속에서도
뿔뿔이 흩어지지 않고 교회를 굳건히 지켜내는 유일한 힘은,
바로 내가 하느님의 밥상에 앉아 하느님의 피를 먹는
'우주의 상속자'라는 이 엄청난 자존감에서 나옵니다.
내가 세상의 실패자나 찌질한 죄인이 아니라,
창조주 하느님과 한 식탁에 마주 앉아 그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하느님처럼 될 수 있는 존재라는 이 폭발적인 자존감을 가슴 깊이 새기십시오.
세상의 파라오들 앞에서 주눅 들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주님의 이름을 부여받은 '또 다른 그리스도'입니다.
이제 세상 밖으로 나가, 두려움에 떨며 상처받고 흩어진 이웃들에게
"당신도 하느님의 자녀입니다!"라는
그 찬란한 이름표를 달아주며 먹이고 돌보는 참된 목자로 파견되십시오.
우리가 베드로처럼 내 자아를 죽이고
이 거룩한 식탁의 밥을 먹으며 주님을 사랑할 때,
우리 삶의 모든 실패와 숯불의 상처는
하느님과 영원한 계약을 맺는 시나이산의 눈부신 영광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아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송 영진 모세 신부
1)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세 번이나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물으신 일은,
사실은 예수님 쪽에서 베드로 사도에게
세 번이나 “나는 너를 사랑한다.” 라고 말씀하신 일입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를
“나는 너를 사랑한다. 너도 나를 사랑하느냐?”로
해석하는 것이 옳습니다.>
언제나 항상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주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입니다.(1요한 4,10)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말씀하신 것은,
베드로 사도가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일 때문입니다.
그 일에 초점을 맞추면,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은
“너는 나를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지만,
그래도 너에 대한 내 사랑에는 변함이 없다.”입니다.
‘회개’는 주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에 하는 일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경우에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말한 직후에
곧바로 회개했습니다.(루카 22,62)
그래서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신 것은,
그의 회개를 인정하셨고 받아주셨으며,
그를 이미 용서하셨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2)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가 자신의 사랑을 ‘말’이 아니라,
‘삶’으로 표현하고 실천하기를 바라셨습니다.
<사랑은 ‘말’이 아니라 ‘삶’입니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라는 말씀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양들을 돌보는 일은,
사도로서 당연히 수행해야 할 직무인데,
예수님께서는 그 일을 의무가 아니라 사랑으로 하기를 바라셨습니다.
<사랑이 없어도 직무 수행을 잘할 수 있지만,
예수님과의 관계에서는, 사랑이 없으면 직무 수행을 아무리 잘해도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어버립니다.(1코린 13,1-3)>
3)
“내 양들을 돌보아라.” 라는 말씀은,
당신이 베드로 사도를 교회의 반석으로 임명하신 일과
그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신 일은(마태 16,18-19),
변함없이 유효하다는 것을 확인해 주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일부 종파에서 베드로 사도의 잘못을 비난하고,
그가 사도의 자격을 잃었다고 주장하면서
교황 제도를 부정하는 경우가 있는데,
아무런 근거가 없는 주장입니다.>
루카복음을 보면,
“나는 너의 믿음이 꺼지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러니 네가 돌아오거든
네 형제들의 힘을 북돋아 주어라.”(루카 22,32)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넘어진다는 것도 알고 계셨고,
다시 일어선다는 것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우셨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다시 일어서려고 노력하는 그를 예수님께서 도와주셨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어떻든 중요한 것은,
‘주님의 사랑과 보호’는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4)
예수님께서는 ‘용서’에 관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어떠한 죄를 짓든,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을 하든 다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말은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현세에서도 내세에서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마태 12,31-32)
이 말씀은, 무슨 죄를 지었든지 간에
진심으로 회개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용서받지만,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용서받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용서받지 못하고 멸망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잘못과 배반자 유다의 죄는 거의 비슷한 죄이고,
둘 다 큰 죄인데, 베드로 사도는 회개했고,
배반자 유다는 회개하지 않고 자살해버렸습니다.(마태 27,5)
유다도 자기 죄를 뉘우치긴 했지만(마태 27,3),
그냥 자살했기 때문에 그 뉘우침은 회개가 아니었던 것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배반자 유다도 그 전에 용서하셨을 텐데,
유다 자신이 주님의 용서를 받는 것을 스스로 거부했습니다.
주님의 ‘용서’도 ‘사랑’처럼
주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주시는 은총입니다.
회개는 그 은총에 대한 응답입니다.
"나를 사랑하느냐?“
오 상선 바오로 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려 주십니다.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21,15.16.17)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빵과 물고기로 새벽 허기를 채워주신 뒤,
베드로에게 당신을 사랑하는지 물으십니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요한 21,17)
베드로는 세 차례나 반복된 질문에 슬퍼하며 답하지요.
이 장면을 세 번 주님을 부인했던 실패에서
베드로를 일으켜 세워 주시려는 예수님의 사랑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 대목에서 우리 안에 반복해 울리는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물음은
부르심을 받아 주님과의 관계 안으로 들어온 우리에게
'신앙이란 바로 사랑의 문제'임을 각인시킵니다.
신앙의 본질이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창조하시고 이끄시며 구원하시는
주님을 사랑하기에 그분께 머무릅니다.
예수님은 일찌기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요한 14,15)라고 하시며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두셨습니다.
제1독서에서는 사도 바오로와 그의 신앙에 대한 두 가지 관점이 등장합니다.
"수석 사제들과 유다인의 원로들이
그에 대한 소송을 제기하면서 유죄 판결을 요청하였습니다."(사도 25,15)
먼저 이스라엘 백성의 종교 기득권자들 입장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죽음으로 처단한 뒤 그분의 추종자들도 경계하며 손을 댑니다.
이방인들에게까지 복음을 전하는 바오로 역시 예외가 될 수 없었지요.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예수님과 제자들,
그리고 그리스도 신앙을 고백하는 무리가 명백한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율법과 계명을 가장 중요한 자리에 놓고 법을 준수함으로써
하느님에 대한 신의를 표현한 기존 종교 기득권자들에게,
사랑으로써 율법을 완성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위험해 보였던 것일까요?
그런데 율법의 정신과 내용이 사랑이고 하느님께서 사랑이시며
예수님은 그 사랑을 완성하러 오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니
사실 그 둘은 다르지 않지요.
"이미 죽었는데 바오로는 살아 있다고 주장하는
예수라는 사람과 관련된 몇 가지 문제"(사도 25,19)
이 견해는 율법도 모르고 예수님도 모르면서
직책상 이 일을 처리해야 하는 이들의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그저 죽었지만 그 추종자들이 살아 있다고 주장하는
어떤 사람 때문에 일어난 귀찮은 분쟁일 뿐이지요.
이 시각이 어쩌면 지금 이 세상의 입장과 유사할 수도 있습니다.
방관자이고 구경꾼이면서 적당히 이득을 취할 기회 정도로
신앙을 바라보는 세상의 모습이지요.
하지만 우리가 부르심 받은 신앙은
율법이나 이익 이전에 사랑의 문제입니다.
주님은 사랑 때문에 우리를 부르셨고,
우리 역시 사랑 때문에 그분께 응답해 지금 여기 존재합니다.
감히 섞일 수 없는 엄청난 간극을 지닌 신과 인간이
사랑 때문에 만나고 사랑하고 하나가 된 것입니다.
사랑만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우리의 정체성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요한 21,18)
그런데 이 사랑은 처음에는 우리가 원하는 방식과 방향으로 흘러가는 듯싶다가,
결국은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예고하신 바와 같이
우리가 생각지도 못하고 원하지 않는 곳,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우리를 끌어가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사랑이란 것이 오묘해서
한때 그토록 원하지 않았던 방식을 그때에는 기꺼이 받아 안게 될 것입니다.
강렬했던 원의마저도 사랑 안에 형체도 없이 녹아들어
사랑과 하나가 되어 버릴 것이니까요.
그러면서 사랑이 되어갈 것이니까요.
"나를 따라라."(요한 21,19)
그때 비로소 사랑이 된 우리에게,
주님께서 이제 진짜 당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실 겁니다.
처음의 부르심과는 다른 차원이 펼쳐지는 겁니다.
사랑하는 벗님!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고 또 물으십니다.
우리도 "예, 주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고 지치지 말고 대답하고 또 대답합시다.
사랑을 물으시고 구걸하시는 주님께 마음을 다해 응답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는 '무엇이 중요한지' 아는 이들이니까요.
네 어린양을 돌보아라.
내 양들을 돌보아라.
이 승화 시몬 신부
부활하신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은
사랑입니다.
그분의 사명을 이어 받는 이들이
주님이 보여준 그 사랑으로 다른 이를 대해야 함을
다시금 알려주십니다.
사랑 때문에 환난과 고통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 때문에 기꺼이 받아들이며
사랑으로 사명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누구는 어린양을 돌보지만
누구는 다 큰 양들을 돌보게 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사랑이라는 사실입니다.
동정이나 자기 만족이 아니라
하느님이 보여주신 그 사랑으로
더 많은 이들을 하느님께 초대하는 자세입니다.
하느님이 이미 보여준 사랑
내가 이미 체험한 그 사랑의 방법으로
이웃에게 사랑을 전하며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다시금 예수님의 부르심이 주는 무게를 체험합니다.
나를 따라라.
이 말씀은 우리가 짊어진 사랑의 무게를 말해주고
내 안에 새겨진 주님의 사랑을 붙잡도록 이끌며
내 사명의 원동력이 바로 하느님의 사랑임을 밝혀줍니다.
그러니 우리 안에 하느님 사랑을 채울 수 있길 바랍니다.
그 사랑으로 이웃에게 기쁨을 전해주는 것은
오직 주님을 더 사랑하기 때문임을 기억하며
오늘도 사랑으로 서로를 대할 수 있길 바랍니다.
출처: https://frsimon.tistory.com/1878 [시몬 신부의 신앙이야기:티스토리]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