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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5월 30일 연중 제8주간 토요일
제1독서 : 유다 17.20ㄴ-25
복 음 : 마르 11,27-33
그 무렵 예수님과 제자들은 27 다시 예루살렘으로 갔다.
예수님께서 성전 뜰을 거닐고 계실 때,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이 와서, 28 예수님께 말하였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또 누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소?”
29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에게 한 가지 물을 터이니 대답해 보아라.
그러면 내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
30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이냐,
아니면 사람에게서 온 것이냐? 대답해 보아라.”
31 그들은 저희끼리 의논하였다.
“‘하늘에서 왔다.’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않았느냐?’ 하고 말할 터이니,
32 ‘사람에게서 왔다.’ 할까?”
그러나 군중이 모두 요한을 참예언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군중을 두려워하여, 33 예수님께 “모르겠소.”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오늘의 묵상
권 순호 알베르토 신부
오늘 복음에서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마르 11,28)
그들은 예수님의 권위를 문제 삼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라는 시골 출신으로 아무 직함도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권위에 약합니다.
2007년 1월, 흥미로운 실험이 있었습니다.
당시 미국인들에게 인기가 높았던 바이올린 연주가 조슈아 벨이
미국 워싱턴 D.C.의 지하철역에서 남루한 차림으로 40분가량 연주하였습니다.
350만 달러짜리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잠시라도 서서 음악을 들은 사람은 일곱 명뿐이었고,
스무 명 남짓만이 동전을 던졌습니다.
며칠 전 그가 보스턴 심포니 홀에서 같은 곡을 연주하였고,
표는 매진되었던 것과는 달랐습니다.
이 실험은 사람들이 음악 자체보다 외부적인 권위에 먼저 이끌림을 보여 줍니다.
왜 하느님께서는 보잘것없는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셨을까요?
바로 진리 자체로 하느님을 알아보기를 바라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외적인 권위가 아닌 말씀, 행위, 사랑 그 자체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마구간에서 태어나시고,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사시며,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지만, 온 생애로 진리를 증언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의 말씀에는 무관심하지 않는지 돌아봅시다.
성경을 집에 두기만 하고 읽지는 않고,
미사에서도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바리사이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들으려고 미사에 왔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 자체에 귀 기울입시다.
화려한 포장이 아니라 그 안의 진리를,
외적 권위가 아니라 말씀 자체를 들읍시다.
그 진리의 선율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 것입니다.
조 명연 마태오 신부
어떤 물건을 살 때, 우리는 용도를 계획해서 구매합니다.
만약 노트를 산다면 무엇인가를 적기 위해서이고,
가위를 산다면 무엇인가를 자르기 위해서입니다.
화장품을 산다면 화장하기 위해서이고, 옷을 산다면 입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이 물건들은 원래의 계획대로 사용되어야 그 효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어떨까요?
처음부터 어떤 용도로 사용되기 위해 만들어졌을까요?
하느님께서 우리를 쓰고자 하는 용도를 미리 정하셨다면,
공부할 필요도 없고 무엇인가를 익힐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 하느님께서 미리 정하셨다는 믿음으로
이제 막 태어난 아기에게 그 어떤 것도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교육 안 시키는 것은 둘째치고라도 먹는 것, 입는 것 등을
알아서 하라고 한다면 아마 인간으로 살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 만들어가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뜻에 맞습니다.
계속 기도하고 사랑을 실천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따르지 않는 순간, 하느님의 뜻도 우리 안에서 펼쳐질 수 없습니다.
나를 만들어갈 수 없게 됩니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이 와서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또 누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소?”(마르 11,28)라고 묻습니다.
오늘 복음의 바로 앞서 일어난 사건이
예수님께서 환전상들의 상을 엎으시며 성전을 정화하신 것입니다.
당시 성전의 관리와 치안은 최고 의회 대표들에게 있었는데,
자신들의 허락 없이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셨기에 항의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집인 성전을 관리하면서도, 정작 그 성전의 주인이신
하느님의 아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영적 눈멂을 볼 수 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이냐, 아니면 사람에게서 온 것이냐?
대답해 보아라.”(마르 11,30)라고 오히려 물으십니다.
하늘에서 왔다고 하면, 세례자 요한과 그가 증언한 예수님을
믿지 않느냐고 할 것이고, 사람에게서 왔다고 하면,
요한을 참예언자로 믿고 있는 군중의 분노를 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최고 의회 대표들은 “모르겠소.”(마르 11,33)라고 답합니다.
예수님을 알려고 하지도 않고, 자기의 생각을 바꿔서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사려고 변화하려고 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저 지금의 상황만 벗어나면 그만이라는 생각에 빠져 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 뜻에 맞춰 살지 않으려는 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나도 말하지 않겠다.”(마르 11,33)라고 하십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그 자리에서 멈춰 설 뿐입니다.
우리는 과연 하느님 뜻에 맞춰서 자기를 만들고 있나요?
그냥 지금의 편안함과 안위만을 생각하면서 만들어지는 것을 멈춘 것이 아닐까요?
이 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권한에 대한 논쟁을 전해줍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신 후 성전 뜰을 거닐고 계셨는데,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원로들이 와서, 예수님께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요?
또 누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소?”(마르 11,28)
원래 ‘권한’ 혹은 ‘권위’를 말할 때, '권'은 저울을 말한다고 합니다.
저울의 눈금은 어느 것이 딱 들어맞고,
어느 것이 딱 들어맞지 않는 것인지를 판가름해 냅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저울은 ‘하늘’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늘의 저울은 사람의 저울과는 사뭇 다릅니다.
사람의 저울은 물건의 경중을 가려서 판가름해 내지만,
하늘의 저울은 '하늘의 뜻'을 따르고 있는지를 판가름해 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수석사제들과 원로들이 주님을 두고 저울질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반문하십니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이냐, 아니면 사람에게서 온 것이냐?”(마르 11,30)
역시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저울’을 들이댑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대답이 가져올 위험을 생각하며 망설였습니다.
그리고는 결국 “모르겠소.”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런데 “모르겠소.”라는 이 말마디가 나의 가슴을 쿵 내리칩니다.
이는 평소의 나의 말이기 때문입니다.
비겁하고, 진실하거나 솔직하지 못하고, 위선적이고, 눈치 보며 하는
계산적인 이 말마디가 바로 내가 자주 내뱉는 말마디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둠에 가린 제 마음을 질책하십니다.
가려진 거짓을 들추시고 제 오만함을 꼼짝달싹 못하게 만드십니다.
그리고 죄를 일깨워주십니다.
제가 저 자신의 저울로 예수님을 저울질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오늘, 제 자신의 저울로 다른 이들을 저울질하고 있지는 않는지 살펴봅니다.
타인을 저울질하다가, 자칫 제 자신이 저울질 당하고 있지는 않는지를 봅니다.
오만함으로 쌓여 있는 제 자신의 속셈을 들여다봅니다.
은밀히 감추어진 속내를 말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남을 저울질하기보다,
주님의 저울인 '아버지의 뜻'에 합당하게 처신하고 있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살게 하소서.
타인의 권한을 따지기보다
그에 대한 나의 사랑을 따지게 하소서.
시시비비를 가리기보다
그에게 나의 사랑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가리게 하소서.
타인을 저울질하다가 제 자신이 저울질 당하지 말게 하소서.
오만함으로 쌓여 있는 제 자신의 속셈을 들여다보게 하시고,
거짓과 위선으로 치장하고 있는 제 자신을 들여다보게 하소서.
저울 위에 타인을 올려놓기보다 저 자신을 올려놓게 하시고,
저울질하는 바로 그 순간 막상 저울에 올려진 것은
타인의 눈치를 보느라 가려진
제 자신의 위선의 무게임을 깨우쳐 주소서. 아멘.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합니까?
조 욱현 토마 신부
예수님께서는 성전 정화 사건 이후, 유다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28절)라는 질문을 받으신다.
이 질문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예수님의 권위와 정체성을 시험하는 도전이었다.
예수님은 단순히 권위만 주장하지 않고,
지혜로운 질문으로 그들의 허점을 드러내신다.(30절)
그들은 진리를 알면서도 두려움과 교만으로
“모르겠소.”(33절)라고 답하며 스스로 문을 닫는다.
이는 자신 앞에 놓인 진리를 인정하지 않고
교만과 안위에 집착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보여 준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말한다.
“진리를 아는 자가 그 진리를 거부하는 것은
마음을 스스로 어둡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진리와 계명을 무시하면서
세상의 기준에 따라 삶을 재단할 때, 스스로 영적 소경이 된다.
예수님께서 지혜롭게 대응하신 것은 단순한 언변의 능력이 아니라,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에서 나오는 권위였다.
성령과 함께 사는 삶은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판단하고 행동하는 삶이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선한 일과 봉사는,
우리의 권력이나 지식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뜻과 계명에 따른 성령의 역사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다른 사람이 “왜 이런 일을 하느냐?”라고 물었을 때,
우리는 예수님과 하느님을 사랑하고 따르기 때문에 이 일을 한다고 답할 수 있어야 한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말한다.
“성령과 함께하는 사람의 말과 행동은
스스로를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라, 하느님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진리 앞에서
겸손하게 서는 자세와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삶을 요구한다.
유다 지도자들이 진리를 외면하고 자신의 안위와 교만에 집착했던 것과 달리,
우리는 성령과 함께 진리를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한다.
세상이 우리에게 질문할 때,
우리는 예수님과 하느님을 따르기 때문에 행동한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삶 속에서 우리는 진정한 지혜와 권위를 얻으며,
하느님의 뜻을 세상에 드러내는 신앙인이 된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성령 안에서
진리와 사랑으로 살아가는 신앙인의 자세를 다시금 확인시키고 있다.
조 재형 가브리엘 신부
성지순례 중에 바르셀로나에서 성가정 성당을 방문하였습니다.
안토니오 가우디가 설계한 이 성당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라 하나의 ‘복음서’와 같은 공간이었습니다.
성당에는 탄생의 문, 고통의 문, 영광의 문이 있습니다.
그 문을 따라가다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오는 빛은
마치 하느님의 은총이 눈에 보이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 안에는 한국어로 된 ‘주님의 기도’도 있었고,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이름도 있었습니다.
한 사람의 신앙과 열정이 도시 전체를 변화시키고,
전 세계 사람들이 찾는 순례지가 되었습니다.
성당의 지하에는 가우디의 무덤이 있습니다.
그 곁에서는 지금도 매일 미사가 봉헌되고 있습니다.
저는 그 모습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였습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성당이라도 미사가 없다면 그저 건물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미사가 봉헌되는 순간, 그곳은 살아 있는 하느님의 집이 됩니다.
바르셀로나에서 차로 한 시간쯤 가면 몬세라트 수도원이 있습니다.
화려한 도시 한가운데 있는 성가정 성당과는 달리,
이 수도원은 깊은 산속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약 천 년 전, 목동들이 신비한 빛과 소리를 체험했고,
그곳에서 ‘검은 성모님’을 발견하였습니다.
이후 그 자리에 수도원이 세워졌고,
지금까지 기도와 미사가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습니다.
깊은 산속까지 사람들이 찾아오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우리 마음 안에 있는 영적인 갈증 때문입니다.
세상은 화려하지만, 우리의 영혼은 침묵과 기도를 필요로 합니다.
성가정 성당이 ‘세상 속의 신앙’을 보여 준다면,
몬세라트 수도원은 ‘하느님 안에 머무는 신앙’을 보여 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께 묻습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입니까?”
그들의 기준은 세상의 기준이었습니다. 능력, 재력, 권력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권위는 전혀 다른 곳에서 나옵니다.
첫째, 예수님은 ‘어린양’이십니다.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자신을 내어주신 분입니다.
힘이 아니라 희생으로 세상을 구원하셨습니다.
둘째, ‘고난 받는 야훼의 종’이십니다.
고통과 십자가를 통해 하느님의 뜻을 이루신 분입니다.
셋째, ‘사람의 아들’이십니다.
마지막 날에 모든 것을 완성하시고, 참된 생명으로 이끄시는 분입니다.
넷째, ‘말씀’이십니다.
태초부터 계셨고, 만물을 창조하시며, 지금도 우리를 비추시는 빛이십니다.
이 네 가지 모습 안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참된 권위를 발견합니다.
그것은 세상이 주는 권력이 아니라,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권위입니다.
십자가를 통한 권위, 사랑을 통한 권위입니다.
순례의 길에서 저는 두 가지 모습을 보았습니다.
하나는 화려한 성당이었고, 다른 하나는 깊은 산속의 수도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둘을 하나로 묶는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미사’와 ‘기도’였습니다. 사제로서 저는 다시 깨닫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더 크고, 더 화려한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드리는 미사를 충실히 봉헌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교우 여러분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이 아무리 크고, 삶이 아무리 풍요로워도
그 안에 기도와 하느님이 없다면 공허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작은 삶이라도 하느님이 함께하시면 그 삶은 거룩한 성전이 됩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십자가에서 드러났습니다. 우리도 그 길을 따라야 합니다.
겸손과 희생, 그리고 사랑의 길입니다. 그 길이 바로 생명의 길입니다.
주님,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주님의 길을 따르게 하소서.
겸손과 희생으로 사랑을 살아가게 하소서.
우리 삶이 주님께 드려지는 살아 있는 성전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은 모든 사람에 대한 권한을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송 영진 모세 신부
1)
이 이야기는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이시고,
예수님의 권한은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다.” 라는
간접 증언입니다.
동시에, 왜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지,
왜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구원하는 권한과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권한을 가지고 계신 분이기 때문에,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원한다면
예수님을(예수님만)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기를 거부하면 기다리는 것은 ‘멸망’뿐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생명을 가지고 계신 것처럼,
아들도 그 안에 생명을 가지게 해 주셨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또 그가 사람의 아들이므로
심판을 하는 권한도 주셨다.
이 말에 놀라지 마라.
무덤 속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의 목소리를 듣는 때가 온다.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 선을 행한 이들은 부활하여 생명을 얻고
악을 저지른 자들은 부활하여 심판을 받을 것이다.”(요한 5,25-29)
무신론자들이나 내세를 안 믿는 자들은
부활, 심판, 구원, 멸망 등에 관한 말씀들을 비웃으면서
그것을 증명해 보라고 요구합니다.
사실 그 일들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증명할 방법은 없고,
“그날이 되면 누구나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희망’이 중요합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기를 바라고,
죽음이 ‘끝’이 아니기를 바라는 그 희망에서 믿음이 시작됩니다.
반대로, 그 희망 없이 현세의 삶에만 만족하고,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믿음을 가질 필요를 못 느끼니까 안 믿게 됩니다.
<희망 없이 사는 것이 과연 사는 것일까?>
2)
28절의 ‘이런 일’이라는 말은, 넓은 뜻으로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들과 말씀들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좁은 뜻으로는) 예수님의 ‘성전 정화’를 가리킵니다.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원로들은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신 일을(마르 11,15-17)
자신들의 권한을 심각하게 침해한 일로 생각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성전 정화’ 이야기를 보면,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마르 11,18)
그러나 군중이 ‘성전 정화’를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죽일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가
‘권한’ 문제로 시비를 걸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의 세례’를 언급하신 것은,
답변을 회피하신 것이 아니라,
“나의 권한은 하늘에서 온 것이라고
요한이 이미 증언했다.”라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은 하느님의 어린양이시고,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분”이라고 증언했습니다.(요한 1,29-34)
세례자 요한을 ‘하느님의 예언자’로 믿는다면,
그의 증언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께 와서 시비를 걸고 있는 자들은
요한을 예언자로 안 믿는 자들이었고,
그래서 요한의 증언도 안 믿는 자들이었는데,
그들은 요한을 ‘참예언자’로 여기는(믿는) 군중에게
돌을 맞게 될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여기서 그들이 군중을 두려워했다는 말은,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고,
자신들이 누리는 기득권을 잃게 되는 것만
두려워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하느님을 믿는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무신론자들처럼 살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3)
“모르겠소.” 라는 그들의 말은,
대답하기 싫다는 뜻이기도 하고, 관심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활동지는 요르단 강이었고,
그는 예루살렘 성전에는 가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당시 유대교의 제도권 사람들이나
예루살렘의 기득권층 사람들과 충돌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세례자 요한에게 별로 관심이 없었을 것입니다.
관심 없다는 말은,
요한의 ‘회개 선포’에 대해서 아무 관심도 없다는 뜻이기도 하고,
자신들의 구원 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들의 관심사는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지위, 권력, 재산 등을 잘 지키는 것뿐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구원받기를 거부한 자들과 같고,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신 예수님을 배척한 자들과 같습니다.
그 거부와 배척은 스스로 멸망을 선택하고,
멸망을 향해서 걸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나중에라도 회개하고 믿었다면 구원을 받았겠지만,
끝까지 고집 부렸다면 그냥 그렇게 끝났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거룩한 분노가 필요합니다!
양 승국 스테파노 신부
우리 인간 각자를 향한 하느님 사랑의 얼굴은 천가지의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때로 극심한 고통과 깊은 상처로 괴로워하는 우리에게
하느님은 세상 자상하고 따뜻한 아버지의 얼굴을 드러내십니다.
때로 깊은 좌절감에 망연자실한 얼굴로 바닥에 주저앉아 흐느끼고 있는 우리에게
하느님은 일으켜 세우시고 격려하시고 고무하시는 든든한 보호자의 얼굴로 다가오십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마냥 그러하시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엉뚱한 생각을 하고, 가지 말아야 할 죽음의 길을 걸어갈 때에는
상상하기도 힘들 정도의 거룩한 분노를 터트리십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모두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의 마음입니다.
때로 끌어안는 것도 사랑이지만 떼어놓은 것도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그러한 하느님의 마음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렇게 기회를 주고 기다렸지만,
끝끝내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십니다.
“이제부터 영원히 어느 누구도 너에게서 열매를 따 먹는 일이 없을 것이다.”
또한 거룩한 성전이 크게 훼손되고 타락한 모습에
진노하신 예수님께서 상상을 초월하는 행동까지 불사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들어가시어,
그곳에서 사고팔고 하는 자들을 쫓아내기 시작하셨다.
환전상들의 탁자와 비둘기 장수들의 의자도 둘러 엎으셨다.”
보십시오, 복음서 어디서도 발견할 수 없는 예수님의 과격한 행동입니다.
강도의 소굴로 타락한 성전 앞에 거룩한 분노를 터트리신 것입니다.
일종의 성전 정화 작업을 하신 예수님의 행동이 과격했던지,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은 자존심에 크게 상처를 입고
그분을 없앨 방법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때로 마냥 좋은 게 좋은 거지 하고, 살아가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음을 예수님께서 잘 보여주고 계십니다.
거룩해야 할 성전이 천박한 배금주의로 타락할 때, 거룩한 분노가 필요합니다.
누군가는 크게 언성을 높여야 마땅합니다.
교회가 고유한 본성을 잃어버리고 엉뚱한 모습으로 변질될 때, 거룩한 분노가 필요합니다.
누군가가 분연히 일어나 반기를 드는 것이 필요합니다.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이 교회의 보물이요
중심으로 대우받지 못하고 들러리요
애물단지로 취급받을 때, 거룩한 분노가 필요합니다.
누군가는 등불처럼 불을 밝히고 과감히 일어서서 그 부당함을 외쳐야 마땅합니다.
그런 과정에서 반드시 고통이 뒤따를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의 말씀처럼
“무슨 이상한 일이나 생긴 것처럼 놀라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니 기뻐하십시오.”(1 베드 4, 12-13)
내가 청하는 것을 내가 존중하는지 먼저 물어야
전 삼용 요셉 신부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마르 11,33)
찬미 예수님! 연중 제8주간 토요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 원로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논쟁을 벌이는 장면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오?"라며
아주 예리한 질문을 던집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진리를 알고 싶어 하는 진지한 구도자들의 모습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질문에 답을 주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례자 요한의 권한이 하늘에서 온 것인지 사람에게서 온 것인지 되물으십니다.
그러자 그들은 속으로 얄팍한 계산을 돌리기 시작합니다.
'하늘에서 왔다고 하면 왜 믿지 않았느냐고 할 것이고,
사람에게서 왔다고 하면 군중이 두렵고.'
결국 그들은 진실을 외면한 채 "모르겠소"라고 거짓말을 해버립니다.
그러자 예수님도 단호하게 선언하십니다.
"나도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주님은 왜 진리를 묻는 이들에게 침묵하셨을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진리에 대한 '존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진리를 알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진리를 이용하려 했을 뿐입니다.
하느님은 스스로 정직하지 않으면서 진리를 훔쳐 가려는 자들에게는
결코 하늘의 신비를 내어주지 않으십니다.
어느 마을에 허풍이 심하고 체면을 중시하는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몸이 자꾸 아파서 아주 용하고 신통하다는 명의를 찾아갔습니다.
의사는 남자의 진맥을 짚어보더니 차트를 들고 진지하게 물었습니다.
"환자분, 정확한 진단을 위해 묻겠습니다.
평소 식습관은 어떠시며, 술과 담배는 얼마나 하십니까?"
남자는 의사 앞에서 자신이 게으르고 방탕하게 산다는 것을 들키는 것이 부끄러웠습니다.
그래서 태연하게 거짓말을 늘어놓았습니다.
"아, 저는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조깅을 하고요.
술과 담배는 입에도 대지 않습니다.
식사도 철저하게 유기농 채소 위주로 소식하며 완벽하게 관리하고 있지요."
의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처방전을 써주었습니다.
남자는 비싼 돈을 주고 지어온 약을 매일 정성껏 챙겨 먹었습니다.
그런데 한 달 뒤, 병이 낫기는커녕 증세가 악화되어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남자는 화가 잔뜩 나서 의사를 찾아가 멱살을 잡았습니다.
"당신 명의라더니 다 사기꾼 아니오! 당신이 준 약을 먹고 내 몸이 더 망가졌소!"
그러자 의사가 남자의 손을 뿌리치며 싸늘하게 대답했습니다.
"선생님, 제가 지어드린 그 약은 완벽한 명약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 약을
'새벽마다 조깅을 하고 술 담배를 안 하는 건강한 사람'을 위해 지어주었지,
매일 밤, 술을 퍼마시고 기름진 고기만 먹는
선생님 같은 분을 위해 지어준 적이 없습니다!
당신이 당신의 진짜 모습을 속였는데,
어떻게 내 처방이 당신 몸에서 진리를 발휘할 수 있겠습니까?"
이처럼 진리를 대하는 우리의 영적 태도가 얼마나 완벽한 무결점을 요구하는지,
현대 첨단 공학의 법칙 하나를 통해 명확히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바로 반도체 공장의 클린룸(Clean Room) 법칙입니다.
스마트폰이나 컴퓨터에 들어가는 초정밀 반도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일반 공기가 아닌 완벽하게 통제된 '클린룸'이라는 공간이 필요합니다.
이 방은 먼지 한 톨, 머리카락 한 가닥도 허용되지 않는 우주에서
가장 깨끗한 공간입니다.
작업자들은 온몸을 방진복으로 꽁꽁 싸매고,
에어 샤워를 거쳐야만 그 방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왜 이렇게까지 유난을 떨까요?
반도체 웨이퍼 위에 그려지는 회로는
나노미터(10억 분의 1미터) 단위의 초미세 설계도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작업자가 귀찮다고 방진복을 대충 입고 들어가서,
아주 미세한 각질이나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먼지 한 톨이라도
그 웨이퍼 위에 떨어진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 나노미터의 정밀한 회로는 즉시 끊어지고 쇼트가 나서,
수백억 원어치의 반도체가 전부 불량품이 되어 폐기 처분되고 맙니다.
하느님의 진리는 이 반도체 회로보다
수억 배 더 정교하고 거룩한 우주의 설계도입니다.
이 거룩한 진리가 우리 영혼의 웨이퍼에 새겨지려면,
우리 마음은 반드시 정직이라는 완벽한 클린룸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겉으로는 기도를 하면서도 속으로는
자기 합리화와 거짓말이라는 미세먼지를 풀풀 풍기고 다닌다면,
하느님의 진리는 우리 영혼 안에서 즉시 쇼트를 일으키고 맙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진리를 쏟아 부어 주시기 위해
가장 먼저 요구하시는 조건은 똑똑한 머리가 아닙니다.
내 죄와 한계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잔인할 정도의 '솔직함'입니다.
진리를 청할 때는 솔직해야 하고, 은총을 청할 때는
죄를 짓지 않을 결심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청하는 것을 존중한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얼마나 자주 유다인들처럼 속을 감추고 하느님 앞에 섭니까?
교회의 위대한 학자인 성 아우구스티누스 주교님은
『고백록』에서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진리는 빛과 같아서, 거짓으로 자신의 두 눈을 가린 자에게는
맹인의 흑암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비참함을 솔직하게 고백하지 않는 자는,
영원히 진리의 문고리조차 잡을 수 없을 것입니다."
(출처: 성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참 아름답고 거룩한 성전
“거룩한 성전, 살리는 성전, 자라는 성전”
이 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행복하옵니다, 당신의 집에 사는 이들!
그들은 영원토록 당신을 찬양하리이다.“(시편84,5)
어제 주간지 <강남은 거대한 정신병동이다>
저자의 인터뷰 내용 일부를 인용함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강남 환자 99.9%, 아무도 못 믿어, 그래서 강남은 정신병동이다.”
제하의 인터뷰 내용이었습니다.
-“강남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전체, 전 세계가 미쳐 있다.
인간성이라는 게 서로 돕고 의지하고 감싸주는 것이다.
그게 없으면 정신병동이 된다.
정신병자는 결국 원시적인 에너지에 사로잡힌 사람들이다.
절제가 없고 이기적이다.
맹수가 먹이만 보고 달리듯이 우리도 그렇게 산다.”
흡사 현대판 악령에 사로잡힌 이들을 상징하는 듯합니다.
“잠드는 일이 제일 힘들다고 한다. 낮에 활동한 만큼 잠이 오는 것이다.
마약은 결국 도파민을 끌어다 쓰는 거고, 그 대가는 반드시 치른다.”
“사람이 느끼는 고통중 제일 큰 것이 한가로움이다.
인간은 어릴 때부터 무수한 도전을 통해 살아왔다.
짜릿한 게 있어야 살맛이 난다. 밋밋하면 죽을 맛이다.
그래서 마약은 성공한 사람을 타깃으로 한다.
자발성을 가지고 계속 나아가야 정신적으로 건강한데,
그게 끊겨버리면 위축된다.
노력하지 않고 얻을 수 있는 쾌락을 선택한다.”
<정신병동>에 대한 궁극의 유일한 처방은 <거룩한 성전>뿐입니다.
어제 독일 남자와 결혼하게 될 딸을 걱정하는
어느 자매의 걱정하는 마음도 잊지 못합니다.
“어제 딸이 한 말이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복잡하고 지옥 같은 이 도시가 더 좋다고 합니다.
너무 외롭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용기있게 잘 견뎌내고 독일 생활에 잘 적응하도록
그곳에서의 삶이 행복하도록 주님의 은총을 청합니다.”
아마도 대부분은 재미없는 천국보다는
재미있는 지옥을 택하겠다는 마음일 것입니다.
흙에서 꽃을 피어내고 생명을 키워내는 것은
AI 기계가 아니라 생명의 하느님입니다.
하느님 관상 능력을 잃어감이 위기의 본질이자 실상이요
이로 인한 고귀한 인간품위의 상실입니다.
지옥은 텅 비어 있고 악마들이 활개 치는 세상이라 하는데
교회 역시 비어가는 현상과 관련된 듯싶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급박한 위기를 통찰한
레오14세 교황의 예언자적 회칙이 바로 <고귀한 인류>입니다.
희망과 꿈을, 길을 잃으면 누구나 정신병자 되기 십중팔구입니다.
참으로 궁극의 희망이자 꿈이요 길이신 주님을 찾고 만나야
비로소 영육의 치유요 참답고 고귀한 인간이 됩니다.
무지와 허무, 무의미의 악령의 세계로부터 벗어나
건강한 정신으로 살 수 있는 길은, 광야 세상의 오아시스와 같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집, 성전을 찾는 길뿐입니다.
이런 모든 불길한 조짐들은 생명의 하느님을,
거룩한 하느님 집인 성전을 찾으라는 초대입니다.
치유보다는 예방이 백배 낫지만 늦었다 싶어도
치유를 위해, 살기 위해 하느님을, 하느님의 집 성전을 찾아야 합니다.
애당초 가톨릭교회는 힐링의 치유의 종교입니다.
사실 성전에서의 미사전례보다 영육의 치유에 더 좋은 힐링도 없습니다.
오늘은 여기 요셉수도원 성전 봉헌 대축일입니다.
2006년 5월30일 봉헌했으니 올해 제2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수도원은 1987년 3월19일 성 요셉 대축일에 개원했고,
저는 1988년 7월11일 성 베네딕도 대축일에 부임하였으니
수도원보다 한 살 적은 올해 38주년이 됩니다.
아주 예전 에버랜드 수도형제들의 공동소풍이 생각납니다.
결론은 <하느님의 성전>이 중심부에 자리 잡은 요셉수도원이야말로
진짜 영원한 에버랜드라는 사실입니다.
보이는 가시적 건물 성전은
물론 불가시적 주님의 몸인 공동체 성전이 정말 중요합니다.
이 하느님의 집 성전의 위대한 건축가는
하느님이요 우리 인간은 협조자입니다.
제가 하느님의 지도하에 초창기부터 자치수도원의 되기까지
분원장으로 22년 동안 기반을 닦았다면,
파코미오 신부가 이어 12년 동안 자치 원장직을 수행하면서 틀을 잡았고,
올해 5월부터는 이사악 원장 신부가 내용을 채우게 되었으니
위대한 건축가 하느님의 배려의 섭리임을 깨닫습니다.
당신의 사람들을 통해 “기반을 닦고, 틀을 잡고, 내용을 채우게” 하시니
참 절묘한 하느님의 지혜입니다.
가시적 건물 성전은 그대로 이지만,
살아 있는 미완의 <주님의 몸> 성전은
끊임없이 완성을 향해가는 순례 여정 중에 있습니다.
완성은 천상 예루살렘에서만 가능할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주님의 집, 성전의 세 특징을 배웁니다.
하느님의 좋으심이 그대로 발현되는 살아 있는 주님의 집, 성전입다.
첫째, 거룩한 성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성전을 정화하는 예수님을 통해 확연히 드러납니다.
거룩해야할 성전이 속화된 현실에 분노하시는 주님의 개입입니다.
눈에 보이듯 아주 생동감 넘치는 장면입니다.
‘주님은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시고,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시며’
비둘기파는 이들에게 말합니다.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주님의 집에 대한 열정의 사랑이 그대로 표출된 것입니다.
항의하는 유대인들에게는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바로 불가시적 진짜 성전인 주님의 몸 공동체 성전에 대한 예고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이 되살아나신 후에야
성전은 바로 주님의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을 깨달았다 합니다.
정말 중요한 성전은 주님의 몸인 공동체 성전이요
우리의 모든 수행이 성전정화에 절대적임을 깨닫게 됩니다.
세상을 성화시켜야 할 성전이 세상에 속화된다면 존재이유의 상실입니다.
둘째, 살리는 성전입니다.
생명의 하느님이요 세상을 살리는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오늘 제1독서 에제키엘 예언자가 이 진리를 잘 소개합니다.
주님의 집에서 세상으로 흘러가는 생명의 강은
그대로 세상 바다로 흘러가 세상을 살리는 성전의 은총을 상징합니다.
에제키엘의 천상 비전이 참 아름답고 풍요롭습니다.
“이 물이 흘러 들어가면, 그 바닷물이 되살아난다.
그래서 이 강이 흘러가는 곳마다 온갖 생물이 우글거리며 살아난다.
이렇게 이 강이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되살아난다.
이 강가 이쪽저쪽에는 온갖 과일나무가 자라는데,
잎도 시들지 않으며, 과일도 끊이지 않고 다달이 새 과일을 내놓는다.
이 물이 성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대로 살아 있는 거룩한 성전의 미사은총을 상징합니다.
이 모두는 천상 예루살렘에서 이뤄지겠지만,
이미 현세에서도 정말 세상을 살리고 정화하고 성화하는,
세상의 빛이요 소금인 교회요 수도원의 성전들의 역할입니다.
정말 그 어느 때보다 생존경쟁 치열한 세상을 살아가는 신자들을
위로하고 치유하고 살리는 은총의 주님의 집, 성전역할이 절박한 시절입니다.
셋째, 자라는 성전입니다.
미사전례 공동체가 없다면 보이는 건물 성전은 흡사 빈껍데기에 불과할 뿐입니다.
진짜 성전은 끊임없이 미사전례가 이뤄지는 주님의 몸 공동체 형제들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이 참 적절합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건물입니다.
아무도 이미 놓인 기초 외에 다른 기초를 놓을 수 없습니다.
그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느님께서도 그자를 파멸시키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공동체 성전 파괴가 얼마나 큰 죄인지 깨닫습니다.
이런 지상에서의 성전은 지상 순례 여정 중
끊임없이 영원한 현재 진행형으로 자라납니다.
그러니 결코 고정불변의 주님의 몸 공동체 성전이 아닙니다.
위대한 건축가 하느님의 성령의 인도 따라 하느님께 잘 협조할 때,
끊임없이 계속 잘 자라는 주님의 집 공동체 성전이 될 것입니다.
오늘은 제20주년 요셉수도원 성전 봉헌 대축일입니다.
수도원 설립 후 39년이 지났습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수도형제들의 최선을 다한 협조로
주님의 몸인 수도공동체 성전이 앞으로도
“거룩한 성전, 살리는 성전, 자라는 성전”으로
그 사명과 몫을 다할 수 있도록
이 거룩한 미사 중 주님의 도움을 청합시다.
“실로 주님 뜨락에서 지내는 하루가, 다른 천 날 보다 더 좋사옵니다.
악인들의 장막 안에 살기보다는,
차라리 하느님 집 문간에 있기 소원입니다.”(시편84,11). 아멘.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이 승화 시몬 신부
신자들에게 질문을 받다보면
재미난 차이를 발견하게 됩니다.
믿음을 가지고 묻는 질문은 주로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를 찾는 주제가 많습니다.
그들은 신앙의 신비를 전제하기 때문에
신비를 토대로 우리 삶의 적용을 가르쳐 줍니다.
더 깊은 신앙으로 나아가기 위해서지요.
반대로 믿음이 없는 이들은
주로 하느님이 계시는가? 라는 질문과
신비를 제외히고 자신의 머리로만 이해하려 합니다.
그러다보니 그들에게 신앙은
그저 답 없는 막연한 지식이거나
허황된 이야기가 되곤 합니다.
질문을 통해 알고 앎을 통해 삶으로 이어져야 하는데
그들은 질문을 위한 질문 혹은
자신의 지금 상태를 합리화하기 위한 질문을 하다보니
아무런 변화 없이 챗 바퀴를 돌곤 합니다.
오늘 예수님을 만난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신비의 영역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독서의 말씀처럼
거룩한 믿음을 바탕으로 성장해 나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믿음이 있는 이가 질문을 통해 성장한다면
더 많은 결실을 맺을 수 있음을 기억하며
오늘도 주님 안에서 신비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되길 바랍니다.
출처: https://frsimon.tistory.com/1878 [시몬 신부의 신앙이야기:티스토리]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