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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K1. 더블린에는 비가 내린다
‘NHS 경영효율화 조치’가 내려진 이후 영국 서민들은 커다란 벽을 마주해야 했습니다. 느리고 불편하기는 해도 공공의료서비스를 비교적 싼 값으로 이용할 수 있었던 시민들은 눈덩이처럼 불어난 의료비를 감당해야 했죠. 곳곳에 영리병원들이 생겨나기 시작해 부자들이 고급 의료서비스를 누릴 때, 서민들은 등허리가 휠 지경이었습니다.
이 여파는 대표적 저소득지역인 아일랜드에게 직격타를 입혔습니다. 분노한 아일랜드인들이 거리로 나왔고, 1972년 1월은 기마경찰대와 화염병, 쇠파이프의 겨울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던 1월 30일, 누군가가 쏜 탄환이 한 경찰대원의 가슴팍에 박혔습니다. 흥분한 경찰들은 그대로 발포, 대학살이 시작됐죠. 이날의 유혈진압으로 181명이 사망하고, 부상자 2000여명 이상이 발생했습니다.
이러한 초강경 조치는 조셉 내각의 내무장관이던 헤일셤 남작 퀸틴 호그(Quintin Hogg)의 “무제한 진압” 정책 때문이었습니다. IRA는 이 일을 잊지 않을 것이며, 곧 피의 복수가 시작될 것입니다…
K1. 안보 정국 리턴즈
사회당 사건이 일어난 이후, 성직자들의 항의와 집회는, 이철승 총리가 끌어올리려던 지지율의 상승세를 둔화 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면, 아무리 불만이 있다 해도, 무차별 체포등을 거행할 순 없다는거지요. 박정희를 심판하고 올라온 정부가 전 정권과 같은 일을 한다면... 정통성은 쓰레기통으로 갈게 자명했습니다.
더 문제가 있다면, 사회당 사건의 재심이나 폐기 또한 무리가 있다는것이겠지요. 군사 법정에서 박살낸 사람을 복권 시킨다면, 일단 군부가 총을 들고 찾아와 사임을 요구할겁니다. 그렇기에, 이철승 총리는 타협점을 하나 찾았습니다. 사정 정국을 끝내면서도, 지지율을 끌어 올릴 방법. 북풍입니다...
이철승 총리가 주장했던데로, 멸공을 위한 작은 움직임이 시작 되었습니다. 그 시작은, 포격 사건과 함께, 대규모 훈련으로 퍼져 나갈것입니다.
J1. 투쟁의 종말
2차대전의 결과로 일본이 두 공화국(일본공화국, 일본인민공화국)으로 분단되고 나자, 좌우익세력은 각각 북쪽과 남쪽으로 향했습니다. 일본공산당 및 그 동조세력은 북일본, 자유당과 민주당 등 우익정당은 남일본에 터를 잡았죠. 사회당의 경우는 조금 복잡했습니다. 마르크스주의를 따랐던 좌파 및 급진사회주의를 주장한 중도파는 북쪽을 택했으나, 사회민주주의 성향의 우파는 당 지도부의 친소친공적 노선을 비판하며 남쪽에 남았습니다. 이들은 니시오 스에히로 위원장을 중심으로 민주사회당을 결성했죠.
1958-60년의 안보투쟁 정국은 자유당과 민주당, 개진당, 민주사회당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계기를 제공했습니다. ‘국민연합’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정치단체는 공식적인 정당도 단일교섭단체도 아니었지만, 정관을 통해 “협의에 의한 정치”를 구사하도록 실질적 강제력을 행사했습니다. 연합은 언제나 중참 양원 의석의 90% 이상을 점유했죠.
자연스레 학생운동권 세력은 기성정치 자체에 회의를 가져 좌경화, 급진화되었습니다. 안보투쟁이 실패로 돌아간 뒤 구심점을 잃고 헤매던 이들은 중공의 몰락과 공산권의 내홍 등을 계기로 다시금 조직을 재건하고 투쟁에 나서기로 했습니다. 북일본의 노선조차 수정주의라고 비판하던 극좌 반수정주의자들이 패권을 잡았다는 등 사소한 문제가 존재했지만 말입니다.
정권에 대항할 단결력을 재건했다는 자신감에 고무된 ‘연합적군’ 이하 극좌 학생운동 세력은 1972년 3월 27일 행동을 개시했습니다. 국내 최고학부인 도쿄대 캠퍼스를 점거한 것이죠. 개학을 앞둔 도쿄대는 한산했고, 일반 학생으로 위장한 수천명의 운동가들은 일거에 캠퍼스를 봉쇄했습니다. 수백명의 교직원 및 행정직원들, 연구원들, 대학원생들이 인질로 잡히고 말았습니다.
사건을 보고받은 사토 에이사쿠 총리는 즉시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위수령을 내려 군 병력으로 학교를 둘러쌌습니다. 또한 학생들의 가족들과 지인들을 섭외해 투항을 재촉하는 한편 헬기를 띄워 인질 구조를 시도했습니다. 방위군은 학생들의 저항을 뚫고 꽤 많은 수의 인질들을 구출해낼 수 있었으나, 여전히 100명이 넘는 인원이 억류되어 있었습니다.
더구나 악에 받힌 일부 농성자들이 밀수 총기와 (물론 조악한 품질의) 사제 로켓으로 작전을 방해하는 통에 제대로 된 헬기 구조는 어려워진 상황. 사토 총리는 결단을 내려야 했습니다. 결국 농성 6일차 이른 아침, 대대적 진압작전이 시작되었습니다. 동시다발적으로 바리케이드선을 폭파하고 돌입한 전투경찰 및 방위군 민정경찰부대는 빠르게 상황을 정리하고 인질들이 모여있던 대학본부 건물을 에워쌌습니다. 학생회 간부진과 비상대책본부 협상팀의 마지막 협상이 결렬로 돌아가자, 진압병력은 즉시 강경 진압에 들어섰죠.
그러나 비극적인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겁에 질려 매우 흥분한 인질 중 일부가 학생들의 총기를 일부 탈취한 뒤 내부총격전을 벌이던 중 합선사고가 발생, 건물에 대규모 화재가 발생한 것입니다. 인질들과 인질범들이 불길과 유독가스에 고통받으며 죽어가는 모습은 전국에 생중계됐죠. 모두가 경악했습니다.
결국 도쿄대 총장을 포함한 27명이 사망하고 인질과 점거대를 합해 89명이 부상을 입은 끝에 이 사태는 종결되었습니다. 이 사태로 도쿄대는 1년간 모든 활동을 중지해야 했고, 입학이 예정되었던 학생들은 입학취소조치를 당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사건의 여파 역시 심대했습니다. 그나마 학생들의 혈기어린 행동을 이해해주던 이들이 완전히 등을 돌렸고, 72학년도 입시제도가 마비되면서 학생들의 원성도 하늘을 찔렀습니다. 거의 모든 대학의 72학번 신입생들은 즉각 반운동권 학생회를 조직해 (보수적 성향의)교내 체육회와 연합, 운동권 학생조직들을 구축해버렸습니다. 이로써 일본공화국 내 혁신계 학생운동은 사실상 명맥만 남은 채 사멸해버리고 말았습니다.
북일본 정부에서는 “우리 정부는 남측에서 벌어지는 폭력사태에 깊은 유감을 표하며, 그 어떤 형태의 지지도 건넬 의향이 없다”는 성명을 발표했고, 책임을 물어 총리를 교체한 남일본 정부는 즉각 ‘특정반사회집단범죄에대한가중처벌법(특사법)’을 제정해 혁신세력을 집요하게 와해시켜 버렸습니다.
이로써 남일본의 좌파는 사실상 죽었습니다. 국민연합 내 좌파를 담당하던 민사당계 역시 우익 협동조합노선(일명 호소카와 노선)으로 선회해 버렸으니까요. 역사는 오늘도 흘러갑니다..
A-B1. 7년 전쟁의 종결.
이처럼 전 세계의 역사가 흘러갈때, 남미의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는 7년간 지루하게 전선에서 싸우고 있었습니다. 아르헨이 대규모 시위를 진압하고, 핵개발을 한것과, 브라질에서 대선이 한번 치러진게 그나마 큰 사건 일겁니다.
문제는, 브라질이 또 대선을 치를 시간이 왔다는 거겠죠. 전후 첫 대선에는 전쟁 명분과 함께, 말을 갈아타서는 안된다는 말로 정권을 수호했으나, 이번에는 그러기 힘들어 보였습니다. 전쟁 명분이 아무리 강해도, 7년동안 아무런 성과도 없이 전장에 잡혀 있다는건, 이해할수가 없었습니다.. 심지어, 아르헨티나는 평화를 말하고 있었지요.
결국, 현 정권은 정권 수호를 위해서라도, 무리한 작전을 감행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몬테비데오를 함락 시켜, 우루과이를 해방하겠다!" 였죠. 문제가 있다면... 너무 뻔한 포인트라는거였습니다. 그리하여, 그 작전은 실패로 끝나, 브라질군 2000명이 포로로 잡히며, 약 8000명이 사망하는 참극을 빚어냈습니다. 당연히, 아르헨티나는 이걸 구실로 다시 평화를 요구했고, 정부는 거절했습니다...
네. 이 전쟁이 끝난 귀결입니다. 유력 대선 후보, 주앙 굴라르는 시민들의 불만을 발빠르게 캐치해, 종전을 주요 공약으로 선언하고, 당선되었습니다. 굴라르 대통령은 빠르게 아르헨티나와 접선해 종전을 요구했죠. 브라질의 이너서클은 포로를 대가로 배상금과 함께, 영유권을 공인 받는데 성공했습니다. "절멸 작전" 을 이루기에 이만한 적기가 없을거라면서 말이죠. 7년 전쟁은 이렇게 끝났습니다. 아르헨티나의... "비 백인" 은 어떻게 될까요.
I1. 그가 돌아왔다
무더운 여름날, 테헤란 메흐라바드 국제공항에 새하얀 전세 여객기가 사뿐히 착륙했다. 비행기에서 내린 장년 남자, 지난 해 미국으로 망명했던 이란 제국의 샤한샤였으며 지금부터 다시금 제위에 복귀하게 될 모하마드 레자 샤 팔라비는 따가운 햇살을 손으로 가리며 계단을 내려갔다.
지난 1년 반 정도는 그의 인생에서 가장 당혹스럽고 수치스러웠던 기간이었다. 러시아인들이 타브리즈에 괴뢰정부를 세워 영토를 탈취하려 했을 때도, 영국과 미국이 자신을 위한답시고 석유 국유화를 외치던 총리를 제거했을 때도 그는 이 정도의 모멸감을 느껴본 바가 없었다.
레자 샤의 망막이 강한 빛에 적응할 때쯤, 그는 활주로 앞에 도열한 수천, 수만명의 환영인파를 목격했다.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동상을 무너뜨리고 온갖 욕설을 내뱉으며 그를 저주했던 군중들이, 이제는 그의 사진과 제정 깃발을 흔들며 샤한샤의 복귀를 열렬히 환영하고 있었다.
역시 그런 것이었나. 레자 샤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지더니, 이내 씁쓸하고 비릿한 미소가 자리잡았다. 백색 혁명을 내세우며 국가를 부강하게 만들고 국민의 지적 수준을 신장해 아리아-페르시아 민족의 부흥을 추구했던 그였다. 그는 언젠가 ‘위대한 아리아-페르시아 민족’이 무지와 광신의 미몽에서 깨어나 언젠가 자신이 없어져도 이 나라를 보란듯 멋지게 운영하게 되기를 내심 바랐다. 망명 기간 중에도 그는 혹시나 하는 희망을 품고 나라의 상태를 세심히 관찰했다.
그리고, 결과는 절망적이었다. 레자 샤는 이들을 증오했다. 레자 샤는 그들을 경멸했다. 이 들쥐같은 작자들은 스스로 운명을 결정할 능력이 전무하며, 그저 말솜씨 좋은 선동가의 꾀임에 무비판적으로 빠져 자기 자신조차 납득하지 못하는 멍청한 짓을 일삼을 뿐이다…
“나는 여러분들을 이해했습니다.”
X발, 이게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생각없이 환호하는 저 멍청한 꼬라지를 좀 보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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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놈들이 자초한 거야.
KD1. 수난과 고난의 시대
레반트 연방과 아랍 삼국동맹 간의 제2차 중동전쟁 및 이란 내전의 결과, 쿠르드족은 독립에 성공했습니다. 비록 이란 북서부의 작은 영토만을 실효지배하고 있지만, 이들은 쿠르드 인민공화국을 선포해 정부를 꾸려나가고 있었죠. 다만 이들의 미래가 그다지 밝다고 하긴 어려웠습니다. 쿠르드 인민공화국의 UN 회원국 자격을 인정하는 국가는 대부분 동구권으로 한정되었으며, 그마저도 레반트 연방 내 쿠르드족 다수 거주지역에서 인민공화국 편입 바람이 거세지자 여러 국가들이 승인을 철회했기 때문입니다. 실지 수복을 노리는 이란 제국의 문제는 말할 것도 없고요.
레반트에서 지원을 줄이며 쿠르드 길들이기를 시도하는 동안, 또 하나의 이해관계국인 터키는 더욱 심한 짓을 저지르고 있었습니다. 이뇌뉘 사망 이후 수립된 군사정권은 “민족문제에 관한 긴급명령”을 발동, 남동부 지역에 거주 중이던 쿠르드족을 서부로 대거 강제이주시키거나 게토에 가두는 정책을 실행 중입니다. 이들은 생전 가보지도 못했던 황무지에 인프라도 없이 떨어지거나, 뿔뿔이 흩어져 턱없이 작은 게토에 살아야 했습니다.
이 정책은 터키 내 쿠르드족을 뭉치지 못하게 하기 위한 극약처방이었습니다. 이에 저항하던 쿠르드인 수만명이 강제수용소에 수감되거나 쥐도새도 모르게 사라졌죠. 쿠르드 인민공화국 측은 당연히 백방으로 도움을 요청했으나, 소련이나 레반트로부터 외교적 지지을 얻을 수 있었을 뿐 실효적 조치는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레반트 연방 내에서 일부 바트당 과격파를 중심으로 터키와의 전쟁을 주장하는 의견이 있긴 했습니다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지도부 대부분은 이에 반대했습니다. 오히려 터키가 쿠르드인들을 다른 지역으로 보내버리고 학대하면 할수록 쿠르드 민족의 결집력은 낮아질 것이고, 그렇다면 쿠르드 인민공화국의 대 레반트 의존도를 높여 북부 메소포타미아의 자국령 쿠르드인 거주지역과 합친 “쿠르드 자치령” 계획을 완성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었죠.
중동의 정세는 점점 복잡해지고 있습니다. 지금의 패권국인 레반트는 칼날 위를 걷는 묘기를 보여주고 있지만 그것이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지는 불투명합니다. 쿠르드인들은 조국을 얻었지만 자유를 얻지는 못했습니다. 이들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요?
A1. Black Lives Matter
무더운 1972년 여름의 어느 날, 워싱턴 포스트 일간지의 1면에는 충격적인 소식이 실렸습니다. 미국 앨라배마 주 메이컨 카운티에서 정부 주도로 흑인들에 대한 무허가 매독 임상실험이, 그것도 1932년부터 40년간이나 치러지고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실험은 터스키기 의학 연구소의 주관으로 이루어졌으며, 피실험자들은 항생제를 포함한 그 어떤 적절한 처방도 받지 못하였습니다.
실험의 목적은 “매독을 치료하지 않고 내버려두면 어떻게 되는가”를 규명하는 것이었는데, 이건 마치 나치의 수용소 생체실험이나 일본 관동군 731부대의 만행에 버금갈 정도로 비윤리적인 것이었습니다. 임기 막바지의 존슨 행정부는 여론의 폭발을 예상하고, 빠른 진화에 나서기로 했죠. 터스키기 청문회가 열렸습니다.
청문회에 출석한 존 커틀러(John Cutler) 박사 이하 연구소 임원들은 뻔뻔함의 극치를 보여줬습니다. “어차피 내버려두면 무의미하게 죽을 사람들, 차라리 의학에 기여라도 하고 죽게 만들어줬으니 상을 줘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 말을 뱉은 커틀러 박사는 다음 날 흑인 경찰관에게 참혹하게 살해당했습니다.
청문회 자체는 매우, 아니 ‘지나치게’ 성공적이었습니다. 터스키기 연구소가 과테말라에서 현지 주민들에게 매독균을 풀었다는 사실까지 확인되었으니 말입니다. 과테말라 정부는 미국의 부도덕함을 비판하고 피해보상을 요구해왔습니다. 중앙아메리카 협력 공동체 역시 합동성명으로 미국의 조속한 보상과 사과를 요구해왔죠.
존슨 대통령은 모든 오명을 쓰고 가기로 했습니다. 자신이 고개를 숙이고 달걀과 오물을 뒤집어쓰는 정도로 미국의 명예와 미래를 살릴 수 있다면, 그는 기꺼이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대통령은 매우 담담하고 담백한 어조로 피해 흑인들 및 과테말라 국민들에게 사죄했습니다.
책임자들이 처벌받고 실험이 중단되며 피해자들에게 지금부터라도 적절한 치료와 보상이 진행될 것입니다. 행정부는 맡은 바 책임을 다했습니다. 여론은 퇴임하는 존슨 대통령에게 (비록 경제실패와 민권법 사태의 여파에도 불구하고) 서서히 찬사를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그는 이제 물러나야 할 몸이었죠.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미국의 비주류 집단들이 미국이라는 국가의 근본적 전제를 의심하게 되었다는 점이었습니다. 봉합된 실밥이 터진다면, 그 여파는 작지 않을 것이었습니다…
UK2.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1972년 마드리드 올림픽은 스페인이 국제사회에 완벽히 복귀했다는 것을 화려하게 보여줄 무대였습니다. 원래 개최권은 프랑스 마르세유가 가지고 있었으나, 1969년 정치 혼란의 여파와 마르세유시의 경제난으로 인해 마드리드가 기회를 잡은 것이었죠. 실제로 올림픽은 성황리에 개막했습니다. 물론, 그 누구도 이후에 벌어질 상황을 알지 못했습니다.
폐막을 3일 앞둔 어느 날, 노르망디 앞바다 상공에서 영국유럽항공 BEA418기가 납치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이 비행기 1등석에는 스페인에서 재무 및 내무장관회의를 마치고 돌아가던 마거릿 대처 재무상서와 퀸틴 호그 내무장관이 탑승하고 있었죠. 호그 장관은 앞서 설명했듯 더블린 학살의 책임자였습니다.
납치범들은 자신들이 아일랜드 독립운동조직 “에이레의 아들들” 소속임을 밝힌 뒤, 퀸틴 호그 장관의 신변을 넘긴다면 대처 재무상과 수행원단을 비롯한 나머지 승객들은 무사히 풀어주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이렇게 선언하고서 무전을 끊어버린 납치범들은 기장을 협박해 진로를 아일랜드로 틀었습니다.
더블린의 윈스턴 처칠 국제공항에 착륙한 비행기는 즉시 대테러 병력에 의해 둘러싸였습니다. 내각 일원이 무려 두명이나 인질로 잡혀있는 상태에서 강경진압을 선택할 수는 없었기에, 영국 정부는 일단 협상단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요구는 호그 장관의 신변 인도 단 하나밖에 없었고, 일반 승객들을 몇명씩 석방받는 것 외의 성과는 전무했습니다.
결국 SAS가 나섰습니다. 야음을 틈타 화물칸을 통해 진입한 존 프라이스 대위 이하 부대원들은 납치범들을 하나둘씩 쓰러뜨리면서 앞칸으로 전진해 나갔습니다. 기도비닉을 유지하며 모든 납치범들을 제압해나가던 그 때, SAS는 충격적인 모습을 목격했습니다. 호그 장관의 몸에는 C4 폭탄이 장착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SAS가 마지막 납치범의 미간에 탄환을 박아넣는 찰나의 순간 스위치가 작동되었고… 1분의 타이머가 발동했습니다.
SAS는 빠르게 대처 재무상과 다른 인질들을 탈출시키면서 폭탄을 해체하려 했으나, 시간이 너무 부족했습니다. 진압팀장은 선택을 해야 했죠. 짧은 순간, 그는 장관 1명의 생존보다는 무고한 시민 여럿의 생명이 더 중요하다고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대원들은 비행기 문을 개방하고 호그 장관을 바깥으로 던져버렸죠.
폭탄은 장관의 몸과 함께 땅에서 폭발했습니다. 폭발의 여파로 기체에 화재가 발생했으나, 승무원들 및 대원들의 노력으로 다른 승객들은 안전하게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이 사건은 전세계 모든 언론에 대서특필되었습니다. IRA는 “모 단체가 호그 남작의 ‘사형을 집행한 것’은 우리 지도부의 지시가 아니었으나, 결국은 정의가 구현되었다”는 논평을 발표했고, 영국 정부는 당연하게도 “절대로 용납하지 않겠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프라이스 대위는 살인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책임조각사유인 긴급피난이 인정되어 무죄를 선고, 군문을 떠나는 선에서 마무리되었습니다. 다만 이 사건의 여파는 상당히 클 것입니다. 피로 피를 씻는 항쟁이 벌어지겠죠. 정의는 무엇이고, 선악은 무엇일까요?
W1. 나에게 편을 강요하지 말라
알렉산드르 이사예비치 솔제니친은 수용소 문학으로 유명한 러시아의 대문호이자, 소련을 대표하는 작가였습니다. 1970년 로열 레거시 문학상 수상을 두고 당국과 갈등을 벌이다 “모스크바의 서기국은 어릿광대 집단”이라는 말을 남기고 스웨덴을 거쳐 영국으로 출국해버리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로열 레거시 문학상은 원래 영연방 국적 작가들에게만 수여되던 ‘존 르웰린 리스(John Llewellyn Rhys) 상’을 전세계로 확장해, 영국 왕실이 직접 수여토록 한 것으로, 타칭 “공산주의자들의 자화자찬 수단으로 전락해버린” 노벨문학상의 대체재라고 불렸습니다. 스웨덴이 친소국가로 돌아선 이후 수상자 인선이 조금 더 공산권 쪽으로 편향된 것은 맞지만, 그러한 평가에는 약간의 논란이 있었습니다.
아무튼 영국 왕실 직속 문학상여위원회는 솔제니친을 1970년 최고수상자로 지명했었고, 솔제니친은 처음엔 의아하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뭐, 한 번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죠. 그러나 모스크바에서 시상식에 불참할 것을 종용하자 오기가 돋은 솔제니친은 아예 망명을 택한 것이었습니다. 그에게는 권위로부터의 해방이 더 중요했으니 말이지요.
솔제니친의 망명을 자유세계 언론은 꽤나 크게 다뤘습니다. “체제개편이다, 개혁사회주의다 해도 역시 빨갱이들이 그럼 그렇지!”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역시 알아서들 자유의 품에 안기는구나!” 미국 정부는 행복회로를 열심히 돌려댔죠. 물론 솔제니친은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민권운동가 및 사회주의 정치인들과 접촉해 민감한 발언을 일삼았습니다.
결국 미국 정부 역시 솔제니친을 부담스러워했고, 그에게 크고작은 법적 소송을 가하며 압박했습니다. 그렇게 미국에 온지 2년만에 그는 다시 스위스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죠. 그곳에서 솔제니친은 독일 출신의 신좌파 작가 하인리히 뵐(Heinrich Böll)을 만나 반핵, 평화운동, 환경운동, 반권위주의 해방운동에 투신했습니다. 1972년 9월, 스위스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왼쪽, 오른쪽, 나에게 편을 강요하지 말라. 우리는 그 어느 방향도 아닌,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S1. 예기치 못한 재해.
가을 전역에서, 이란 내전이 왕당파의 승리로 끝나 지원을 떼먹힌 소련에게 뒷목을 잡을만한 소식이 하나 더 들어왔군요. 소련 전역에 극심한 가뭄이 들어, 연간 수확량이 전년 대비 7할을 밑돌거라는 보고서가 올라왔습니다.
소련은 농업 개혁을 성공시켜, 제도상의 문제와 근로 의욕을 어느정도는 개선 시킬수 있었으나, 자연재해는 그런것으로 모두 해결되는게 아니었습니다. 그와 더불어 문제가 하나 더 있었다면, 비료 공급이었지요. 북한이 패전하여 상실한 흥남 비료공장은, 소련의 주 비료 수급원중 하나였기에, 쌍으로 재해를 얻어맞은 셈이었습니다. 그래도 안정권에 도입 시키기 위해 국내 비료 생산라인을 총 동원해서 안정화를 거뒀지만, 가뭄이 들면... 어쩐답니까. 장관회의의 참석자들은 모두 외쳤습니다. "сука блять"
아무튼, 인민들을 아사시킬순 없었습니다. 우크라이나 대 기근의 악몽을 다시금 인민에게 경험 시켰다간... 상상도 가지 않는군요. 일단, 외교 라인을 총 동원해, 동맹국중, 수확량이 많은편인 북 일본, 헝가리, 루마니아, 그리고 친소 중립국인 폴란드, 스웨덴과 공급 계약을 체결하고자 높은 가격을 불렀지만, 그들도 난색을 표하긴 마찬가지였습니다. 비료 수급 문제는 이들도 동일하게 겪고 있었고, 농사는 딱 하면 식량을 뽑아내는게 아니었죠.
결국, 동맹국으로 끝나지 않는다면... 다른 진영에까지 손을 벌려야 합니다. 제 3세계 뿐만 아니라, "자유진영" 에까지. 다행히, 인도, 유고슬라비아는 석유 공급계약과 서로 맞교환해 공급선을 늘릴수 있었고, 브라질 또한, 진영 논리보단 정국을 안정 시켜줄 석유가 더 중요했기에, 결국 협상을 할 수 있었습니다.
문제가 있다면, 미국입니다. 미국은 소련의 식량 사정이 위기에 빠졌다는 소식을 빠르게 입수해, 동맹들을 단속하기 시작했습니다. 주 미 대사인 알렉세이 메스너가, 미 국무부 청사에 방문했으나, “시베리아와 바쿠 유전 등 소련 내 유전들의 채굴권을 합중국에 ’우선’ 넘긴다면 ’고려‘는 해보겠다.“는 답변만 받은채 거절 당했고, 영국, 호주, 캐나다, 프랑스, 이집트, 인도차이나, 그리고 마지막 보루인 중국까지...
결국, 소련은 '마지막 수단' 을 고려 했으나, 극복할 수 있는 위기 때문에 세계를 멸망 시킬순 없다는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따라서, "배급제" 가 시작 되었습니다. 이 가뭄이 길게 느껴지겠지만, 아무튼 극복 할 수 있을 위기일겁니다.
S2. 소련의 금주령?
배급제가 시작 되었습니다. 소련은 극복을 위해 제일 먼저, 주류부터 제한을 내렸습니다. 사람은 밥으로 먹고 살순 있지만, 술로는 먹고 살 수 없고, 자원을 공유하는 주적이었기에, 합리적인 선택... 이었습니다만, 예. 여긴 소련입니다. 소련이라구요.
주류 상점에는 배급제 시행 이전부터 사재기꾼들로 판쳤고, 배급제가 시행 된 이후에는 싸움이 멈추지 않는 전쟁터였습니다. 그래도, 질서 유지를 위해 경찰력이 투입 된 이후에는 좀 괜찮아졌지만, 그럴때의 문제는, "권위"를 동원하려는 사람입니다...
"Бори́с Никола́евич Е́льцин" 익히 아시는 이름일겁니다. 현재는... 스베르들롭스크주의 지역당 당수와 더불어... 지역 광산부의 부서장을 맡고 있는 높으신 분이지요. 그리고... 술고래입니다.
그는, 배급제가 시행되기 전에 최대한 술을 끌어 모았습니다. 그리고, 예상보다 빠르게 그 술을 다 털어마셨지요. 아껴마신다고 다짐 했지만, 그 결심. 어디 가나요... 아무튼, 술을 하루에 두병씩만 살 수 있는 배급제는 가혹합니다. 당원에게는 더 많이 내어줘도 좋을텐데... 라고 생각이 들자 마자, 주류 상점으로 달려가서, "내가 이 지역당 당수인데, 꼴랑 두병밖에 못 주냐" 고 거센 항의를 시작했죠. 경찰이 와서 막으려 했지만, 지역당 당수를 함부로 건드렸다간... 귀찮은 일이 생길게 뻔했습니다. 결국, 그는 원하는대로 술 몇병을 더 얻어 가는데 성공했죠. 하루... 이틀... 그리고 1주. 중앙에 이 사고가 보고 되는데 걸린 시간이자, 그가 하루에 술을 10병씩 사 모으고 처 마신 시간입니다.
그리고, 시범 케이스에 딱 걸리고 말았습니다. 금주령 위반도 위반이지만, "민중의 종"이어야 할 당직자가 오히려 민중을 곤궁케 한건, 공직 기강에 큰 해악을 끼칠 여지가 있었습니다.
결국, 그는 해임되었습니다. 굴라그로는 가지 않겠지만... 공직자 윤리법 위반에 걸렸으니, 다시 공직을 쥘수는 없겠지요. 또한... 공직 기강 단속 시범케이스로써, 영원히 입방아에 오를것 입니다...
A3. 미국적 가치의 수호, 혹은 저열한 사기극
1972년 미국 대통령 선거의 막이 올랐습니다. 국가자유당에서는 조지 월리스 앨라배마 상원의원과 로널드 레이건 캘리포니아 주지사가, 공화민주당에서는 로버트 버드 웨스트버지니아 상원의원과 에드워드 브룩(Edward W. Brooke III) 매사추세츠 상원의원이, 진보당에서는 퍼트리셔 로버츠 해리스(Patricia Roberts Harris) 하버드대 교수와 마이클 헤링턴 미주리주 상원의원이 각각 정부호와 부후보로 출마했습니다. 공화민주당의 브룩 부후보는 공화당 진보파(록펠러 공화당)의 일원인 흑인 의원이었고, 진보당의 해리스 후보 역시 흑인 여성 민권운동가였죠.
선거 결과, 총 538석의 선거인단 중 진보당이 241석, 공화민주당이 186석, 국가자유당이 111석을 가져갔습니다. 하원의원 선거에서는 진보당이 과반선을 2석 넘기는 승리를 가져갔고, 상원에서도 꾸준한 상승세를 보이던 진보당이 100석 중 43석을 점했습니다. 이대로라면 하원에서 진보당 후보가 당선, 상원에서도 몇가지 정치적 거래가 성공한다면 진보당 후보 또는 타 정당 내 진보성향 정치인을 부통령으로 세울 수 있었죠.
그러나 공화민주당과 국가자유당 수뇌부들은 이미 밀약을 맺은 상태였습니다. 미증유의 스태그플레이션 및 국내정치 위기 상황에서 진보당의 ‘급진 사회주의자들’이 정권을 잡는다면 미국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될 것이라는 게 그들의 생각이었죠. 결국 선거인단 본투표에서 양당 선거인단들은 정후보로 공화민주당의 버드를, 부후보로 국가자유당의 레이건을 선출했습니다.
진보와 변혁의 꿈에 부풀었던 유권자들은 크게 분노했습니다. 정후보와 부후보를 따로 선출하는 선거인단 제도의 허점을 이용한 거대한 사기극이 벌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버드 당선인은 선명한 원칙을 제시했습니다. 첫째, 재정건전성을 철저히 유지하며 시장자유화를 통해 경제위기를 조속히 극복한다. 둘째, 인종차별 문제를 일단락짓는다. 셋째, 극단주의를 근절한다.
다음해 1월, 새 대통령은 취임식을 가질 것입니다. 아마 역대 가장 인기없고 싸늘한 취임식이 될 지도 모르겠군요. 물론 정국 안정과 위기 극복을 위한 고육지책이라고 주장하겠지요.
그러나 이런 정부를 국민들이 지지해줄까요, 대통령 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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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년 사건.
- 73년 사건 목록
- 마약과의 전쟁 : 대선의 야합. 국민들은 용납하지 않을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는 목적의식이 필요합니다. 신 대통령은 마약과의 전쟁을 그 목적의식으로 삼으려시는군요. 행운을 빕니다.
- 피의 아일랜드 : 프라이스 사건. 영국인들에겐 큰 충격이었을겁니다. 피의 보복이 약속된 지금, 아일랜드는 관동 대지진의 일본보다, 나을수 있을까요?
- 쿠르디스탄의 타협? 맹종? : 중동에 칼바람이 불어닥치고 있습니다. 터키나, 레반트나, 이란, 사우디. 모두 직접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은 아닙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쿠르디스탄은 어떤 결정을 내려야만 합니까? 자유를 위한 타협? 레반트를 향한 맹종? 아니면...
- 스웨덴의 결정 : 스웨덴은 현재 큰 고민에 빠져 있습니다. 친소 노선을 따르고 있긴 하지만, 자유 진영의 러브콜은 일상 다반사. 오일 쇼크 이후 자원 수급을 소련에 어느정도 기대곤 있지만, 그것도 언제 끝날지 모릅니다. 식량 부족을 타개할 방법으로, 유가 인상 압박을 취해 올수도 있겠지요. 북해 유전의 개발 소식도 무시 못할 일입니다. 연립 내각이 삐걱거리고 있는중인 지금, 스웨덴의 노선을 다시금 고를 시간이 온 것 같습니다...
- 공직 기강 : 소련에서 공직자 윤리법이 제정된지 약... 5년차. 그러나, 그런 법이 발효 되는건 드문일이죠. 감사관이나 공무원이나 한 통속이니. 그런데, 한 사건이 터짐으로써... 대규모 감사가 시작 되었습니다. 소련의 내부는, 얼마나 문제가 있을까요?
- 아프가니스탄 쿠데타 : 왕이 휴가를 떠난 사이에, 총리가 배신했습니다. 이제 아프간은 공화정입니다! 만... 어... 네. 이 주변 정세를 기억하신다면, 행운을 빕니다. 복귀한 이란, 혼란을 부추길 소련, 복수를 꿈꾸는 파키스탄까지.
- 우주 경쟁 : 4년 전, 달 상륙 경쟁이 끝났지만, 그 이상을 양측 모두가 바라고 있습니다. 소련은 화성에 우주선을 쏘려하고, 미국은 우주 정거장을 만들려 하는군요. 어느쪽이 더 우수한 성과를 거둘수 있을까요?
- 철군 이후의 말레이 반도 : 약속된 3년이 끝나고, 미군 25000명은 말레이에서 철군 했습니다. 공산군이 공급될 수단은 없지만, 이 지역은 아직 안정적이지 못한것이 사실인데다, 불쾌하더라도 정권을 쥔 첸만힝을 지켰을 미군이 빠진 지금, 어떤 일이 벌어질려나요?
- 태국 민중 봉기 : 태국의 군사 정권은 큰 불만에 직면하여, 대중들의 봉기를 겪습니다. 이들은 정권을 내려놓고 순응할까요? 아님 피로써 진압하고, 정권을 이어갈까요...
- 그리스 폴리테크닉 봉기 : 저번에 말했듯, 그리스와 북 일본은 적대국이 명확해 개혁을 하지 않을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적대국이, 사실은 아무런 힘도 없는 모질이라면... 그 통제를 유지할 유인이 있다고 설득 할 수 있을까요? 정부는 아무래도 무리였나봅니다. 공산 정권에 대한 민중의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습니다. 반군 반란까지 확대 될지는 아직 미지수입니다...
- 이슬람 협력 기구 : 레반트는 쿠르디스탄 독립 이후, 칼날을 걷고 있습니다. 코올리션이 발동 되는건 시간 문제로 보이고... 그 시작으로, 이슬람 협력 기구가 발족 되었습니다. 두 성지의 수호자인 사우디를 위시로 해, 북 아프리카 전체, 중부 아프리카 과반, 그리고 중동 대다수가 가입했습니다. 아. 인도네시아도 빼먹으면 안되죠...
- 아르헨티나의 비 백인 : 전쟁은 끝났습니다. 아르헨티나의 이너서클은 전쟁중에는 쥐어짜야할 필요성을 느껴서 비 백인들을 수용소에 가두고, 제대로된 식량을 공급 안할지언정, 절멸시키려 들진 않았죠. 그러나... 전쟁은 끝났습니다. 결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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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투고에 항상 감사 드립니다. 이번화는 더욱 더 감사 드립니다.
@E.E.샤츠슈나이더 제 미적 감각이 특이하지 않다면 저건 무채색이 아니라도 좀 괴이쩍긴 하네요 ㅋㅋ... 그나마 채색이라도 되어있음 조금은 낫겠는데, 저건 만화에 나오는 기계도시 같은?
@E.E.샤츠슈나이더 밀로셰비치:
(힐끔)
@E.E.샤츠슈나이더 그래서 유고에게 딱히 비난은 없을겁니다.
유고가 이상황을 어찌 이용하냐일뿐
근데 취향이 참 특이하네요
@돈이 곧 진리 뭐 밀로셰비치 한놈만 없다고 없어질 갈등은 아니었다만...
@E.E.샤츠슈나이더 뭐 모더니즘 구축주의 등등의 양식은 사실 집산주의 이념과는 뗄래야 뗄 수 없고, (파시즘도 들어가죠....) 동구권이나 공산당이 힘세거나 개발독재를 겪은 나라에서는 죄다 보이죠. 사실 한국의 아파트촌도 딱 그케이스고...
문제는 브루탈리즘처럼 저렇게 한발짝 더 나가서 진짜로 위압감을 주는 형태의 건축물인데(...) 심지어 이북에도 좀 있죠.....
@렌지파일 아무래도 유고는 알기쉬운 국가통합의 상징이 별달리 없다보니까 이런 식으로 대놓고 위압감을 주는 형식의 건축을 차용한 걸수도 있겠네요 ㅋㅋ
@E.E.샤츠슈나이더 ㅋㅋ... 유고는 확실히 티토 말곤 통합이... 역사도 그렇구요. 다들 따로 놀다가 갑자기 합쳐진 케이스.
다음화 올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