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OHb3x8p3Bog?si=l_Iu6aS549e0ZEjS
Ópera Tannhauser de Richard Wagner com legendas em portugues
바그너 [Wilhelm Richard Wagner 1813∼1883]
음악을 중심으로 한 독일의 종합적 예술가. 라이프치히 출생. 작곡가·지휘자·시인(그의 오페라 대본은 모두 자작)·오페라개혁자·문화철학자·음악제 주최자를 겸한 바그너는 19세기 독일의 낭만적 오페라를 지양하고 종합예술 작품인 이른바 악극을 창시하였다. 악극 그 자체는 물론이고, 그의 음악기법과 사상은 후세의 작곡가에게 큰 지침이 되었을 뿐 아니라, 바그너의 예술관·세계관은 철학자·작가를 비롯하여 광범위한 문학인에게 다채로운 영향을 주었다.
생애
아버지 프리드리히는 연극애호가로서 경찰서 서기로 근무하였으며 3명의 형, 5명의 누이가 있는 아홉째인 막내였다. 아버지 프리드리히는 바그너가 태어난 지 6개월 만에 죽어서, 이전부터 친분이 있었던 배우이면서 시인·화가인 L. 가이어의 보호를 받았으며 또 바그너 자신이 한때 가이어라는 성(姓)을 썼기 때문에 가이어가 실제 부친이라는 설도 있다.
가이어가 드레스덴 궁정극장의 배우 겸 대본작가였으므로 바그너는 4세 때 무대에 서고, 8세 때 음악에 대해 천재적 재주를 나타내었으며 13세 되는 해에는 비극 《로이바르트》를 쓰기 시작한 것에서 볼 수 있듯 우선 문학과 연극에 열중하였다. C. 베버의 오페라 《마탄(魔彈)의 사수》를 좋아했던 바그너는, L. 베토벤의 작품을 듣고 음악가가 될 것을 결심하였고, 18세에 라이프치히대학에 입학함과 동시에 C.T. 바인리히에게 작곡이론을 배웠다.
19세 때에는 교향곡 제 1 번을 작곡, 초연(初演)하는 한편, 미완성 오페라 《혼례》에 착수하였다. 20세 때인 1833년부터 39년 사이의 시기는, 편력시절이라고 말할 정도로 각지를 찾아다니며 오페라 작곡가로서의 길을 개척하였다. 우선 형이 가수로 있는 뷔르츠부르크시립오페라극장의 합창지휘자로 취임하여 오페라를 실습하면서 《요정(妖精)》의 창작에 몰두하였다.
34년에는 마크데부르크를 본거지로 한 베토만오페라단의 지휘자가 되고, 여배우 미나 플레너와 사랑에 빠진다. 36년 오페라 《연애금제(戀愛禁制)》를 완성·초연하고, 미나와 결혼, 37년 쾨니히스베르크극장 지휘자, 리가극장 지휘자 등으로 편력을 계속하였다. 대도시에서 성공을 꿈꾸던 바그너는 39∼42년 파리에 체재하였다. G. 마이어베어의 추천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작품 상연의 희망이 모두 어긋나 바그너부부는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어려운 지경에 빠진다.
그러나 불굴의 바그너는 《파우스트 서곡》, 오페라 《리엔치》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을 차례로 완성하였다. 또 생활을 위해서 문필활동을 하였던 바그너는 소설 《베토벤 순례(1840)》와 《파리에서의 최후(1841)》를 비롯하여 많은 평론을 썼다. 드레스덴 궁정극장에서 《리엔치》를 초연한 42년(29세)부터 49년 사이에는 드레스덴에서 안정된 생활을 하였다.
《리엔치》의 대성공은, 다음해인 43년 같은 극장에서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을 초연할 수 있는 계기가 되고 더욱이 이 극장의 제 2 지휘자로 취임하는 계기가 되었다. 오페라로는 《탄호이저》와 《로엔그린》이 완성되고, 연주사(演奏史)에 남을 베토벤의 제9교향곡의 지휘가 실행되었다. 그러나 드레스덴에서 일어난 혁명운동에 참가한 바그너에게 체포영장이 발부되어, 49년에 스위스로 망명하였다.
바그너의 일생 70년의 중간점에 해당하는 49년은 창작에서나 생애에 있어서 일대 전환의 해이며 바그너를 전기와 후기로 구분하는 해이다. 전기 오페라에서 후기의 악극으로 이행하는 시기에 해당하는 49년(36세)에서 64년까지는, 주로 스위스가 생활의 터전이 되었으므로 망명시절이라고 한다. 취리히를 본거지로 한 바그너는 《예술과 혁명(1849)》 《미래의 예술작품(1849)》 《오페라와 드라마(1851)》의 세 저작으로써 악극의 이론적 기초인 종합예술론을 확립하였고, 52년에는 무대제전극(舞臺祭典劇)인 《니벨룽겐의 반지》 4부작의 작사를 거의 완성, 작곡은 53년부터 시작하였다. 이 대작을 작곡 중이던 54년에 A.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表象)으로서의 세계》를 읽고 큰 영향을 받았다.
57년에는 바그너의 후원자인 젊은 부인 M. 베젠동크와 사랑에 빠지지만, 다음해에 비극적 종말이 나고 베네치아로 도피한다. 이 비련 때문에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구상이 떠올라 59년 스위스의 루체른에서 완성하였다. 경제적 빈곤으로 분주하게 지휘여행을 계속한 바그너는, 《탄호이저》의 파리 상연 실패 등의 불운이 겹쳐서, 완전히 절망에 빠진 64년에, 18세의 젊은 바이에른국왕 루트비히 2세로부터 따뜻한 초빙을 받는다.
64년(51세)부터 72년에 이르는 동안은 열광적인 바그너 신봉자였던 루트비히의 보호하에서, 뮌헨과 루체른 교외의 트리프셴의 좋은 환경 속에서 바그너가 자기의 이상을 하나하나 실현하였던 시기였다. 루트비히 2세는, 바그너가 《니벨룽겐의 반지》를 완성할 수 있도록 작곡료와 주택 제공을 비롯하여 거액의 원조를 계속했다. 바그너는 제자인 한스 폰 뷜로 일가를 뮌헨으로 초청하고 F. 리스트의 딸인 뷜로부인 코지마와 사실상의 부부가 되어, 1866년 바그너의 첫 아내 미나가 죽은 후 정식으로 결혼하였다.
오랫 동안의 현안이었던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이상적인 초연을 시작으로, 《뉘른베르크의 명가수》와 《니벨룽겐의 반지》의 전반부가 뮌헨궁정극장에서 초연되었다. 한편, 저작에서도 《지휘에 대해서(1869)》 《베토벤(1870)》 등의 역작이 탄생되었다. 또 자서전 《나의 생애》는 루트비히 2세의 요청에 의해 코지마에게 구술필기(口述筆記, 1865∼80)시킨 것인데, 미완성으로 끝났다.
그리고 축제극장을 건설하기 위해 72년 4월 바이로이트로 이주했다. 바그너가 그의 오랜 꿈을 바이로이트 언덕에서 실현시킨 72년(59세)부터 83년까지의 시기는 완결의 시기이다. 그의 59세 생일날 축제극장의 정초식(定礎式) 때는 루트비히 2세에게 바치는 《충성행진곡》 연주로 시작되었으며, 저녁에는 변경백(邊境伯)극장에서 베토벤의 제9교향곡이 그의 지휘로 연주되었다. 건축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서 각지에 바그너협회를 설립, 74년에는 루트비히 2세의 원조로 사저인 반프리트가 건축되고 이해 11월 21일 실로 26년 만에 4부작 《니벨룽겐의 반지》를 완결, 76년 8월의 축제극장의 첫번째 상연작품으로 4부작 모두를 초연하였다.
80년에 논문 《종교와 예술》을 집필하고 2년 뒤에 무대 신성제전극(神聖祭典劇) 《파르지팔》을 완성·초연하고, 83년 2월 13일, 베네치아에서 죽었다. 바그너의 오페라와 악극은, 그가 죽은 후에도 코지마를 비롯해서 장남 지크프리트, 손자 발란트 등의 노력으로 매년 여름 바이로이트음악제로서 계속 상연되고 있다.
양식과 종합예술론
바그너는 성악과 기악 등 여러 곡종(曲種)의 작품을 남겼지만, 중심이 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무대작품이다. 《요정》에서부터 《로엔그린》에 이르는 전기의 작품은 베버와 베토벤의 영향하에 출발하여, 독일의 낭만적 오페라를 한걸음씩 끌어올려, 후기의 종합예술작품인 악극 양식을 준비해 갔다. 후기의 첫머리를 장식한 《예술과 혁명》 《미래의 예술 작품》 《오페라와 드라마》의 세 저작에서, 후기 작품의 지침이 된 종합예술론을 전개하였다.
연극을 최고의 예술이라고 한 바그너는, 완전한 인간의 표현이야말로 예술이라고 하였고, 인간의 표현능력인 육체·감정·오성(悟性)은 무도(舞蹈)·음악·문예의 세 가지 예술분야에서 각각 발휘된다고 분석하였다. 그러나, 인간의 육체·감정·오성이 삼위일체인 것처럼 세 가지의 예술분야가 하나로 융합되었을 때에, 원래의 참다운 예술이 된다고 바그너는 주장하였고, 동시에 예술은 일부 계층의 취미에 의한 것이 아니라 국민 전체에게 종교적 만족을 가져다 주는 세계관의 표현이 되어야만 한다고 강조하였다. 따라서, 하나의 예술분야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또 각 예술분야의 단순한 집합체여서도 안된다는 것이었다.
바그너가 말한 종합예술작품이라는 것은 예술의 원래 모습이었던 그리스 비극으로 귀환하는 것이며, 각 예술분야의 융합으로 이루어진 예술이다. 이러한 근본사상에서 바그너 특유의 악극 양식이 나타나게 되었다. 제재로는 신화가 즐겨 사용되었고, 음악과 문예의 결합을 위해 철저한 라이트모티프(指導動機)의 사용, 아리아와 레시터티브(낭독조의 가창)의 구분을 배제한 시프레히게장(Sprechgesang)과 무한 선율, 반음계적 수법의 도입 등의 수단이 사용되었다. 《니벨룽겐의 반지》의 제 1 작인 <라인의 황금>으로 시작되는 후기 작품은 이러한 종합예술작품의 양식으로 관철되어 있다. 후기 작품은 일반적으로 악극이라고 불려지지만 바그너 자신은 이 명칭이 오해를 살 수 있다고 하여 좋아하지 않았다.
[니체와 바그너]
바그너는 극시인이요 종합 예술로서의 악극의 이론과 창작을 완성시킨 사람으로 1848년 혁명에 참가했다가 쫒겨 스위스로 망명했었습니다 혁명이 실패하자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받아 염세적으로 되고 신비적인 종교의 기분과, 탐미주의 및 게르만 주의 등의 경향을 띤 작품들을 발표합니다.
니체는 바그너의 작품 [트리스탄과 이졸데]에 매혹되어 그의 처녀작인 [비극의 탄생]에서 바그너를 극찬합니다. 이어 쓴 [반시대적 고찰]의 "바이로이트에 있어서 리하르트 바그너" 라는 항목에서 바그너를, "공포라는 것을 모르는 " 사람으로, 모든 예술을 처음으로 하나의 위대한 미적 종합으로 융합한 고로 위대한 유일의 예술의 창시자"라고 부릅니다. 니체는 "장차 올 바그너 축제일의 장대한 의미를 이해하라" 고 전 독일을 향해 호소했다는 것입니다. 니체가 초인이라는 개념은 바그너의 남성적 과단성과 용기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처럼 극찬을 하는 예술적 기질의 한 편에서는 예민한 철학자적 안목이 번뜩입니다. 니체는 바그너의 몇 가지 행동에서 부정적인 경향을 간취합니다. 아마도 바그너가 프랑스에서 상연된 그의 탄호이저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평가가 좋지 않은 데 대해 비난한 일이 있는 모양입니다. 니체는 이 점에 실망하고 또 바그너가 부람스를 질투하는 것을 보자 놀랍니다.
한 번 부정적으로 보기 시작하면 그러한 관점은 점점 확대되는 법, 니체는 바그너의 숭배자들인 황제/ 왕자/ 소공자/ 유한 계급의 인사들이 바그너를 사랑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밀어젖히고 관람석을 차지하는 것에 대해 불쾌하게 생각했습니다. 바그너의 작품에 대해서도 그 가치가 무대 효과에 의해 과장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에 니체는 바그너 작품을 관람하면서 " 여기에 있으면 미칠 것 같다" " 나는 매일 밤의 이 긴 음악회가 무섭다.-----나는 진저리가 났다"고 씁니다.
그리하여 바그너가 성공의 절정에 올라가고 있을 때 그는 아무런 말도 없이 바그너 곁을 떠납니다. 그는 병고에 시달리는 고통 속에서 영원회귀와 초인의 사상을 발전시켜 나갑니다. 그의 권력의지의 사상에 비춰볼 때 바그너의 염세주의적이고 종교(기독교)적인 경향은 허무주의적이고 무기력한 것에 지나지 않게 보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그너 사후에 니체는 종종 바그너의 초상을 바라보며 그를 회상하여 " 내가 몹시 사랑하던 사람이다" 라고 중얼거렸다고 합니다.
자료출처: 웹사이트
https://youtu.be/xvqQA8mCmkY?si=ieVfnwF-j2peW6HD
Wagner - Lohengrin - Kaufmann, Harteros, Fischesser, Schuster, Koch, Nagano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