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eyVR1PFiFug?si=DUctn_sepOSd4HvV
Wagner - Der Fliegende Holländer + Presentation (Theo Adam - reference recording : Otto Klemperer)
바닷가의 전설 속에 담긴 Dutch 선장의 이야기. 대본은 Wagner가 직접 썼고 초연도 Wagner의 지휘로 Dresden에서 이루어졌다.
1막: 해변
풍랑으로 항해 course를 벗어난 Daland가 뜻하지 않는 곳에서 붉은 돛을 단 "Flying Dutchman" 의 선장 Dutchman을 만남으로 얘기는 시작된다. Dutchman은 끝 없이 바다를 항해 하도록 저주 받은 자기의 운명과 7년 만에 한번씩 육지에 내려 그 저주로 부터 풀려날 수 있는 길을 찾는, 그리고 자기가 몇번이나 바다에 빠져죽기를 원했었는지를 노래한다. Die Frist ist um (The time is up)
(네델란드인의 아리아) '기한은 끝났다'
다가오는 배를 본 Daland, Dutchman에게 풍랑으로 배가 손상되었는지를 묻는다. Dutchman은 자기의 운명을 얘기하며 만약 Daland가 자기의 집에 데려가 쉬게 해 준다면 많은 보물을 주겠다 하며 혹시 딸이 있는지를 묻는다. 그렇다는 대답에 만약 그 딸과 결혼하도록 해주면 자기의 모든 보물을 주겠다는 하자 Daland는 욕심이 생겨 제안에 동의한다. 이윽고 풍랑이 잠잠해지고 그들은 함께 Daland의 집으로 항해한다.
2막: Daland의 집
동네의 젊은 여인들, 물레를 돌리며 귀항하는 연인들을 그리며 노래하고 있다. Daland의 딸 Senta는 한쪽 벽에 걸린 초상화에 넋을 놓고 꿈속에 잠겨있는듯 하다. 시중 Mary가 불러도 대답이 없다가 동네의 젊은 사냥꾼 Erik과 사랑에 빠져있다는 다른 처녀들의 놀림에 화를 내며 그 멍청한 노래들을 그만 부르라고 한다.
(아가씨들의 합창) '빙빙 돌아라, 귀여운 물레'
"Dutchman의 발라드"를 불러달라는 Senta의 요구를 Mary거 거절하자 자신이 부른다. 내용은 풍랑을 만나 위기에 처한 Dutchman이 욕설을 입에 낸 죄로 영원히 바다에서 항해하도록 저주를 받았으나 그를 위해 기꺼이 죽을 수 있을 아내를 만난다면 구제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Senta 울면서 자기가 그런 아내가 되겠다고 한다. Senta"s ballade: Johohoe! Johohohoe!
(젠타의 발라드) '요호호에! 바다에서 저 배를 만난 일이 있어'
Senta의 노래를 들은 Erik, 그녀를 잃을까 두려워 그런 터무니 없는 생각은 버리라 말하며 자기의 꿈에 Dutchman을 열애하는 그녀가 Dutchman과 바다로 항해해 가는것을 보았다 말한다. Auf hohen Felsen lag ich träumend (I lay dreaming on the lofty crag)
Daland 와 Dutchman 이 함께 등장하고 Daland는 자기의 딸에게 손님을 반겨 맞으라 말한다. 한눈에 벽의 초상화와 꼭같은 Dutchman을 알아보는 Senta, 서로들 사랑의 응시를 교환하는데 Daland는 Dutchman이 준 보물을 보이며 그의 결혼 제안에 대해서 말한다. Mögst du, mein Kind (Would you, my child)
(달란트의 아리아) 딸이여, 이 낯선 분을 환영해 다오
긴 duet에서 두 사람은 자기들의 꿈이 이루어진 놀라움과 아버지의 뜻에 따라 결혼하여 그를 구원할 것이며 죽음이 이를때까지 변치 않을 것이라 맹서한다.
3막: 해변, 두척의 배와 Daland의 집을 배경으로
Daland의 배 선원들과 동네 사람들의 축하연이다. 반면에 어둡고 조용한 Flying Dutchman. 젊은 처녀들에게 Flying Dutchman의 선원들을 깨우지 않도록 주의시키며 모두 향연을 벌린다. 풍랑이 일듯이 바람이 불고 Dutchman의 선원들은 선장이 아내를 얻었을까 서로에게 묻는다. 양쪽 배의 선원들, 어느 그룹이 더 큰 소리를 노래하는가를 시합하며 떠들다가 Daland의 선원들이 먼저 포기하며 떠나자 곧 다시 조용해 진다.
(합창) '키잡이여, 파수보기를 그만두어라'
Senta를 뒤 쫓아 따라오는 Erik, 어떻게하여 생판 처음의 Dutchman과 결혼할수 있는가를 물으며 영원히 변치 않을 것을 맹세한 그때를 기억하라고 노래한다. Willst jenes Tag du nicht mehr entsinnen (Don"t you remember that day)
이를 엿들은 Dutchman, Senta의 맹서가 거짓이었다 생각하고 절망에 빠져 자기의 선원들에게 항해할 준비를 하라 명령한다. Senta는 그를 잡으려 하지만 Dutchman은 그녀를 그녀의 맹서로 부터 풀어주며 신 앞에서 맹서한 것이 아니므로 그녀의 운명으로 부터 자유로워진 것이라 말한다. Erfahre das Geschick (Learn the fate)
Erik과 동네 사람들이 말려 잡지만 Senta는 "Hier steh" ich treu dir bis zum Tod!" (Here I stand, faithful to you until death) 라 외치며 스스로 바다에 몸을 던진다. Flying Dutchman은 바다에 가라앉고 Senta와 Dutchman은 서로를 품에 안고 천상에 오른다.
https://youtu.be/CvIIajk4M2k?si=rtqZkti7qZaJBv0c
Wagner Der Fliegende Holländer Chor der Deutschen Staatsoper Berlin, Staatskapelle Berlin, Franz Konwitschny (conductor)
음악 이야기
삼십육계의 줄행랑
바그너는 자기 수입의 몇배나 써버려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던 탓에 보수가 아무리 많아도 소용이 없었다. 걸핏 하면 빚을 자뜩 지고 결국에는 채권자들에게 몰려 야반도주하기 일쑤였다. 21세 때인 1834년 마그데부르크 극단의 음악감독 직위를 얻은 바그너는 그곳에서도 막대 한 채무를 걸머지고 키니히스메르크로 도망쳤다. 그곳까지 빚쟁이들이 들이 닥치자 이번에는 북쪽으로 멀리 달아나 라트비아의 리가에서 겨우 직장을 얻었다.
그곳에서 2년 동안 재직하다 1839년 해임과 동시에 다시 리가의 채권자들에게 쫓겨 발트 해와 북해를 거쳐 도버 해협을 빠져 내려오는 해로를 타고 프랑스로 도망쳤다. 이때의 해상경험이 뒷날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가 된 <방랑하는 화란인>을 작곡하는 계기가 되었다. 바그너가 이와같은 내력을 친구에게 말하자, 그 친구 하는 말이 걸작이었다.
"그렇다면 그 오페라의 제목은 <방랑하는 화란인>이 아니라 <도망가는 독일인>이 더 걸맞겠군"
처음으로 파리에 머무르게 된 바그너는 때때로 몹시 빈궁해져서 전당포 신세를 지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 무렵 거리에서 한 친구를 만났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친구가 문들 바그너에게 물었다.
" 지금 몇시나 되었나? 시계를 집에 두고 나와서..."
" 미안하지만 지금 자네에게 시간을 가르쳐줄 처지가 못되네."
바그너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겸연쩍게 덧붙였다.
"내 시계는 고아가 되어버렸거든."
"고아?"
"그래. 부모를 잘못 만나 지금 다른 사람이 기르고 있다구."
1849년 프랑스 왕정이 붕괴되자 이에 자극받아 이듬해 5월 드레스덴에서도 민중봉기가 일어났다마침 그 무렵 바그너는 드레스덴에서 오페라를 지휘하고 있었다. 생활은 여전히 무질서해 채귀에 몰리는 재정적인 곤란에 직면해 있었다. 바그너는 정치적으로 러시아의 무정부주의자 미하이 바쿠닌의 이론적 영향을 받았으므로 드레스덴 볻기 때 혁명주의의 입장에 섰다. 그는 대중을 선동하는 꽤 격렬한 논문을 기고하기도 했다.
" 나는 기성질서를 파괴한다.!... 따라서 그대들, 대지의 인민들이여, 가난하고 억압당한 자들이여, 일어서라. 그리하여 왕정을 쳐부수고 화폐를 폐지하라!...."
후세의 학자들은 당시 바그너가 쓴 논문에서 분명히 몇 자 빠졌음을 지적하고 싶다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일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화폐를 폐지하라!...... 그러면 나의 채무도 소멸될 것이다." ( 바그너의 절규에도 불구하고 드레스덴 봉기는 실패했다. 그는 바이마르로 도피해 친구인 리스트집에 은신했다. 그때 만약 붙잡혔다면 당국은 그를 재판에 회부해 사형에 처할 작정이었다고 한다.그렇게 되었다면 <트리스탄과 이졸데>이후의 걸작들은 영영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것이다. 생각하면 아찍한 이야기이기는 하다 )
60줄에 접어든 바그너가 혼신의 힘을 다해 건립한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은 허다한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드디어 완공을 보고, 1876년 첫번째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이 열렸다. 이때 완주하는 데 나흘이나 결리는 초대작<니벨릉겐의 반지>가 공연되었는데 결과는 거액의 적자를 보는 것으로 끝났다.
극장 건립비용으로 걸머진 막대한 부채 때문에 궁지에 몰린 바그너는 빚을 갚는 데 보탤 생각으로 런던에 건너가 8회의 콘서트를 열어보았지만 그것 역시 흥행 참패였다.
남은 방도는 단 하나. 축제극장과 별장이 있는 땅을 모조리 팔아 빚을 갚고 가족과 함께 빈털터리로 미국에 이민 갈 결심을 하고 있는터에 구세주가 나타났다. 후견을 중단했던 바이에른 왕 루드비히2세가 자신의 왕실극장에서 바그너의 작품을 공연한다는 조건으로 연이율 5퍼센트의 빚을 주어 간신히 파국을 면한 것이었다.( 만약 바그너가 한국인이었다면 그때 '백담사행'을 결심했을지도 모른다.) <글출처: http://www.classickorea.co.kr/>
안탈 도라티 (Antal Dorati, 1906~1988)
18세에 지휘자로 데뷔한 그는 뮌스터 시립 오페라 극장, 몬테 카를로의 러시아 발레단, 댈러스 SO, 미니애폴리스 SO, BBC SO, 스톡홀름 PO, 내셔널 PO, 로열 PO, 디프로이트 SO 등의 음악감독과 상임지휘자를 역임했다.
이 경력으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전에는 오페라 극장이나 발레단의음악감독으로 수완을 발휘했고 종전 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주로 콘서트 지휘자로서 활약했다.
오케스트라 빌더로서 매우 뛰어나, 그가 음악감독이 된 오케스트라는 모두 월등하게 기능이 향상되었다고 한다. 콘서트 지휘자 및 오페라 지휘자로서 화려한 활약을 계속하고 있는 그의 연주는 반드시 멋지고 화사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타고난 약동감과 풍부한 리듬감, 그리고 폭넓은 레퍼토리는 모두 강한 설득력을 지녔다.
자료출처: 웹사이트
https://youtu.be/G3rLmu9zC0M?si=28k_4oiUwh6Airsv
Richard Wagner Der fliegende Holländer Ouvertüre London Covent Garden Antal Dorat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