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손님과 등사판
지금은 울산광역시에 편입된 울주군 상북면이 내 고향이다. 천 미터가 넘는 고헌산, 가지산, 간월산이 병풍처럼 둘러 처져 있고 그 산들에서 흘러내리는 수정같이 맑은 물이 태화강 최상류, 시발점으로 경관이 빼어난 고장이다. 높은 산들이 연봉을 이루고 있어 등산객들이나 여행자들로부터 ‘영남 알프스’라는 애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50여 년 전에는 그런 애칭도 없었을 뿐더러 그 속에 은거한 빨치산, 공비(共匪)들 탓에 살기가 편치 않은 곳이었다.
8.15 광복, 해방의 환희 속에 우리 고장에서는 지주들의 수탈에서 벗어나겠다는 ‘농민조합’ 운동이 갈바람 속의 들불처럼 빠르게 번져 가고 있었다.
“♬애탕 개탕 피땀을 흘려 억울하게 뺏기지 말자….”
마을 청년들이 부르던 노랫말은 하도 많이 들어서 지금까지도 잊지 않고 있다. 그러자 불안을 느낀 지주들이 서울에서 서북청년단(西北靑年團)* 단원들을 무더기로 데려와 경찰과 합동으로 조합원 검거에 나섰다. 이때 산으로 피신한 농민들이 가끔 경찰들에게 맞서기도 한 게 우리 고장 빨치산의 시초였다고 한다.
지주들을 비롯한 우익 진영에서는 곧장 저들을 빨갱이, 공비로 매도하기 시작했다. 순박한 농투성이들을 하루아침에 공산주의 전사로 출세(?)를 시킨 것이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빨갱이나 공비 같은 험한 말을 입에 담지 않았다. 엊그제까지 자기 아들의 친구였거나 또는 이웃 마을 누구네 집 아들이 갑자기 그렇듯 나쁜 사람이 되었다고는 믿어지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대신 밤에 몰래 나타난다고 해서 ‘밤손님’이라고 부르곤 했다.
강 씨 집성촌인 우리 동네에서도 농민조합 운동을 하다가 밤손님이 된 분이 있었다. 항렬로 따져 내게 할아버지뻘이 되는 그는 우람한 체격에 얼굴이 희고 우렁우렁 울림이 좋은 목소리를 갖고 있었다. 고샅에서 마주치면 얼굴 가득 미소를 띠고,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곤 했다.
그때 초등학교 5학년이던 나는 수업이 끝나면 곧장 교무실로 달려가 일손을 돕고 밤에는 선생님들과 함께 숙직도 했다. 정식 사정(使丁)은 아니었지만, 학비를 면제받는 대신 그와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무더위가 한풀 꺾이고 아침저녁으로는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던 8월 하순, 그날도 나는 3학년 담임인 김 선생님과 우리 반 담임인 오 선생님, 이렇게 셋이서 숙직을 하고 있었다. 램프 등 피 위쪽이 까맣게 그을린 이슥한 밤중, 나는 선생님들의 무료함을 풀어드리려고《소년》잡지에서 순정소설 한 편을 읽어 드리고 있었다.
한참 재미있는 부분을 읽어 내려가는데 갑자기 방안이 조용해진다 싶어 고개를 들었더니, 아뿔싸! 이게 웬일인가. 말썽꾼 아이들이 교실 복도에서 벌을 서듯 선생님들이 꿇어앉아 양팔을 공중으로 치켜들고 계신 것이 아닌가. 방문 쪽에는 복면한 건장한 청년 둘이 신발을 신은 채 우리를 향해 총을 겨누고 있었다. 틀림없는 밤손님, 숨이 탁 막혔다. 얼른 팔을 들어 올리고 고개를 숙였는데 그들에게서 풍겨 오는 쉬척지근한 냄새가 나를 더욱 겁먹게 했다.
이윽고 한 청년이 해치지 않을 테니 팔을 내리라고 하면서 일장 연설을 시작했다. 농지 개혁, 악질 지주 처단, 반동분자 숙청, 미 제국주의 앞잡이 이승만 타도 같은 낱말들이 연거푸 쏟아졌다. 스스로 도취되는지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면서 방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불과 얼마 전에 경찰과 서북청년단 단원에게 쫓겨 산으로 피신했던 농사꾼들이, 누구한테 뭘 배웠기에 저토록 불온한 말들을 겁도 없이 당당하게 쏟아낼 수 있을까. 어쩌면 저들은 이제 진짜 빨갱이가 되어 버렸을지도 모른다 싶었다.
연설을 끝내면서 자신들의 투쟁에 꼭 필요하니 학교의 등사판을 빌려 달라고 했다. 뺏어 가면서 빌려 간다는 말은 또 무엇일까. 그러나 토를 달 처지가 아니었다. 고헌산 밑 송낙골에 살던 친구 아버지는 저들 비위를 거슬렸다가 반동분자로 몰려 마을 사람들 앞에서 즉결 처분을 당했다지 않는가. 이 선생님과 내가 총을 든 청년의 호위(?)를 받으며 1학년 교실로 가서, 천장 속에 감춰 뒀던 등사판을 꺼내 주었다.
그들이 떠나가자 경찰지서에 신고하는 일이 가장 급했다. 늑장 신고했다며 트집을 잡아 공비와 내통했다고 덮어씌우면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경찰관의 붓끝이나 말 한마디가 사람의 목숨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던 시절이었다.
내가 신고하러 가겠다고 나섰다. 학비를 면제받는 값을 해야 한다는 마음도 있었지만, 선생님보다는 어린 내가 여러모로 유리할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선생님들의 걱정은 공비들이 중간에 숨어 있다가 신고하러 가는 나를 해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럴 때 사용할 비장의 카드를 갖고 있었다. 고샅에서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그 아재가 ‘태백산 유격대’ 울산 지대장으로 부하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있었다. 저들에게 아재의 이름과 나와의 관계를 설명하면, 내게 깍듯이 경례를 올려붙이고 순순히 물러갈 것이라 믿고 있었다.
지서까지는 오리길, 자갈 깔린 신작로를 맨발로 달렸다. 검정 고무신이 땀으로 미끈거렸기 때문이었다. 믿는 구석이 있는데도 무서웠다. 인기척에 놀란 개구리들이 풍덩풍덩 무논 속으로 뛰어드는 소리에 머리칼이 곤두서고 개똥벌레 불빛 앞에서도 소름이 돋았다. 등사판을 받았던 청년의 큼지막한 손이 금방이라도 내 뒷덜미를 낚아챌 것만 같았다.
기진맥진, 저만치 어둠 속에 희뿌연 무엇이 보이기 시작했다. 공비들의 습격을 막기 위해 지붕보다 높게 돌담을 쌓고, 그 위 망루에서 ‘의용 경찰’이라는 완장을 찬 동네 청년들이 지키고 있는 지서, 요새처럼 견고한 모습이 점차 뚜렷하게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나는 지서 문 앞에 닿자마자 꺼이꺼이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 순경들이 달래도 막무가내였다. 이제 살았다는 안도의 눈물, 아니면 자갈길을 맨발로 달려올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처지에 대한 슬픔 때문이었을까. 강산이 다섯 번도 더 바뀌는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코끝이 찡해진다.
그 뒤 군경 합동의 공비 토벌에서 얼굴이 희던 그 아재를 비롯한 밤손님들이 모두 저세상으로 갔다고 했다. 저들은 지금 아름다운 영남 알프스 어느 산골짝의 고혼(孤魂)으로 떠돌고 있을지도 모른다. 지하의 저들에게 자신들이 가장 이상적인 사회, 유토피아라고 믿었던 소비에트 연방이 무너지고, 중국 또한 자본주의 체제로 방향을 선회했다고 알려 준다면, 너무 놀라 까무러치고 말지 않을까.
일 년에 네댓 번 고향으로 내려간다. 두 번의 성묘와 시제, 그리고 초등학교 반창회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그때마다 산부터 바라본다. 웅혼한 기상의 고헌산, 섬세하고 우아한 가지산 그리고 강물이 굽이치듯 유장한 간월산, 모두가 아름답다. 취한 듯 그 경치를 바라보노라면 문득 그때 등사판을 가져갔던 청년들의 실루엣이 떠오른다.
어떻게 보면 저들은 동서 냉전 시대의 희생자, 신기루 같은 이데올로기에 홀렸던 불쌍한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이제 그 불쌍한 영혼들을 위해 들꽃 한 송이쯤 준비해도 괜찮지 않을까. (2004. 여름)
*서북청년단 : 북한 공산주의에 반대해 남한으로 내려온 사람들이 1946년 11월 30일 서울에서 결성한 극우 반공 단체였다. 따라서 이들은 공산주의라면 생리적 거부감에 치를 떨었고 공산주의자라고 의심되는 자에게는 무조건으로 공격을 가하는 편이었다.
강철수 2004년 《에세이문학》 《에세이21》등단. 제29회 현대수필문학상 수상. 수필집 《내 마음속의 해와 달》 3인 수필집 《사람들 사이에 길이 있다》. (사)한국수필문학진흥회 회장 겸 《에세이문학》 발행인 역임.
첫댓글
밤손님과 등사판!
강철수선생님은 작품을 게재했다 하면 큰 홈런을 치십니다.
저는 힘이 없어 그렇게 못합니다.
다만 텍사스 히트 치면 만족하는데 그것도 점점 어려워지는 것 같습니다.
강철수 선생님의 건필을 빕니다.
김윤권 선생님, 고맙습니다.
글마다 관심을
보여주시는 선생님께 깊은 신뢰를 느낍니다.
언제 기회가 닿으면 밥 한 번 먹읍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