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의 월요시편지_598호]
가로수 마네킹
강서연
란제리도 망사스타킹도 액세서리도
색 바랜 바바리코트도 한데 뒤엉켜있던 가판대
가을 정기세일을 마치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의 마네킹들이 서 있다
가로등 불빛이 훤하게 조명을 비추는 쇼윈도
은행나무의 옹이가 생식기처럼 열려 있다
저 깊은 생산의 늪에 슬그머니 발을 넣어보는 저녁
어둠이 황급히 제 몸을 재단해 커튼을 친다
첫눈이 내린다
칼바람을 따라가며 천을 박는 발자국들
재봉틀 소리에 맞춰 나무의 몸속에서도 바람개비가 돌아간다
길도 불빛도 사람들도
왕십리 돼지껍데기집 화덕 위에 불판으로 모여든다
올해의 유행은 몸에 딱 달라붙는 레깅스 패션
마지막 단추까지 꼼꼼하게 채운 새들은 어디까지 갔을까
오래 서 있어서 아픈 플라타너스 무릎에
가만히 손을 얹는 홑겹의 흰 눈발
- 『가로수 마네킹』(지혜,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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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서연 시인의 '첫' 시집 상재를 축하드리며 시집의 표제시를 띄웁니다. 2016년 영남일보 신춘문예 수상작이기도 하지요. 「가로수 마네킹」.
강원대학교 후문에서 밤 늦게까지 술을 먹을 때면 후평동 집까지 그냥 걸어가곤 합니다.
인공폭포를 지나 포스코 아파트 입구까지 가다보면 이런저런 옷가게를 지나가게 되는데, 가로등 불빛이 환하게 비추는 쇼윈도 안으로 알몸의 마네킹들을 보곤 합니다. 그리고 길 건너 포장마차에 따개비처럼 모여든 사람들까지... 같은 길, 같은 상황을 맞닥뜨리며 살고 있으면서, 나는 왜 이런 시를 쓰지 못할까, 같은 시인으로서 무능과 무관심에 대한 반성을 먼저 해보는 아침입니다.
시가 묘사하는 것은 첫눈이 내리는 어느 저녁의 쓸쓸한 풍경이지요.
(알몸의) 마네킹 = 은행나무(의 옹이) = (오래 서 있어서 아픈) 플라타너스 = 생산의 늪에 빠진/ 칼바람을 따라가면 천을 박는/ 불판에 모여든 사람들... 그리고 이들의 무릎에 가만히 손을 얹는 흰 눈발... 흰 눈발은 결국 시인일 테지요....
근데 왜 저는 이 시를 읽으면서 엄마가 생각나는 걸까요. 만성중이염을 달고 살았던 엄마. 지하 셋방 백열등 불빛은 언제나 흐렸고, 공장에서 돌아온 엄마는 저녁 밥상을 차리고는 돌아 앉아 흐린 불빛 아래서 밤새 봉제인형에 까만 눈을 달았습니다. 단추 같은 까만 눈 두 개를 달면 10원을 받았던가요. 곰이며 토끼며 인형이 수북이 쌓인 방에서 식구들 새우잠을 자는 동안 엄마 귀에서는 밤새 피고름이 흘러내렸습니다. 몇 해 전 수술을 받았지만 결국 엄마의 한 쪽 귀는 영영 소리를 잃었는데, 그래도 한 쪽은 남았으니 괜찮다, 괜찮다는 엄마. 시를 읽다말고 왜 엄마가 떠오르는 걸까요. 시를 읽다가 엉뚱한 데로 자주 새곤 한다면, 당신도 나이를 먹었다는 증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내일이 4월 3일입니다.
제주 4.3 항쟁 70주년이 되는 날이지요. 세월호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 그와 꼭 같은 이유로 우리는 제주 4.3을 기억해야 한다고 누가 그러더군요. 그런 의미에서 강기희 형의 소설도 많이 읽혔으면 좋겠습니다.^^
2018. 4. 2.
월간 태백/달아실출판사
편집장 박제영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