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녕대군과 어리(於里)
어리(於里)란 여인은 양녕대군이 소문만 듣고도 선물을 보낼 만큼 빼어난 미인이었다.
어리는 그때 지중추부사 곽선의 첩이었다.
1417년 (태종 17),
어리가 서울 친척집에 왔다는 소식을 들은 양녕대군은 좋은기회라고 여겨 그 친척을 통해 선물을 보냈다.
그러나 어리는 이미 남의 부인인지라 그 선물을 받을 수 없다면서 돌려보냈다.
몸과 마음이 온통 달아오른 양녕대군은 말을 달려 ...
그녀가 머물고 있는 집으로 찾아가 다짜고짜 말에 태워 동궁으로 데리고 돌아왔다.
이 소식을 들은 태종은 노발대발하였다.
세자의 측근은 모조리 엄벌에 처하는 한편 어리도 직접 불러 문초하였지만 그녀에게는 아무 죄가 없었다.
태종은 어리에게 다시는 세자를 만나지 말라고 한 뒤 그녀를 집으로 돌려 보냈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어리에 대한 사랑으로 미칠 지경이 된 양녕대군은 그 뒤에도 태종 몰래 어리를 만나 마침내 아이까지 낳았다.
이 사실을 알고 대노한 태종은 양녕대군의 장인김한노를 나주로, ....
세자를 두둔하던 황희는 남원으로 귀양 보내고 세자빈은 친정으로 내쫒았으며, ....
동궁의 문지기와 내시들은 모조리 죽였다.
그러나 양녕은 아버지 태종의 어떠한 문책도 다 감수하였지만, "어리" 문제에 대하여는 양보하지 않았다.
실록에 그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이었다.
양녕은 태종에게 글을 올려..
" 아버지는 왕권을 강화한다고 여러 여자를 두었으면서도 왜 자신의 여자문제는 엄격하게 대하는냐 .."
고 따지듯 물으면서 어리 하나를 금한다면
"잃는 것은 많으나 얻는 것은 적을 것이다" 라고 항의한다.
진노한 태종은 분기탱천하여 세자를 갈아치울 것을 결심하고 중신들을 불러 세자폐출을 결의하고, ...
충년대군을 세자로 책봉하였으니 1418년 6월이었다.
그리고양녕을 궁에서 내쫒아 경기도 광주로 유배가서 살게 하고 양녕은 기다렸다는 듯이 광주로 가서...
어리를 불러 살았다.
그 후 어리는 모함을 받아 자살하게 된다.
후에 태종도 양녕에게 어리문제에 대하여 사과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단순한 불륜관계는 아니었던 듯하다.
월탄 박종화 가 소설에서 어리를 묘사한 글을 인용하여 보면...
머리쪽은 흑공단같이 검고도 윤이 자르르 흘렀다.
이맛전은 넓지도 아니하고 좁지도 아니해서 알맞고 반듯하였다.
살결은 만져보지 아니하고 바라만 보아도 부드럽고 따스해서 희고도 고왔다.
눈썹은 약간 숱이 많아서 그리지 아니해도 아름답고,....l
갸름한 속눈썹은 맑은추파와 함께 사람의 정을 소리없이 흔들어 놓았다.
코는 백랍으로 빚어 놓은 듯 오똑하면서도 윤이 흐르고 연한 뺨에는 오목 볼이 져서 더 한층 풍정을 자아낸다.
여기다가 붉은입술과 하얀 이는 그대로 단순호치이다 어깨는 날씬하고 허리는 가늘다.
마치 백학이 날아 들고 세류가 한들거리는 모습이다.
양녕대군, 도주하다
어리문제로 양녕대군은경기도 광주로 유배되었다.
경기도 광주의 깊은 한 밤 양녕대군이 도망쳤다.
양녕대군의 도주 소식이 궁궐에 전해진 것은 1419년 1월30일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넘긴지 거의 5개월 .
그리고 양녕이 폐세자되어 광주로 쫓겨난지 7개월 여가 흘렀을 즈음이었다.
양녕이 지난밤 자정에 편지를 써서 봉해 놓고 담을 넘어 도망갔습니다.
라는 말을 전해들은 태종은 근심이 깊어 식사도 하지 않은 채, ...
내관들과 내금위를 광주로 보내어 양녕을 찾아오게 하였다.
그러면서 한편 경기도 관찰사에게 도내에 양녕의 도주를 알리고 찾게 하되 ...
찾은 사람에게는 상 주기를 아끼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
세종 또한 관찰사에게 심력을 다하여 양녕을 찾아주기를 바란다
전하고 태종에 이어 양녕을 찾은 자에 대한 중한 償을 다시 한 번 약속했다.
양년대군은 곧 찾을 수 있었다.
2월 1일,
양녕대군은 헤어져 발이 나온 신을 신고 제발로 경기도 양주에 있는 본궁(내수사)의 종 ' 이견"의
집에 나타났고 이견이 바로 ....
그 사실을 고하자 태종은 효령대군과 경녕군 내시 등을 보내 옷과 신발과 술을 가지고 가서 맞아오게 하였다.
아차산에 올라가 하루를 보냈다는 ...
양녕대군은 어두워질 즈음에 소매로 얼굴을 가리고는 태종이 있는 수강궁에 모습을 드러냈다.
양녕대군을 본 태종은 양녕을 와락 끌어 안고 눈물을 보이며 한 참을 흐느낀다..
천하의 태종도 어쩔 수 없는 한 사람의 아비의 모습을 보인다.
"네가 도망했을 때 주상(세종)이 듣고 음식을 전폐하여 서러운 눈물이 그치지 아니했다. 너는 어찌 이 모양이냐.
너의 소행이 너무도 패악하니 나는 특히 부자의 정으로써 가련하게 여기는 것이다."
라면서 아들에 대한 마음을 말했지만 태종 자신도 아들 양녕앞에서 계속 눈물을 보이고 만다.
애초에 양녕의 주거를 제한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그가 한때 세자이었고 세자이었던 사실과 명분을 빌어 ....
조선왕실을 위협하는 세력이 생길 수도 있다는 만약의 경우를 철저히 막아보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양녕이 무작정 담을 넘어 도망을 쳐버렸으니 ...
양녕대군을 도성에서 ......
더 멀리 보내야 한다는 신하들의 주장을 묵살했던 상왕 태종과 세종 두 왕은 얼굴이 붉어질 수 밖에 없었다.
실제로 양녕이 사라진 동안, ...
그의 애첩 어리가 목을 메어 죽었으니 양녕의 도주사건은 ....
온 나라의 근심과 함께 한 사람의 목숨까지 앗아갈 정도의 작지 않은 사건이었다.
양녕이 돌아온 다음 날, ....
상왕 태종은 양녕이 도망간 일이 어리때문이라 그녀를 몰아세워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죄를 물어 ...
양녕의 유모 약장과 김한노의 첩 충개 등을 잡아 가두었다.
그러나 곧 풀어주었다.
태종은 양녕을 가엽게만 여길 뿐 ...
어리를 뺏으려 한 적도 없고 어리와 관련된 죄를 다시 물은 적도 없는데 ...
새삼 7개월이나 지나 양녕이 어리때문에 도망을 감행할 이유란 것이 있을 리가 없다는 이야기이다.
태종은 어리의 죽음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어리의 죽음은 진실로 슬프고 민망하다.
어리 자신이 양녕에게 들어 온 것이 아니고 양녕이 재상의 첩을 탈취한 것이며, ...
또 양녕이 달아난 것도 어찌 어리때문이겠느냐
어리의 죽음은 충동적인 것이었다고 보기 어렵다.
물론 목을 메는 것은 계획되었다고 보기도 어렵지만 자신의 목에 줄을 거는 데에는 양녕의 도주보다는 ...
양녕이 폐세자가 된 일에 대한 ....
양녕대군의 측근들이 어리에게 지속적으로 가했을 구박이나 협박이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어리의 죄는 예쁜 얼굴을 가졌는데 천한 신분이었고 그리고 양녕대군같은 남자를 만났다는 것뿐이었다.
양녕대군의 도주 의도는 의외로 간단하다.
양녕은 아버지 태종에게 시위를 하기 위하여 도망친것이다.
때는 광주에 있던 양녕대군을 강화도로 보낸다 했다가 양평에 두기로 결정을 하고, ...
경기도 양평에 양녕대군이 살 집을 지으라고 명령이 내려진 시점이었다.
게다가 양녕대군에게는 새삼스러운사건도 아니지만, ...
여자와 관련된 일이 또 터져 태종이 그와 관련된 사람들을 붙잡아 가두는 등 조처를 취하는 중이기도 하였다.
즉 양녕대군은 광주로 쫓겨난 상황에서 자신이 그토록 아끼는 어리를 곁에 두고도 ....
노비 ' 전송 "에게 다른 기생을 불러들이라 명령하였다.
전송이 말을 듣지 않자 양녕대군은 전송을 때렸고, ...
어쩔 수 없었던 전송은 광주의 아전 이첩과 양반 이동인 등과 상의하여 기생 두 명을 양녕대군에게 바쳤던것이다.
이 일은 광주 판목사 ' 이배 "가 태종에게 고하여 알려지게 되었고 태종은 그들을 잡아오게 하였는데 ....
아전 이첩을 놓쳐 잡아오지 못하자 태종은 그것에 대한 죄를 물어 광주의 판목사 이배와 판관김영 ....
그리고 양녕에게 바쳐진 기생 두 명까지 모두 잡아들이라 명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양녕대군이 도주하였으니 그의 의도는 뻔하였다.
그는 아버지에게 항의하는 시위를 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