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3번째 편지 - 목포에서 서울 오는 특별한 방법
저는 업무상 어제 일요일 당일치기로 전라남도 영암을 다녀와야 했습니다. 너무 먼 곳이라 아내에게 같이 가자고 권했습니다. 아내는 흔쾌히 따라나섰습니다.
그러나 일요일이라 KTX 기차표를 구하기 어려웠습니다. 하는 수없이 <서울 7:42 출발, 목포 10:14 도착>과 <목포 20:55 출발, 서울 23:24 도착>을 끊었습니다.
아침 일찍 출발하는 것은 그런대로 괜찮았지만 문제는 상경하는 기차편이 너무 늦은 데다가 업무는 3시경이면 다 끝나 무려 6시간을 목포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저희 부부는 업무를 마치고 시간을 보내기 위해 지인이 알려 준 갓바위로 향했습니다. 바닷가 공원은 너무 깨끗했고 몇 년 전 방문했던 찰리 채플린 동상이 있던 스위스 호반도시 브베의 호반 공원 같았습니다.
공원 벤치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아내가 빠른 시각 기차로 서울 가면 어떠냐고 했습니다. 그러면 좋지만 이미 서울에서 알아본 바에 의하면 그 시간 이후 목포에서 서울 가는 KTX는 완전히 매진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재미난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한 번에 목포에서 서울까지 가는 기차표는 없어도 구간을 끊어서 가면 어쩌면 일찍 가는 기차표를 구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은 지방을 다닐 때 여러 번 해보았다면서 핸드폰을 뒤지기 시작하였습니다. 30여 분 기차 시간표와 씨름을 한 끝에 저희가 예약한 기차표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1) SRT, 목포 16:45 출발, 익산 17:56 도착, 3호차 2B, 2C
2) KTX, 익산 18:08 출발, 서대전 19:05 도착, 1호차 5A, 4호차 7B
3) KTX, 서대전 19:29 출발, 천안아산 19:59 도착, 3호차 3B, 8A
4) KTX, 천안아산 20:09 출발, 서울역 20:50 도착, 3호차 5B, 5C
원래 계획대로라면 목포에서 서울역까지 2시간 29분 걸리는 일정이 4시간 5분 걸리는 일정으로 바뀐 것입니다. 그래도 원래 출발하는 시각에 서울에 도착하게 되어 저희로서는 천만다행이었습니다.
16:45 목포에서 SRT를 탔습니다. 다행히 같은 칸에 좌석도 붙어 있어 평상시와 같았습니다. 문제는 SRT 도착과 KTX 출발 사이의 간격이 12분밖에 되지 않아 혹시라도 SRT가 연착하게 되면 KTX를 놓칠 수도 있다는 걱정이 앞섰습니다.
불과 1시간 11분밖에 타지 않아 잠을 잘 수도 없기에 가지고 간 책을 읽기로 하였습니다. 배철현 교수가 쓴 ‘더 높은 차원의 삶을 위하여’라는 부제가 붙은 <승화>라는 책입니다. 잘 벼려진 비수처럼 문장 하나하나가 가슴을 파고듭니다.
“쏜살같이 달려오는 마지막 순간을 상상해 본 사람이라면 자신의 삶을 의미 있고 가치 있게 만드는 그 무엇을 갈구하기 마련이다.”
“삶의 의미는, 삶이 무의미하다고 여겨질 때 건져 올릴 수 있는 바닷속 깊은 곳에 숨겨진 진주다. 내 마음의 등불로 빛을 비추어야 할 어둠, 그것이 바로 삶의 의미 아니겠는가!”
피곤에 지친 몸을 기차에 싣고, 차창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다가 펼친 책자에서 쏟아지는 생각거리는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듭니다.
그 사이에 벌써 익산에 도착했습니다. 대한민국 기차는 대단합니다. 단 1분의 오차도 없이 도착하였고 내려선 그 플랫폼에서 정확하게 12분 후 다음 기차를 탔습니다. 이번에는 아내와 다른 칸에 탔습니다. 책 읽기는 계속됩니다.
“누구나 현 단계에 안주하지 않고 다음 단계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과해야 할 장소가 있다. 우리는 그 장소를 경계, 문지방 또는 현관과 같은 용어로 표현한다.”
“통과 의례의 장소가 문지방 혹은 (유대인에게는) 문지방처럼 괴물이 출몰하는 사막이라면, 통과 의례의 기간은 ‘40일’이다. 유대인들에게 ‘40’이라는 숫자는 특별하다. 40일은 곧 변화의 기간이다.”
이 대목에서 잠시 멈추었습니다. 저도 문지방을 넘어야 할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디 프로필 사진을 찍은 후로 불어난 몸은 변화의 문지방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40일, 40일이면 충분할까? 책은 이어집니다.
“만일 나를 과거의 나로, 구태의연한 나로 되돌리려는 전염병 같은 습관이 있다면 그것은 소멸시켜야 한다. 이 기간은 나를 깊이 바라보는 관찰의 시간인 동시에 나를 소멸시키는 수련의 시간이다.”
기차는 정확하게 53분 만에 서대전에 도착하였습니다. 서대전에서는 24분의 여유가 있습니다. 저희 부부는 역사로 올라가 식당에서 저녁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김밥과 볶음밥으로 5분 만에 식사를 마치고 다시 KTX를 탔습니다. 이번에는 30분 만에 천안아산에서 내려야 합니다.
“정신과 영혼을 수련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인간으로 태어나 짐승으로 죽는 직무 유기자로 전락할 것이다. 온전한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야말로 인격의 완성이다.”
제가 삶의 목표로 삼고 있는 <인격의 완성>을 이 책에서 만나니 반갑기 그지없었습니다. 마지막 기차입니다. 20:09 천안아산에서 저희 부부는 재회하였습니다. 같은 칸 옆자리에 앉은 것입니다. 이제 41분이면 서울역에 도착합니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지만 책 읽기에 몰입합니다. 몇 페이지 남지 않았습니다.
“인생을 마지막 날처럼 살리라 말은 하지만, 하루라는 시간을 스스로 장악하지 못하면 각성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하루를 또 그럭저럭 보내기 십상이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아침 새로운 심정이 필요하다.”
“자신이 간절히 원하는 것을 시도하지 않는 삶은 죽음이다. 나는 무엇을 응시하고 있는가? 그것을 완수하기 위해 나의 정신을 가다듬어 최선을 경주하고 있는가?”
책 <승화>는 이런 질문을 독자들에게 던지고 있었습니다. 책장을 덮을 무렵 서울역에 도착했음을 알리는 기내 방송이 나왔습니다. 목포에서 서울로 오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기차를 4번이나 갈아타고 오는 방법은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게다가 책 <승화>와 함께 했기 때문에 더욱 특별했습니다. 서울에 빨리 오기를 <간절히 원했고> 그것을 완수하기 위해 <최선을 경주>했습니다. 목포에서 서울로 오는 시간만큼은 배철현 교수의 질문에 부끄럽지 않는 반나절 인생을 살았습니다.
여러분의 주말 인생은 어떠셨나요?
이번 한 주도 웃으며 시작하세요.
2022.5.23. 조근호 드림
<조근호의 월요편지에서>
첫댓글 누구나 현 단계에 안주하지 않고 다음 단계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과해야 할 장소가 있다. 우리는 그 장소를 경계, 문지방 또는 현관과 같은 용어로 표현한다.” -배철현의 '승화'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