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청양 장곡사 괘불 국립중앙박물관 전시를 위한 운송과정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열 여덟 번째 괘불전을 맞아 ‘부처의 뜰-청양 장곡사 괘불을 개최한다. 괘불은 부처님 오신 날 등 사찰에서 의식을 베풀 때 마당에 거는 거대한 불화로, 평소에 보기 힘든 작품이다. 이번에 소개하는 국보 <청양 장곡사 괘불(長谷寺 彌勒佛 掛佛)’>은 장곡사 대웅전 마당에서 열린 영산대회에 걸기 위해 만든 괘불이라는 기록이 있다.
2023년 4월, 청양 칠갑산의 깊은 골짜기에 자리하였던 <장곡사 괘불>이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걸음했다. 1673년(현종 14) 5월 어느 날 괘불이 완성된 지 꼭 350년만의 일이다. 깊은 산 아래가 아니라도, 절집의 지붕 너머가 아니라도, 괘불이 펼쳐진 곳은 어디라도 부처님이 설법하는 청정한 땅이 된다. 산 자에게는 희망을 약속하고 죽은 이에게는 안식을 기원하는 부처의 뜰로 초대한다.
● 전시명 : 부처의 뜰 - 청양 장곡사 괘불
● 전시장소 : 국립중앙박물관 서화관 불교회화실
● 전시기간 : 2023-04-19~2023-10-09
● 전시품 : 청양 장곡사 괘불(국보), 괘불함
● 담당부서 : 미술부 김영희 (02-2077-9504)
장곡사 미륵불 괘불탱(長谷寺 彌勒佛 掛佛幀, 국보 제300호)은 1997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삼베 바탕에 채색. 가로 809.0x세로 566.0cm. 철학(哲學), 천승(天勝), 신밀(信密), 일호(一湖), 해종(海宗) 등의 화승(畵僧)이 조선 1673년(현종 14)에 그렸다. 왕·왕비·세자의 만수무강을 기원한 이 괘불탱은 화기에 ‘영산대회괘불탱(靈山大會掛佛幀)’이라 쓰여 있고 본존은 ‘미륵존불(彌勒尊佛)’이라 하였다.
미륵불彌勒佛: 미래에 지상으로 내려와 중생을 구하는 부처
용화수 가지를 들고 있는 미륵불을 그린 괘불이다. 괘불이란 야외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진행할 때 법당 앞뜰에 걸어놓고 예배를 드리던 대형 불교그림을 말한다.
장곡사 미륵불괘불탱(국보 제300호, 다보여래와약사여래 . 약구존자 . 소빈라존자, 제대용왕 .
문수보살과관음보살 . 가리라존자 . 노사나불과 대묘상불상 . 비로사나불과 법림보살)
장곡사(충남 청양군 대치면 장곡길 241, 장곡사)에 있는 이 그림은 가로 5.99m, 세로 8.69m로 미륵불을 화면 중심에 두고 6대 여래, 6대 보살 등 여러 인물들로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인간세계에 내려와 중생을 구제한다는 부처인 미륵불은 사각형의 얼굴에 머리에 4구의 작은 불상이 있는 화려한 보관을 쓰고, 풍만하고 살찐 모습으로 유난히 긴 팔과 커다란 상체를 가지고 있다.
좌우에 있는 비로자나불과 노사나불은 머리에 둥근 두광이 있고 각각 두 손을 맞잡은 손 모양과 어깨 높이까지 두 손을 들어 올려 설법하는 손모양을 하고 있다. 그 밖의 다른 여래와 보살들은 각기 상징하는 물건들을 들고 있으며 10대 제자는 두손을 모아 합장한 자세로 방향이나 표현을 달리해 변화를 주고 있다. 그림 아래에는 부처를 수호하는 사천왕과 그 권속들이 자리잡고 있다. 전체적인 채색은 붉은 색을 주로 사용하고 녹색, 연록색, 주황 등의 중간 색조를 사용하여 밝은 화면을 보여 준다.
이 그림은 조선 현종 14년(1673) 철학(哲學)을 비롯한 5명의 승려화가가 왕과 왕비, 세자의 만수무강을 기원하기 위해 그린 것이다. 미래불인 미륵을 본존으로 삼고 있지만 그림의 내용은 현세불인 석가가 영축산에서 설법하는 영산회상도와 비슷한 것으로 등장인물들과 배치구도가 독특한 작품이며 경전의 내용과도 다른 점이 있어 앞으로 연구할 가치가 많은 작품이다.
사찰의 마당에 거대한 부처가 나타났다. 높이 8m가 넘는 거대한 화폭에 화려하게 꾸며진 부처가 우뚝 섰다. 하늘에는 오색 깃발을 걸고 갖은 음식과 꽃과 향과 음악을 올리는 정성 들인 의식의 주인공이었다. 첩첩산중 깊은 계곡, 절집 마당에 내려온 부처는 작은 뜰을 부처님의 설법 도량으로 바꾸어 놓았다.
임진왜란의 긴 전쟁이 끝난 후, 17세기 조선의 사찰에서는 돌아간 넋을 편안히 보내고 살아남은 자를 위로하는 불교 의식이 많이 거행되었다. 이러한 야외 의식이나 큰 법회에 괘불掛佛이 걸렸다. 거대한 부처는 존재만으로도 신비로웠고, 의식을 위해 구름같이 모인 사람들에게 강렬한 영적 경험이 되었을 것이다.
조선 1673년(현종 14)에 조성된 <청양 장곡사 괘불>은 높이 8m가 넘는 거대한 괘불이다. 바탕 화면은 총 17폭의 삼베를 연결하여 구성하였다. 괘불의 가운데에는 머리에 보관을 쓰고 구슬과 장신구로 온몸을 장엄한 거대한 부처가 압도적으로 자리하였다. 그 좌우에는 화면 위부터 아래까지 다양한 불·보살·권속들이 앉거나 서 있는 자세로 가득히 그려졌는데, 마치 줄을 맞춘 것처럼 정연하게 배치된 것이 특징적이다. 화면에는 본존을 비롯하여 총 39위位의 등장인물이 그려졌는데, 이들의 옆에는 빠짐없이 붉은색 네모 칸에 노란 글씨로 이름이 적혀 있다. 생김새만으로 알기 어려운 등장인물들의 명칭을 구분하게 해 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둥근 꽃 모양 안의 범자梵字
괘불의 화폭 가장자리를 둘러싼 둥근 꽃 모양 안에는 범자梵字가 적혀 있다. 이는 불상이나 불화를 만들고 나서 사리 등 귀한 물건을 넣어 신성성을 부여하는 의식인 복장의식腹藏儀式과 관련된 진언眞言들이다.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지고 그려진 상像은 이 복장의식을 거치며 비로소 성스러운 존재가 된다. 괘불 조성의 마지막 단계에 사방을 돌아가며 신비로운 주문을 써넣음으로써 생명력을 불어넣은 것이다. 부처의 완성이었다.
청양 장곡사 괘불 화기
강희 12년 계축년(1673년) 5월일 청양 땅 동령 칠갑산 장곡사 대웅전 마당 영산대회에 거는 괘불화 상단에 거는 불화 하나 관음전 상단화, 중단화, 제석화 셋 그림을 모두 마칩니다.
이 괘불의 가장 아래쪽에는 붉은색의 네모 칸을 만들고, 괘불을 완성한 시기와 장소,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을 적었다. 이 기록은 괘불이 ‘영산대회’에 걸기 위해 만들어진 그림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영산대회는 원래 석가모니불이 깨달음을 얻은 후 마가다국 왕사성의 영취산에서 설법한 일을 가리키는데, 조선 후기 사찰에서는 의식으로서의 영산작법靈山作法을 가리키기도 한다. 즉 영산작법은 현실의 공간을 석가모니불이 설법하는 영산회가 펼쳐지는 장소로 바꾸는 의식을 말하며, ‘영산대회에 거는 괘불화’는 이 의식에 걸기 위한 그림을 의미한다.
한편 이 그림의 등장인물마다 적혀 있는 이름을 살펴보면, 화면의 주인공인 본존불은 ‘미륵존불彌勒尊佛’로 칭해진다. 영산회에서 설법하는 석가모니불이 아닌 미륵존불의 이름이 쓰여 있는 것으로 보아, 이 괘불의 본존은 단순히 하나의 존상으로만 여겨지지 않고 복합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충청 지역은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 등 높이 10~20m에 달하는 거대한 미륵상을 조성하는 전통이 이어지던 곳이다.
현실의 고통을 치유하고 평안한 미래를 약속하는 자비로운 미륵은 임진왜란의 긴 전쟁이 지나간 후인 17세기 조선 사람들이 간절하게 원하는 존재였을 것이다. 이 괘불은 그림에 적힌 기록을 통해 ‘대웅전 마당에 걸기 위해’ 만들어진 사실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장곡사에는 상대웅전과 하대웅전, 모두 2개의 대웅전이 있는데, 그중에서 보다 공간이 넓으며 사찰의 중심 권역이었을 하대웅전 마당에 걸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보살菩薩과 나한羅漢들
보살菩薩과 나한羅漢들
비로나자불毘盧遮那佛과 법림보살法林菩薩
노사나불盧舍那佛과 대묘상보살大妙相菩薩
아난존자阿難尊者와 제석천帝釋天, 서방 광목천왕西方 廣目天王과 남방 증장천왕南方 增長天王
가섭존자柯葉尊者와 범천梵天, 북방 다문천왕北方 多聞天王과 동방 지국천왕東方 支局天王
연꽃을 들고 있는 화려한 보관불(寶冠佛) 중심으로 많은 권속들이 둘러 선 군도식 구도이다. 즉 비로자나불과 노사나불이 독립된 존상으로 비교적 크게 표현되었고, 미륵존불의 협시로 6대보살(六大菩薩), 6대여래(六大如來), 10대제자(十大弟子), 범천과 제석천, 사천왕, 천자(天子)와 천동(天童), 아사세왕(阿闍世王)과 위제희(韋提希) 왕비, 용왕과 용녀 등이 둘러 서 있다. 정면 입상의 보관불을 그린 후, 남은 공간에 많은 권속들을 배치한 군도 형식은 단독 형식보다 선행한다.
보관에 비로자나불과 석가불 등 4구의 화불(化佛)이 묘사된 보관불은 천개(天蓋), 그리고 원형(圓形) 두광(頭光: 부처나 보살의 정수리에서 나오는 빛)과 신광(身光: 부처나 보살의 몸에서 발하는 빛)을 갖추었다. 비만한 원통형 체구는 오른쪽 어깨가 넓고 왼쪽 어깨가 좁아 어색하지만 얼굴은 온화하다.
6대여래는 노사나불, 비로자나불, 다보여래, 석가문불(釋迦文佛), 약사여래, 아미타불이고 6대보살은 대묘상보살(大妙相菩薩), 법림보살(法林菩薩), 문수보살, 보현보살, 관음보살, 대세지보살이다. 보통 상단부에 등장하는 가섭존자(迦葉尊者)와 아난존자(阿難尊者), 그리고 범천과 제석천은 이 괘불탱에서는 사천왕과 함께 하단부에 배열되었다. 범천은 원유관(遠遊冠)을 쓰고 홀(笏)을 든 왕의 모습이다.
이 괘불탱의 주조색은 홍색과 녹색이며 그밖에 가볍고 부드러운 파스텔 톤의 하늘색과 금니(金泥)를 대신한 황색(黃色) 등을 사용하였다. 신광의 모란 덩굴무늬 및 화면 테두리의 연속 꽃 문양이 화려하다.
이 괘불탱에서는 비로자나불과 노사나불이 다른 권속보다 크게 표현되었기 때문에 보관불을 화신 석가불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화기에 본존이 미륵불이라 쓰여 있기도 하고 마곡사 석가모니불괘불탱과 비교한다면 석가불의 협시보살인 미륵보살·제화갈라보살 대신 미륵불의 협시보살인 대묘상보살·법림보살이 표현되었다는 점에서 보관불을 미륵불로 보고 있다.
이 장곡사 미륵불괘불탱과 무량사 미륵불괘불탱(1627년) 외에는 미륵불괘불탱으로 명명한 예가 없어 미륵불괘불탱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또한 권속 중에 여래형 노사나불이 처음 등장하고 있어 주목된다. 그리고 마곡사(麻谷寺) 석가모니불괘불탱(1687년 제작)처럼 각 상에 명문이 밝혀져 있어 괘불탱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청양 장곡사 금동약사여래좌상(靑陽 長谷寺 金銅藥師如來坐像, 보물), 고려시대/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대고려 2018년, 그 찬란한 도전' 특별전시에서 촬영.
청양 장곡사 금동약사여래좌상(靑陽 長谷寺 金銅藥師如來坐像)은 충청남도 청양의 장곡사에 있는 상·하 2채의 대웅전 가운데 하대웅전에 모신 불상이다.
청양 장곡사 금동약사여래좌상(靑陽 長谷寺 金銅藥師如來坐像, 보물), 고려시대/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대고려 2018년, 그 찬란한 도전' 특별전시에서 촬영.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정수리 부분에 있는 상투 모양의 넙적한 머리(육계)는 구분이 잘 되지 않는다. 갸름한 타원형의 얼굴은 단정하고 우아하지만 통일신라시대 불상에서 보이던 미소는 사라지고 근엄한 인상을 풍기고 있다. 양 어깨에 걸쳐 입은 옷은 두터워 보이며 어깨는 상대적으로 왜소하게 보인다. 옷자락에는 굵은 주름이 듬성듬성 새겨져 있고, 배에 있는 띠매듭은 율동감있게 표현되어 있다. 오른손에는 약그릇을 들고 있으며, 왼손은 엄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맞대고 있는데 손톱 모양까지 세세하게 표현하고 있다. 전반적으로 불상의 신체는 늘씬하게 균형이 잡혀 있으며 넓은 무릎으로 인해 안정된 느낌을 주고 있다.
1959년 불상 밑바닥을 열고 조사하다가 불상을 만들게 된 이유와 연도를 적은 발원문이 발견되어, 고려 충목왕 2년(1346)에 만들었음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고려시대 불상임이 확인되었으며 충청도 지역에서 유행하던 고려 후기 불상양식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장곡사 금동약사여래좌상 발원문. 시주한 사람들의 이름이 적힌 위에 새로 천을 덧대어 이름을 추가해 막판까지 모금을 이어갔음을 보여준다. /불교중앙박물관 제공
✺ 청양 장곡사 미륵불괘불탱(靑陽 長谷寺 彌勒佛掛佛幀, 국보 제300호) 및 문화유산답사:
201family | 청양 장곡사 미륵불괘불탱(靑陽 長谷寺 彌勒佛掛佛幀, 국보 제300호) 및 문화유산답사 - Daum 카페
[참고문헌 및 자료출처: 문화재청 문화유산 정보/ 『동산문화재지정보고서』'96∼'97 지정편(문화재관리국, 1998)/ 『괘불조사보고서』I(국립문화재연구소, 1992)/ 글과 사진: 이영일∙고앵자 전) 문화재청 헤리티지채널 사진작가∙채널A 정책사회부 스마트리포터 yil207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