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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노동자 김선동 국회를 가다
출생에서 노동자로, 다시 정치의 중심에서 국회의원 당선까지
▲ 사진은 김선동 의원이 건설노동자로 활동할 당시 모습.<사진은 선거 홍보물에서 발췌한 것임>
가난하지만 가난하지 않은 고향, 발포!
“저는 남도 땅 끝자락, 고흥군 도화면 발포리의 작은 마을에서 2남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부모님은 남의 땅을 빌려 농사도 지으시고 동네 앞 바다에서 김도 양식하시던 가난한 농민이셨습니다.”
우리네 사는 어느 골짜기 하나, 우물가 하나에도 사연이 없는 것이 없듯 김선동 후보가 살던 발포에도 옛날부터 전해져 오는 이야기가 있었다. 다른 마을의 뭇 이야기들과 다른 점이라고는 발포의 옛 이야기는 성웅이라 불리는 이순신 장군과 관련된 실화라는 점이다. 예전에는 도덕 교과서에도 실렸던 너무나 유명한 일화다.
늦은 나이에 무과에 합격한 이순신 장군이 함경도와 훈련원 등 육군으로 떠돌다 처음 수군과 인연을 맺어 서른여섯의 나이로 임명된 직책이 바로 발포만호였습니다. 발포만호로 재직 중 직속상관인 좌수사 원균이 객사 뜰 안에 있는 오동나무를 베어다가 거문고를 만들겠다고 했고. 이에 이순신 장군은 “이 나무는 나라의 물건이니 사사로이 쓸 수 없습니다.”라며 한마디로 거절을 했다고 합니다.
“이순신 장군 이야기는 우리 동네에선 모르는 사람이 없었어요. 어린아이부터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다들 그 얘기를 하셨고 초등학교 때도 일 년에도 몇 번씩 글쓰기나 발표대회 같은 행사의 주제가 이순신 장군과 오동나무 일화였던 기억이 남아 있어요.”
공물(公物)과 사물(私物)은 반드시 엄격히 구별해야 한다는 의연한 태도, 그 이야기와 그 뜻을 몇 백 년 동안 마을의 자랑으로 삼아, 부모가 자식을 가르치고 또 남겨주는 유물로, 입에서 입으로, 그렇게 전해져 내려온 곳이 발포다.
“서정주 시인은 자신의 8할은 바람이 키웠다고 말했지만, 저의 어린 시절을 오롯이 키워준 것은 이순신 장군에 대한 이야기와 그 이야기를 자랑스러워하며, 당신들은 채 한글도 깨우치지 못했건만 자식들의 교육지표로 삼던 마을 어른들의 심성이었고, 우리네 어머니들의 마음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소작농이었던 김선동의 부모님은 김선동을 대학에 보내기 위해 소작료를 지불하는 자기 농사 뿐 아니라 남의 농사를 품삯을 받아가며 함께 지으셨다고 한다. 낮에는 품삯 때문에 남의 논의 곡식을 탈곡하고 밤이 되어야 비로소 집안 농사를 탈곡하던 일이 항상 반복되었다.
“겨울에는 김을 양식하여 학비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골집에 들를 때면 언제나 가난한 부모 밑에 태어나서 제대로 뒷바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눈물바람을 하셨습니다.”
김선동은 언젠가 농담처럼 문익환 목사님에 대해 알고 나서 무척이나 반가웠던 적이 있다고 말했다. 이유를 물으니,
“문익환 목사님은 58세에 통일운동을 시작했었잖아.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어. 50살까지는 물리학자로 성공해서 부모님께 효도도 하고 가족도 보살피다가 목사님처럼 50넘어 운동을 시작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봤어, 뭐 핑계거리가 생긴 것 같아서 좋더라고, 허허”
농담처럼 예의 그 넉넉한 웃음을 지으며 던진 이야기이지만, 절대로 농담일 수만은 없는 그 마음이 전해졌다. 2남 4녀 중 장남, 어려운 집안 형편에 자신을 위해 온 가족이 희생하며, 뒷바라지 한 마음을 너무도 잘 알고 있어서, 항상 자신에게만은 최선을 다 하셨으면서도 미안하다고 하시는 어머니의 마음을 너무도 잘 알고 있어 김선동은 단 한 번도 부모님에 대한 죄스러움을 내려놓은 적이 없었다.
“고등학교 시절 하숙집에 오신 어머니께서는 단 한 번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하지 않으셨어요. 평생 농사를 지어 거칠 대로 거칠어진 당신의 손을 절대로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으셨다고 하시더군요. 어머니는 행여 당신의 거친 손을 보고 다른 사람들이 저를 무시할까 그게 싫으셨던 겁니다.”
미문화원 점거 투쟁으로 구속과 제적을 당한 이후 김선동은 노동현장을 찾아 노동운동을 시작한다. 울산과 광주에서 대기업 공장의 하청업체 노동자로 살며 노동운동을 전개하던 중, 후보는 부모님과 가족에 대한 미안함에 노동운동을 그만두려고 했다.
“1992년일 것으로 기억합니다. 어느 날 야음을 틈타 고향 마을을 찾았습니다. 부모님과 남동생에게 노동운동을 그만두고 돈을 벌겠다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환영하였고 농민운동을 하고 있던 남동생은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어머니께서 “너 혼자 그만두냐? 아니면 다들 그만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저만 그만 둘까 합니다.” 했더니 “니도 오죽 힘들면 그만 둔다고 하겠냐만 너마저 그만두면 남는 사람들은 얼마나 더 힘들것냐? 여자는 시집가면 살아도 시집귀신, 죽어도 시집귀신이다, 장부가 뜻을 품고 길을 나섰으면 살아도 그 길에서 살고, 죽어도 그 길에서 죽어야 한다. 당장 돌아 가그라!” 하셨던 일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 길로 그는 다시 현장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어머니의 뜻이기도 한 운동에 대한 선택의 고민은 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저는 누구보다도 부지런하시지만 한 평생 가난 속에서 고생과 한숨과 눈물로 사시는 부모님의 모습을 보면서 부조리한 현실에 눈을 떴었고 광주항쟁의 진실을 접한 후, 역사와 사회에 대해 눈을 뜨면서 민중이 주인 되는 세상을 갈망하게 되었고 이러한 저의 열망이 학생운동과 이후 노동운동의 가장 큰 원동력이었고 오늘 저 김선동을 이 자리에 있게 한 힘이었습니다.”
공부 잘 하던 모범생 김선동 !
김선동은 고향인 발포에 있는 충무초등학교와 도화면에 있는 도화 중학교를 졸업했다. 어려서부터 야무지고 똑똑하고 주관이 뚜렷한 아이였다고 한다. 1981년 3월, 김선동은 전국적 명문고인 순천고등학교에 입학한다.
“선동이는 고흥에서 올라온 촌놈이었지만, 누구보다 의리가 있어서 친구가 아주 많았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어요”
고등학교 친구인 박태현(한의사)씨는 김선동 후보를 이렇게 회상한다. (참고로 그는 언제인가 만약 가수가 되어 노래를 만든다면 대표곡의 제목을 무엇으로 할 것이냐는 질문에 “사랑과 의리”라는 언밸런스한 제목을 이야기 할 정도로 의리를 중시하는 사람이다.)
1984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과학도를 꿈꾸며 서울대학교 천문학과에 지망하였으나 낙방하고 서울 종로학원에서 1년간 재수를 거쳐 1985년 3월 고려대학교 이과대학 물리학과에 입학한다.
대학교 1학년 김선동은 물리학자를 꿈꾸며 친구들과 수학과 물리를 공부하는 모임을 만들어 운영하는 등 향학열에 불타는 학생이었다고 한다.
광주항쟁의 진실, 그 역사의 한복판에 서다
대학교 2학년, 우연하게 듣게 된 광주항쟁의 진실은 김선동의 방향을 바꾸는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더 이상 책을 붙잡고 일신상의 고민을 중심으로 젊은 날을 보내기에는 부끄러움을 이겨낼 수 없었던 김선동은 본격적으로 학생운동에 뛰어들게 된다. 그 해가 1986년 여름이 시작되는 시기였다.
“첫 가투(거리투쟁)때의 기억은 25년이나 지난 지금도 또렷이 기억이 납니다. 당시만 해도 소위 데모는 대학생의 전유물이었어요. 그래서 ‘나도 이제 대학생이다.’라는 겉멋이 한편에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그렇게 모든 것이 두렵고 무서웠어요.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그렇게 고향의 어머니 생각이 나더라고요. 그냥 싸한 기분과 함께 어머니가 계속 떠 올랐습니다.”
1986년 건국대 <애학투련> 사건 이후, 정권 연장에 혈안인 된 전두환 정권은 대대적으로 학생운동을 탄압하기 시작한다. 이때 그가 다니던 고려대학교에서도 소위 <애학회사건>이라는 조작사건이 발생한다. 이 사건과 직접 관련이 없었으나 김선동은 공안기관에 연행되었고, 대공분실에서 ‘물고문’ 을 포함한 갖은 고문을 당하게 된다. 그는 곧 풀려났지만, 풀려난 지 불과 1주일 후, 박종철 열사가 바로 후보가 고문 받던 그곳에서 고문으로 산화하는 일이 발생한다.
“지금이야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지만 당시에는 너무도 큰 충격이었습니다. 말 그대로 운이 좋아서 살았을 뿐, 누구든 박종철 열사와 같이 될 수 있는 것이 그 당시의 분위기였습니다. 사람 목숨을, 젊디젊은 대학생의 그 귀중한 목숨이 꽃잎처럼 떨어져 가던 시대였습니다. 박종철 열사 대신 나 자신이 죽을 수도 있었다는 사실에 온 몸에 소름이 돋았습니다.”
박종철 열사의 죽음을 목도한 후, 김선동의 삶은 완전히 바꿔 버렸다. 86년 김선동은 이과대학 대의원회 의장을 역임하고., 1987년에는 고려대학교 이과대학 학생회장으로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위한 6월 항쟁의 중심에서 활동하게 된다. 통일운동의 봇물이 터진 1988년에는 고려대학교 총학생회 사회부장을 맡아 통일운동의 물꼬를 트는데 일조를 한다.
“박종철 열사의 죽음을 겪은 이후, 제 삶은 잠깐의 숨 쉬는 여유도 없을 만큼 급박하게 흘러갔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모든 사회변화의 중심은 서울이었습니다. 그 서울의 한 복판에서, 한국사회 민주화의 격변기의 한 중심에 저는 맨 몸으로 서 있었습니다. 이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닌 삶의 문제였고 역사의 문제였기에 매 순간순간마다 제 모든 것을 다 쏟아 부어야 했고, 판단해야 했고, 행동해야 했고, 또 책임져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1988년 10월, 국회에서는 광주항쟁과 관련한 청문회가 열리게 되었고, 광주학살의 진짜 주범인 미국의 본질을 국민들에게 알리는 것이야말로 광주의 원혼을 위로하는 일이라고 생각한 김선동은 뜻을 같이하는 대학생들과 함께 미문화원 점거 투쟁을 진행한다. 광주청문회에 80년 당시 주한 미대사와 주한 미군사령관을 출석시키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하지만 김선동은 미문화원 점거투쟁으로 구속이 되고 말았고 그로 인해 1989년 2월 결국 제적이 되고 만다.
“구속과 제적이 처음부터 예상되었던 투쟁이었습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말 중에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인데 다들 꺼리는 일이라면 내가 웃으면서 하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딱 그 말대로 였습니다,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 그 일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그 때의 제 선택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위대한 가치를 배우다. ‘노동자 김선동’
1989년은 87년 한국사회를 휩쓴 민주화의 바람이 노동계로 번져가던 시점이었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노동의 현실을 직시하며 노동조합이 만들어지고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찾기 위한 노력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그에 따른 정권과 자본의 노동 탄압 역시 ‘현대 식칼 테러’ 등 상상할 초월하던 시기 김선동은 또 다시 역사의 중심이었던 노동현장으로 들어가게 된다.
“1989년 4월 드디어 울산에 있는 현대중공업의 사내하청업체에 입사하여 족장공으로 일하게 되었을 때, 드디어 저도 천만 노동자의 일원이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자랑스럽고 큰 자부심이었는지 모릅니다.”
김선동은 울산 현대중공업 사내하청에서 족장공(용접을 할 수 있도록 발판을 놓아주는 일)으로, 광주 아시아자동차 하청업체에서 용접공으로, 광주 금호타이어 사내하청에서 몰드교체 노동자로, 그렇게 울산과 광주에서 90년대의 7년을, 20대의 대부분을 현장 노동자들과 동고동락하며 철저하게 노동자로 살아간다.
“노동자로서의 자부심도 잠깐, 채 6개월도 안되어서 고된 노동으로 지칠대로 지친 저는 노동자로 한 평생을 산다는 것이 너무도 막막하고 눈앞이 캄캄해져 먼 산을 바라보곤 하는 날들이 늘어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지쳐갈 무렵, 김선동을 지켜주었던 것은, 앞서 소개한 어머니의 말씀이었다.
“장부가 뜻을 품고 길을 나섰으면 살아도 그 길에서 살고, 죽어도 그 길에서 죽어야 한다. 당장 돌아 가그라!”
그리고 1994년, 금호타이어의 총파업투쟁 당시 사내하청 노동자이면서도 원청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을 지지 지원하면서 투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경험은 김선동을 진정한 노동자로 거듭나게 하는 또 다른 계기가 된다.
“저는 학생운동 출신의 활동가들이 현장을 떠날 때 마다 울산에서 힘들어 하던 그때 그 시절이 떠오르곤 했습니다.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들은 떠나는구나!’하지만 떠나고 싶어도 갈 곳이 없는 현장의 노동자들은? 저는 다짐했습니다. “설령 저 혼자 남더라도 갈 곳 없는 노동자들의 참다운 벗으로 남겠노라.” 그렇게 다짐하고 또 다짐했던 시절이었습니다.”
김선동은 20대를 노동자로 살면서 투쟁을 만들고, 조직하는 역할을 했다. 그래서 그는 20대의 대부분을 수배자의 신분으로 살아야 했다. 김영삼 정부가 출범하면서 신분을 합법화하기 위해서 말소되었던 주민등록을 다시 살리고 결혼도 했다. 하지만 결혼 이틀 만에 31살의 늦은 나이로 군에 입대하고 1997년 10월 육군 포병 병장으로 만기 전역하게 된다.
불모의 땅에 진보정당을 개척하다
1997년, 군 제대와 함께 김선동은 당시 대통령 선거에 민주주의 민족통일 전국연합과 민주노총의 결의로 출마한 ‘국민승리 21’ 의 권영길 후보의 선거운동을 시작한다.
“당시만 해도 진보정당운동이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노동자와 진보적 지향의 활동가들까지 진보정당운동을 쉽사리 납득하기 어려운 분위기였습니다. 수많은 반대와 오해 속에서 참 말 못할 마음 고생도 많이 했습니다. 낮에는 권영길 후보의 현수막을 걸기도 힘들 정도였으니, 지금 생각하면 말 그대로 격세지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1997년 ‘국민승리21’을 거쳐 1999년 진보정당 창당이 추진될 때 김선동은 ‘노동자의 정치세력화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과감히 합류한다. 2000년 민주노동당 창당 당시 광주시지부 조직국장을 맡아 광주에서 당을 건설하는데 산파역할을 했다.
“당시에만 해도 광주광역시당이 아닌, 광주시지부였습니다. 하나에서 열까지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만 하는 시기였지요. 무엇인가 새로운 형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시도한 것이 지금은 보편적 당 체계로 자리 잡은 분회 편재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분회 운영을 추진한 것은 가장 잘한 일인 것 같아 커다란 자부심이 있습니다.”
이후 김선동은 2000년 여수, 순천의 노동자들이 대거 당에 가입하자 간부가 부족한 순천으로 내려가 민주노총 정치위 간사로 활동하며 노동자들을 당으로 안내하는 역할을 한다. 그로서는 1985년 서울로 올라 간지 15년만에 오랜 타향살이를 마감하고 고향으로 돌아간 셈이다. 김선동은 순천에서 2년간 순천시당을 비롯한 여러 지구당을 개척하고 광주시지부에 이어 전남도지부를 건설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전남에서, 진보정당운동의 씨를 뿌리다
2002년, 김선동은 지방선거와 대통령선거에서 전남지역 야전사령관으로 활동한다. 그리고 지방선거에서 정당 투표 15%득표와 도의원과 시의원을 당선시키는 등 당시만 해도 사실상 진보정당운동의 불모지였던 전남지역에 새로운 진보정당의 희망의 씨앗을 뿌리게 된다.
그리고 2003년 3월 전남도지부(민주노동당 전남도당)를 창립하고 김선동 자신이 전남도지부 지부장으로 활동하게 된다. 특히 대표적인 농도인 전남에서 농민들의 진보정당운동이 중요함을 인식하고 농민 입당에 커다란 공을 들인다.
“전남에서의 진보정당의 성패는 농민들의 결합 유무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농민들의 정치세력화 그것은 저의 또 하나의 신념이었습니다. 그래서 농민이 입당하면 도지부를 전면 개편한다는 의미로 임원 일괄 사퇴까지 결의했고, 2004년 총선 때는 고향인 고흥보성지역 출마를 준비했었지만 농민회의 동의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출마를 포기하기도 했습니다.”
이 같은 김선동의 진정성과 노력은 농민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2004년 전남도지사 보궐선거에서는 드디어 민주노동당 후보(김선동 후보)에 대한 농민회의 조직적 지지를 이끌어내게 된다. 농도인 전남에서 진보정당운동의 튼실한 씨앗이 뿌려진 것이다.
이후 김선동은 전남도지부 지부장을 마감하고 민주노총 전남 동부지구협 조직국장으로 다시 순천으로 내려가 현대 하이스코 비정규직 노조 창립 및 투쟁을 함께 만들어 간다. 전남 동부지역 노동자연대파업을 조직하고 5천여 명이 참가한 전남 동부지역민 총궐기대회를 성사시키는 등 초기 전남지역 노동자, 농민, 진보 운동의 현장마다 김선동 후보의 땀과 노력이 항상 더해져 왔다.
민주노동당 사무총장 김선동
2006년 김선동은 국회의원 10명의 원내 제3당인 민주노동당의 중앙당 사무총장이 된다. 민주노동당의 전성기에 중앙당의 핵심으로서 진보정당운동의 기틀을 마련하고 당 분열의 한가운데에서 온 몸으로 통합과 상생으로 위한 노력을 경주한다.
하지만 2007년 중앙선거대책본부 상임본부장으로서 대통령선거의 패배와 2008년 당 분열에 대해서 무한책임을 느끼면서 백의종군을 결심하고 고향인 순천으로 돌아오게 된다.
어려서부터 이순신 장군의 일화를 듣고 자라며 백의종군의 책임성과 애국애족정신을 흠모해 왔던 김선동 후보는 곧바로 배관 용접 기술을 배우고 건설플렌트의 일개 조합원으로서 노동현장에서 노동자로써 살아가면서 현장 노동자들 속에서 지난 시기의 활동에 대해서 반성하고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바르고 빠른 길을 찾고자 했다.
원내 제3당의 사무총장이 현장 노동자로 살아가기 위해 마흔이 넘은 나이에 배관과 용접 기술을 새로이 배우고, 노동 현장에서 노동자로 산다는 일,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 일을 김선동은 너무나 당연하게 선택했다.
그리고 국회의원 후보가 되기 직전까지, 불과 한 달 전까지 그는 노동현장에서 건설노동자로 살았다.
김선동이 사는 방법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항상 고민합니다. 그리고 얻은 답은 (아직 완벽한 답인지는 모릅니다.) 착하게 살기보다는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착하게 사는 것은 나를 양보하고 숙이면 되는 일이지만, 바르게 사는 것은 때로는 욕먹을 각오도 해야 하고, 주변의 오해와 불신도 이겨내야 하며, 무엇보다 내 삶을 꼭 책임져야 하는 일이기에 더욱 어렵습니다. 바른 선택을 위한 지혜도 필요하며, 참과 거짓을 구별할 수 있는 분별력도 갖추어야 하는 일이 바로 바르게 사는 길입니다. 전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제 자신에게 묻습니다. 지금 이 순간 나의 선택이 역사의 정방향을 거스르지 않는 바른 것인지를 말입니다.”
통일이 되면 아이들에게 철학과 역사를 가르치며 살고 싶다는 사람입니다.
김선동은 “친구나 동지의 부인들이 싫어한다.”는 것이 콤플렉스인 사람입니다.
친구나 동지를 고생시켜 부인들에게 미움 받는 콤플렉스가 있는 사람입니다.
김선동은 자신을 “뚝심과 의리”라고 표현되어지기를 바라는 사람입니다.
참 좋은 많은 말들 중 “뚝심, 의리”로 기억되고 싶다는 사람입니다.
껄끄러움을 고백하라면 “돈을 벌어볼까 고민을 많이 했었다.”는 사람입니다.
“돈을 벌 고민” 그것이 다른 동지들에게 부끄러운 사람입니다.
김선동은 가장 비싸졌으면 하는 것이 “노동자의 임금”인 사람입니다.
역사의 한 복판에서 한 번도 비껴 서지 않았던 사람
언제나 바르게 살고 있는가를 끊임없이 자문하는 사람
민중과 동지들의 부름에 언제나 심장으로 답해 온 사람
바로 그 사람!
김선동을 이야기 한다.
<본 기사는 김선동 선거대책본부에서 보내온 자료를 재구성한 것임을 밝힙니다.>
첫댓글 너브내님하고 김선동의원은 동창이였던거 같군요. 한때 같이 학교생활을 했다면 말이죠.
아니요. 일년 후배입니다.
자유당땐가 김두한 국회의원이 의사당에 똥물세례를 한 적이 있습니다. 다수 국민들?인지는 모르지만, 사람들은 신성한 의사당에 똥물을 퍼부었다고 야유지만, 아버지께서는 뭐가 신성한데? 하고 반문하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똥물을 씌워도 가당치 않다는 뜻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미디어 화제의 흐름이 특정 산업의 손익계산에만 바쁜데 이 글에서 정말 제 관심사를 풀어주는 것아 반갑습니다. 화제가 일반적으로 핵심에서 어긋나 흐르고 있는 느낌입니다. 그리고 동학혁명 운동이라도 해야될 판이 아닌가 싶네요.
김두한은 그 똥물투척말고는 김선동과 궤를 달리한 것이지요
ㅎㅎㅎㅎㅎ 물샐 틈 없이 지키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