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미쳐 시가 되고. / 최영미
시골집 툇마루 요강에 걸터앉아 추석 앞두고 부푼 달을 쳐다보며 생각한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을,
지금 내 모습이 닮지 않았나? 또 생각해본다 시를 써서 밥을 먹으면 좋겠다, 아니 그보다 연애를 하면,
시를 빙자해 괜찮은 남자 하나 추수할 수 있다면 파렴치하게 저 달, 저 달처럼 부풀 수 있다면...
항상 너무 넘치거나 모자랐지, 놋쇠바닥에 물줄기 듣는 소리가 똑 똑 시처럼 들리고 어둑어둑한 게 아쉽게도 깊은 밤. 사실은 그게
더 아쉬운데도 일부러 힘을 줘 짜내지 않고 다만 로댕처럼 무릎에 팔을 괴고 생각해본다 생각이 미쳐 시가 되고 시가 미쳐 사랑이
될 때까지...
출근하느라 한껏 차려입은 수 많은 싱싱한 다리들이 분주한 건널목, 샤워로 채 물기 마르지 않은 굽슬거리는 머리 위로 꽃무늬 활짝핀 우산 받쳐들고 적당히 낡은 맨 얼굴에 삘거른 구찌배니 살짝 묻힌 무표정한 여자,
제법 높은 구두 위로 두리뭉실한 몸뚱아리 뒤뚱거리고, 숨가쁜 초록의 외눈박이 얼른얼른 비켜라 등 떠밀어도, 무뎌진 세상일인양 느긋한 발걸음 위로 축축한 물기 튀어 오른다. 집으로 가는 버스안은 시내 반대방향이라 헐렁하니 빈자리가 수두룩하고, 내리기 편한 문 바로 뒤 두칸의 널찍한 좌석을 다 차지하고 밤새워 피곤한 몸 편안히 기대 앉는다
가뜩이나 움푹 들어간 눈, 까칠하게 메말라오는 혓바닥, 여전히 창밖엔 비 내리고, 앉은 머리위로 에어컨 빵빵하게 돌아가고 버스는 달리고 셔틀버스 타고 내달려 온 광나루를 지나고 그 유명한 워커힐 언덕배기도 지나고, 한다리도 지날쯤 스르르 감기는 눈,..
감은 눈 사이로 보이는 까만 적막함, 낡은 필름 돌아가다 지지찍 거리며 잠시 시커멓게 어둔 장막 드리운 곳으로 흑백의 희미한 영상이 펼쳐진다
어둑한 저녁 나절 만큼이나 적적하고 그림자 짙은 얼굴을 가진 남자와 작고 가냘프고 쓸쓸한 표정의 여자가 둥근달 저 멀리 하늘에 떡 하니 매달아 두고 밤길을 걷는다 십리길을 지나고 이십리길 지나고 삼십리길도 지나고, 왁자한 개구리 울음 소리 요란한 논둑을 지나 자갈이 깔린 울퉁불퉁한 미포장 도로를 벌쭉하게 키큰 남자 손 꼬옥 붙잡고 세상의 끝까지라도 함께 갈 듯 자박자박 또박또박 걸어 간다 구불구불 부드러운 곡선의 길 위로 고고한 달빛 스민 푸르고 깊은 긴 그림자 휘청거리고..
달콤한 사랑의 밀어도 없다 말없이 움켜쥔 작은 손 파르르 떨리고, 간간히 불러주는 휘파람 소리만 스물 여섯의 짧은 삶 속을 온통 휘저어 놓는 저 울음 같은 휘파람, 굳게 맺은 언약은 관습에 걸려 꺽이고 어른들의 호통에 힘 없이 물러서 버린 허망한 청춘의 약속이여......
꿈인듯 환상인듯 아픈 청춘의 언약이, 멀고도 먼 삼십년 전 숨가픈 고개마루에서 멈췄다. 흔들린다 마구 휘청거린다 끝간데 없이 이어지는 굴곡진 춤 사위길을 휘휘 돌아 돌아 너는 어디에? 나는 또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건가? 살아도 산것같지 않을 이 허전함을 너는 어떻게 메우며 살까? 지금쯤 그 작고 가냘픈 쓸쓸한 얼굴의 여자,기억이나 할까?
끝내 함께 도망치지 못하고 오십리길의 길을 걸어 집에 들여보내고 뒤 돌아서던 쓸쓸한 뒷 모습 아직도 생생한데, 지금쯤 아들하나 딸 하나 둔 적당히 뱃살 나온 한 집안의 남편이자 누구의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겠지.
여자 처럼........
여전히 비는 내리고 버스는 내달리고, 흐릿한 차창에 어른거리는 중년의 서글프고 고달픈 얼굴의 여자, 생뚱맞게 올려다 본다
#...
오래 전 글입니다.
한 참 詩에 미쳐있던 시절
시골집, 툇마루, 요강, 부푼 달,
정겨운 단어가 여자의 묻어둔 생각
그 속을 온통 헤집어 놓았나 봅니다.
첫댓글 저도 새댁 적에 아침이면 요강을 비우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얼마 전 합천 작약꽃밭에 갔더니,
뻥튀기 아저씨가 사기 요강을 돈통으로 쓰시더라고요. ^^
요강에 걸터 앉아서도 저리 생생한 시상이 떠오르시다니,
가히 감탄의 대상이신 우리 요요님^^
푸른 바다를 헤엄치는 등푸른 물고기 같이 생생하게 펄쩍 펄쩍 뛰어 오르는 요요님의 시어들이 저는 보석으로 보입니다.
건필하소서!
시는
최영미 시인의 시입니다ㅎㅎ
비가 오니
예전에 쓴 글이 생각 나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꺼집어 내 봤네요
감사합니다 ^^~
@요 요 아앗, 난독증 죄송합니다. ^^
최영미 시인의 시 좋아합니다.
그리고 그 시에 이어서 쓰신 요요님 글은 더욱 좋아합니다. ^^
최영미시인
대단하신분입니다.
대단하지요
그 유명한 "돼지들에게"라는
문학계 미투 시발점이 된 시
@요 요 고은시인도
혼났어요.
비가 모처럼 내리니 친구도 쓸쓸함이 밀려오는듯
그러게나 말입니다
꽤 세월이 흘렀지요
사이버세상 속 인연
늘 건강하세요
화끈한
최영미 시인
저도
은근히
찻아 읽습니다
거대한
산을
연약한 펜으로
와그르르~
요요님
글
아껴가며 읽는 할매....ㅎ
감사합니다
아껴가며 읽으주신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비 내리는 수요일
남은 시간도 행복 하시길요^^~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생각은 모세혈관을 흐르는 피처럼 끝없이 가지쳐 나가는 정신 세계가 놀랍습니다.
글은 아무나 쓰는게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글, 잘 읽었습니다.
아쉬운 것은
오십리길을 바래다준 남자를 잡지못하고
못내 보내버린 이성이란 허울이 아닐런지요.
주변의 안녕과 평화를 깨지 못해
차라리 나 자신의 행복을 포기하고야마는데 익숙한 우리네들의 겁에 질린 순박함 탓은 아닐런지요,
아마도 그 남자는 끝까지 행복하게 해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갈등이 많으셨을 것 같습니다.
어쨌든 지난 일이고
인생은 계속 될 것이기에... 희망은 또 어떤 길로 나를 이끌게 될지 기대해봐야죠.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
요강 위에 걸터앉아 하늘의 부푼 달을 쳐다보는 심정,
현실에 걸터앉아 이상을 꿈꾸는 삶,
땅과 하늘,
육신과 정신,
감성과 이성,
욕망과 순수함에 갈갈이 찢겨나가도
욕망을 내려놓을 수도 키울 수도 없이 끌려다녀야 하는 것이 우리네의 삶이라면, 기꺼이 감수할 밖에요.
그냥 함 끝까지 살아보자구요~ ㅎ
@신포도
무늬들 / 이병률
그리움을 밀면 한 장의 먼지 낀 내 유리창이 밀리고
그 밀린 유리창을 조금 더 밀면 닦이지 않던 물자국이 밀리고
갑자기 불어닥쳐 가슴 쓰리고 이마가 쓰라린 사랑을 밀면
무겁고 차가워 놀란 감정의 동그란 테두리가 기울어져 나무가 밀리고
길 아닌 어디쯤에선가 때 아닌 눈사태가 나고
몇십 갑자를 돌고 도느라 저 중심에서 마른 몸으로 온 우글우글한 미동이며
그 아름다움에 패한 얼굴, 당신의 얼굴들
그리하여 제 몸을 향해 깊숙이 꽂은 긴 칼들
밀리고 밀리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 이름이 아니라
그저 무늬처럼 얼룩처럼 덮였다 놓였다 풀어지는 손길임을
갸륵한 시간임을 여태 내 손끝으로 밀어보지 못한 시간임을
신포도님의 긴 댓글 감사드립니다
무어라 답글을 달아야 할지 몰라 제가 좋아하는 시인의 시 한 편
대신 올립니다
편안한 밤 되시길^^~
햐! 오십리 길을 사랑의 힘이란 초자연적인 능력을 발휘하기도
최영미 풍운아 같이 휘몰아 치더니 지금은 그 열정이 다 했는지 어느 지면에도 안 보이네요 다 한때였나봐요
요요님 젊은 날 아픈 사랑조차 지나고 보니 굉장한 사치를 부렸구나 하는 생각 안 드세요? ㅎㅎ현재의 지지부진한 일상에 비춰볼 때 전 가끔 그래요 아! 그 시절 사랑의 배신 집착 저주 절망감 그 시간들이 돌이켜 보면 참 사치스러웠구나 내가 반짝거릴 때 였구나 하는 다시는 돌아 갈 수 없는 사랑했던 시간들 이젠 희미한 미소로 남은 사랑 사랑했던 날들 ㅠㅠ
ㅎㅎ
그 때는 젊었을때니요
비가오니 매착 없는 옛 생각이 ...
어느새 이렇게 나이를 먹었는지 흐~
추적추적 비오는 저무는 봄밤입니다
편한 밤 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