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더 큰 사회적 이슈에 밀려 다소 수그러든 감이 있지만, 작년만 해도 이른바 ‘양심적 병역거부자’들, 즉 평화를 사랑하는 자신의 종교적, 정치적 신념에 의해 군대를 가지 않겠다고 주장한 사람들에 대한 문제는 커다란 사회적 화두였다.
징병제를 채택하여, 남자라면 어떤 방식으로든 ‘군대’라는 조직과 맞닥뜨릴 수 밖에 없는 우리의 현실에서, 과연 자신의 신념에 따라 군대에 가지 않겠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이야기가 얼만큼 설득력을 가질 수 있으며, 또한 윤리적으로 어떻게 평가되어야 할 것인지는 흥미 있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이른바 ‘양병거(양심적 병역 거부의 준말)’가, 우리 사회가 중요하게 취급하고 있는 두 가지 덕목, 즉 개인의 사상적, 신념적 ‘자유’와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의무’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현장이기 때문인 것이다.
본 발표문에서는 단순히 군대 다녀온 예비역들의 보상심리 같은 류의 ‘하찮은’ 관점이 아닌, 도덕적, 윤리적인 관점에서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의 문제를 자세히 짚고 넘어가기로 하겠다.
2. 양심적 병역거부의 개념과 현황
양심적 병역거부란, 앞서도 잠시 비쳤듯이, 자신의 도덕적, 종교적, 정치적 신념에 의하여, 병역 ·집총(執銃)을 자신의 양심에 반하는 절대악이라 확신하여 거부하는 행위를 지칭한다. 양심적 병역거부의 역사는 상당히 오래되었는데, 295년 그리스도교의 입장에서 병역을 거부하고 처형된 막시밀리아누스의 기록도 있다(군 입대시 로마 황제에게 하는 충성의 맹세를 우상숭배로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근대국가가 국민개병제(國民皆兵制)를 시행하자 양심적 병역거부가 큰 문제로 대두되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서는 ‘역사적 평화교회’의 신도들과 사회주의자들의 투옥을 각오한 병역거부가 속출하였고 그에 대한 탄압도 혹독하였다. 이러한 와중에서도 몇몇 나라에서는 양심적 병역거부가 법제화(法制化)하였다.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등 10여 개 국에서는 제한조건이 붙어 있기는 하지만, 점령지에서의 농업 ·교육 ·야전병원 근무 등 대체작업(代替作業)에 종사하면 전투행위를 면제하는 법률이 정해져 있다. 그러나 양심적 병역거부자 제도가 없는 나라의 병역거부자는 혹독한 처벌을 각오하면서 자기들의 주장을 관철하려 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한때 ‘여호와의 증인’의 신도들이 그들의 교리에 어긋나는 집총(執銃)을 할 수 없다 하여 병역을 거부,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일이 있다 .
또한 재작년(2001년) 불교 신도 오태양 씨가 ‘살생을 금지하는 불교의 가르침에 따라 집총을 할수 없다’라고 병역거부 선언을 한 데 이어, 고려대생 임재성 씨, 중앙대생 이용석 씨, 서울대생 장기정 씨 등이 동시다발적으로 ‘병역을 거부하고 차라리 감옥에 가겠다’라고 주장하여 양심적 병역거부 행위가 ‘여호와의 증인’같은 특정 종교인들 뿐 아니라, 타 기성 종교인들, 반전평화주의자, 운동권 학생들에게까지 확산되는 양상을 볼 수 있다.
2002년 현재 한국에서는 약 1,600명의 젊은이들이 양심적 병역거부를 이유로 수형 생활을 하고 있다.
3.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윤리적 관점
이상에서도 대강 알 수 있듯이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이 병역을 거부하는 가장 기초적인 근거는, 군에서 실시하는 살인을 목적으로 하는 각종 군사 훈련이 자신의 평화에 대한 신념, 혹은 종교적인 교리에 배치된다는 이유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의 주장이 과연 윤리적인 타당성을 가질 수 있을지를 면밀하게 따져 볼 필요가 있다. 이 문제는 근본적으로는 개인의 사상의 자유와, 공동체의 이익이라는 양대 명제의 충돌임을 우선 유념하자.
우리나라의 법은 물론 개인의 양심,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 그리고 또한 우리나라라는 공동체를 지키기 위한 ‘국방의 의무’또한 우리나라의 각 개인에게 부과하고 있다. 그리고 양심적 병역거부라는 행위는 자신의 사상적 자유로 인해 국방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겠다는 행위인 것이다. 이 경우 개인의 사상의 자유와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의무 중 어느 것이 우선되어야 하는가?
우선, 양심적 병역거부와 ‘병역’이라는 국가 안전보장이 –적어도 공식적으로- 내걸고 있는 목표는 아이러니하게도 둘 다 똑같다. 적용범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모두 ‘공동체의 평화실현’을 그 대의로 삼고 있다. 다만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은 ‘자신들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통해 평화가 이루어진다’라고 믿는 것이고, 국가 안보를 책임지는 정부부처의 입장은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의무인 병역의무 이행을 통해 평화가 이루어진다’고 믿고 있는 것이 결정적인 입장의 차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이 평화란 무엇이고 과연 어떻게 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가를 알아보아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평화라는 개념은 단순히 ‘국가간의 전쟁이 없는 상태’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나라의 무력 위협을 받지 않는 사회공동체나 개인이라고 하더라도, 여러가지 천재지변, 조직범죄, 경제적 위기, 기타 사건 사고로 인해 그들의 지지기반이 위태롭게 되는 지경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이미 ‘평화’와는 거리가 멀다.
인간들은 이러한 위험요소들에 대처하기 위해 국가, 혹은 그에 준하는 사회 공동체 조직을 만들었고(물론 국가를 단순히 약자에 대한 수탈, 지배의 대상으로 여기는 공산주의적 국가관이나 애너키즘적 국가관은 그렇지 않지만) 그 조직 내에서도 이러한 위기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각종 국방조직(군대)나 준국방조직(경찰, 소방 등)을 만들어왔던 것이다. 하다못해 민간 기업이나 아파트 같은 데 가봐도 직장 민방위대라던지, 그곳을 경비하는 사설 경비원들이 있지 않은가?
만약 ‘타국을 침략하고 사람을 죽이는데 쓰일 수도 있는 군대에는 들어가기 싫다’라는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의 주장대로, 인간의 집단에서 이러한 국방조직들이 전혀 없다면, 그러한 집단은 타 인간집단의 공격이나, 자 집단 내의 일부 구성원들의 이기주의적인 욕구 충족, 혹은 인간 집단과는 상관없는 자연적 위기등을 적절히 제어하지 못하여, 결국 자 집단 내의 평화 상태, 더 나아가서는 그 집단의 존속을 지속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또한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이 좋아하는 개인의 사상의 자유도 지켜주기 힘들게 된다.
물론 국방조직-군대-라는 것이 타국에 대한 침략을 목적으로 쓰인 적은 항상 있어 왔으나, 동시에 상대방 집단의 군대가 쳐들어 왔을 때 거기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방어 수단 역시 자 집단의 군대 뿐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또한 군대는 외국의 무력을 억지하거나 외국에 무력을 강요하는 임무 이외에도, 앞서 열거하였던 여러 자연/인공적 재해가 벌어졌을 때에 그 군대가 소속된 공동체를 지키는 임무도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다. 좋은 예로 매년 발생하는 홍수라던가, 얼마 전에 벌어졌던 대구 지하철 화재사건 때에도 군대가 크게 참여하여 현장복구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그렇다면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의 주장인 ‘병역의무 불이행을 통해 평화가 이루어질 수 있다’라는 명제는 상당히 큰 도전을 받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이렇듯 국가와 국방조직을 인간들의 집단안전보장을 위한 기구로 보았을 때 이 문제에서 중요한 화두로 다루어지는 ‘개인의 양심의 자유’ 와 ‘체제수호의 문제’사이의 딜레마에 대해서도 나름대로의 해결점이 있을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원론적인 이야기일지는 모르지만, 대한민국이 자유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이상, 그 체제나 체제 구성원들을 해치지 않는 한도 내에서는 국민의 사상, 양심적 자유를 국가가 최대한 보장해 주어야 한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안전이나 기타 구성원들에게 피해가 가는 사상, 양심적 행동은 규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1992년 시한부 종말론’을 내세우면서 혼란을 야기시키고 신도들로부터 돈을 착취한 이장림 목사 같은 사람에게 ‘종교의 자유’를 내세워 면죄부를 줄 수 있겠는가? 양심의 자유에 따라 국가에 돈을 내지 않겠다고 ‘양심적 납세거부’를 하는 사람을 보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이것은 언뜻 듣기에 조악한 예처럼 들릴지는 모르나 사실 병역에 관한 문제도 본질적으로 보면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개인이 국방세를 부담하지 않는 대신 직접 국방조직에 들어가 그만큼의 노력봉사-현물조세-를 하는 것이 병역의무의 요체가 아니던가 말이다.
물론 감옥에 들어가고, 전과자 딱지가 붙는 병역거부자들을 위한 차선책으로 ‘대체복무’를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은 평화에 대한 신념에 따라 군사훈련을 받기 싫어하는 것이지, 국가안보를 위한 병역의무 자체를 거부하지는 않는다’라는 논리이다. 한국에서도 이미 공익근무요원 제도(차출)나, 산업기능요원 제도(지원) 등 여러가지 ‘비전투 임무’에 속하는 대체복무제도가 존재하고 있고, 그것은 선진국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문제는 대부분의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이 이러한 현행 대체복무제도도 여러가지 이유로 거부한다는데 있다. 앞서 언급한 서울대생 장기정 씨는 공익요원으로 병역판정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공익요원으로 소집되더라도 반드시 받아야 하는 4주간의 집총 군사훈련이 평화에 대한 신념을 무너뜨릴 수 있기 때문에 감옥에 가는 한이 있더라도 집총을 거부할 수밖에 없다 (그 정도로 날아가 버릴 신념이면 그런 신념을 왜 가져야 하는가?)’라고 주장하고 있고, 불교 승려들에 대한 대체복무제 도입를 열성적으로 주장하는 조국(동국대 법학과 교수) 씨 같은 경우에도 ‘성직자인 스님들이 재가자들과 함께 섞여 군복무를 한다는 것 자체가 종교적인 신성성을 훼손하는 일이다’, ‘대체 복무제가 도입돼 스님들이 군 복무 대신 사회봉사를 하게 된다 하더라도 수행자인 스님과 타 종교 신자가 함께 난지도 쓰레기를 치우는 형태의 봉사활동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라는 식으로 특정 종교에 대한 ‘특별대우’를 공공연하게 요구하고 있다. 그들이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을 위한 대체복무제도의 ‘성지’로 떠받드는 서방 선진국들에서도 대체복무자들에게 대부분 군사 교육을 이수토록 하고 있고, 현역병보다 더 오래 복무토록 하며(대만의 경우 대체복무자들에게 현역병-22개월-보다 1.5배가 더 긴 복무기간-33개월-을 부과하고 있다고 한다), 대체복무마저 거부했을 경우 가차없이 처벌하고, 유사시 대체복무자들도 현역병으로 소집되도록 하고 있는 것을 본다면 이들 일부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의 주장이 얼마나 비현실적이고 이기적인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을 위한 대체복무제를 시행하였을 때에 나타나는 문제점도 간과할 수는 없다. 이미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을 위한 대체복무제를 실시하는 나라인 대만의 경우에도 양심적 병역거부자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골라내는데 큰 어려움을 겪고 있고(별도의 심사기관을 설치하였을 정도라고 한다), 대체복무 신청자가 필요인원보다 너무 많을 경우 추첨선발을 통해 인원을 모집한다고 한다. 징병제로 모집되는 사병의 근무여건 및 앞으로의 징병여건 모두가 공히 대만보다 훨씬 열악한 한국에서 충분한 검토 없이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을 위한 대체복무제를 실시하였을 경우 그에 따르는 사회적 반발 및 부작용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군 규모의 적절한 리사이징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명제이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충분하고도 효율적인 국방력을 얻기 위해서 이루어져야지,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을 위한 ‘빈 자리’를 만들어주기 위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은 명백한 본말전도의 오류다.
4. 닫는 글
이제까지 우리는 ‘양심적 병역거부’가 과연 윤리적, 사회적으로 얼마만한 타당성을 가지는지를 살펴보아왔다.
사람을 죽이면서 진정한 쾌감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 새디스틱한 야만인들 밖에는 없다. 인간의 생명을 존엄히 여기고, 인간과 공동체의 평화를 원하는 사고방식은 어떤 사람이나 집단, 종교도 모두 기본적으로 추구하여야 하고 또 이미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평화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자신이 속하고 있는 공동체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활동에 동참하지 않는 것 역시 명백한 이율배반이다.
양심적 병역거부자들도 대한민국의 국민이기에 그 동안 살아오면서 대한민국이 제공하는 국방서비스를 받아오면서 살아왔을 것이고,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이 군대에 가지 않거나 기타 방법으로 병역의 의무를 회피한다면 분명 그만큼의 다른 사람들이 국방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그들의 자리를 반드시 메꾸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명백한 사회적 불평등을 초래하는 요소가 될 수 있다.
따라서 평화적 신념에 따른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이라도 어떠한 형태로든 병역의 의무를 이행하여야 하되, 그들을 위한 ‘대체복무제’라던가 그 선별 등 이에 대한 세부적인 조치는 충분한 사회적 합의를 거쳐, 한국 사회의 실정상 용인될 수 있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첫댓글 퍼가겠습니다. 저희 까페에서도 다소나마... 여기서 저번에 퍼간 양병거 관련 글 덕에... 작은 논쟁이 좀 일어나서리요...