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보다 의의가 큰 전쟁
20세기 초인 1914년 6월에 발발하여 1918년 11월까지 벌어졌던 거대한 전쟁을 흔히 제1차 세계대전이라고 한다. 비록 미국과 일본이 참전하고 일부 전투가 중동, 아시아, 아프리카 일대에서도 벌어지기는 했지만 전쟁 전체를 놓고 본다면 이는 상당히 미미한 수준이었다. 당시 대부분의 격전이 유럽에서 벌어졌으므로 세계대전이라 정의하기는 뭔가 부족한 측면이 있고 사실 이런 정의는 서구 중심 사관의 영향을 받은 것이기도 하다.
지금도 서구에서는 제1차 대전이라는 명칭보다 대전쟁(Great War)이라 많이 부르고 1940년대 이전에 발행된 우리 신문에서도 구주대전(歐洲大戰)이라 표기하였으니, 엄밀히 말해 유럽에서 벌어졌던 거대한 전쟁이라고 정의 내리는 것이 옳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지만 제2차 대전이 벌어지면서 이 전쟁을 제1차 대전이라 칭하게 되었으니 어쩌면 세계대전이라는 명칭도 제2차 대전 이후부터 붙게 되었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 일부라도 연관이 있는 제2차 대전에 비한다면 우리에게 제1차 대전은 상당히 먼 남의 이야기로 취급되어 왔다. 올해가 전쟁이 발발한지 정확히 백주년이 되는 해일만큼 아주 오래 전의 일이고, 싸움의 주 무대 또한 지구 반대편에 떨어진 유럽이어서 우리 삶에 크게 와 닿을 만큼 영향을 끼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당시에 국권을 상실하여 세계사의 흐름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없어 벌어진 일종의 착시다.
20세기 초인 1914년 6월에 발발하여 1918년 11월까지 벌어졌던 거대한 전쟁을 흔히 제1차 세계대전이라고 한다. 비록 미국과 일본이 참전하고 일부 전투가 중동, 아시아, 아프리카 일대에서도 벌어지기는 했지만 전쟁 전체를 놓고 본다면 이는 상당히 미미한 수준이었다. 당시 대부분의 격전이 유럽에서 벌어졌으므로 세계대전이라 정의하기는 뭔가 부족한 측면이 있고 사실 이런 정의는 서구 중심 사관의 영향을 받은 것이기도 하다.
지금도 서구에서는 제1차 대전이라는 명칭보다 대전쟁(Great War)이라 많이 부르고 1940년대 이전에 발행된 우리 신문에서도 구주대전(歐洲大戰)이라 표기하였으니, 엄밀히 말해 유럽에서 벌어졌던 거대한 전쟁이라고 정의 내리는 것이 옳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지만 제2차 대전이 벌어지면서 이 전쟁을 제1차 대전이라 칭하게 되었으니 어쩌면 세계대전이라는 명칭도 제2차 대전 이후부터 붙게 되었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 일부라도 연관이 있는 제2차 대전에 비한다면 우리에게 제1차 대전은 상당히 먼 남의 이야기로 취급되어 왔다. 올해가 전쟁이 발발한지 정확히 백주년이 되는 해일만큼 아주 오래 전의 일이고, 싸움의 주 무대 또한 지구 반대편에 떨어진 유럽이어서 우리 삶에 크게 와 닿을 만큼 영향을 끼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당시에 국권을 상실하여 세계사의 흐름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없어 벌어진 일종의 착시다.
-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폐허로 변한 프랑스 보드퐁덩루의 모습. 세계대전이라는 명칭과 달리 대부분의 전투는 유럽에서 벌어져 서구에서는 ‘대전쟁’으로 많이 불리지만 당시까지 인류가 겪은 최대의 비극이었음은 틀림없다.
우리는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해방을 맞이하였기 때문에 제2차 대전을 심정적으로 크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비록 싸움 자체의 규모와 피해는 작지만 세계사적 의의는 제1차 대전이 훨씬 컸다. 엄밀히 말해 제2차 대전과 그 이후의 현대사를 결정한 가장 커다란 분기점이 바로 제1차 대전이었다. 싸움은 지구상의 일부에서 벌어졌지만 그 여파는 당대는 물론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계속 잔영을 미치고 있다.
지난 20세기는 인류사에 있어 가장 격정적이었던 시기라 감히 정의할 수 있다. 지난 수백 년 간 계속된 유럽 주도의 제국주의 질서가 제1차 대전을 기점으로 급격히 바뀌면서 20세기는 시작되었다. 이는 신대륙 발견과 산업혁명으로 이어져 온 기존 질서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거대한 변화는 이후 20세기를 신대륙의 미국과 새로운 체제를 선도한 소련이 주도하도록 만들었다.
- 영일동맹을 핑계로 일본은 산둥반도의 독일 조계지인 칭다오를 공격하였고 본국의 지원을 받을 수 없던 독일은 패배하였다. 이처럼 일본의 도발 야욕은 형식적이나마 제1차 대전이 아시아에서도 판을 넓히도록 만들었다.
제2차 대전이 워낙 커서 상대적으로 작아 보일 뿐이지 제1차 대전의 규모도 엄청났다. 약 50여개의 국가 및 식민지가 이 전쟁에 참여하였지만 싸움의 대부분을 이끈 주인공들은 독일, 영국, 프랑스, 러시아, 오스트리아-헝가리, 오스만투르크, 미국 등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런데 앞서 설명한 것처럼 이들은 말 그대로 당시 세계의 전부와 다름없었다. 즉 당대 수퍼파워들 모두가 전쟁에 뛰어든 것이었다.
이렇게 강대국들이 편을 갈라 쉼 없이 4년간 벌인 전쟁의 결과는 실로 참혹했다. 무려 1,000만 명의 전사자가 발발하였는데, 이는 그때까지 지구상에서 인류가 경험하지 못하였던 엄청난 인적 피해였고 더불어 물적 손실도 막심하였다. 그 이전에 있었던 몽골의 정복 전쟁처럼 인류사에 더 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한 기록들도 있지만 기간과 직접 피해 규모만 따진다면 제1차 대전은 가히 최악의 수준이었다.
- 제1차 대전은 제국주의가 절정에 이르던 시기에 발생하였다. 따라서 대부분의 싸움은 유럽에서 벌어졌지만 서류상으로 전 세계가 전쟁에 참가한 형식이 되었다. 분홍색으로 표시 된 중립국 지역을 제외하면 결국 지구상의 대부분이 전쟁과 관련이 있는 셈이었다.
이 과정에서 베르사유체제의 성립, 국제연맹과 같은 국제기구창설, 워싱턴 군축회의 같은 일련의 군비통제 체계가 곧바로 출범되었다. 전후에 맺어진 강화조약은 당연히 승전국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했지만, 반면 군축은 패전국뿐만 아니라 승전국에게도 공히 제약이 가해지는 사항이었다. 그것은 비록 지난 전쟁에서 함께 싸웠지만 승전국끼리도 서로를 군사적으로 견제할 필요가 있다고 느낀 것이었다. 그만큼 지난 전쟁은 무서웠다.
- 베르사유 조약 체결 당시의 각국 대표단의 모습. 비록 독일을 너무 구석에 몰아 붙였다는 비판을 받고 결국 역효과를 냈지만 베르사유 조약은 그 만큼 전쟁 재발을 막기 위한 강력한 의지이기도 했다.
그런데 정작 이런 기구나 조직이 없었지만 전쟁 발발 전 주요 참전국을 살펴보면 오히려 비극을 충분히 막을 수도 있었던 기막힌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쉽게도 그런 시스템이 부정적으로 작동하여 전쟁이 벌어졌고 비극을 잉태하였지만 만일 긍정적으로 작용하였다면 제1차 대전은 발발하지 않았을 수도, 아니면 단지 국지전으로 끝날 수 도 있었을 것이다. 앞으로 소개할 내용은 이와 관련된 이야기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