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026년 5월 24일 주일[성령 강림 대축일]
제1독서 : 사도 2,1-11
제2독서 : 1코린 12,3ㄷ-7.12-13
복 음 : 요한 20,19-23
19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20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21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22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오늘의 묵상
권 순호 알베르토 신부
오늘은 성령 강림 대축일입니다.
오순절에 사도들이 모여 있을 때
하늘에서 거센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났고,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그들 위에 내려앉았습니다.
그들은 성령으로 가득 차 여러 언어로 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바람은 그 형체가 보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어 존재를 알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도 마찬가지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두려움에 떨며
문을 잠가 놓고 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 말씀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19)
그리고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며
“성령을 받아라.”(20,22)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 창조 때에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어
살아 있는 존재가 되게 하셨습니다(창세 2,7 참조).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새로운 생명의 숨, 성령을 불어넣으십니다.
성령께서는 제자들을 변화시키십니다.
그들은 더 이상 문을 잠그고 숨지 않습니다.
용기를 내어 세상으로 나아가 복음을 선포합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차가운 지하 감옥에서도 절망에 빠진 사람들을
사랑으로 위로하셨던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성인과 같이,
성령과 함께하면 사랑이 생겨나고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또한 성령께서는 우리를 하나로 만드십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우리는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1코린 12,13).
같은 언어를 써도 마음이 통하지 않을 수 있지만,
성령의 언어는 분열을 넘어 일치로, 두려움을 넘어 사랑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오늘 우리 모두 성령의 손길을 느낍시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의 숨을 불어넣어 주시기를 기도하며,
하나 되는 공동체를 이룹시다.
조 명연 마태오 신부
저는 책을 많이 읽기는 하지만, 2번 이상 읽는 책은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한 번 읽고 나면 아무리 좋은 내용을 가지고 있더라도
보관하지 않고 성당 도서관에 기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읽는 감정에 지루함이 들어가고,
또 세상에는 새롭게 읽어야 할 책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계속 읽어도 지루하지 않은 책이 있습니다. 바로 성경입니다.
성경은 읽을수록 주님께서 빛을 비춰주심을 깨닫습니다.
성령께서 활동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같은 내용도 같은 내용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게 됩니다.
여기에 주님께서 직접 제게 말씀해 주시는 생생함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어느 집을 방문해서 성경을 보면 반갑습니다.
언젠가 어느 집에서 거실 한가운데에 자그만 책상이 있고
그 위에 펼쳐져 있는 성경을 보았습니다. 경건함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책 앞에 갔다가 실망하고 말았습니다.
그곳에는 먼지가 뽀얗게 쌓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펼쳐 놓는 것이 아니라,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인의 삶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신앙인의 삶은 자기 편한 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불편하더라도 계속해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펼쳐 놓은 성경책처럼 말로만 신앙인이라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신앙의 기쁨을 얻을 수 없게 됩니다.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신앙인의 삶을 통해 주님께서 주시는 새로움으로
또 커다란 의미로 매 순간을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오늘은 성령 강림 대축일입니다.
교회가 탄생한 날이자, 주님께서 주신 사명이
제자들을 통해 세상으로 뻗어 나가기 시작한 거룩한 날입니다.
성령을 받지 못했던 제자들의 모습을 오늘 복음에서 볼 수 있지요.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하고 말씀하셨다.”(요한 20,19)
십자가 사건 이후 제자들은 죽음에 대한 공포,
또 스승을 버렸다는 죄책감으로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있었습니다.
성령을 받기 전, 자기 자신과 세상에 대해 닫혀 있는 인간의 영적 상태를 보여줍니다.
제자들이 받은 성령은 두려움으로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고,
세상이 줄 수 없는 십자가의 참된 평화를 가져다주는 영입니다.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요한 20,22)
창세기를 보면, 하느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어 사람이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 장면과 일치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는 행위는
십자가의 은총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제2의 창조를 의미합니다.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낡은 자아를 벗고
하느님의 생명을 품은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면서 주님의 뜻을 세상에 펼치게 됩니다.
우리 역시 성령의 숨결을 받아들일 때
새롭게 창조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오늘은 “성령강림 대축일”입니다.
성령께서는 오늘도 갖가지 모습으로 저희에게 오시어 동행하십니다.
특별히 오늘 <말씀 전례>에서는 성령께서 오시는 두 가지 모습을 보여줍니다.
<제1독서>에서는 ‘놀라운 모습’,
곧 하늘에서 세찬 바람의 소리와 불과 혀의 모양으로 내려오십니다.
그리고 <복음>에서는 ‘고요한 모습’, 곧 ‘닫혀 진 문’을 뚫고
아무런 소리도 없이 부드러운 숨결로 들어오십니다.
이 두 가지 모두 하늘 문을 열거나,
땅의 문을 열거나 모두 ‘닫힌 문’을 열면서 벌어집니다.
곧 성령의 활동은 ‘문을 여는 일’을 통해 드러납니다.
성령께서는 하늘을 가르고, 닫혀 진 문을 부수고, 가려진 장막의 휘장을 찢고,
죽음에 갇힌 무덤을 풀고, 우리의 굳은 마음의 문을 여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늘이 문을 열고 땅으로 내려온 것입니다.
묘한 것은 하늘은 하늘이 아니라 땅에서 열리고,
닫힌 문은 마음에서 열린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하늘이 열리는 자리는 바로 우리네 삶의 자리입니다.
결국, 하느님께서는 이미 우리 마음 깊은 곳에 계시고,
그러기에 우리는 다른 먼 곳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바로 그분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성령께서는 바로 ‘지금 여기’ 우리 가운데서 활동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미 성령이 베풀어졌고, 그분께서는 우리 안에 살아계십니다.
<제2독서>에서는 이를 잘 말해줍니다.
‘신비체’는 지체로 이루어진 ‘한 몸’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 몸은 바로 성령에 의해 지탱되고 존속됩니다.
그 지체를 서로 결합시키고 하나로 묶어주는 힘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발현하시어
‘평화를 주시는 장면’과 성령으로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시는 장면’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로써, 새 백성이 탄생되고, 새 시대인 ‘성령의 시대’가 열리고,
그리스도 몸의 신비체인 교회가 탄생하게 됩니다.
그것은 ‘닫혀 진 문’을 열고 들어 와 시작됩니다.
그러니, 이제는 더 이상 ‘닫혀 진 문’ 뒤에 숨어있을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문을 잠가 놓고 있을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닫혀 진 문’을 뚫고 들어오시어, “평화의 인사”를 나누십니다.
팔레스티나에서 보통으로 표현하던 이 인사는
이제 인간의 구원을 약속하시는 인사가 됩니다.
이제 이 ‘평화’는 주님의 축복이요, 선물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부재가 방황이요 두려움이라면,
‘예수님의 현존’이 곧 ‘기쁨’이요 ‘평화’입니다.
이제 공포는 기쁨으로 바뀌고, 혼란은 질서를 찾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의 숨결을 불어넣으셨기 때문입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요한 20,21-22)
예수님께서는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라고 하실 때,
‘숨을 불어넣으셨다’는 말의 원어의 번역은 ‘숨을 건네주었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당신의 생명을 건네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영’을 제자들에게 건네주시며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를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2-23)
“성령을 받아라.”는 말씀은 너희는 ‘이미 용서를 받았다’는 사실을 밝혀주며,
그러니 ‘너희도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성령께서는 ‘용서’를 통해, 평화를 이루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용서’할 때, ‘평화’는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먼저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에게 ‘당신의 숨’을 불어넣으시어 새롭게 하십니다.
당신의 생명으로 우리에게 용서할 수 있는 힘을 주시고,
우리가 용서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바로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우리 안에 현존하시고, 우리 가운데서 활동하십니다.
하오니, 아버지!
오늘, 이 감격스런 성령의 활동에 자신을 승복하고,
주님의 현존에 푹 젖은 성령강림절이 되게 하소서.
당신의 숨결로 저희 사이에, 저희 안에 있는 장벽을 허무소서.
바로 오늘이 ‘용서와 평화의 축제’가 되게 하소서. 아멘.
“성령을 받아라.”
조 욱현 토마 신부
오늘은 부활 시기의 절정이자 완성인 성령 강림 대축일이다.
교회는 오순절 사건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수난·죽음·부활)가
성령 안에서 완전하게 열매 맺었음을 선포한다.
성령은 단순히 부활 사건의 부속물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파스카를 오늘 우리 안에 현존케 하시는 분이다.
1. 성령, 새 계약의 율법
사도행전은 오순절 사건을 구약의 시나이 계약과 연결하여 묘사한다.(탈출 19,16-20)
모세 시대에 돌 판에 새겨진 율법이 주어졌다면,
이제는 “살리는 영”(2코린 3,6)이신 성령께서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 새겨지는 새로운 율법이 되셨다.
성 예레미야가 예언했던 것처럼,
“나는 그들의 가슴에 내 법을 넣어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주겠다.”(예레 31,33)
이제 이 약속은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완성된다. 교리서는 이렇게 가르친다.
“성령은 교회의 영혼이시다.
성령께서 교회의 지체들에게 생명을 주시고, 교회를 하나로 모으시며,
교회의 사명과 은사들을 인도하신다.”(797항)
따라서 성령께서 그리스도인에게는 율법 이상의 기준,
곧 내적 인도자가 되어 선과 악을 분별하고 실행할 능력을 주신다.
2. 성령, 하나 됨의 원리
오순절의 언어 기적은 인간의 분열을 극복하는 성령의 힘을 드러낸다.
창세기의 바벨탑 사건(창세 11,1-9)은 언어의 혼란으로 인류가 흩어진 비극을 보여 준다.
그러나 오순절에 성령은 다양한 언어와 문화, 민족을 초월하여 복음 안에서 하나로 모으신다.
성 바실리오는 성령을 이렇게 묘사한다.
“성령께서는 교회를 조화롭게 엮어 하나로 만들고,
흩어져 있는 이들을 모아 일치시키신다.
성령께서는 서로 다른 이들이 하나 되게 하시는 원리이시다.”(De Spiritu Sancto, 16,38)
바오로 사도도 코린토 신자들에게 이렇게 가르친다.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성령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십니다.”(1코린 12,4.12)
즉, 성령은 다양성 안의 일치를 가능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3. 성령, 죄 용서의 은사
요한복음은 오순절 사건을 다른 관점에서 전하고 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며 말씀하신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있을 것이다.”(22-23절)
여기서 성령의 첫 열매는 곧 용서의 은사이다.
죄는 공동체를 와해시키고 형제애를 파괴한다.
따라서 공동체가 살아남고 참된 교회로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힘 안에서 끊임없는 용서와 화해가 이루어져야 한다.
교회 헌장은 이를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성령께서 교회를 거룩하게 하고 인도하시며,
그 안에서 은총과 봉사의 다양한 은사를 나누어 주시며,
사랑으로 교회를 인도하시어 놀라운 일치를 이룩하신다.”(4항)
4. 성령, 삼위일체의 사랑
교회는 성령을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의 유대”라고 고백한다.(교리서 733항 참조)
성령은 인격적 ‘관계’이며, 바로 그 관계가 사랑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단순히 능력을 받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의 친교 안에 들어가는 은총을 받는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설명한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사랑은 곧 성령이시다.
그분은 삼위일체의 친교 자체이시다.”(De Trinitate, XV,17,27)
따라서 성령의 선물을 받아들이는 것은
곧 하느님과 깊은 사랑의 관계 안에 들어가는 것이다.
5. 삶의 적용
성령은 우리 안에서 새로운 율법이 되어,
양심을 빛으로 비추고 선과 악을 분별할 힘을 주신다.
성령은 교회 안에서 다양성을 존중하면서도 일치를 이루는 사랑의 원리이다.
성령은 공동체의 죄를 용서하고 화해시키시는 힘이다.
성령은 삼위일체의 사랑 안으로 우리를 끌어들이시며, 우리 삶을 새롭게 창조하신다.
그러므로 신앙인은 매일의 기도 안에서
“성령께 자기 자신을 맡기는 태도”를 배워야 한다.
성령께 내어 맡길 때 개인과 교회, 그리고 세상은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조 재형 가브리엘 신부
브루클린 성당에 있을 때입니다.
보통 주일미사에 80명 정도 나왔습니다.
미사에 100명이 넘으면 아이스크림을 사드리겠다고 했습니다.
1년에 두 번 정도 100명이 넘었습니다. 성탄 때와 부활 때입니다.
저는 기분 좋게 아이스크림을 사드렸습니다.
2024년 2월 11일에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으로 왔습니다.
주일미사에 700명이 조금 넘었습니다.
저는 1,000명이 넘으면 점심을 사드리겠다고 했습니다.
그럴 일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200명이 넘게 더 나올 수 없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작년에 곧잘 800명이 넘었습니다.
그리고 올해에는 900명이 넘을 때가 두 번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부활 미사 때입니다.
성당은 물론 성당 밖의 복도에도 의자를 놓았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그물을 배 오른쪽으로 던지라고 했을 때입니다.
밤새 고기를 잡지 못했는데 예수님 말씀을 따라서
그물을 배 오른쪽으로 던졌더니 고기가 그물에 가득 잡혔습니다.
그물이 무거워서 들지 못할 정도였고, 나중에 확인하니 153마리였습니다.
제자들은 모두 놀랐습니다. 이번 부활 미사에 1,155명이 왔습니다.
저도 놀랐고, 교우들도 많이 놀랐습니다. 저는 약속대로 점심을 사드렸습니다.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였습니다.
나름대로 미사에 1,155명이 참례한 이유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째는 지리적인 이유입니다.
텍사스는 미국에서 이주를 많이 오는 주가 되었습니다.
날씨가 좋고, 세금 혜택이 있고,
상대적으로 뉴욕이나 LA 보다는 물가가 저렴한 편입니다.
타주나 한국에서 전입해 오는 교우들이 많은 편입니다.
둘째는 성당입니다.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은
9년 전인 2017년에 지금 자리로 옮겨서 신축했습니다.
다운타운에 있을 때는 성당이 작았고, 주차 공간이 협소했습니다.
벨리 뷰에 있을 때는 물류창고를 매입해서 사용했습니다.
교우들도 당시 성당을 ‘창고 성당’이라고 불렀습니다.
지금 어빙에 새로 지은 성당은
넓은 주차 공간, 다양한 용도의 교리실과 친교실, 농구장,
어린이 놀이터, 야외 십자가의 길이 있습니다.
성당도 밝은 분위로 아름답습니다.
공동체의 땀과 눈물로 세워진 성당은 아름답고, 쾌척합니다.
고속도로 옆이라 교통이 편리합니다.
셋째는 ‘새 신자 분과’입니다.
성전이 신축되면서 전임 신부님은 ‘새 신자 분과’를 만들었습니다.
새 신자 분과는 미사 때마다 매의 눈으로 새로 온 교우들을 파악합니다.
새로 온 교우들의 정보를 컴퓨터에 정리해 놓습니다.
구역장에게 연락해 주고, 1달 동안은 미사 후에 함께 식사하면서
본당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주택 마련, 자녀 교육, 직업 안내, 취미 활동까지 도움을 줍니다.
2달에 한 번은 새 신자들을 교중 미사 때 소개하고, 선물을 줍니다.
1년에 한 번은 새 신자를 위한 ‘친교 모임’을 갖습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양들의 목소리를 잘 알아듣고,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다고 하셨습니다.
본당의 새 신자 분과 위원들은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본받아
새 신자들을 위해서 정성을 다하고 있습니다.
낚시꾼은 잡은 물고기에게는 먹이를 주지 않는다고 하지만,
새 신자 분과 위원들은 전입해 온 새 신자들을 위해서 많은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넷째는 본당의 분위기입니다.
내년이면 본당 설립 50주년을 맞이합니다.
설립 초기 교우들은 씨를 뿌렸습니다. 사제를 모셔 왔고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신부님들은 사랑의 물을 주었고, 영성의 거름을 주었습니다.
몇 번 어려움이 있었지만, 성령의 이끄심으로 잘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비가 온 뒤에 땅은 더욱 단단해지듯이,
공동체는 신앙 안에서 친교와 화합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다른 한인 공동체는 고령화되는 추세인데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은
젊은 층이 상대적으로 많은 허리가 두꺼운 성당입니다.
오랜 역사를 지닌 ‘한국학교’도 전교에 큰 힘이 되었습니다.
매주 토요일이면 150명이 넘는 학생들이
한글과 한국 문화를 배우려고 성당에 옵니다.
본당 교우의 자녀도 있지만, 지역의 주민 자녀도 옵니다.
자연스럽게 성당을 접한 아이들과 부모는 신앙인이 되기도 합니다.
3년 전에 서울 대교구에서 파견된 부주임 신부님도 있습니다.
신부님은 영어 미사를 담당하고, 청소년 사목을 전담합니다.
신부님은 청소년들에게 영적인 거름을 듬뿍 주고 있습니다.
다된 밥상에 숟가락 하나 더 놓듯이, 저도 함께 할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이 모든 것이 이루어질 수 있던 것은
하느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성령의 친교가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성령 강림 대축일입니다.
오늘은 ‘견진성사’가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성령의 은사를 하나씩 뽑았습니다.
저는 ‘굳셈’을 뽑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뽑은 성령의 은사가
우리의 말과 행동으로 드러날 수 있도록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노력이 열매 맺어 언젠가 2,000명이 미사 참례하는 날이 오기를 소망합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성령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직분은 여러 가지지만
주님은 같은 주님이십니다.
활동은 여러 가지지만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활동을 일으키시는 분은
같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 받으려고 하는 사람만 받게 됩니다.
송 영진 모세 신부
1)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성령을 주는 일부터 하신 것은,
그들이 온 세상의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그리고 보라,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분을
내가 너희에게 보내 주겠다.
그러니 너희는 높은 데에서 오는 힘을 입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어라.”(루카 24,47-49)
이 말씀에서,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는,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면 죄를 용서받는다고(구원받는다고)
모든 사람에게 선포하여라.”입니다.
요한복음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성령을 주신 다음에
곧바로 ‘용서의 권한’을 주신 일”은,
루카복음에 있는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 라는 말에 연결됩니다.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면 죄를 용서받는다.”고 선포하는 것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대리해서 사람들의 죄를 실제로 용서하는 일을 하는 것까지
사도들의 임무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용서의 권한’을 주신 일은,
단순히 권한만 주신 일이 아니라 실제로는 ‘직무’,
또는 ‘임무’를 맡기신 일입니다.
그래서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는,
‘용서하지 않을 권한’을 주신 말씀이 아니라,
“용서받지 못한 채로 남아 있게 하지 마라.”로 해석됩니다.
죄를 용서하는 일은 예수님을 대리해서 하는 일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뜻’에 합당하게,
‘예수님의 뜻’에 따라서 수행해야 하는 일이고,
권한을 남용하거나 오용하면 안 되고,
직무유기나 직무태만도 안 됩니다.
사도들이 받은 ‘고해성사의 권한과 직무’는
주교들에게 계승되었고,
신부들은 교구장 주교로부터
그 권한과 직무를 위임받아서 수행합니다.
<고해성사를 보는 사람 쪽의 처지에서 생각하면,
고해성사는 예수님께서 신앙인들에게 주신
특별한 은총입니다.>
2)
예수님께서 성령을 주시고 나서
곧바로 ‘용서’를 말씀하신 것을,
그 당시의 교회 공동체의
내부 상황에 연결해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직후에
공동체의 내부 분위기는 몹시 안 좋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배반자 유다를 원망하고 미워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사도들이 잘못한 일들을 지적하고 비난하는 일도 있었을 것이고,
서로가 서로를 탓하는 분위기였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공동체의 일치가 아주 많이 깨져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그런 공동체의 일치를 회복시켜 주는 일부터 하셨을 것입니다.
<성령은 ‘일치를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는 힘’이고,
일치는 사랑, 용서, 화해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용서하려고 노력하면, 일치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성령께서 도와주시지만,
만일에 용서하기를 거부하면?
그것은 성령의 도움을 거부하는 것이고,
일치를 이루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3)
오순절 날 ‘성령 강림’의 가장 큰 ‘수혜자’는
사도들이 선포한 복음을 믿고 받아들여서,
세례를 받은 사람들(사도 2,41), 바로 그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날 일어난 일을 잘 모릅니다.
사도들이 배운 적 없는 외국어를
갑자기 말할 수 있게 된 것인지,
그렇게 되었다면 그 능력은
그날만 있었는지, 그 후에도 있었는지,
구체적인 상황은 알 수 없지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도들 쪽이 아니라,
사도들의 말을 알아들은 사람들 쪽입니다.
창세기에 있는 바벨탑 이야기를 보면,
하느님께서 사람들의 말을 뒤섞어 놓으셨기 때문에
사람들이 흩어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창세 11,7-9),
실제로는 이기심과 욕심으로
사람들의 마음이 닫히고, 멀어지고......
마음이 멀어지면서 말도 멀어졌을 것입니다.
성령 강림 때의 상황을 보면,
열린 마음으로 사도들의 말을 들으려고 한 사람들은
말을 알아들었고, 믿었고, 회개했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들이 마음을 열자
성령께서 그들의 귀를 열어 주셨다.”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사도들의 말을 알아듣고 받아들인 것은 아니고,
“새 포도주에 취했군.” 하면서 비웃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사도 2,13)
그들은 안 들으려고 해서 알아듣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성령은 만능 해결사도 아니고, 자동 기계 장치도 아닙니다.
인간이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어도
성령께서 알아서 다 해 주시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성령에 사로잡혀서 로봇처럼 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분명히 자신들의 자유의지로 사람들 앞에 섰고,
자신들의 믿음을 ‘능동적으로’ 증언했습니다.
성령께서는 그렇게 스스로 노력한 그들을 도와주셨습니다.>
율법의 “해야 해”, 그리스도의 “할 수 있어”, 성령의 “어 되네?”
전 삼용 요셉 신부
찬미 예수님!
부활의 기쁨과 성령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하기를 빕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 이런 벽에 부딪힙니다.
성경은 분명히 "원수를 사랑하라", "일곱 번씩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명령합니다.
우리 마음속에서는 '어떻게 그게 가능해?' 라는 비명이 터져 나옵니다.
오늘 요한복음의 첫머리는 이 답답한 한계를 시원하게 뚫어주는
놀라운 구원 공식을 선포합니다.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지만,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다."
모세를 통해 주어진 '율법'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해야 한다"고 다그칩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죠. 그 명령을 들을수록 우리는 더 작아지고,
'나는 할 수 없어'라며 기가 죽습니다.
율법은 길을 알려주지만, 그 길을 갈 힘은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진리'와 '은총'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차원 이동의 4단계 공식과 같습니다.
첫째, 율법의 "해야 한다"는 강박을 만납니다.
둘째, 진리이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나는 하느님의 자녀이기에 할 수 있다"는 새로운 정체성을 입습니다.
셋째, 내 힘으로는 안 됨을 고백하고 성령의 '은총'을 청하여
마침내 "어, 되네?"라는 기적을 체험합니다.
넷째, 그때 내 영혼이 하늘로 솟아오르는 진정한 "평화와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이 원리는 우리가 어릴 적 '두 발 자전거'를 처음 배울 때의 경험 속에
아주 선명하게 담겨 있습니다.
처음 두 발 자전거를 타면 쓰러질 것 같은 공포에 휩싸입니다.
"넘어지지 말고 똑바로 타야 한다!" 이것이 율법의 "해야 한다"입니다.
아무리 머리로 알아도 내 힘으로는 자꾸만 옆으로 쓰러집니다.
할 수 없다는 절망이 밀려옵니다. 그때 아빠가 뒤에서 자전거 안장을 꽉 잡아줍니다.
그리고 귀에 대고 속삭입니다.
"아빠가 잡고 있어. 너는 아빠 아들이니까 혼자서도 달릴 수 있어.
앞만 보고 페달을 밟아봐!"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할 수 있다"는 '진리(정체성)'입니다.
아빠의 말(진리)을 믿고 조심스럽게 페달을 밟기 시작합니다.
아이는 여전히 자기가 페달을 밟아 간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뒤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밀어주고 중심을 잡아주는
아빠의 헌신적인 힘이 있습니다.
이 보이지 않는 아빠의 밀어주는 힘이 바로 성령의 '은총'입니다.
그렇게 비틀거리며 페달을 밟다가, 어느 순간 뒤를 돌아보면
아빠는 저 멀리 서서 박수를 치고 있습니다.
아빠가 손을 놓았는데도 자전거가 쌩쌩 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 아이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기막힌 탄성이 무엇입니까?
"어? 되네! 내가 혼자 두 발 자전거를 타고 있네!"
이 "어, 되네?"의 순간, 걷기만 하던 아이의 세상은
두 바퀴로 세상을 가르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이동합니다.
쓰러질까 두려웠던 공포는 사라지고,
바람을 가르는 짜릿한 '평화와 기쁨'만이 남습니다.
자전거 타기라는 율법(해야 한다)이
아빠의 진리(할 수 있다)와 은총(밀어주는 힘)을 만나 기쁨의 춤이 된 것입니다.
이 놀라운 신앙의 퀀텀 점프(Quantum Leap)를
제2차 세계대전의 참혹한 지옥 속에서 생생하게 겪어낸 한 여인이 있습니다.
네덜란드의 레지스탕스였던 코리 텐 붐(Corrie ten Boom)과
그녀의 언니 벳시는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갔습니다.
그곳에서 코리는 언니 벳시가 잔인한 간수들의 학대로
끔찍하게 죽어가는 것을 두 눈으로 지켜보아야만 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1947년, 코리는 뮌헨의 한 예배당에서
하느님의 용서와 사랑에 대해 강연을 하고 있었습니다.
강연이 끝났을 때, 그녀는 심장이 멎는 듯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언니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바로 그 옛 나치 간수가
미소를 지으며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손을 내밀며 말했습니다.
"당신의 메시지에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저도 예수님을 영접하고 회개했습니다.
예수님이 제 죄를 용서해주셨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당신의 입으로 직접 용서의 말을 듣고 싶습니다.
저를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성경은 원수를 용서해야 한다(율법)고 명령합니다.
코리는 자신이 예수님의 진리 안에 있어 용서할 수 있 존재(진리)임을 굳게 믿었습니다.
"할 수 있다"는 정체성은 가졌지만,
원수가 손을 내민 순간 그녀의 핏속은 차갑게 얼어붙었고
도저히 손을 내밀 수 없었습니다.
율법과 진리만으로는 도저히 내 뜻대로 안 되는 인간의 한계에 부딪힌 것입니다.
그때 그녀는 침묵 속에서 간절히 성령의 힘을 청했습니다.
"주님, 저는 용서할 힘이 없습니다. 제가 할 수 없으니,
당신의 성령을 부어주시어 당신의 사랑으로 용서하게 해주십시오!"
코리가 자신의 무능함을 인정하고 성령의 도움(은총)을 청했을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내 어깨에서부터 팔을 타고 알 수 없는 따뜻한 전류 같은 것이 흘러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내 손이 기계처럼 움직여 간수의 손을 잡았습니다.
그때 내 입에서 이런 말이 튀어나왔습니다.
'나의 형제여, 온 마음을 다해 당신을 용서합니다!'"
그녀의 입에서 "어, 이게 되네? 내가 원수의 손을 잡고 있네!"라는
영적인 탄성이 터져 나온 순간입니다.
두 손이 맞잡힌 순간, 내 영혼을 짓누르던 증오가 씻은 듯이 사라지고
세상이 줄 수 없는 압도적인 평화가 밀려왔습니다. (출처: 코리 텐 붐, 『주는 나의 피난처』).
용서할 수 없다고 느끼면 아직 예수님(진리)을 온전히 만나지 못한 것이고,
용서해야 함을 알면서도 용서하지 못해 괴롭다면
아직 성령님(은총)을 만나지 못한 것입니다.
코리는 진리와 은총이 결합되어 차원을 이동하는 기쁨을 온몸으로 증명했습니다.
구약성경 예레미야서 38장에는
이 위대한 차원 이동과 구원의 원리를 보여주는 기막힌 알레고리가 등장합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핍박을 받아 깊은 진흙 우물 속에 던져집니다.
물은 없고 진창만 있는 그 깊고 어두운 똥통 같은 구덩이에서
예레미야는 굶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에벳멜렉이라는 내시가 임금의 허락을 받고 우물 위로 나타납니다.
에벳멜렉은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의 예표입니다.
하지만 구원자가 나를 찾아왔다고 해서 저절로 똥통에서 빠져나올 수는 없습니다.
차원 이동을 위한 절대적인 두 가지 도구가 필요했습니다.
에벳멜렉은 예레미야에게 밧줄을 던져줍니다.
그리고 낡은 헝겊과 헌 옷 조각들을 밧줄에 묶어 던지며 이렇게 외칩니다.
"이 낡은 헝겊과 옷 조각들을 겨드랑이와 밧줄 사이에 대십시오."(예레 38,12).
왜 헝겊을 먼저 대라고 했을까요?
예레미야는 진흙탕 속에서 무거운 뻘을 잔뜩 뒤집어쓴 상태였습니다.
그 상태에서 까끌까끌한 밧줄만 겨드랑이에 끼우고 위에서 당기면,
피부가 다 찢어져 고통스러워 밧줄을 놓치고 맙니다.
여기서 우리를 위로 끌어올려 주는 이 밧줄이
바로 예수님이 주시는 '진리의 말씀'입니다.
진리는 우리에게 "너는 똥통에 있을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처럼 용서하며 하늘로 올라갈 존재다" 라는 정체성의 믿음,
즉 "할 수 있다"는 자존감을 줍니다.
하지만 머리로 아는 진리(밧줄)만으로는 찢어지는 고통(분노와 억울함) 때문에
원수를 끝까지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낡은 헝겊입니다.
헝겊은 나를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서 너덜너덜하게 찢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즉 성령을 통해 부어지는 '은총'입니다.
은총은 내 마음에 부드러운 보호막이 되어 끝까지 밧줄을 놓지 않게 만들고
마침내 "어, 되네?" 하며 위로 솟구치게 만듭니다.
예수님(에벳멜렉)을 만났어도, 진리의 밧줄(내가 하느님이라는 믿음)과
은총의 헝겊(성령의 평화)을 만나지 못하면 결코 차원 이동은 완료되지 않습니다.
(출처: 『주석 성경』 예레미야서 38장)
저 육중한 비행기가 하늘로 날 수 있을까요? 비행기니까 날아야만 합니다.
우리도 용서해야만 합니다. 할 수 있다고 믿어야 조종간을 잡을 수 있습니다.
용서할 수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달리게 되고 정말 그 큰 쇳덩어리가 뜨는 것을 목격하게 됩니다.
이는 연료가 없으면 안 되는 일입니다. 그 연료가 성령님입니다.
하늘을 날 때 우리는 이렇게 외칠 수밖에 없습니다.
“어, 되네?!” 이 기쁨으로 사는 삶이 신앙생활입니다.
"성령을 받아라!"(요한 20,22)
오 상선 바오로 신부
기쁨으로 지내온 50일간의 부활 시기는 오늘 성령 강림 대축일로 막을 내립니다.
제1독서인 사도행전에서는 제자들이 성령을 받은 오순절 체험을 이야기하고,
제2독서는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 하느님 백성으로
새롭게 탄생한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를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은 세상 창조 때 성부 하느님께서 하셨듯,
인간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는 성자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오늘 미사 때 듣게 되는 성경 구절들을 잘 귀 기울여 듣다 보면
"가득"이라는 말씀이 자주 반복된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온 세상을 채운 주님의 영(입당송),
온 집안을 가득 채운 성령의 현존(제1독서),
성령으로 가득 찬 제자들(제1독서),
온 세상이 당신이 지으신 것으로 가득하다는 시편 저자의 고백(화답송),
우리 마음을 성령으로 가득 채워달라는 청원(복음환호송),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찼다는 영성체송까지...
이 말씀들에 머무르며 온 세상 만물, 공기와 사물, 사람,
모든 존재를 가득 채우고 계신 성령께 머무릅니다.
과연 온 누리는 성령과 함께 새로워지고 기쁨이 넘실대고 있습니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 곁을 떠나신 후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주시고,
그렇게 오신 보호자, 주님의 영께서는 우리와 모든 피조물,
온 누리 어디든 현존하시고, 무엇이든 가르치시며, 만물을 지탱 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요한 20,22)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며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으로 예수님의 숨이 그분에게서 우리에게로 옮겨옵니다.
숨이 곧 영입니다.
진리의 영, 사랑의 영, 평화의 영, 용서의 영...
그분 육신과 존재 안을 내밀하게 채워 흐르던 숨이
고스란히 내게로 흘러들어와 나를 채웁니다.
나의 것이 됩니다.
숨을 나누어 받는 것은 호흡을 주고받는 것이고, 생명을 공유하는 것입니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사랑은 이처럼 근원적이고 절실합니다.
숨이 곧 생명이니까요.
주님께서 내게 숨을 불어넣을 때 그 거룩하고 복되고 선한 숨을
최대한 많이 받아들이려면 나의 내부가 가능한 최대로 비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내가 비운 만큼 주님의 숨결, 주님의 영이 가득 채워질 수 있으니까요.
그분으로 가득 찬 여기에 지금 "우리가 있습니다!"
"가득"이란 말씀에서 성령의 속성을 봅니다.
가득 찼다는 건 빈 곳이 없다는 뜻이지요.
온전함을 가리킵니다.
일부만, 절반만, 거의...처럼 부분적으로 점유된 상태가 아니라,
그야말로 통째로, 싸그리(몽땅), 남김 없이 채운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성령과 함께 주신 "평화"(요한 20,19)에도 적당 선은 없습니다.
조금만 평화롭게 살자든가 약간 평화롭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는 말이지요.
평화는 성령의 속성처럼 온전해야 하고 가득 채워야 평화인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성령과 함께 주신 "용서"의 권한도 마찬가지입니다.
반쯤 용서한다든가 조금만 용서할 수는 없습니다.
용서는 그 자체로 온전히 베풀어져야 하고,
한 존재를 해방과 감사의 영으로 가득 채우는 힘입니다.
"새로움", "사랑의 불", "기쁨"...
이처럼 다양한 성령의 자취는 선하고 진실 되고 아름다우며 복됩니다.
"성령"에 힘입어 "성자"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1코린 12,3 참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곧, 우리가 성령을 통해 얻은 은사와 직분과 활동이
"공동선을 위한"(1코린 12,11)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성령으로 가득 찬 이는 그 숨결이 내게 불어넣어지기 전에 거쳐 온
모든 이웃, 모든 피조물, 온 누리의 기쁨과 행복은
물론 고통과 슬픔에도 함께 감응하게 되어 있습니다.
온 존재가 이미 한 성령의 숨결로 하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현실에는 처절한 비극과 고통어린 절규,
집단이기주의적 정치 다툼이 여전한데도
온 우주가 성령으로 가득 차, 그 사랑의 기운이
나의 세포 속속들이 머금어지는 것은 놀라운 신비가 아니겠습니까?
부족한 나에게도 오시는 성령께 마음을 활짝 열고,
그분께서 내 안에 사랑의 불을 놓으시기를,
그 불이 온전히 나를 차지하시기를 함께 청합시다.
용서와 화해와 치유가 필요한 곳으로 흘러드는 새 창조의 숨이신 성령께서
나와 모든 이웃, 모든 피조물, 온 누리를 사랑의 끈으로 이어주실 것입니다.
성령의 특별한 은사가 벗님을 가득 채워주시길 축원합니다. 아멘.
교회의 생일이요 우리 모두의 생일인 오늘 기쁨 가운데 축하드립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성령을 받아라.
이 승화 시몬 신부
성령 강림 대축일입니다.
사도들은 성령을 받아
담대히 신앙을 선포하게 됩니다.
나의 믿음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하고
나를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로 사람들을 이끌기 위한 선포를 합니다.
여기서 성령의 은사의 특징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은사는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느님께 대한 겸손된 자세를 가지게 하고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초대하는 데 힘이 되어 줍니다.
내가 이런 달란트가 있다고 자랑하기보다
그 달란트를 통해 교회에 이득이 되는 행동을 할 때
우리는 은사를 제대로 받아들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은사는 공동체의 선을 향합니다.
각자가 받은 은사는 서로를 위한 봉사로 이어지고
하느님이 원하시는 뜻을 맺도록 도와줍니다.
공동체가 아닌 자신의 뜻을 위해서만 활용하려 한다면
이미 받은 은사를 오용하는 것이고
은사 때문에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은사는 다양성 안에 일치를 말해줍니다.
사도들은 각자 다른 언어로 말하기 시작합니다.
내가 하느님의 영을 받았음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라
다양한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함께 할 수 있도록
언어의 장벽을 넘어 서로를 이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곧 은사를 통해 분열과 갈등이 생기기보다
은사를 통해 충만함으로 이어질 때 우리는 성령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바오로 사도는
성령의 은사에 대해 분명히 말해줍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성령은 같은 성령이라는 점
직분은 여러 가지지만 주님은 같은 주님이라는 점
활동은 여러 가지지만 모든 활동을 일으키는 분은 같은 하느님이라는 점
공동선을 위하여 은사가 주어진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되돌아봅니다.
내가 받은 은사를 가지고 공동체를 위한 봉사를 하는 것은
하느님의 더 큰 선을 이루기 위해 필요합니다.
동시에 봉사에 참여하지 않고 나 홀로 신앙에만 머물고 싶다면
이는 은사를 잘못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자세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평화는
나를 위한 것을 넘어
하느님 안에서 함께 하는 모든 이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그분은 언제나 함께 있을 때 숨을 불어 넣어주셨고
함께 하면서 죄의 용서를 위한 권한을 주셨습니다.
바로 이 함께 하는 단어를 통해
우리는 혼자가 아닌 공동체임을 기억하며
우리가 받은 성령의 은사를 통해 서로를 위해 봉사하고
더 좋은 선을 이루어나갈 수 있길 바랍니다.
그럴 때 주님을 중심으로 모인 친교의 공동체가 되어 감을 기어가며
서로를 위한 사랑을 나누는
그런 한 주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출처: https://frsimon.tistory.com/1878 [시몬 신부의 신앙이야기:티스토리]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