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을 잃은 슬픔
짝을 잃어버렸다. 어디로 가버렸는지 찾을 길이 막막하다. 찾으려 애썼으나 끝내 발견하지 못했다. 짝을 잃어버리고 나니 마음이 상했다. 아쉬웠다. 짝을 잃은 슬픔을 지니고, 남은 것은 무용지물 폐기물이 되어, 결국 분리수거함으로 버려야 했다.
사무실 이전과 무릎 수술이 같은 시기에 진행된 지난달 말, 나는 병원 침대 위에 누워 있었고, 사무실 이삿짐 정리는 상근이사의 몫이었다. 근 보름 만에 새 사무실에 처음 출근한 날, 먼지를 닦고 전선을 연결하며 일상으로 돌아오는 의식을 치르듯 컴퓨터를 켰다. 그러나 무선 키보드는 묵묵부답이었다. 이사 과정에서 키보드와 본체를 이어 주던 USB 동글(dongle)이 사라진 것이었다.
서랍을 열고, 닫고, 또 열었다. 여기저기, 책상 밑, 상자 안,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모든 공간을 훑었지만, 동글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전문업체가 아닌 저렴한 이삿짐 운반 용달차 기사에게 이삿짐을 의뢰한 것을 후회하였다. 이사 과정에서 분실된 것 같다. 짝을 잃은 키보드는 더 이상 키보드가 아니었다. 기능을 잃은 사물은 이름만 남긴 채 침묵한다. 결국 유선 키보드를 새로 들였고, 무선 키보드는 플라스틱 분리수거함으로 향했다. 쓸모의 상실은 그렇게 담담하게 처리되었다.
몇 년 전 울산에서 이사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울산에서 서울로 급히 이사하던 날, 벽걸이 에어컨의 실외기는 아파트 베란다 창문 아래 외벽에 단단히 고정되어서, 비전문가 이삿짐 일꾼이 분리하기가 어려웠다. 이삿짐이 서울로 가야 하는 시간이 촉박해짐에 따라 실외기는 그냥 놔두고 서울로 떠나야 했다. 그때에도 이사비용을 절감하기 위해서 이사전문업체가 아닌 운송업자에게 맡긴 것을 후회했다. 실외기는 며칠 뒤 전문가의 손에 의해 분리되었다. 그 기사는 “빗물이 들어갔을 가능성이 크다.”라는 말과 함께 서울로 보낼 경우, 운송비용이 10만 원 이상 들어가게 되므로, 폐기를 해야겠다고 했다. 할 수 없이 그렇게 하라고 했다. 짝을 잃고 서울로 올라온 실내기는 잘 보관해 두었다. 신제품으로 구매한 지 2년이 채 안 된 거의 사용하지 않은 신제품과 같은 상태이었다. 그러나, 나중에 알게 되었다. 에어컨은 실내기와 실외기가 ‘짝’으로만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각각은 홀로 완전해 보이나, 함께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둘 다 짝을 잃은 슬픔과 함께, 폐기물로 바뀐다는 것이다. 말짱한 에어컨 실내기는 이번에 다시 이사를 하면서 돈을 내고, 폐기물 수거 수수료 스티커를 붙여서 버렸다. 에어컨 1대를 버린 것이다. 경제적 손실이 제법 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본성적으로 관계적 존재”라고 말했다. 그는 인간의 완성은 고립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사물도 그러한가 보다. 제 짝을 잃은 순간, 기능은 사라지고 의미도 희미해진다. 세상은 홀로 설 수 없는 것들로 가득 차 있다.
오늘 오후, 서울 병원에서 의사와의 면담을 마치고, 처방전을 들고 약국으로 갔다. 약국에서 약봉지를 한 아름 안고 안산 집으로 돌아오는 길, 버스정류장 앞에서 사람들 발에 밟히고 있는 털 목장갑 한쪽을 보았다. 제법 괜찮은 털장갑으로 보였다. 아마도 누군가 급히 오르내리다 놓친 것이다. 남은 하나로도 손은 덮을 수 있겠지만, 그 장갑은 이미 ‘한 켤레’라는 이름을 잃었다. 프랑스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은 “사랑은 타인을 ‘문제’가 아니라 ‘신비’로 대하는 것”이라 했다. 짝을 잃은 장갑은 문제처럼 보였지만, 그 이면에는 누군가의 체온과 하루가 스며 있었을 것이다. 떨어진 털장갑을 보면서 문득 아내가 떠올랐다. 내가 아프면 그녀는 늘 먼저 나를 걱정한다. 그런데 그날은 달랐다. 저 주인을 잃어버린 장갑처럼, 아내도 혹시 내가 먼저 세상을 떠나 홀로 남게 되면 어쩌나, 짝을 잃은 슬픔을 아내가 감당해야 한다면 어쩌나라는 생각이 나의 통증처럼 마음을 깊게 파고들었다. 인생 살아가면서 때론 짝을 잃는 슬픔을 겪는 것은 운명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대체로 그런 슬픔은 전혀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급작스럽게 일어나기 때문에 짝을 잃는 것은 아쉬움이고, 안타까운 일이고, 고통이고, 슬픔이다.
수필가 피천득 선생은 『인연』에서 “인연은 만남보다 이별에서 더 빛난다.”라고 했다. 이별이 더 빛난다는 것은 아직도 나는 이해할 수 없다. 아직도 나는 이별은 슬픈 일이라고 생각한다. 짝을 잃게 되는 것은 하나의 이별이지만, 슬픈 것이다. 함께 했던 시간은 짝을 이루며, 즐겁고, 행복하고, 맡겨진 일을 잘 수행했기 때문에 보람의 순간들이었다. 그러나 짝을 잃는다는 것은 단순한 결손이 아니라, 그동안 함께였음을 증명하는 흔적이 남는 일인지도 모른다. 키보드의 동글, 에어컨의 실외기, 장갑의 다른 한쪽. 그리고 사람의 곁에 있는 사람까지. 우리는 짝이 있을 때는 그 존재의 귀중함을 느끼지는 못한다. 그러나 잃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된다. 짝이 기능하던 이유, 짝이 온전하던 까닭이 무엇이었는지를.
짝을 잃은 슬픔은 결국 관계의 소중함을 가르쳐 준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곁에 있는 아내의 손을 조금 더 오래 잡아 본다. 잃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함께 있음이 이미 충분히 귀하다는 것을 잊지 않기 위해서.
첫댓글 선생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저도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답니다. 운전하다 보면 도로 가운데 혼자 돌아다니는 구두 혹은 운동화 한 짝. 주인은 누구일까? 혹시나 안 좋은 사고의 피해자? 아마도 그럴 가능성이 높아 그 신발 힌 짝의 주인을 위한 화살기도를 한답니다. 짝을 잃어 온전한 기능을 상실한 다른 한 쪽..에게도 위로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